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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메시야 예언 再考(1) (사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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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머리말

이사야 9장 1-7절 (히브리원전 8:23-9:6) 은 메시야 예언으로 잘 알려져 왔다. 그 점 때문에 본 단락은 그리스도인들의 종교적 선입견()이 무조건 이입되는 전형적인 부분이 되었을 뿐 아니라 동시에 구약성경의 주석이나 주해의 방법을 익히는데 아주 유익한 것이기도 하다. 본 논고는 엄밀한 학술 논문의 형태를 취하지 않고 평이하게 본문 중심으로 논술을 전개했기 때문에 각주와 본문 사역 및 각절 주석은 생략했으며, 독자의 편의를 위해 개역성경의 장절구분을 따랐다. 독자의 보완적 연구를 기대한다.

II. 문단구분

본문은 전후 문맥상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는 점에서 독립단락임에 틀림없지만 도입부가 어딘지는 불명확하다. '만군의 주님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는 종결부는 37장 32절에도 똑같이 등장하는 바, 구원의 서광을 암시하는 귀절인데 반해 도입부는 앞문단의 종결부로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에 학자들 간에 이론이 분분하다. 9장 1절 (원전 8장 23절)의 전반부는 선행귀절 마지막 부분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 뜻이 달라질 수 있다. [와아펠라 므눋다흐]는 전통적으로 `어둠 속으로 쫓겨나리라'로 번역되었다. 이 해석은 선행문을 종결하는 뜻이 있기 때문에 다음 귀절과는 무관할 수 있다. 그러나 히브리 원문이 다소 불명확하기에 독법(讀法)을 달리하면 사정은 바뀐다. 이미 헬라역은 skotos wste ne blepein(어두워서 볼 수 없음) 이란 맛소라 본문 전통과 상이한 독법을 보이며, 혹자는 아모스 5장 20절 하반절에 의거 (캄캄하여 빛남이 없음) 본문 교정을 시도하는 바, 이를 감안하면 9장 1절 상반절은 그들이 겪는 고초의 이유를 부연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본 단락 도입부의 해석상 핵심적인 [무앞] 이란 말은 동사 [우프] 에서 유래했는데, 이는 `압박', `압제하다'라는 뜻 이외에도 `날아가다', `벗어나다'라는 의미가 있다. 전자에 따를 때 `그럼에도 그것(어둠)에 짓눌린 자들에게 (더이상) [무앞](압박)은 없다'가 되는 반면, 후자의 경우엔 '… 왜냐하면 그것에 짓눌린 자들에겐 [무앞](탈출구)가 없기 때문이다'로 번역이 가능하다. 원문의 [키로]라는 접속사는 전자를 좇을 때 선행귀와는 역접(逆接) 관계를 이루게 된다. 후자의 경우는 순접(順接)관계를 이루어 종속절을 유도한다. (역접으로 번역한 개역성경이나 표준새번역과는 달리 공동번역은 다소 모호하게 처리했다. 참고로 홍콩에서 1979년도 발행한 現代中文譯本 聖經의 독법을 보면 ; … 再也伐不到逃脫患難的出路.) 이 시점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는 용이하지 않으며 본문의 주해 후에나 가능할 것이다. 확실한 것은 도입부가 모호함에도 불구하고 이후 등장하는 단락은 선행귀와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는 점이다.-곧 구원의 표상이 전면에 부각된다.

III. 시대적 배경

본 단락의 시대적 배경은 본 예언의 이사야 친저성(親著性)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본 논고는 본 예언이 이사야 자신의 것이라는 잠정적 전제 하에 진행된다. 친저성 여부에 관한 신학적 논의는 뜻밖에도 기묘한 결론에 이를 수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우선 시대적 상황을 암시하는 부분으로서 단락 첫머리에 나오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북쪽 변경 지역 상황 보도를 들 수 있다.
[카에트 하리숀 헤칼 아르차 즈불룬 브아르차 낱탈리]

이 귀절엔 주어가 명시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개역성경의 `여호와께서'나 새번역의 `주께서'는 역자가 부연한 것이다 (BHS 참조). 헤칼이란 형태는 동사 [칼랄]의 히필 3인칭 단수 완료형으로서 주님이 본동사의 의미상 주어 (소위 신학적 주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나 전후 문맥상 [에트 하리숀] (예전) 이란 사물을 주어로 삼을 수도 있다. 사물을 주어로 의역할 경우 ; '과거'가 스불룬 땅과 납달리 땅에 소모를 안겨 주었지만…. 반면 시간을 나타내는 부사구로 해석할 때 ; 과거에 그가 스불룬 땅과 납달리 땅에 수모를 안겨 주었지만…. 어쨌든 우리는 여기서 과거 어느 시점에 멸시꺼리로 전락했던 스불룬 납달리 지경과 연이어 등장하는 훗날 (하아하론)의 변화를 겪게 된 (완료형에 유의) 지역인 해변길과 요단 저편 (동편) 지역과 이방 지역들의 명칭을 통해서 본 단락의 배경을 이루는 어떤 역사적 사건을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흔히 학자들은 열왕기 하 15장 29절의 주전 733년 전후 있었던 디글랏빌레셀 3세의 원정으로 인한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모를 연상한다. 여기서 번역상의 미묘한 문제를 지적할 수 있겠다. 바로 `이방의 갈릴리'라 번역한 [글릴 학고임]이란 지명인데, 개역이나 새번 모두 갈릴리라는 지명을 고수했다. (마태는 4장 15-16절에서 헬라역을 인용하면서 [갈릴라이아]로 읽었다.) 그러나 여기서 글릴은 [갈릴]이라는 일반명사의 연계형으로 보는 것도 가능하다. 그 경우 단순히 `이방인 지역'으로 번역이 가능한 바, 훗날 예수 그리스도의 이방지역 순회 사역과도 상충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적합한 해석일 지 모른다.

도입부에 거론된 이 지역은 이스라엘 역사상 결코 주도적 위치를 차지한 곳은 아니었다. 스불룬의 경우, 여호수아 19장 10-16절의 지파경계목록상 하부갈릴리 서편지역에 위치했으며 멍청한 나귀로 비유된 잇사갈지파와 같이 등장하곤 했던 이 지파는 (창세기 49장 13절 이하와 신명기 33장 18절 이하에 연속등장) 드보라 전쟁때 주도적 역할을 감당한 것(삿4, 10;5, 14, 18) 이외에는 뚜렷하게 역사적 족적을 남기지 못했다. 오히려 사사기 1장 30절은 이들이 가나안족속과 더불어 삶을 영위했음을 보도할 뿐 아니라 야곱의 신탁에선 해변의 일꾼()으로 고용된 암시를 찾을 수 있다(잇사갈도 마찬가지, 잇사갈이란 명칭엔 삯꾼아란 의미가 있다).

또한 납달리 역시 상부갈릴리 동편에 위치한 지파로서(수 19, 32-39), 드보라 전쟁때 수불룬과 함께 명성을 떨쳤던 것 이외엔 야곱의 신탁 (창49,21)이나 모세의 신탁(신33,23)에서 그들 삶의 양태에 대한 구체적 정보를 얻을 수 없는 실정이다. 이 지역은 애초부터 이스라엘역사의 변두리에 위치했고 소위 중간시대에 이르기까지 그 사정은 내내 변함없었다(본 신탁이 기대한 역사적 회복은 이스라엘 역사상 성취되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는 이 도입부에 등장하는 `훗날(하아하론)'이 이 지역을 영화롭게 한(힝비드/완료형 !)것에 유의해야 한다. 9장 2절의 `흑암속에 헤메던 백성이 큰빛을 하나 보았고, 어둠의 땅에 거하던 자들 위에 빛이 비췄다'는 표현에서도 간취할 수 있는 것처럼 예언자는 신탁의 모든 동사를 완료형으로 기록하므로써 이미 이 사건이 이루어 진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가 아는 한 이스라엘은 왕정사는 물론 포로기 이후에도 이 지역의 회복에 대한 역사적 성취를 이룩하지 못했다. 이곳은 문자그대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 지역을 주유했다는 것에 신학적 의미를 부여한 복음서기자의 재해석을 보기 전까지 어둠에 묻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적 사실이 아직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완료형으로 묘사한 예언자의 의도는 무엇인가

IV. 양식및 표상(表象)

본 단락은 구분상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먼저-아직 하나님의 이름은 명시되지 않았지만-하나님이 핍절한 상황에 빠진 백성들에게 이미 베푸신 구원의 모습과(1-3절), 그 구원의 근거를 밝히는 접속사 키( )가 유도하는 구원의 이유는 다시 둘로 나눌 수 있는 바, 전쟁표상으로 점철된

4.5절이 그 첫번째 부분이요, 나머지는 본 단락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6절의 아들탄생에 관한 이야기다. 예언자는 본 단락의 마지막 접속사가 이끄는 사건을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에게 베풀 구원의 징표로 삼고 있다. 본문의 거의 모든 동사가 감사송특유의 완료형시제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은 예언자 특유의 구원표상의 확신에서 유래한 것이라 하겠는데,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를 이미 완료된 사건으로 규정하므로써 미래를 선취(先取)하는 이런 기법을 소위 '예언적 완료(perfekta prophetica)'라 한다. 비록 6절의 아들탄생 부분이 문장구성상 최후에 등장했지만 이 부분이야말로 선행한 모든 구원사건의 담보가 된다는 점에서 논리적으로는 도입부에 해당한다-아들의 탄생으로인해 이 모든 구원신탁이 제 의미를 찾게 되므로.

예언자가 본 단락의 예언을 선포하면서 도입한 또 다른 요소로서 제왕송의 양식을 들 수 있다. 6, 7절은 여타부분과 상관없이 그것 자체로 독자적 표상을 반영, 간직하고 있는데 바로 '제왕이념(Konigsideologie)'이다.
고대 이스라엘이 주변 대제국의 제왕이념을 공유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신과 인간사이의 중재자로서 왕은 신의 인간에 대한 지배권을 대신 관장하는 존재일 뿐아니라 인간편에선 신께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대표다. 이 왕은 제왕시의 대표격인 시2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즉위시 신의 아들로 선포되므로써 그 독특한 지위를 보장받는데, 이는 메소포타미야지역에서 통용되던 양자론(養子論)적 입장에 해당하며, 태어나면서 부터 신의 아들로 인정되었던 애굽의 바로에 적용되었던 것과는 다소간의 차이를 보인다.

한 아들이 우리에게(왕실과 백성들에게)태어났다-구원의 원초적 근거로서 명시된 이 도입귀절에서 독자는 신의 대리인(王)이 즉위하는 모습이나 왕위를 계승할 왕세자의 탄생을 알리는 백성을 향한 왕실의 의전적 선포를 추론할 수 있다. 연이어 이 왕(혹은 왕세자)에게 부여된 이름은 4중(혹 5중)으로 이루어 진 것으로서 여타 구약본문에선 그 유례를 찾을 수 없이 독특한 형태로 전승된 것이며, 바로 예언자가 예루살렘 궁정에서 통용되었던 전래적 의식에 정통했음을 반증하고 있다.

왕에게 붙힌 다양한 명칭은 제왕이념에 생소한 우리로서는 다소 의아한 느낌을 주는데 특히 `엘 깁보르'같은 것이 그 대표적 예다. 이 용어는 두가지 해석이 가능한데 `과 같은 용사(神雄)'이거나 `용맹한 신(勇神)'일 것이다. 우선 전자는 왕의 인간적 측면을 고려할 때 현대인들에게 별 어려움없이 수용될 수 있는 번역이겠으나, 고대인들에겐 왕이 인간적 존재이상의 그 무엇으로 인식되었던 것을 염두에 둔다면 후자의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문법적으로도 더 타당해 보인다-깁보르를 형용사로 보아 한정적으로 해석함. 왕은 '용맹한 하나님'이다-이는 고대의 수많은 민족들의 생존의 시험장이었던 전장에서 그 성패를 좌우했던 한명의 용사의 존재가치를 구체적으로 표상한 것이며, 그런 점에서 `全能하신 하나님'이란 번역은 신학적으로 너무 정제된 느낌을 줄뿐 아니라 이 문맥에선 적합치 않다. 오히려 시 24, 8에서 주는 강하고 용맹하며, (용감한)전사(戰士)로 묘사될 뿐 아니라, 다른 곳에선 깁보르의 동족어 구부라(용맹한 능력, 힘, 권세)를 지닌 분으로도 나타난다(참고. 시20, 6 구원의 권능:54, 1:권능으로 의를 세움:89, 13 팔에 능력이 있음 사 33, 13 주의 능력, 63, 15 주의 열정과 권능).

이런 전쟁의 표상은 3정에 묘사된 백성들이 만끽하는 구원의 기쁨이 철저하게 생사의 갈림길을 헤쳐나간 생생한 경험적 언어로 이루어 진 것과 4절의 `미디안의 날'이란 표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고대 이스라엘이 경험했던 하나님은 추상화한 신인식에 근거한 존재가 아니라 어떻게 보면 비종교적이라할 정도로 비정한 삶의 영역에서 유래한 존재였다. 3절 하반절에 등장하는 기쁨의 두 양태를 보라. 하나는 추수의 기쁨이고 다른 하나는 `샬랄(노획물, 약탈물, 몫)'을 분배하는 `썩은 기쁨'이다. 전자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하사한, 언제보아도 좋은 기쁨이나 후자는 인간의 맹목과 어리석음이 빚어낸 전쟁이라는 참화에서 마지못해 찾아낸, `곳간 불질러먹고 나락 줍는 기쁨'이다. 그러나 예언자는 이에 개의치 않고 '실존적기쁨'에 촛점을 맞추므로써, 정제하지 않은 거친 언어구사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을 명시한다-이것보다 더 적절한 표현을 찾기 어려웠으리라.

`미디안의 날'도 인간적 관점에선 도저히 승산이 없는 전쟁을 하나님의 극적인 개입으로(삿 7, 13f.)승리로 이끌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표상이며, 이스라엘을 향한 주님의 열정, 배타적 애정(킨아트 아드나이/사9,7)에 상응하는 것이다.

그외의 제왕칭호로서 첫번째로 열거된 `펠레 요에츠'는 전통적으로 별개로 번역된 말인데 (기묘자, 모사), 근래에 들어 한 개념어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짙다. 먼저 펠레라는 용어는 비상한 것, 기묘한 것이란 의미가 있는 명사로서 출애굽기 15장의 바다의 노래에선 `기이한 일을 행하는자(모세 펠레 ,11절)'로 하나님을 기리고 있다. `요에츠'는 동사 의 능동분사형태로 '충고하다, 간(諫)하다'라는 의미외에도 `기획, 결정하다'라는 뜻이 있기에 간언자 (諫言者), 충언자(忠言者), 입안자(立案者)로 번역이 가능하다.

따라서 상기한 두 단어를 동격으로 이해하고 전자를 대격목적어로 해석하면 `기이한 것을 기획, 결정하는자'라는 의미가 된다. 개역이나 새번역이 양자를 분리해서 번역한 것은 차치하고라도 (기묘자, 모사), `모사'라는 말은 문맥상 적합하지 않아 보인다. 왜냐하면 모사라는 말은 부수적인, 조언자의 역할을 의미하기 때문에 결단의 주체자로서 왕의 지위에는 걸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점에선 천하를 다스린다는 의미의 '경륜가(經綸家)로 번역한 공동번역이 좀 더 원의에 가깝다고 본다(참고, 中譯, 奇妙, 的導師). 결국 `신묘한 경륜가'라 번역이 가능한데 여기서 신묘한것(펠레)은 속칭 `신기한 일'이라기 보다는 인간능력의 한계를 넘어선 '큰일'로 이해해야 할 것이며, 바로 하나님의 전권에 속하는 구원사역의 동의어라고도 하겠다. 이 해석은 먼저 언급한 '엘 깁보르(용맹한 신)'이라는 칭호와 상호관련이 있으며 계속되는 칭호 '아비 아드'와 `사르 샬롬'과 결부시킬 수 있다.

`아비아드'라는 말은 `영원한 아버지' 혹은 `전리품의 아버지'로 번역이 가능하다. 영속적인 미래를 뜻하는 `아드'는 흔히 왕에게 만세의 복이 임할 것을 기원했던 백성들의 염원과 결부시킬 때 무리없이 선택되나, 창세기 49장 27절에 등장하는 벤야민 지파의 삶의 양식-아침엔 `아드(약탈물)'를 먹고 저녁엔 '샬랄(탈취물)'을 나누는 산적떼와도 같은 삶-에 의거한 해석, 곧 `노획품, 전리품의 아버지'라는 해석은 그것이 비록 3절의 전쟁표상과 연관이 있다손 치더래도 본 문맥에 어울리지 않는다.

마지막 `사르 샬롬'은 `사르'라는 용어가 문맥상 여러가지 번역이 가능하기 때문에 난해하지만 인도자, 관장하는 사람이란 뜻에서 `평강으로 인도하는 자'라 의역할 수 있겠다. 개역, 새번역, 공동번역 모두 평강의 왕, 평화의 왕으로 옮겼는데 좀 지나친 감이 있다 (참고, 영역 prince of Peace, 독역 Friedensfurst, Furst des Friedens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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