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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가 쓰시겠다 하라 (막 1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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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가 쓰시겠다 하라 (막 11:1-10)

오늘 본문 3절의 주(主)라고 하는 것은 히브리어로는 ‘아도나이’라고 하는데, ‘아도나이’라고 하는 말은 ‘나의 주권자,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나를 맘대로 지배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My Lord'라고 해서 ‘나의 주’라고 합니다.

본문의 상황은 예수님이 갈릴리와 또 사마리아, 예루살렘 등지에서 의 삼년 가까운 공적 사역의 시대를 마감하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장면입니다.
 
마지막 유월절에 예루살렘에서 죽임 당하시게 될 것을 아시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제자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데 그것은 마치 짐승이 도살장에 찾아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이제 일주일 뒤에 죽임을 당하시는데 이 한주간의 역사는 마가복음  전체 16장 중의 1/3이 여기 함축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이 예루살렘 입성과 그의 죽임 당하심과 부활의 의미는 너무나 중차대한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아들의 희생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내용들이기 때문에 아주 중요한 교훈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본문 1절을 보면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시온산이 있고 감람산이 있습니다. 시온산은 예루살렘을 이루는 가장 큰 언덕 봉우리이고, 겟세마네 동산에서부터 낮아져 가다가 다시 우뚝 솟은 작은 산 하나가 있는데 그것을 감람산이라고 합니다.

이 감람산은 감람나무가 그 산에 우거져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감람산이라고 불렀는데 그 감람나무의 영적인 묵시적 교훈은 ‘성령’입니다. 하나님의 삼위 중에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계시는데 그 ‘성령’을 상징하는 것이 감람나무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감람산 기슭에 있는 벳바게라는 마을과 베다니라고 하는 마을 사잇길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기 위하여 가시는 중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십니다. 제자가 열두 명이었는데 그 중에 두 제자를 보냈습니다. 두 제자가 누구인지는 기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확실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 두 제자에게 예수님은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2절)고 하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제자들과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시는 중에 저 골짜기 건너편에 있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본 적이 없는 나귀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볼 것인데 그것을 풀어 끌고 오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이 무례하게 남의 소유인, 사람이 한 번도 타본 일이 없는 나귀 새끼를 가서 끌고 오라고 제자들에게 지시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씀이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3절) 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남의 나귀를 가져오라 하면서 돈도 안주고, 빌려 쓰고 되돌려 주겠다는 이런 말도 하지 아니하시고 맞은편 마을로 두 제자들을 보내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주권적 행사를 아주 당당히 하시는 모습인데 그 주권(主權)이라고 하는 것이 뭘까요?

창세기 1장 2절에 보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만들어졌습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3절의 내용을 살펴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할렐루야! 말씀이 태초에 있었습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이셨다”라고 소개되면서 만물이 그 말씀으로 창조되어졌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지은 것 중에 그를 통하여 생겨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나귀의 본래 임자가 누구인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피조물의 조물주, 창조자가 바로 하나님이시고, 말씀이 모든 것을 창조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곧 누구냐?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나옵니다.

그 말씀이 만물을 창조하시고,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셨는데 우리가 그분을 알아보니까 그분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하나님의 아들이시더라는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 중에 어느 것 하나라도 예수님에 의해서 생겨나지 않은 것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주인시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남의 가축을 그 사람의 재산 목록 몇 번째인지는 모르지만 제자 둘을 보내서 끌어 오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이 원래의 주인으로 행사하시는 것입니다.

진리를 제대로 깨달은 사람은 나라는 존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어머니 뱃속에 생기게 되었고, 태어나게 되었고, 그동안 살아오게 되었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대로는 조상 아담의 죄 값을 용서받지 못하고, 스스로 범한 죄를 용서 받지 못해 지옥 가서 심판, 형벌을 피할 길이 없는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구속해 주셨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성도는 예수님께 이중으로 빚을 진 것입니다. 육신을 오늘까지 살아 있게 하시는 은혜의 빚을 진 것이고, 영혼이 지옥 갈 것을 하늘나라 갈 수 있도록 구속해 주신 은혜의 빚을 진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이 절대주권자이시고 주인이시기 때문에“너 내가 시키는 일을 좀 해라”고 하실 때 못한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를 살리시는 이가 그분이십니다. 나를 구속하시어서 하늘나라 갈 자격을 주신 이도 그분이십니다.

그런데“주가 쓰시겠다”하시는데 “곤란한데요, 안 되는데요”하며 제 계획이 소중하고 자신의 목적과 욕심 때문에 예수님이 시키시는 일을 못한다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는 말씀 이상 필요한 말씀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신다면 그 길은 평탄이고 형통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가라고 하시는 그 길에서 해야 할 일들은 바로 그분의 뜻을 이뤄드리는 일이기 때문에, 그 길을 갈 동안 그분이 안전하게 보호하시고 좋은 조건으로 함께 하십니다. 또한 필요한 지혜도 주시고, 은사와 영력을 주시고, 건강도 주시고, 물질도 주시고, 자기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서둘러 넉넉히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못 믿어서 자기가 세운 계획과 자기 꿈을 실현하려고 주님이 예비하신 길을 거부하고 불순종하면 그 인생은 결국은 예수님과의 관계를 원치 않는 것이 되고 하늘 소망을 내던지는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잘 깨달아야 합니다. 짐승도 주님의 것입니다. 산천초목도 풀 한포기도 주님의 것입니다. 주인이 쓰시겠다는데 소유물이고 피조물에 불과한 존재들이 쓰임 받지 않겠다고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 나귀를 나게 하셨고 오늘까지 살리신 이가 바로 주님이십니다. 왜냐하면 이때 쓰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그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종일 지쳐 계셨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애타게 복음을 전하시고 바리새인들과 쟁론하시고 병자들을 고치시고 그리고 저녁때 지금 벳바게와 베다니 사잇길로 내려가시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보내신 두 제자들이 가서 보니 정말 나귀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었습니다. 그것을 봤을 때 두 제자는 ‘과연 주님은 주님이시구나 그분의 말씀은 틀림없는 진리이구나’ 확신했을 것입니다. 그때 두 제자는 예수님에 대한 기대심이나 존경심, 의지심이 더 확실해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두 제자가 서슴지 않고 고삐를 풀어 데려오려고 할 때 주인이 “왜 남의 나귀를 풀어 가느냐” 라고 물었을 것입니다. 그때 제자들은 예수님이 이르신 대로“주가 쓰시겠다 해서 끌고갑니다”라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의 말씀과 존재의 권위도 중요했지만 두 제자의 역할이 참 훌륭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두 제자의 신앙,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참 대단했구나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두 제자는 제자의 도리를 참으로 잘했습니다.

제자란 무슨 뜻입니까? 스승을 본받는 것이 제자입니다. 그런데 참 안타까운 것이 우리는 예수님 닮을 생각이 없어서 예수님께 쓰임 받기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쓰임 받다 보면 예수님을 닮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더 많이 닮은 인생일수록 하나님은 그 사람을 더 보배롭게 하시고 존귀하게 대접을 하십니다.

제자들은 가서 제자 노릇을 잘 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보내신 그대로 참 잘했습니다. 이사야 55장 11절에 보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시키시는대로만 하면 말씀하신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형통하게 이루어지도록 끝까지 책임지신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것이 믿어졌다는 것입니다.

그 나귀 주인은 예수님을 모르는 것 같지만 주가 쓰시겠다 하니까 보냈습니다. 그분이 자기의 주가 되는 것도 인정하기 때문에 자기 소유물도 주가 쓰시겠다 하니 다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사는 것이 자기를 위해 사는 지혜가 됩니다.

그렇게 두 제자는 나귀 새끼를 예수님께 끌고 왔습니다. 그리고는 겉옷을 벗어서 나귀 위에 얹으니 예수님께서 그 나귀에 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 문에 들어오니 예수님의 능력과 이적 기사를 본 많은 사람들이 이분이 왕이 되면 로마 제국으로부터 해방과 독립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나귀 앞에 겉옷을 깔았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밭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가에 깔았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너무 존경하고 영광을 돌리는 태도이며 자신을 예수님께 소속되기를 원하는 굴종의 자세였습니다. 예수님을 환영하는 이유는 예수님에 대한 기대와 꿈이 너무나 거창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만일 주가 쓰시겠다고 하면 나귀 주인처럼 주님께서 쓰시도록 자기를 내어 드릴 수 있을까요? 주님께 내어 드린다면 주님께서 주님의 영광에 참여케 하십니다. 그러나 거역하면, 주님과의 관계를 원치 않는 것이 됩니다.

우리 모두 정신 차리고 주님께 쓰임 받는 삶을 살도록 합시다. 쓰임 받으며 주님의 영광에 참여합시다. 그리고 더 잘 섬길 수 있는 조건, 더 잘 섬기는 지혜로 쓰임 받읍시다. (장재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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