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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눅 03: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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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3:2절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였다고 하는 것은, 마치 구 약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기 위해서 선지자 들에게 말씀을 주셨던 모습을 연상하게 만듭니다.

구약성경, 민22:9절에 보면, "하나님이 발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라고 말씀했고, 삼하7:4절에서는 "여호와의 말씀이 나단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왕상12:22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사람 스마야에게 임하여 가라사 대" 왕상17:2절에서는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대하11:2절에서는 "여호와의 말씀이 하나님의 사람 스마야에게 임하여 가라사 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시대가 어두울 때에, 시대 시대마다 각 ¼ 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어쨌든 눅3:2절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 한에게 임한지라"라고 말씀함으로, 세례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였음을 우리 는 알수 있습니다.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이 그러한것 처럼, 비록 사람이 백성들 앞에 서서 백성들의 죄악을 질타하며 외치고 있지만 그의 외침은 인간의 외침이 아니라 하나님의 외 침이요 하나님의 경고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먼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백성을 향한 세례요한의 외침은, 시대가 변한 지금에도 동 일한 하나님의 메세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본문의 역사적인 배경부터 살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자들을 보내시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 나님의 메세지를 전하셨던 선지자 시대는 하나님의 역사가운데 가장 죄악이 관영 하고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가장 부패하였던 시대였으며,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 고 하나님께 경배해야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곁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였던 영적으로도 가장 암울한 시대였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그래도 자기 백성들을 사랑하시사 사랑의 메세지, 진노의 메세지를 시대마다 주셨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로 세례요한이 일하던 그 당시의 이스라엘은 매우 어려운 시대였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로마의 속국이었고, 사회적으로는 말할수 없는 혼란이 있었으며, 경제적으로는 매우 가나한 형편이었습니다. 뿐만아니라, 종교적으로는 갖가지 죄악과 부패가, 종교라는 이름하에 정당화되는 그야말로 암흑의 시대였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다 더 놀라운 것은, 시대를 깨우고 백성들의 죄를 꾸짖던 하나님의 음 성이 400년 동안이나 들리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 이 하나님을 잊고 살았을까요 어느 누구하나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기보 다는 오히려 가난과 혈벗음에서 건져줄 육신적인 메시야만을 소망하고 있엇을 뿐 이었습니다.

이와같은 당시의 상황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오늘날 우리의 시대를 생각해 보게 된다. 오늘날 우리의 시대는 어쩌면 세례요한의 시대보다 훨씬 더 악하고, 훨씬 더 영적 으로 암울한 시대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하나 하나님의 영광 을 구하기 보다는 오히려 육신의 쾌락을 추구하는 모습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오늘날의 성도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의 강단에서 피 에 맺힌 생명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지만, 어느 누구하나 그 말씀을 사모하는 자 없고 그말씀에 도전받아 삶이 변화되는자 없는 영적으로 암훌한 시대가 바로 오 늘 우리들의 시대가 아니던가요 아무도 예수그리스도를 목말라 하지 아니하고, 아무도 하나님을 위해서 고난받기 를 즐겨하지 아니하는 시대가 지금이 아닙니까... 분명한 것은 2,000년 전의 세례요한이 오늘 우리시대에 찾아오면,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경고했던 그의 메세지를 오늘 우리시대도 피할 길이 없다는 사 실입니다.

바로 이와같은 시대적 상황이였습니다. 세례요한이 광야에 나타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하고 무서운 책망과 함께, 요한이 두가지 의 경고를 주고 있는 모습을 오늘 본문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럼, 세례요한의 두가지 경고는 무엇일까요

첫째, 회개의 합당한 열매가 없음을 경고하였습니다. 본문에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할 사실은 회개하지 않음을 책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회개의 열매가 없음을 책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문제는 회개의 열매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앞에 나와서 눈물로 통회 자복한다고 할찌라도, 집으로 돌 아가서 또다시 같은 죄를 되풀이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회개했으면, 회개에 합당한 '죄에서의 돌이킴'이 있어야 함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회개의 합당한 열매가 없는 나무는 "도끼로 찍어 불에 던지우리 라" 했습니다.

9절 말씀에 보면,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했습니다. 여기서, 열매를 맺지 못하기 때문에 찍 힘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기 때문에 찍혀 불에 던지운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회개의 열매가 있는가 좋은 열매를 맺었는가.... 우리는 회개는 많이 합니다. 그러나 행함은 여전히 변함이 없는.... 전혀 회개의 ¿ 매와는 거리가 먼 삶이 아닌가를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둘째로, 세례요한은 말하기를,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말하지 말라" 경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것 처럼, 아브라함은 하나님께로 부터 '친구'라고 불리 움을 받은 유일한 인간이요, 믿음의 조상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와같은 아브라함과는 전혀 닮지 않은 모습과 신앙을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혈통과 전통때문에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 니다. 세례요한은 바로 이러한 이스라엘백성들을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저 단순히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라고 하는 것이 세레요한의 경고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면, 후손다운 삶을 살아야 되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분명히 오늘 이 말씀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세례요한의 준엄한 경고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 서도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못한다면, 결코 속으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하지 말것을 우리들에게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지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기에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라고, 당연히 믿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했던 것처럼, 오늘날도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다고 해서, 교회의 한 구성원이 되었다고 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될수 없다는 무서운 경고입니다.

10절말씀에 보면 이와같은 세례요한의 경고에 대해서 "무리가 물어 가로되 그러 하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까"라고 묻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이 질문은, 본문에서 세번이나 나타나는 질문입니다. 당시의 무리들이 하나님의 준엄한 책망과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알게 되었을때, 그들은 구체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할것인가"를 물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당시 세례요한에게 질문한 무리들은 세 계층의 사람들 이었는데, ①일반백성과 ②세리와 ③군인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하리까..."라는 이들의 질문에 대 한 세례요한의 세가지의 대답은 오직 한가지의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세례요한의 답변은, 직업을 바꾸라든가, 세상의 구조, 권력의 구조를 바꾸라는 것 이 아니라 오직 하나, 마음깊은 곳에 회개의 열매가 있어야 한다는 내면의 변화를 요구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와같은 세례요한의 경고에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하여야 하리이 까"라고 진실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물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이밤이 하나님께 "어찌하여야 하겠습니까" "도대체 어떻게 하여야 임박한 진노를 피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묻는 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답변은 가슴 깊은 곳에 회개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요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는 유다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고 이스라엘이 그토록 자랑하던 예루살렘 성전이 이방인들의 말발굽 아래 비참하게 짓밟히고 성전이 황 무하게 무너져 버린 상황을 바라보며 슬픔의 애가를 불렀습니다.

예레미야애가 1:1-3절에 보면, "슬프다 이 성이여 본래는 거민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히 앉았는고 본래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 같고 본래 는 열방 중에 공주 되었던 자가 이제는 조공 드리는 자가 되었도다 밤새도록 애 곡하니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 사랑하던 자 중에 위로하는 자가 없고 친구도 다 배반하여 원수가 되었도다 유다는 환난과 많은 수고로 인하여 사로잡혀 갔도다 저가 열방에 거하여 평강을 얻지 못함이여 그 모든 핍박하는 자가 저를 쫓아 협 착한 곳에 미쳤도다" 했다.

하나님의 나라로서 영광을 발하며, 이방나라 가운데 빛이었던 예루살렘이 이제는 이방인들에게 조공을 바쳐야 하는 비참한 식민지의 처지가 되어버린 형편을 선지 자 예레미야가 바라보면서 이 슬픔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비극적인 상황이 눈 앞에 펼쳐지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성 예루살렘과 시온을 하나님이 영원히 지키시며, 하나님의 보호와 임재는 끝이 없을 것이라"고 그들은 굳게 믿고 있엇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은 헛된 믿음이였습니다. 그들 마음속에 있는 바램일 뿐이였 다. 하나님의 뜻을 멀리하고, 온갖 죄악을 자행하였기 때문이다. 마음에는 미움과 시기와 악독이 가득하며, 살인과 도적과 속임과 간음과 방탕함 이 극에 달하였고, 또한 영적으로는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의 소리가 듣기 싫어서 선지자들을 멸시하고, 가두 고, 심지어는 죽이기 까지 하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했다. 그래서 말씀이 없는 암흑의 시대가 장장 400년이나 지속되었던 것이다.

우리에게 믿음은 있으나, 모든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믿었으나 예루살렘성은 무너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청년들이여! 이스라엘의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은 아닙니까... 그저 주일이 되면 교회에 나가서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생각하며..., 내 마음속에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기에, 장차 주께서 다시¿ 실 때, "나는 구원 받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 믿고 있는 사람은 아닙니까 그러나 모든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굳게 믿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성이 무너졌 던 사실을 우리는 가슴 속 깊은 곳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예레미야 애가 1:13절에 보면, 이와같은 여호와의 진노의 날...., 비참한 상황에 인간의 어떤 방법과 위로도 선지자를 도울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고백합니다. 오직 위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성령이 골수에 사 무칠 때 이같은 상황을 이길 수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어떻게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우리 심령깊은 골수에 성령의 불을 보내 실 때만이 가능함 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밤에 하나님께 부르짓읍시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이밤에 우리 심령의 깊은곳에 성령의 불을 보내어 주옵소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오리이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게하여 주옵소서!" 우리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이밤에 간절히 사모하는 심령 심령위에 주의 성령께서 불로 임하셔서, 예수의 이 름으로 더럽고 추악한 죄악을 태우실 줄로 믿습니다. 빗줄기같은 성령이 임하셔서 우리의 모든 추한 것들을 씻어 주실 것입니다.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지금은 구원의날" 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지금 이라 는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고, 돌이킬 수 없는 이 시간을 선용하시기 바란다. 다같이 기도하겠습니다.

 (눅3:7-14)



눅3:2절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였다고 하는 것은, 마치 구 약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기 위해서 선지자 들에게 말씀을 주셨던 모습을 연상하게 만듭니다.

구약성경, 민22:9절에 보면, "하나님이 발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라고 말씀했고, 삼하7:4절에서는 "여호와의 말씀이 나단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왕상12:22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사람 스마야에게 임하여 가라사 대" 왕상17:2절에서는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대하11:2절에서는 "여호와의 말씀이 하나님의 사람 스마야에게 임하여 가라사 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시대가 어두울 때에, 시대 시대마다 각 ¼ 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어쨌든 눅3:2절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 한에게 임한지라"라고 말씀함으로, 세례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였음을 우리 는 알수 있습니다.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이 그러한것 처럼, 비록 사람이 백성들 앞에 서서 백성들의 죄악을 질타하며 외치고 있지만 그의 외침은 인간의 외침이 아니라 하나님의 외 침이요 하나님의 경고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먼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백성을 향한 세례요한의 외침은, 시대가 변한 지금에도 동 일한 하나님의 메세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본문의 역사적인 배경부터 살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자들을 보내시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 나님의 메세지를 전하셨던 선지자 시대는 하나님의 역사가운데 가장 죄악이 관영 하고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가장 부패하였던 시대였으며,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 고 하나님께 경배해야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곁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였던 영적으로도 가장 암울한 시대였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그래도 자기 백성들을 사랑하시사 사랑의 메세지, 진노의 메세지를 시대마다 주셨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로 세례요한이 일하던 그 당시의 이스라엘은 매우 어려운 시대였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로마의 속국이었고, 사회적으로는 말할수 없는 혼란이 있었으며, 경제적으로는 매우 가나한 형편이었습니다. 뿐만아니라, 종교적으로는 갖가지 죄악과 부패가, 종교라는 이름하에 정당화되는 그야말로 암흑의 시대였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다 더 놀라운 것은, 시대를 깨우고 백성들의 죄를 꾸짖던 하나님의 음 성이 400년 동안이나 들리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 이 하나님을 잊고 살았을까요 어느 누구하나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기보 다는 오히려 가난과 혈벗음에서 건져줄 육신적인 메시야만을 소망하고 있엇을 뿐 이었습니다.

이와같은 당시의 상황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오늘날 우리의 시대를 생각해 보게 된다. 오늘날 우리의 시대는 어쩌면 세례요한의 시대보다 훨씬 더 악하고, 훨씬 더 영적 으로 암울한 시대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하나 하나님의 영광 을 구하기 보다는 오히려 육신의 쾌락을 추구하는 모습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오늘날의 성도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의 강단에서 피 에 맺힌 생명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지만, 어느 누구하나 그 말씀을 사모하는 자 없고 그말씀에 도전받아 삶이 변화되는자 없는 영적으로 암훌한 시대가 바로 오 늘 우리들의 시대가 아니던가요 아무도 예수그리스도를 목말라 하지 아니하고, 아무도 하나님을 위해서 고난받기 를 즐겨하지 아니하는 시대가 지금이 아닙니까... 분명한 것은 2,000년 전의 세례요한이 오늘 우리시대에 찾아오면,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경고했던 그의 메세지를 오늘 우리시대도 피할 길이 없다는 사 실입니다.

바로 이와같은 시대적 상황이였습니다. 세례요한이 광야에 나타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하고 무서운 책망과 함께, 요한이 두가지 의 경고를 주고 있는 모습을 오늘 본문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럼, 세례요한의 두가지 경고는 무엇일까요

첫째, 회개의 합당한 열매가 없음을 경고하였습니다. 본문에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할 사실은 회개하지 않음을 책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회개의 열매가 없음을 책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문제는 회개의 열매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앞에 나와서 눈물로 통회 자복한다고 할찌라도, 집으로 돌 아가서 또다시 같은 죄를 되풀이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회개했으면, 회개에 합당한 '죄에서의 돌이킴'이 있어야 함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회개의 합당한 열매가 없는 나무는 "도끼로 찍어 불에 던지우리 라" 했습니다.

9절 말씀에 보면,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했습니다. 여기서, 열매를 맺지 못하기 때문에 찍 힘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기 때문에 찍혀 불에 던지운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회개의 열매가 있는가 좋은 열매를 맺었는가.... 우리는 회개는 많이 합니다. 그러나 행함은 여전히 변함이 없는.... 전혀 회개의 ¿ 매와는 거리가 먼 삶이 아닌가를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둘째로, 세례요한은 말하기를,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말하지 말라" 경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것 처럼, 아브라함은 하나님께로 부터 '친구'라고 불리 움을 받은 유일한 인간이요, 믿음의 조상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와같은 아브라함과는 전혀 닮지 않은 모습과 신앙을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혈통과 전통때문에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 니다. 세례요한은 바로 이러한 이스라엘백성들을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저 단순히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라고 하는 것이 세레요한의 경고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면, 후손다운 삶을 살아야 되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분명히 오늘 이 말씀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세례요한의 준엄한 경고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 서도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못한다면, 결코 속으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하지 말것을 우리들에게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지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기에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라고, 당연히 믿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했던 것처럼, 오늘날도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다고 해서, 교회의 한 구성원이 되었다고 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될수 없다는 무서운 경고입니다.

10절말씀에 보면 이와같은 세례요한의 경고에 대해서 "무리가 물어 가로되 그러 하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까"라고 묻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이 질문은, 본문에서 세번이나 나타나는 질문입니다. 당시의 무리들이 하나님의 준엄한 책망과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알게 되었을때, 그들은 구체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할것인가"를 물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당시 세례요한에게 질문한 무리들은 세 계층의 사람들 이었는데, ①일반백성과 ②세리와 ③군인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하리까..."라는 이들의 질문에 대 한 세례요한의 세가지의 대답은 오직 한가지의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세례요한의 답변은, 직업을 바꾸라든가, 세상의 구조, 권력의 구조를 바꾸라는 것 이 아니라 오직 하나, 마음깊은 곳에 회개의 열매가 있어야 한다는 내면의 변화를 요구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와같은 세례요한의 경고에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하여야 하리이 까"라고 진실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물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이밤이 하나님께 "어찌하여야 하겠습니까" "도대체 어떻게 하여야 임박한 진노를 피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묻는 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답변은 가슴 깊은 곳에 회개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요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는 유다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고 이스라엘이 그토록 자랑하던 예루살렘 성전이 이방인들의 말발굽 아래 비참하게 짓밟히고 성전이 황 무하게 무너져 버린 상황을 바라보며 슬픔의 애가를 불렀습니다.

예레미야애가 1:1-3절에 보면, "슬프다 이 성이여 본래는 거민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히 앉았는고 본래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 같고 본래 는 열방 중에 공주 되었던 자가 이제는 조공 드리는 자가 되었도다 밤새도록 애 곡하니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 사랑하던 자 중에 위로하는 자가 없고 친구도 다 배반하여 원수가 되었도다 유다는 환난과 많은 수고로 인하여 사로잡혀 갔도다 저가 열방에 거하여 평강을 얻지 못함이여 그 모든 핍박하는 자가 저를 쫓아 협 착한 곳에 미쳤도다" 했다.

하나님의 나라로서 영광을 발하며, 이방나라 가운데 빛이었던 예루살렘이 이제는 이방인들에게 조공을 바쳐야 하는 비참한 식민지의 처지가 되어버린 형편을 선지 자 예레미야가 바라보면서 이 슬픔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비극적인 상황이 눈 앞에 펼쳐지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성 예루살렘과 시온을 하나님이 영원히 지키시며, 하나님의 보호와 임재는 끝이 없을 것이라"고 그들은 굳게 믿고 있엇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은 헛된 믿음이였습니다. 그들 마음속에 있는 바램일 뿐이였 다. 하나님의 뜻을 멀리하고, 온갖 죄악을 자행하였기 때문이다. 마음에는 미움과 시기와 악독이 가득하며, 살인과 도적과 속임과 간음과 방탕함 이 극에 달하였고, 또한 영적으로는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의 소리가 듣기 싫어서 선지자들을 멸시하고, 가두 고, 심지어는 죽이기 까지 하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했다. 그래서 말씀이 없는 암흑의 시대가 장장 400년이나 지속되었던 것이다.

우리에게 믿음은 있으나, 모든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믿었으나 예루살렘성은 무너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청년들이여! 이스라엘의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은 아닙니까... 그저 주일이 되면 교회에 나가서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생각하며..., 내 마음속에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기에, 장차 주께서 다시¿ 실 때, "나는 구원 받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 믿고 있는 사람은 아닙니까 그러나 모든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굳게 믿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성이 무너졌 던 사실을 우리는 가슴 속 깊은 곳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예레미야 애가 1:13절에 보면, 이와같은 여호와의 진노의 날...., 비참한 상황에 인간의 어떤 방법과 위로도 선지자를 도울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고백합니다. 오직 위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성령이 골수에 사 무칠 때 이같은 상황을 이길 수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어떻게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우리 심령깊은 골수에 성령의 불을 보내 실 때만이 가능함 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밤에 하나님께 부르짓읍시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이밤에 우리 심령의 깊은곳에 성령의 불을 보내어 주옵소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오리이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게하여 주옵소서!" 우리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이밤에 간절히 사모하는 심령 심령위에 주의 성령께서 불로 임하셔서, 예수의 이 름으로 더럽고 추악한 죄악을 태우실 줄로 믿습니다. 빗줄기같은 성령이 임하셔서 우리의 모든 추한 것들을 씻어 주실 것입니다.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지금은 구원의날" 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지금 이라 는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고, 돌이킬 수 없는 이 시간을 선용하시기 바란다. 다같이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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