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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 10장 강해 (마 10: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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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일군들인 열 두 제자를 부르시고 그들에게 자 신의 일을 대신 행할 수 있는 권능을 부여하십니다. 이러한 권능은 자신들의 이익이나 명예나 영화를 위해 사용되어서는 안되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 을 필요로 하는 불쌍한 양들, 길 잃은 양들에게 사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일군들이 자신들에게 맡겨진 권능을 합당하게 행사할 때 하나님 나라의 성격이 바로 드러나며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이 온전히 나타나며 하나님 나라 의 복음이 효과적으로 전파될 수 있습니다(7-8절).

 본장은 마태복음에서 두 번째 나타나는 강화입니다. '강화'는 어떤 한 주 제에 대한 예수님께서 집중적으로 가르치신, 오늘날의 강의 또는 설교와 비슷 한 것입니다. 마태복음에는 다섯 개의 강화가 실려 있는데, 첫 번 것은 5-7 장까지에 있는 '산상수훈'(산상보훈)이고, 여기 10장이 예수님의 두 번째 강 화로서 그 주제는 '전도'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강화(13장)의 주제는 '천국' 인데 모두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네 번째 강화(18장)의 주제는 '교회'이고 , 다섯 번째(23-25장)는 '종말'입니다. 이 강화들은 모두 "그리고 예수께 서......하시기를 마치셨다"(직역)라는 똑같은 문구로 끝납니다(참고; 7:28, 11:1, 13:53, 19:1, 26:1).

 본장은 '전도'에 관한 강화이므로 복음전파에 관한 여러 가지 사항들이 자세히 언급됩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는 그 복음으로 인하여 핍박을 받게도 되며 심지어는 죽음의 위협을 받을 수도 있음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있습 니다. 그만큼 그 당시에는 복음전파가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복음에 대한 반 대는 이방인들에게서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같은 형제 심지어는 부모자식간 에도 복음으로 인하여 적대관계가 생길 것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일은, 가문이나 혈통 또는 인간적인 의지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떠한 위험과 핍박 또는 심지어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해도 복음은 반드시 전파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죄로 인해 죽은 사람들을 살려내 는, 생명의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도(복음)를 전하 시고 그 나라의 능력을 보이셨을 때 바리새인들은 오히려 그 복음과 복음의 능력을 부인하는 짓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저가 귀신의 왕을 빙자하여 귀신 을 쫓아낸다"(마 9:34)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까지도 능멸한 자들이 유대의 종교지도자로서 군림하고 있는 그 당시의 상황 속에서는, 동일한 복음을 전하는 에수님의 제자들에 대해서 반대와 핍박을 가하지 않을리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겪으신 그 사건(마 9:34)을 염두에 두시며 복음전파자에게 당연히 핍박이 있을 것임 을 말씀하셨음이 25절에 나타납니다[유대인들은 귀신의 왕을 '바알세불'(마 12:24; 눅 11:15 '바알세붑'이라고 하기도 함)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뜻은 ' (귀신들의) 처소의 주인' 또는 '배설물의 주인'으로서, 경멸하거나 악담 또는 욕지거리 할 경우에 그렇게 호칭했던 것입니다.]

아무리 거친 위협과 핍박이, 심지어 죽음이 복음을 전하는 자에게 임한다 해도, 두려움 때문에 복음전파를 멈출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 두려움을 주 는 실체보다 더 능력이 크시고 위대하신 분께서 명하신 일인 복음전파의 임무 (28절)가 무엇보다 중요하고 시급한 것이며, 또한 그 일을 시키신 분께서 자 기의 사역자들을 철저하게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그토록 능력이 크신 하나 님은, 그저 저 멀리 앉아 계시다가 큰 일들만 가금씩 둘러보시는 분이 아니 라, 세상의 모든 일을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29절).

 복음을 전파하노라면, 때로는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시다"라는 신앙고백 으로 인하여 위험을 당할 수도 있고 반면에 그러한 신앙고백을 하지 않음으로 심지어 자신의 목숨을 구할 수도 있는 상황이 벌어지게도 됩니다. 이러한 상 황을 예수님께서 염두에 두시고, 그의 제자들은 마땅히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는지를 간접적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32-33절). 복음은 참으로 좋은 것이 며 복된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복음을 막연히 그렇게만 생각하고,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다지 아쉽지 않은 것 정도로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복음을 받 아들이느냐 아니냐에 따라 생명이 좌우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실을 잘 드러내시기 위하여 구약의 선지자 미가의 말을 인용하셨습니다.[미가 선지자는 하나님의 재앙이 유다 백성에게 임하는 형벌 의 날에 대해 미가 7장에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1-6절을 읽으시고 어느 구절을 예수님께서 인용하셨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여기 인용된 말 씀은 단지 예수님으로 인하여 집안 식구끼리 불화하거나 싸우게 된다는 사실 을 알려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말씀은, 예수님의 오심은 구약의 미가 선지 자가 예언한 재앙과 형벌을 성취하시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지적해 주는 것입 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오신 이후로는, 그분의 구원의 복음을 거부하는 자 에게는 하나님의 재앙과 심판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 "내가 세상에......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34절)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 자신이 전쟁론자 라든가 평화를 원치 않는 과격한 혁명투사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 말씀은 예 수님 자신이 드러내시고자 하는 진리의 한 면을 부각하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심지어는 예수님의 제자들까지도 막연하고 또 피상적으로 '화평'(평화)을 이해했습니다. 식민지 상태로부터 벗어나 자주적인 국가를 만드는 것,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원만한 것, 물질적인 걱정 없이 넉넉 한 생활을 하는 것 등등이 곧 화평이며 이것을 예수님께서 이루실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적인 기대를 송두리째 깨뜨리신 것입니다. 그런 인간적인 관점에서 생각하자면, 예수님은 너무나도 거리가 먼 분이라는 것입 니다. 그분은 그들이 생각하는 '화평'이라는 개념과 정반대되는 '검'을 주 러 오셨음을 명백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 '검'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여 설명하십니다. 그것은 재앙이 요 형벌이요 심판인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진정한 화평을 위 하여 오셨습니다.

 이 화평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가로놓인 죄의 장벽을 허물고 끊어진 관 계를 연결시켜서 하나님과 인간을 화목시킴으로, 하나님께서 창조 때 의도하 셨던 상태로 인간과 온 피조계를 회복시켜 놓는 일(즉 구원)로 인해 누리게 되는 모든 축복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화평은 그분의 복음(그분께서 죄인을 구하시러 이 땅에 오셨다는 생명의 소식)과 그 복음의 능력을 믿고 받아들일 때 주어집니다. 그러나 그 복음을 거절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진노와 재앙이 죄의 값으로 임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은 구원과 심판을 동시에 성취시키는 사 건입니다. 이러한 이해를 갖게 되면, 34-39절의 말씀의 뜻이 더 명확하게 드 러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대상을 마음으로 신뢰한다는 것보다 훨씬 큰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그분께 자신의 생명을 내놓는 것이며 자신의 삶을 몽땅 내맡기는 것입니다. 마치 죄수가 처형을 받기 위 해 형장으로 갈 때 아직 목숨이 붙어 있으나 실상은 자기의 목숨이 자기 것 이 아닌 것과 같이, 예수님을 믿는 삶은 생명에 관한 한 바로 그러한 삶인 것 입니다(3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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