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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포도원 농부의 비유 (눅 2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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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성전에서 장사치들을 내어쫓으시고 말씀을 가르치시자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큰 도전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떼를 지어 예수님의 권세에 도전을 했습니다.
이럴 때 예수님은 유명한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하십니다.
이 비유는 당시 타락한 종교 지도자들의 죄악이 무엇이며 예수님의 권세가 어디서 온 것인가를 밝히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지극하시며 이 사랑을 거절할 때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가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죄인들을 길이 참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예수님을 깊이 영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예수님의 권세에 대한 질문(1-8)

어느 날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면서 기쁜 소식(복음)을 전하고 계셨습니다.(1)
이 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함께 예수님께 왔습니다. 이들은 종교 지도자들로서 당시 최고 권력 기관이었던 산헤드린 공회원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께 와서 “당신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가 누가 이런 권세를 주었는가” 하고 항의를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이런 일이란
①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이들, 소 팔고 양 팔고 비둘기 팔고 돈을 바꾸는 자들을 쫓아내시고 성전을 깨끗이 하신 사건을 말합니다.(19:45)
②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장로들이 볼 때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메시아의 환호를 받으며 입성하신 것도 대단히 불쾌합니다.(19:39)
③ 이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이 집은 만인이 기도하는 집인데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고 책망도 하시고 회개를 촉구하시자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이러는가>
④ 또, 예수님이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파하시자 <무슨 권위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는가> <무슨 자격으로 이런 일을 하는가>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 할 권한을 주었느냐> 하고 다그쳐 물었습니다.
이들은 모든 종교적인 권세가 자기들의 것인 양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권세가 산헤드린으로부터 나오는 양 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이런 일을 하느냐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 할 권한을 주었느냐고 예수님께 항의를 하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그러면 나도 하나 물어 보자 하시며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 서냐 사람에게로 서냐”
세례 요한도 공회에서 무슨 자격증을 받아서 회개의 세례를 베푼 것이 아니었습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3:2) 온 이스라엘이 요한에게 나아 와 자기 죄를 자복하고 회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는 요한의 세례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을 받은 이들은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 온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러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고 문책을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① 이들은 요한의 세례가 하나님의 뜻인 줄 알면서도 세례를 받지 않았습니다.(눅7:30) 이들의 자존심과 교만으로 거부했습니다.
② 또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증거 했습니다.(요1:29) 그러므로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 서라고 대답을 한다면 당연히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 서라고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또, <요한의 세례가 사람으로 부터라>고 한다면 백성들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고 있으니 백성들이 돌로 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사람들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서로 의논해서 “어디로 서인지 알지 못하노라”(7) 하였습니다.
이런 이들을 보고 예수님은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8) 하셨습니다.
이들은 이미 세례 요한의 권세나 예수님의 권세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대답을 할 필요성이 없었습니다.
이런 비양심적인 이들에게 대답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으신 예수님께서 대답을 하지 않으시고 그리고 유명한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하셨습니다.

Ⅱ.포도원 농부의 비유(9-18)

이 비유는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그린 한 폭의 그림과 같습니다.
9절 하반 절을 보십시오.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소작인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 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의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에게 보냈습니다.
이런 일은 당시 실제로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한 주인이 아름다운 포도원을 만들었습니다. 주인은 포도원을 만들어 소작인에게 세로 주고 먼 타국에 가서 오랫동안 살게 되었습니다. 당시 농부들은 일정한 농토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하루하루 품팔이를 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이들의 생활은 비참했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이들을 불쌍히 여겨 포도원을 맡겨 주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큰 은혜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거지가 하루 아침에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동시에 소작인들은 포도원을 잘 가꾸고 주인에게 정한 세를 바쳐야 하는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날품팔이하던 시절을 생각하면 이런 것쯤은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습니다. 소작인들은 주인의 은혜가 너무 커서 죽도록 충성하고 주인에게 정한 세 이상을 바쳐야 되겠다고 다짐을 했을 것입니다. 주인은 타국에 갔고, 그 날부터 농부들은 열심히 땀을 흘리며 포도원을 가꾸었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났습니다. 주인은 포도원 소출의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소작인들에게 보냈더니 이 소작인들이 주인의 종을 심히 때리고, 세도 주지 않고 거져 보냈습니다. 포도원은 심은 지 2-3년 후면 소출을 거둘 수 있습니다. 소작인들은 이미 많은 소출을 거두었습니다. 주인은 계약한 때가 되매 세를 받으려고 종을 보냈습니다. 그러면 소작인들은 어떻게 해야 마땅합니까
주인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생각하며 극진히 대접하고 정한 세 이상을 바쳐야 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주인의 종을 늘씬하게 때려서 거저 돌려 보냈습니다. 이 소작인들은 참으로 선을 악으로 갚는 배은망덕한 자들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볼 때, 이럴 수가 있을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하니 그것도 우리들과 같이 비교해 보니까 이해가 되었습니다.
소작인들이 처음에는 주인의 은혜가 너무나 크고 고마워서 눈물도 흘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루 이틀, 한달 두 달이 지나면서 점차 감사한 마음이 식어졌습니다. 또 일 년 이 년이 지나면서 서서히 주인의 은혜를 잊어버리게 되었습니다. 또 열심히 땀 흘려 일하다가 보니까 포도원이 자기 것처럼 애착이 생겼습니다. 또 소출이 많아지니 욕심도 생겼습니다.
① 세만 바치지 않으면 금방 큰 부자가 될 것 같았습니다.
② 또 손가락도 까딱하지 않은 주인에게 소출의 일부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억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③ 또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주인이 한 번도 오지 않으니 주인이 있다는 것도 까마득하게 잊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느닷없이 낯선 사람이 와서 주인이 보낸 증거를 보이면서 세를 달라고 했습니다. 소작인들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세를 주지 않았습니다. 올 해는 포도를 따지 못했다는 둥, 해 길이를 해서 올 해 포도 농사를 못했다는 둥 별별 핑계를 대며 세를 주지 않았습니다. 종은 어찌하든지 받아 가려고 하자 소작인들은 종을 두들겨 패서 쫓아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이 소작인들이 특별히 악해서가 아니고 모든 사람이 이와 같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십시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비참한 노예 생활을 하며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긍휼이 여기사 크신 능력으로 구출해 내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잘 살게 되거든 하나님을 잘 경외하고 하나님을 잊지 말 것을 거듭 거듭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어떻게 했습니까 좀 잘살게 되자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을 잊어버리고 하나님께서 가장 가증히 여기는 우상 숭배를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자신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얼마나 잘 잊어버립니까
어떤 분은 죄의 종살이 하던 데서 구원을 받고 너무나 기뻐서 주님께 죽도록 충성을 하겠다고 맹세를 합니다. 그러나 한 달이 못하여서 구원의 은혜를 잊어버립니다.
또, 가난하던 사람이 잘살면 주의 일도 하고 십일조도 꼭 할 것을 다짐합니다. 그러나 잘 살면 십일조도 하지 않게 되고 주의 일도 우선적으로 하지 않고 나의 일부터 먼저 합니다. 어느 목사님은 “늙은 양은 새끼도 낳지 못하고 젖도 짜지 못한다”고 설교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늙어서 양의 새끼(전도)도 낳지 못하고 젖(헌금)도 나오지 않는다고 책망한 것입니다. 그 설교로 인하여 당회에서 그 목사님을 내쫓았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주인은 이런 이 소작인들을 보고 고민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다시 다른 종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도 심히 때리고 능욕까지 하며 거져 보냈습니다. 갈수록 태산입니다. 그러나 주인은 또 참았습니다. 다시 세 번째 종을 보냈습니다. 그러자 이 종도 때리고 상하게 해서 내어쫓아 버렸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인이 왜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넘겨주지 않고 계속해서 다른 종을 보내는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주인은 소작인들을 갈아치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갈아치우지 않고 어찌하든지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고자 했습니다.
소작인들의 소행을 보면 괘씸하기 짝이 없지만 끝까지 농부들을 믿어 주고 회개하고 돌이키게 하고자 했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소작인들을 바꾸어 보아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소작인들도 이들처럼 되지 않는 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본성이 타락한 인간들은 이기적이고 은혜를 배반하기를 잘합니다. 그러므로 먼저 소작인들을 회개시켜 세우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길입니다. 우리는 이런 길이 참으시는 주인으로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회개하기까지 길이길이 참으시고 당장 갈아치우시지 않고 참으시기까지 참으시는 하나님을 봅니다.

그런데 주인은 큰 고민이 생겼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어찌할꼬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혹 그는 공경하리라”
주인은 고민 고민 끝에 최후로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아들을 보내면서도 확신은 없었습니다. 소작인들이 아들을 해칠 위험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들을 보낸다는 것은 굉장한 모험입니다. 이런 모험을 감수하면서 주인이 간절히 바라는 것은 <혹 그는 공경하리라>
얼마의 소출을 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이 주인의 간절한 소원은 소작인들과 바른 관계성을 맺는 것이었습니다.
소작인들이 주인의 아들을 공경하므로 주인을 공경하기를 바랬습니다. 그래야 소작인들이 계속하여 포도원을 붙일 수 있고 포도원에서 일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들을 보내는 것은 소작인들에 대한 주인의 사랑을 확증한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랑은 주인의 최후의 사랑이요, 최고의 사랑입니다. 소작인들이 아들만 공경한다면 지금까지 행한 모든 죄는 없었던 것으로 하려고 아들을 보낸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 소작인들을 위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낸 포도원 주인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이는 탐욕에 가득 찬 죄 많은 인생들을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①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 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 마다 멸망치 않고 여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② 또, 요한 복음 5:23절에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심으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롬5:8) 외아들을 보내신 이것보다 더 큰 사랑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최후의 사랑입니다. 누구든지 이 하나님의 사랑, 독생자를 보낸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공경하는 자는 영생을 얻습니다. 이전까지 지은 죄, 어떤 죄를 지었든 지간에 다 용서해 주십니다. 기억도 아니하십니다.
소작인들 같이 악독한 죄인들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찬양합니다.

그러면 이제 소작인들은 최후로 보낸 주인의 아들을 어떻게 했습니까
14, 15절을 보십시오.
소작인들이 그를 보고서로 의논을 했습니다. 이 사람은 상속자다, 그러니 그를 죽이고 유산을 우리 것으로 만들자 했습니다. 그리고는 주인의 아들을 포도원 밖에 내어쫓아 죽여 버렸습니다.
우리의 내려오는 말 가운데 겁 없이 일하는 사람을 “간 큰 사람”이라고 합니다. 간이 큰 사람보다 더 큰 사람은 “간이 부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그 사람보다 더 한 사람에게는 “간이 배 밖으로 나왔다”고 합니다.
여기 소작인들은 간이 배 밖에 나왔습니다. 하나님이 길이길이 참으시고 당신의 종을 한 번, 두 번, 세 번 여러 번 보내시며 회개하기를 바라시는데, 그러다 안되어서 독생자까지 보냈는데 거기에다 대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그 사랑을 버렸습니다.
다같이 로마서 2:4,5절을 읽어봅시다.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주인의 아들을 죽인 소작인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16절을 보십시오.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그러면 이 비유 가운데서 이 주인의 아들을 죽인 농부(소작인)들은 누구를 가리킵니까 19절을 보면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입니다. 이들은 바로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에게 주었던 권리를 빼앗아 이방인들에게 주었습니다.

이 비유를 들은 유대인들은 무서워서 그렇게 되지 말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시편 118:22절에 예언된 말씀이 있어서 그대로 될 것이라 하셨습니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될 것이라”
예수님은 귀한 머릿돌이십니다.
그들은 이 돌을 버렸습니다. 배척을 했습니다. 죽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권세는 이러하다고 했습니다.
“무릇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셨습니다.
<돌로 계란 치기>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배척하고, 버리고, 죽이고 하였지만 예수님의 권세, 이 돌이신 예수님, 이 돌 위에 부딪히면 산산 조각이 납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에게 무슨 권세로 성전에서 장사치들을 쫓아내고, 누가 권세를 주어서 성전에서 가르치느냐고 했을 때, 이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를 하시면서 예수님의 권세는 돌인데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가루로 만들어 버린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권세가 그만큼 큼을 알립니다.
그러므로 간 큰 짓, 간이 배 밖에 나온 짓을 하지 맙시다.
어차피 우리는 하나님의 포도원 농장 소작인들입니다. 주인이 아닙니다.
주인의 농장을 붙이는 소작인들인데 소작료를 잘 내고 주인의 말씀에 절대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 농장에서 진실로 행복을 누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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