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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의 부어주심과 성령충만의 차이 (요 07:3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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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성령 세례(성령의 부어주심)라는 것의 성경적인 근거는 무엇인가 이 말씀에 대하여 오늘은 살펴보기로 하자.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줄 알라 하셨기에(요 1:33)”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증언했다. 동시에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문제는 예수님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것, 즉 성령의 부어주심이 내주하심과 동일한 것인가 아니면 다른 것인가라는 것이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요 7:37-39)”
지금 현재의 상황은 예수님께서 아직 사역을 다 마치지 않으셨기에 성령이 오시지 않았다. 그러면 영광을 받으신 이후, 즉 대속 사역을 이루신 후의 장면들을 살펴보자.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 하여 모인 곳에 문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요 20:19-22)”
요한복음 7장에 의하면 아직 성령이 안계시는 것이고 지금 여기서는 성령을 받으라고 친히 말씀하신다. 그러나 이 말씀은 부활하신 후 시일이 지난 사도행전의 말씀과 또 다르다.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행 1:4-5)”
이상의 말씀들을 종합해 보면 예수님께서 내주하심도, 성령세례도 가능해졌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은지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의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창 6:1-3)”
여기서 하나님은 내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신다. 그렇게 된 실제적인 원인은 타락에서부터이다. 우리가 구원을 생각할 때에 타락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형벌에서 어떻게 회복되는가를 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신의 형상을 따라 만드셨다. 성경은 타락한 인간이 아이 낳는 모습을 이렇게 묘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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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창 5:1-2)”
여기서 아담이 아들을 낳았는데 더 이상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묘사하지 않고 자기 형상이라고 지적한다. 아담은 타락한 이후로 죄인이 되었고 그가 비록 처음에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을지라도 이제 그의 후손들은 타락한 선조인 아담의 모양으로 밖에는 출생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은 생령이었다. 그러나 타락으로 인하여 6장에서는 육체가 되었다고 지적하였다. 인간들은 육체가 되었다고 말한다. 영적으로 죽어 하나님과의 교류가 끊어졌고 죄악의 노예가 되어 버렸다. 예수님은 이것을 고치시려고 오셨다. 구원이란 죄의 형벌 속에 있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지만 그것은 결국 죽은 영혼을 살리시는 것이다. 죽은 영혼을 살리사 마치 태초에 생기를 불어 넣으신 것같이 이제 육체가 된 우리, 죄인되었던 우리를 십자가 아래 다 파묻고 새로 지으시는 것이다.
요한복음 20:22의 ‘숨을 내쉬며’라는 단어는 태초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는 사역과 예수님께서 이제 타락한 우리를 죄인의 자리로부터 구출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키며, 새롭게 창조하시는 사역과 동일하다.
그러나 요한복음 20장의 이것과는 달리 구약의 요엘서에 기록된 바와 같이 구약과 신약을 구별짓는 성령님의 어떤 부어지심을 살펴보려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에서는 어떻게 묘사되었으며, 또한 성령의 내주와는 어떻게 다르며, 성령 충만과는 어떻게 다른가를 보아야 한다.
사도행전 8장을 보자. 빌립의 전도로 사마리아 사람들이 분명히 예수님을 구주로 믿었다는 사실이 니오고, 또한 그들이 믿은 자들인 것을 분명히 확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와 요한이 와서 성령받기를 기도했다. 여기에는 분명한 구별이 있다. 우리가 사도행전 8장에서 분명히 확인하는 바는 빌립의 전도로 말미암아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다. 성경은 언제나 예수를 믿는 자에게 성령이 그 안에 계신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
여기서 그리스도의 영이 있느냐의 설명은 성령님의 내주하심이다. 그러나 성령은 내주하시나 우리가 모를 수도 있다. 다음을 보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예수를 믿으면 누구든지 성령이 계신다. 그러나 사도행전은 분명히 예수를 믿어서 성령님이 내주하시는 선에서 약속을 중단하고 계시지 않다. 그러나 성령 세례를 강조하는 쪽에서는 성령님의 나타나심이 없으면 아직까지 참다운 신자가 아니라는 오해를 하고 있다. 또한 한편으로는 성령의 내주가 전부라고 생각하는 쪽에서도 성령 세례가 사도행전이 기록된 이 시대. 독특한 역사적 시기인 교회가 형성기인 시대에만 필요하였던 하나님의 특별한 예외적인 사건이지 모든 신자에게 요구되거나 일반적인 약속으로 의도된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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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서신서에서는 성령 세례(부어주심)를 받은 것이 이미 보편적인 사건으로 되어 있다. 성경은 신자들이 말할 수 없는 충만함과 확신과 기쁨 속에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분명히 우리의 현재 환경이나 조건보다 더 나쁜 핍박과 박해 속에서도 지금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신앙고백과 기쁨에 찬 확신이 기록되어 우리에게 증거되고 있다.
지금까지 성령 세례(부어주심)라는 것이 성령님의 내주와는 달리 분명한 경험이요, 하나님께서 분명히 우리에게 허락하신 축복이요, 모두에게 드러나는 사건인 것을 확인했다. 그러면 이제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이것이 성령 충만과는 어떻게 다른가라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 다른 것이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 5:18)”
여기 사용된 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표현은 권고형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성령 세례는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것으로 되어 있다. 성령 세례는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행사하시는 은사이다. 은사란 베푸시는 쪽에서 주권적으로 행하시는 것이다. 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것은 열심히 추구할 것으로 되어 있다. 성령충만은 원래 성경에서 성화의 원리로 요구되고 있다. 성령 세례는 하나님께서 그의 기쁘신 뜻대로 그의 사랑하시는 자녀들에게 허락하시는 것으로 그것을 받는 자에게는 분명한 기쁨이 있고 확신이 있다. 그러나 내용의 진전이 있는 것은 아니다. 가지고 있는 것을 더 분명히 하고 확실히 하는 것이지 그것이 성화를 이루는 과정도 성화의 체험도 아니다. 성령 세례를 받으면 성화에 대한 큰 자극과 촉진이 되기도 하지만 그것 자체로서 내용에 있어서나 그 사건에 있어서 성화를 대신하지 않는다.
성령 충만이란 우리가 하나님을 모시며,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인으로 모셔 그의 요구와 그의 권면과 그의 명령 앞에 자기를 끊임없이 굴복시키며 순종하며 그리스도의 요구와 원리와 명령을 나의 것으로 삼아 나가는 즉 자기를 쳐서 복종시켜 십자가를 지고가는 문제인 것이다. 술취하지 말라는 것과 성령 충만의 비교는 술취함으로 술이 그 사람을 지배하듯이 성령이 우리를 지배하도록 성령의 휘하에 들어가라는 권면이다. 육체를 따르지 말고 성령을 좇아 행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성화이며 끊임없이 하려고 하지만 실패하곤 하며, 시행착오 속에서, 실패 속에서 다시 울고 회개하고 자기를 낮추고 채찍질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더 자기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성령 세례는 그런 일에 우리를 더 자극하며 우리를 더 힘있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어떤 간섭이요 어떤 축복인 것이다. 즉 성령 세례와 성령 충만은 불가분리의 단계이다. 더 높은 성화의 단계를 위하여 성령 세례(부어주심)이 필요하다. 우리는 성령 세례(부어주심)와 성령충만의 연결점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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