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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의 눈물을 생각하자 (마 16:3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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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은 눈의 윗쪽에 있는 누선에서 분비되는 약한 알카리성의 액체 를 말합니다. 눈물을 흘리면 이 눈물은 안구 위를 지나서 비루관으로 흘러 비강에 고이게 됩니다. 눈물이 흘러가는 누선의 크기나 모양은 편도선과 비슷합니다. 누선은 눈구멍의 상측면부에 위치하고 있습니 다.

사람의 눈물은 98%가량이 수분입니다. 이 눈물은 무색의 액체로서 안구와 눈까풀 사이에서 흘러 나옵니다. 눈의 각부분을 원활하게 해 줍니다. 특히 혈관이 없는 각막에 영양을 공급합니다. 각막을 보호하 기 위한 이물질을 씻어내는 청소작업도 해줍니다. 이와 같은 임무를 마친 눈물은 누점으로 흡수되어 누소관을 지나 누낭에 일단 고입니다.

펌푸작용에 의해 비루관으로 밀려나와 비강으로 흘러 갑니다.

사람이 눈을 뜨고 있는 대략 16시간동안 분비되는 눈물의 용량은 0,6cc 에 불과합니다. 이런 눈물도 눈속의 이물질이나 어떤 감정의 충 동을 받으면 많은 양의 눈물이 분비됩니다. 눈물의 분비신경은 교감 신경과 안면신경입니다.

여자의 누선은 남자의 것보다 약간 큽니다.그래서 여자들이 더 잘 우는가 봅니다. 생후 3,4개월의 유아는 눈물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 런 눈물이 양이 과도해지면 누로의 순간적인 통과용량을 초과하게 됩 니다. 그러면 눈속의 누낭에서 흘러 뺨을 타고 내리게 됩니다. 우리 는 이것을 눈물이라고 합니다. 눈물은 사실 누선의 홍수 누낭의 홍수 에 의한 결과인 것입니다.

 이상 말씀드린 것이 눈물의 백과사전적 지식입니다. 이런 지식에 관하여는 알아도 좋고 알지 못하여도 괜찮습니다. 꼭 알아 보려고 덤 빌 필요도 없습니다. 일평생동안 이러한 눈물의 지식없이 살다 죽은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이 눈물이 홍수가 나서 누낭을 넘처 뺨을 타고 흐르면 눈물 은 신비해 집니다. 사람의 일생은 눈물로 시작해서 눈물로 끝납니다.

눈물을 흘리는 것을 우리는 흔히 운다고 합니다. 사람은 태어 나면서 부터 웁니다. 세상을 떠나면서도 웁니다. 인생이 왜 울고 왔다가 울 고 가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이 인생입니다. 우리 인생이 눈 물없이 살 수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기뻐서 울고 슬퍼서도 웁니다. 눈물은 감정의 자극에 의하여 흘리 게 됩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란 말입니까 네 맞습니다.

사람은 감정이라는 부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생물보다도 예민합니다. 사람의 감정의 자극이 예민하면 예민할수록 사람다운 것 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눈물에 얽힌 이야기가 많습니다. 사람이 가만 히 있으면 하루 평균 0,6cc의 눈물 밖에 흐르지 않지만 인간적인 자극 을 많이 받으면 눈에는 항상 홍수사태가 납니다. 놀라운 일이지만 사 람은 평생에 자그마치 2억 5천만번 이상을 울고 지낸다고 합니다.

우는 사람을 보면 우선 그 사람이 슬픈일이 생겼나 보다 생각합니 다. 그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슬픈 때만 운다고 생각 하기 쉽니다.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슬퍼서 울지 않더라도 눈물은 항상 나옵니 다. 때로는 견디기 어려울만큼 웃을 때에도 눈물이 나옵니다. 그것 은 웃을 때에 힘살이 죄어지기 때문입니다. 그 관계로 누낭에 있던 눈물이 쏟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기뻐서도 운다고 하는 것 입니다.

슬퍼서 울고 기뻐서도 우는 인생, 일생에 2억 5천만번을 우는 인 생, 그래서 인생은 울면서 지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꼭감 정에 복받처서 운다고 할 수만은 없습니다. 갓난 아이는 생각 없이도 울기만 합니다. 어찌하든지 눈물은 감정과 매우 밀접한 것이 사실입 니다.

 사람은 보통 말을 사용하여 자기 감정을 나타냅니다. 감정이 너무 격하면 감정 에너지는 말로 표현하는 대신 눈물을 짜내는 기관을 자극 해서 많은 눈물을 흘리게 합니다. 이래서 사람은 울게 됩니다. 이것 은 억제하려해도 할 수 없는 반사운동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경험에서 생긴 감정을 말로서 전달할 수 없을때 , 또는 전하 고 싶지 않을때는 우는 일로 자기 감정을표현하는 것입니다.

눈물은 인간관계에서만 밀접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도 눈물의 이야기는 흔합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여 웁니다. 창세기 27장 34절에 에서가 동생 야 곱에게 축복을 빼앗기고 나서 아버지 앞에서 방성대곡을 합니다. 죽 음이 다가올 때에도 웁니다. 열왕기 하 20장 1절에서 5절을 보면 히 스기야 왕이 죽음 앞에서 눈물로 기도한 결과 15년간의 생명을 연장 받습니다. 눈물의 위력은 이렇게 큽니다.

전도서 4장 1절은 학대받는 자의 눈물이 있습니다. 이사야서 16장 9절에는 패배 당한 자의 처절한 눈물이 있습니다. 시편 6편 6절에는 괴로움으로 호소하는 눈물이 있습니다. 또한 시편 126편 5절에는 기쁨 의 보상에 감격하는 눈물도 있습니다.

누가복음 7장 38절 44절은 회개의 눈물의 구절입니다. 고린도 후서 2장 4절은 환란과 애통의 마음으로 흐르는 눈물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히브리서 12장 17절에는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흘리는 위선 적인 눈물도 있습니다. 에스더서 8장 3절에는 자기 민족을 구원하기 위하여 흘리는 한 여인의 간절하고도 애절한 눈물도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사는 눈물에 얽힌 눈물의 이야기입니다. 성경에도 눈물에 얽힌 눈물의 이야기가 줄거리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자 기의 눈물을 자랑하려고 하는 이도 있습니다.

시편 56편 8절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유리함 과 자신의 눈물을 기억하시기를 염원합니다. 그 눈물을 노드에 담습 니다. 노드는 문자적으로 가죽병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눈물을 담는 항아리를 말합니다. 실지로 이런 눈물단지가 있었다는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 말은 하나의 비유인것 같기도 합니다.

사람은 그의 눈물이 하나님께 기억되기를 원합니다. 이런 마음은 누구나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오늘은 이 눈물에 대하여 공부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눈물에 대하여 분석하고 많은 지식을 가진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눈물에 얽혀 살고 있는 것이 인생이라지만 눈물 자체가 사람에게 무슨 효력이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눈물에 대하여 오늘 이렇게 많은 말씀을 드리는 것은 인생의 눈물에 대하여 올바른 의미를 알아 보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왕에 눈물을 흘리고 살아야 하는 인생이라면 눈물답게 흘리고 의미있는 눈물을 흘 리자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 예수님도 육체에 계시는 동안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주님 이 흘리는 눈물은 어떤 눈물이셨을까요. 물론 주님은 자주 눈물을 흘 리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아주 진한 눈물, 통곡으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양보다는 질이라는 의미로 따질 성질은 아닙니다. 그 러나 그 눈물은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을 요약하면 주님은 자신을 위하여, 또한 이웃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릴줄 알라고 권고하시기도 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분노하시는 장면도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진한 감동의 장면입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가 나옵니다. 주님은 거푸 3번을 기도 하셨습니다. 간절한 기도 였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주님의 눈물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 은눈물을 홍수 같이 쏟으셨습니다. 단지 상상의 문제일까요.

마태복음 26장 36절에서 46절은 언제나 히브리서 5장 7절에서 9절을 연결헤서 읽어야 합니다. 히브리서는 이렇게 이록되어 있습니다."그 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 곡과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8절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 이 되시고 "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의 본문에서 주님이 무엇을 하 셨는지 여실히 보여 줍니다.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짊어 지느냐 기피하느냐 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33년의 육신의 삶을 통하여 십자가 지는 삶을 배 우셨습니다. 주님 자신이 십자가를 져야할 사실을 자주 말씀 하셨습 니다.

주님은 십자가가 무엇인지 아십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만민의 죄를 대신 짊어지는 것입니다. 죄가 받아야할 마땅한 형벌을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몸으로 받으시려는 것입니다.

주님은 죄가 얼마나 무섭고 더러운 것인가도 아십니다. 그 죄의 댓 가가 얼마나 혹독한 것인가도 아십니다. 이 죄와 형벌이 십자가입니 다. 주님은 바로 그 십자가를 지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드디어 십자가를 져야할 시간이 다가온 것입니다.

주님은겟세마네로 나아 가셨습니다. 엎드려 기도 하셨습니다.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을 생각하신 것일까요 몸으로 당하실 죄악의 형벌이 두려워서였을까요 아닙니다. 십 자가로 구원 받아야할 당신의 백성들을 생각하신 것입니다.

죄의 두려움으로 슬픔이 엄습한 것입니다. 형벌의 두려움은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그 형벌을 받아야 할 인류를 생각하신 것입니다. 사 람을 사랑하시는 사랑이 아니라면 십자가를 짊어 지실 수가 없습니다.

형벌이 아니라 사랑을 생각하신 것입니다. 이런 마음은 사랑해본 경험 을 가져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그러나 하찮는 인간의 사랑도 사 랑의 경험은 거룩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해줍니다.그러나 그보다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겸손하게 몸으로 받으려는 희생에 대한 간절한 갈망 때문에 우신 것입니다. 그것은 약속있는 희생입니다. 그러므로 그 희생을 경외함으로 받으시려는 것입니다. 거기에 진한 통곡과 눈물 이 따른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눈 물의 씨앗입니다. 사랑이 눈물의 씨앗이라는 말은 에로스의 사랑에만 국한하는 말은 아닙니다.

사랑에는 눈물이 있습니다. 부모의 사랑에 눈물이 있습니다. 모니 카의 사랑의 눈물이 어거스틴을 회개시켰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의 눈 물은 남편을 구원의 길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도 눈물이 있습니다. 주님의 겟세마네의 기도는 당 신이 하나님의 아들됨을 확인하는 눈물의 기도였습니다. 하나님이 당 신의 아들됨을 굳게 믿는 눈물의 기도였습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순 종하려는 사랑에 찬 확신의 눈물이였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짊어지기 전에 기도 하셨습니다.눈물로 기도 하셨 습니다. 겟세마네의 기도는 통곡의 기도였습니다. 그 통곡은 사랑의 통곡이였습니다. 그 사랑의 기도가 십자가를 통하여 온 이류를 구원하 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가시밭 길을 헤치며 살아 갑니다. 찔리며 상처를 받 습니다. 아픔이 엄습할 때에 우리는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그 눈 물은 과거를 바라보는 눈물입니다. 소득이 없는 눈물입니다. 아까운 눈물입니다. 흘리지 말아야할 눈물입니다.

사람이 직립하여 사는 것은 앞을 바라보기 위한 것입니다. 앞을 바 라보아야 하되 멀리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한치 앞도 바라보지 못하고 삽니다. 눈물을 흘리며 사는 인생, 눈물 밭에 묻혀 서 사는 인생,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런 눈물의 인생이 얼마나 소비하 는 인생인가 생각하고 자기 인생의 결과 없음에 더욱 덧없어서 우는 인생, 이런 삶에 지처있는 형제 자매들이시여 주님의 눈물을 생각 하 십시다.

주님은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하여 눈물로 기도 하셨습니다. 주님의 눈물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눈물입니다. 눈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원하고 눈물로 하나님의 의를 지켜 따른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겠습니까 주님을 생각하고 우리도 주님처럼 의미있는 눈물로 자기 삶을 보람 되게 주님께 드리는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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