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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고난 속의 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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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속의 물음 

- 정석환 연세대 신과대학장
 

“아이고 불쌍해서 어떡해∼. 젊은 학생들이 좋은 일 하러 시골에 왔다가 참변을 당했네.”

지난 주 춘천에서 발생한 산사태로 희생된 젊은 대학생들의 주검을 두고 마을 주민이 한탄한 말이다. 최근 전국을 강타한 기습 폭우는 마치 하늘이 구멍이라도 난 듯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놓고는 많은 사상자와 피해를 남겨놓고 떠났다. 모든 주검들이 다 안타깝고 서글프지만 특히 여름방학을 맞아 봉사활동을 갔던 젊은 학생들의 주검 앞에서는 망연자실, 할 말을 잊고 말았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 왜 의롭고 착한 자들에게 이런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고난의 문제가 생기는 것일까? 마치 욥기의 저자가 선하신 하나님께 이해할 수 없는 세상살이의 아픔에 대해 묻는 질문처럼 이번 폭우가 남긴 아픈 상처의 뒷자리에 서서 묻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마치 슬로비디오를 보는 듯 선명하게 기억나는 일이 있다. 지난겨울 폭설이 내리던 제주도 5·16도로 한 복판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 오른팔이 부러지는 순간, 말할 수 없는 통증을 느꼈다. 

그 순간, 왜 나일까?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길까? 혹 내가 지은 죄 때문일까? 학생들에게 학점을 짜게 주는 인색한 선생이라서일까? 혹 오른손으로 남이 모르는 죄를 살짝 살짝 짓고 다녀서일까? 아니면 나도 잘 지키지 못하는 도덕적 선한 말들을 이 오른손을 사용하여 열심히 가르치려 했던 것 때문이었을까? 

마치 욥기에 나타나는 욥의 친구들이 번갈아 나타나며 욥이 겪고 있는 고난의 의미와 책임을 추궁해 나가듯 내 안의 또 다른 나는 나의 경험, 지식,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며 고난 받고 있는 나를 분석하고 있었다.

구약성서 욥기의 저자는 까닭 없이,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삶의 고난을 받아야만 하는 한 인간 욥을 내세워 선한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리네 삶 속에서 넘쳐나고 있는 고난의 문제를 묻고 있다. 이스라엘 민족은 타 민족에 비해 율법을 생활화하며 노력해가는 비교적 윤리적 민족인데 왜?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나누는 종교성이 강한 민족인데 왜? 이런 의구심과 회의를 가지고 욥이라는 인물의 개인적 고난 받는 삶을 내세워 하나님께 이 세상의 수수께끼 같고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의 의미를 묻고, 묻고 또 묻고 있는 것이 욥기의 핵심이다.

욥이 하나님께 묻듯 우리도 우리의 고난과 아픔에 대해 묻는다. 분명한 대답을 들을 것으로 기대하지 않지만 묻지 않을 수 없어서다. 왜? 우리들 삶에 이런 아픔을 주십니까? 왜 선한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서 이런 고통과 이별의 아픔을 겪어야만 합니까? 하나님의 답변은 아마도 예수를 십자가에 내주시고 침묵으로 울고만 계셨던 성부 하나님의 답으로 대신하는 듯하다. 

그러나 코엘료의 말처럼 아픔 속에서 울부짖을 수 있다는 것은 건강한 것이라 믿는다. “언제나 강한 척할 필요는 없고, 시종일관 모든 것이 잘 돌아가고 있음을 증명할 필요도 없다. 다른 이들이 뭐라고 하건 신경 쓰지 않으면 그뿐. 필요하면 울어라. 눈물샘이 다 마를 때 까지. 그래야 다시 웃을 수 있는 법이니.”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 중에서)

-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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