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시 23:4)

첨부 1


인간의 삶에는 항상 평탄하고 평안한 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때는 천지가 캄캄하고 앞길로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이와같은 절망적인 시 련이 우리에게 기대하지 않는 시간이 휘몰아 닥쳐올 때가 종종 있습니다.

절망적인 사건을 당할 때도 있고, 친구의 배반을 당할 때도 있으며 가정에 불화가 있어 절망에 처할 때도 있습니다.

 또한 불의의 사고를 당하여 어찌할 바를 모를 때도 있으며 원수의 공격을 받아서 상처를 입을 때도 있습니다. 이처럼 가지각색의 풍파가 몰아쳐와 사 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걸어갈 때가 종종 있는 것입니다.

 이럴 때면 "과연 주님께서 함께 계실까요, 너무나 외롭고, 답답하고 절망 적인 처지에도 주님이 나와 정말 같이 계실까요"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주님께서 우리와 늘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고 계 십니다.

 1. 사랑의 원리

사랑은 참으로 힘이 있고 강하면서도 실제로는 너무나 연약한 모습도 존재 합니다. 사랑은 사랑받는 사람이 상처를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주는 사 람이 손해를 보고 상처를 받고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 은 항상 상처입은 가슴 속에 있습니다.사랑을 하게 되면 많은 상처를 받게 됩니다.

 사랑 때문에 참으로 고통을 당하고 슬픈 삶을 살아간 할머니 한분이 계셨 습니다. 할머니는 그 추운날 담요 한장 덮어 쓰고 늘 교회와서 울면서 밤을 새웠습니다. 철야기도에 나와서 부르짖으며 기도합니다.

 어느날 아침에는 며느리가 찾아와서 따뜻한 죽을 끓여들이며 집으로 가시 기를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그 할머니와 제가 이야기해본 적이 있습니다.

 맏아들과 맏며느리는 큰 집을 가지고 잘 살며 할머니 방도 따로 꾸며 놓고 항상 어머니가 오시기를 기다리며 효도하고 있으며 둘째 아들도 늘 어머니 를 기다리는 자식이었습니다. 그런데 막내는 방탕자요, 술먹고, 타락하고, 가정을 돌보지 아니하고, 가족들에게 고통을 가져다 주는 자식이었습니다.

 그런데 할머니가 잘사는 맏아들 집이나 둘째아들 집에도 있지 아니하고 평소에 못살게 하고 술주정뱅이로 도박하고 가정을 떠나 돌아다니는 막내 아들집에 가서 생활하곤 했습니다. 맏아들 집에 가서 용돈을 받와서 항상 막내에게 다 갖다 주고 밤이면 집에서 자지 않고 교회에 나와서 담요 한장 덮어쓰고 울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할머니에게 조언을 해 드렸습니 다.

 "할머니 고생을 왜 사서 하십니까 맏아들이 잘 사는데 그 집에 계시지 술 먹고, 도박하고 방탕하고 돌아다니는 막내아들집에 계셔서 힘들어 하고 이 렇게 밤에 추운데 와서 고행을 하십니까" 그러자 할머니는 눈물을 주르르 흘리면서 저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때 저는 총각목사였습니다.

"목사님은 아직 자식을 낳아서 길러보지 못하셨죠 그러니 내 심정 모르지 요. 나도 맏아들 집에 가서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고 싶어요 그리고 둘째 아들 집에가서 손주들 재롱 보면서 편안하게 살고 싶어요.그런데 맏아들 집 에 있어도 둘째 아들 집에 있어도 이 막내 아들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습니 다. 아무리 좋은 자리에서 호의호식해도 마음이 고통스럽고 괴로워서 차라 리 막내 집에 와서 고통을 같이하고 괴로움을 당하고 또 교회와서 담요 한 장을 덮어 쓰고 이 막내를 살려 달라고 기도하는 이 시간이 오히려 내 마음 이 편안합니다. 막내가 올바르게 되기 전까지는 내가 편안한 마음을 가질 수가 없어야."

나는 그때 그 말을 듣고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가고 저도 자녀를 낳게 되고 자식들을 사랑하게 되니까 그때서야 그 할머니가 이 해되었습니다.

사랑은 고통당한 자와 함께 고통을 나누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 때문 에 고통당하시며 인간에게로 독생자를 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부귀 영화 공명을 버리서고 부자와 권세 있는 자와 능력있는 자와 함게 있지 아니하시고 언제나 죄지은 사람, 세리, 창녀들, 병든 사람, 버림받은사람, 가난한 사람, 비천한 사람과 함께 계셔서 그들의 고통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고통당하는 인간을 외면하고서는 마음에 평안을 가질 수 없었습 니다. 예수님을 본 사람은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서 하늘과 땅과 세계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다 지으셨습니다. 예수니은 위 대한 창조주이십니다. 그를 둘러 진치고 찬미하며 노래했었습니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 영광을 버리시고 보좌를 떠나서 이 답답하고 고통스 럽고 괴로운 세상에 자원해서 내려오신 것은 하나님 자체가 사랑이기 때문 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절대로 버림받고, 병들고 가난하고, 헐벗고,추악한 사람과 함께 거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는것입니 다.

 예수 그리스도

성경은 말씀하셨습니다.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 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마태복음27:42).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고통 당할 때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모여서 침을 뱉고, 손가락질 하며 조롱하였습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을 구 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창녀를 구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바리새인, 서 기관, 세리들조차도 예수님께서 구원하는 능력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병든 자가 일어나고 죽은 자가 살아났으며 귀신들린 자들이 놓여남을 받고, 배고 픈자에게 양식을 주고 풍랑이 잠잠해지는 기적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그리스도를보고 그들은 조소하였습니다. " 저가 남은 구원하였는데 왜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나, 왜 자기는 십자가에 못박혀 몸찢고, 피를 흘리며, 몸부림을 치고 있는가, 남을 구원할만한 구주 같으면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그러면 우리가 너를 믿겠다"고 말한 것입 니다.

 왜 예수님이 시자가에서 내려올 수 없었습니까.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성경은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느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겠느냐"(눅 15:3-4)고 기록하고 있습니다.한 사람의 죄인이 있을 때, 한 사람의 병든 사람이 있을 대, 한 사람의 빈민이 있을 때, 한 사람의 소외되고 가난하고 고통당하는 자가 있을찌라도 예수님은 그 한 사람 때문에 십자가에서 내려 올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남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고, 대가를 지불하더 라도 고통을 당하셨지 그것을 피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사랑으로 모르는 이기주의적인 마귀의 종들은 예수님께서 죄인을 위하여 죽으시는 것을 결코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 안에 있는 사랑의 힘에 이끌려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희생 제물로 자기를 내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모진 고통도 사랑 때 문에 참으시고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은 것입니다. 열 두 영이나 되는 천 사를 불러서 예수님은 내려 올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려오려 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 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직에 맞음으로 우리 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야 웨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켰도다"(이사야53:4-5)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강한 자이면서도 그렇게 무력하게 십자가에 매달려 있었던 것은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죄의 대가를 갚아야만 했습니다.

우리의 죄와 불의는 갚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와 불의는 갚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저주를 짊어져야되고, 사망을 청산해야 하기 때문에 강한 자가 약하게 되고 능력있는 자가 무능력하게 되고 지혜로운 자가 미련한 것 같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 때문에 우리의 짐을 짊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로마서 5 장8절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 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3. 지금도 고통당하고 계신 하나님

우리들은 하나님을 평안하고 기쁘고 영화스럽고 아주 찬란하게 생각하는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고통을 당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사 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항상 토오을 당합니다. 사랑은 항상 상처를 입습니다. 사랑은 항상 괴롭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고통당하는 사람이 있는 이상 사랑은 그 고통당하는 사람의 곁에 함께 있어서 그 고통을 함께 나누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계셨을 때 하나님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그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몸부림치고 함께 울부짖고, 함께 고난당 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하셨습니다.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찌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하나님이시라 사망에서 피함이 주 야웨께로 말미 암거니와 "(시편68:19-20).

 이 순간에도 질병의 짐, 슬픔의 짐, 소외된 고통의 짐 그리고 가난의 짐, 배고픔의 짐을 하나님은 함께 짊어지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 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무거운 짐을 함께 지고 성령을 보내시고 천사를 보내셔서 우리를 돕기 위해서 애를 쓰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님은 지금도 가슴 아프고 고통당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아프리카 르완다의 비극은 하나님 가슴에 피멍을 맺히게 했고 세계 도처에 서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려 죽고, 처참하게 살해당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은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인간의 죄악과 몰인정과 무자비와 살상 때문에 하나 님은 이 순간에도 고통당하고 계신 것입니다. 구 유고슬라비아의 세르비아 와 보스니아 크로아티공화국의 내전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고 헐벗고 굶주린 것을 보고 하나님은 울고 계십니다. 이스라엘과 아랍의 분쟁 을 보고 고통을 당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북한의 수재로 말미암아 헐벗고, 굶주리고, 수많은 사람이 죽어간 북한동포들 때문에도 하나님은 이 시간에 고통 당하고 계신것입니다.

이처럼 울고 계시고 고통당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사 람들은 이렇게 질문할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그렇게 고통당하느냐 전지전 능 무소부내하신 하나님께서 권세와 능력으로 순식간에 구원해 버리면 되지 무엇 때문에 그걸 가지고 고통당하느냐"고 반문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구원의 길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 아들 예수님을 보 내주셔서 이 세상의 고통을 예수님게 전부 다 담당시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구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28)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랑이시기 때문에 그 짐을 다 맡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대가를 지불하시고 짐을 맡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헛된 곳에서 구원이 길을 찾아 방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은 그들 때문에 고통당하십니다. 오늘날 교회가 고통당하고 슬퍼하고 죄짓 고 버림받은 세상에 무관심하고 성도끼리만 모여서 찬송을 부르고 즐거워 하고만 있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 속에 있으면 바울 선생이 말한 것 같이 헌신의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 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린도후서5:13-14)라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은 죄인, 미친사람, 병든자, 소외된 자, 가난한 자, 버림받은 자들에 게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몸부림을 쳤습니다. 그것이 바 로 하나님의 심정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성장이 정체된 것은 교회의 사랑이 식어졌기 때문인 것입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식어지면 하나님이 촛대가 다른 곳으로 옮겨진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 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속에 받아들여서 죽어가 는 이 세대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지고 가난하게 헐벗고 굶주리고 음 지에서 허더이는 그곳을 비춰야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녀가 사망의 음 침한 골짜기를 다닐 때 그대로 버려두고 보좌에 앉으셔서 모른 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다윗처럼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 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편23:4)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하나님께서 결단코 모른척 할 수가 없습 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 선생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 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란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 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 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 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 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로마서 8:35-37)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과거에도 우리를 구원하셨고 지금도 우리와 같이 계셔서 구원하 시고 장래에도 우리를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랑인 것 입니다. 사랑은 죄인의 짐을 져야 되고 병든 자의 몸을 져야 되고 슬픈 자 의 슬픔을 동참해야 되고 가난한 자의 가난을 함께 참여해야 되고 죽는자의 죽음과 함께 해야 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