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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도의 교제(사도신경15) (행 0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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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sanctorum)라고 쓰는 말은 우리가 좋게 생각하면 대단히 좋은 의미이지만, 한편에서는 우리가 감히 쓸 수 있는 말인가 두려울 때도 있습니다. 늘 죄인된 인간으로 죄 가운데서 살아가는 인간인 우리에게 ‘성도’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교회로부터 계속된 교회는 믿는 자를 성도라고 불렀고, 이 말은 특별한 거부감 없이 지금까지 교회에서 사용되어 왔습니다.
고전 1: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

왜 그렇게 부를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은 아마도 매일 매일의 생활 속에서 죄를 범하고 부족하게 살고 있지만, 인간을 용서해주시고 자녀로 삼아 주시며, 의롭게 해 주셔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구원하여 하늘나라의 시민으로 택해 주시는 사랑과 은총에 의한 결과일 것이다. 여기에 ‘칭의’와 ‘성화’가 전제되는 것이다. 특히 존 웨슬리에 의해 강조된 칭의와 성화는 바로 우리를 성도라고 부를 수 있는 신학적인 근거가 되는 것이다.
칭의는 우리에게는 죄가 많으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으로 인해 우리를 하나님이 거저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죄인이지만 예수가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죄값을 치루셔서 의인이라 불리는 것이다.
성화는 의인으로 인정받은 후에 우리가 거룩하고 성화된 생활을 계속함을 의미하는 것인데, 여기서도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죄를 짓게 마련이므로 계속해서 회개하고, 기도하며, 성령의 도움을 받아 계속 성결된 생활을 하도록 노력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완전을 행해 계속적으로 나아가야 하며, 이와같은 신앙의 입장을 전제로 노력을 할 때 우리는 성도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어떤 특권의식이나 생활의 변화없이 의례적으로 성도라고 한다면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성도의 의미나 적어도 초대교회에서 사도들이 사용했던 의미와는 동떨어진 의미가 되는 것이다. 요즈음은 우리는 너무나 흔하게 성도라는 말을 사용한다. 좀더 겸손한 자세에서 그 뜻을 음미하면서 사용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라고 부르기에 합당한 모습이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그 다음에는 교제(communio)라는 말은 우리가 너무도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말입니다. 두 사람 이상이 서로 관계를 가지는 인간관계를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교제는 한 가지 특수한 특징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교제가 수평적인 의미가 있는데 비하여 여기서 말하는 교제는 수직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 유의해야 합니다. 즉 성도의 교제는 인간간의 이해나 협력을 바탕으로 하는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그 뜻과 이상을 인간관계를 통해 이 땅에 실현하게 되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주 안에서’ 성도의 교제를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교제가 파괴될 위험이 있을 시에는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시고 단절되었을때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이어주시며 이 교제는 세상 속에 골고루 퍼져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도의 교제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부족한 인간들을 거룩하게 살게하시며, 하나님을 통해서 그 속에서 서로 교제를 한다는 것을 기본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냥 세상 사람들은 상호관계를 맺고 서로 사귀며 사회적인 할동을 영위하면서 기쁘고 즐겁게 살며, 때로는 자기 이익을 충족시키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성도의 교제는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어야 하며 그 뜻을 충족시킴으로써 우리가 기쁨과 즐거움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성도의 교제를 믿는다는 신앙고백은 매우 중요한 신앙고백입니다.
행 2:42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라는 말씀은 초대교회의 생활신조를 말씀하는 것이며, 사도들의 가름침이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초대교회의 신앙의 핵심중에 하나가 성도의 교제였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의 교제는 코이노니아라고 하는데 이 말의 뜻은 교제, 교통, 동참 나누어준다는 뜻입니다. 피차에 유익과 선을 위하여 교제하고 협동하는 것을 말하며 나누어 가지는 것, 동참하는 것을 말합니다.

희랍의 의식을 표현하는 말에서 거룩한 것은 대부분 성찬식의 요소를 지시했고, 성도들의 친교, 사귐에 관계되며 성찬에의 참여를 지시한다. 그런 의미에서 코이노니아는 거룩함과 관계되며 성만찬의 기본의식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초대교회의 성도의 친교는 그리스도의 삶에의 참여를 의미하며 성례전적인 의미에서 공동체의 철저한 연대의식을 경험하는 것이다.

1. 성도의 교제는
① 결혼 생활의 친교이다.
성도의 교제는 결혼 생활의 친교와 비교될 수 있다. 남편과 아내가 한 가정을 이룬다. 가정은 공동체의 최소 기본단위로 남자와 여자의 결합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어느 쪽이 높고 낮음이 없는 것이며, 운명과 행복, 고통과 슬픔, 즐거움이 함께 나누어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삶을 공유하는 것이고 공생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성도의 교제도 무엇이든지 함께 공유하고 함께 나누어 가지는 것이다. 롬 12:15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행복도 불행도, 기쁨도 슬픔도, 성공도 실패도, 좋은 일도 궂은 일도, 모두 함께 가지고 함께 나누는 것이다. 함께 살고 함께 죽는다. 이처럼 성도의 교제는 운명을 같이 하는 공동체적인 관계이다.

② 특별한 친교
성도의 교제는 특수한 친교를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와 같은 것이며,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친교를 말한다. 혈맹으로 맺어진 친교보다 더 강한 친교이다. 믿음을 통한 친교, 이것이 가장 아름다운 친교, 가장 살 깊은 친교라고 말 할 수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맺어준 친교이다. 지난 날에는 다 같은 죄인이었는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함을 얻어 이제 새 삶을 살도록 구원의 공동체를 마련해 주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는 뜨겁게 교제하는 이유가 있다. 같은 과거를 가진 사람들끼리 모였기 때문에 그 관계가 특별한 관계가 되는 것이다. 또 그들은 주님의 재림의 약속을 붙들고 기다리는 사람들이며, 또 다같이 하나님 나라에서 다같이 복을 누릴 사람들이다. 즉 같은 과거, 같은 약속, 같은 미래를 갖고 있기에 깊은 친교를 나누는 것이다.

2. 성경이 말하는 성도의 교제
① 물질을 통한 교제
⑴ 교회내의 교제
행 4:32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행 2:44-45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초대교회는 참으로 성도의 교제가 넘치는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물질을 내어놓고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물질의 교제를 나누었다는 것은 꾸어주고, 단순히 나누어주는 구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 문제는 성도 사이에 아주 미묘한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교회가 물질의 교제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은 초대교회는 물질을 초월한 믿음의 공동체였다는 말입니다. 초대교회 내에는 자기의 전 재산을 사도들에게 내어 놓을 만큼 물질을 넘어선 믿음의 사람이 많았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초대교회는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함께 교제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할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날 교회 내에 점심식사를 하고 오후 예배를 드리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보통 점심은 누구나 다 같이 먹습니다. 목사님이고 장로님이라고 특별한 것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국수를 먹으면 다 같이 국수를 먹고, 보리밭을 먹으면 다 같이 보리밥을 먹습니다. 식사에서 평등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물질의 교제는 물질을 초월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시대는 갈수록 물질주의로 흘러갑니다. 이 때에 물질의 교제가 참으로 필요한 때입니다.
바울은 롬 12:13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고 하였습니다. 교회내에 물질의 어려움이 있는 자들을 도우라는 말입니다. 함께 사는 공동체를 만들라는 것입니다.
⑵ 교회간의 교제
행 16:1-4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내가 이를 때에 너희의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바울은 모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의 어려움을 알고 이방의 여러 교회에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헌금할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예루살렘교회의 어려움을 들은 여러 교회들이 정성껏 헌금해서 도왔던 것이 초대교회의 모습입니다.
교회간에 이와같은 성도의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내 교회 뿐만 아니라 모든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이고, 하나님의 자녀이며, 성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형제 자매이며 서로의 어려움을 돕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한국 교회의 50% 정도가 미자립이라는 보고가 있습니다. 미자립 교회들은 다른교회의 도움으로 꾸려나갑니다. 교회간의 물질의 교제입니다.
⑶ 목회자와의 교제
빌 4:18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바울이 복음을 위하여 애쓰는 동안 바울을 열심히 돕는 교회들이 있었습니다.

② 정신적인 교제
신약의 책 중에 가장 짤막한 책 중에 하나가 빌레몬서입니다. 빌레몬서의 주인공은 오네시모라는 도망친 노예입니다. 이 노예를 중심으로 빌레몬서가 전개됩니다. 오네시모의 주인은 빌레몬입니다. 오네시모는 주인 빌레몬의 집의 중대한 피해를 입히고 로마까지 탈출해 나왔습니다. 그러다가 어찌하여 바울을 만났고, 바울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 오네시모에게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네시모를 ‘갇힌 중에 낳은 나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감옥에서 전도해 예수 믿게 된 나의 제자라는 뜻입니다.
바울이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 그러나 이제 변화되어 새사람이 된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보내면서 간절하게 편지를 한 장 씁니다. 그것이 바로 빌레몬서입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편지를 씁니다. “오네시모는 변했고, 복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엇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더 이상 단순히 당신의 종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그는 당신의 형제요. 빌레몬이여, 오네시모를 당신의 형제로 받으시오.”
초대교회는 주인과 종, 남자와 여자가 한 형제와 자매로 동등한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③ 영적인 교제
빌 1:3-5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고후 1:11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를 인하여 많은 사람도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성도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교제는 바로 영적인 교제입니다. 바울이 위대한 사도로 복음증거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는 영적인 교제를 통해 그를 돕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몸은 떨어져 있지만 항상 서로를 위해 기도하므로 영적으로 서로 교통하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 영적인 교제가 사라지고 있다. 단지 육적인 교제, 정신적인 교제만 있다. 교회가 영적인 단체가 아니라 하나의 인간의 모임으로 전락해버리고 만 것이다. 그래서 모여서 먹고 마시고 즐기는 일은 열심인데 거기에서 끝나버린다.
함께 모여서 기도하고, 말씀을 나누며, 찬양하고, 권면하며 사랑하는 영적인 교제가 넘쳐야 한다. (속회예배, 심방...)

성도의 교제를 믿는다는 우리의 고백은 우리의 교회 안에 성도 사이의 교제를 넘어 온 하나님의 교회, 백성들의 교제에 대한 믿음입니다. 고백입니다. 특히 영적인 교제(기도, 말씀, 찬양, 봉사)가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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