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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광야에 들리는 구원의 노래 (사 35: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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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이스라엘은 모름지기 다시 위기에 들어선 것이 아닌가 하고 느껴집니다. 아랍 국가들과 대항하여 싸우는 지도 벌써 칠 년이 넘어섰습니다. 사실상 이스라엘은 300대 1이 넘는 인구 비례를 가진 원수들과 더불어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지 않고, 그러나 굴하지 않고 지금도 싸우고 있습니다. 7년전 저 유명한 6일 전쟁이 터졌을 때 미국을 비롯한 각 나라에 흩어져서 유학하던 아랍 국가들의 유학생들은 본국으로부터 소환장을 받고서는 모두 도피하고 귀국하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이때에 이스라엘 유학생들은 앞을 다투어서 학교 생활을 중지하고 본국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누가 그들에게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당신은 돌아가서 입대하여 군인으로 나가면 죽을런지도 모르는데 어찌하여 귀국하느냐고 하였더니 한 이스라엘 학생이 대답하기를, "이후에 누가 묻기를 1967년에 너는 어디 있었느냐고 물으면 나는 그때 무엇이라고 대답하겠는가"라고 하더랍니다. 부끄러운 향락보다 영광의 고난을 택하겠다는 심사라고 생각됩니다.
오늘 무엇이 이스라엘을 이처럼 강하게 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곧 믿음입니다. 본문 말씀에 나타난 것과 같은 기적을 믿고 있습니다. 성경이 보여주는 예언을 믿고 있습니다. 이사야 34장과 35장은 해방의 노래로 유명한 장입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가사에는 많이 나타나곤 합니다. "황무지가 장미꽃같이 피는 것을 볼 때에", 또는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같은 찬송들입니다.
이 노래는 물론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올 것을 노래하는 위대한 신앙과 진실한 소망에서 부른 노래요, 찬송입니다. 따라서 근본적인 뜻에서는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환상이요, 영원한 계시이며 하나님의 가장 신실한 예언이었던 것입니다. 이 성실한 해방을 말해 주는 언약은 이스라엘 백성이 70년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올 것을 예언하였고, 또 그대로 성취된 것이 사실입니다만 이 예언은 결코 그 하나의 사건에 머문 것이 아니라고, 계속적인 현재 사건(Ever Present)으로 오늘 그들의 생애 안에 "여기에, 오늘"(Here and Now)의 역사 안에 성취되고 있음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을 승리하게 하는 힘의 근본인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자유케 하는 약속"을 굳게 믿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1절에 "광야에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같이 피어 즐거워하며……"라고 하신 말씀을 문자 그대로 믿고 오늘의 이스라엘은 2,000년간 사막으로 버려졌던 땅을 개간하여 과수원을 만들고 울창한 수림을 만들었습니다. 사실상 년중 비 한번 없는 메마른 땅과 사막을 옥토로 만들어서 이제는 엄청나게도 그 땅에서 농업국이 되어 세계 최고의 국민소득을 자랑하고 있지 않습니까 성경적 예언은 그대로 믿고 이 환상을 오늘에 실현시킨 것입니다.
본문 말씀은 한 민족의 민족사적인 예언과 성취의 사건만이 결코 아니라 그보다 더 깊은 곳에 본 뜻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본문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완성될 그리스도의 왕국을 뜻한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이제 그 본문에 그려진 낙원을 보십시다.
광야와 사막에 백합이 피고, 광야에서 물이 솟고, 사막에 시내가 흐르고,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되고,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되고, 사랑이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고 거기 대로가 생기며 거기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도 없다고, 또한 소경이 눈을 뜨고, 귀머거리의 귀가 열리고,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라. 이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입니까 이것이 자유의 땅이며 낙원이 아니겠습니까 굶주림이 없고, 병자가 없고, 눌린 자가 없고, 사자(폭군)도 없으며 자유와 평등 그리고 풍요함이 있는 곳, 그곳이 낙원이 아니겠습니까
세계 제 2차 대전의 종식과 함께 이 세계에는 평화가 잠시 온 것 같으나 실상은 세계 전쟁은 계속되고 있는 셈입니다. 역사가의 말에 의하면 혁명이 300번이나 있었다고 합니다. 815이후에 독립된 나라 중에서 그 무서운 혁명을 겪지 아니한 나라는 오직 이스라엘뿐이라고 합니다.
세계는 더욱 더 암담해 가고 있다고 봅니다. 유토피아가 아니라 유토피아의 세계가 오고 있습니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만이 무서운 줄로 알았고 또 흉년과 재난 그리고 혁명(revolution)만이 무서운 줄로 알았더니 그것이 아닙니다. 이것들이 다 없어도 공해로 인해서 인류는 스스로 망하게 되었고 또 자연자원의 고갈로 인하여 인류는 소멸될 수밖에 없는 형편에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어떤 면으로 보아도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참으로 암담하고 절망적인 세대를 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면 본문에 나타난 유토피아 같은 낙원에 대한 예언은 단순한 환상이란 말입니까 하나의 허망한 꿈이란 말입니까 결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은 여전히 오늘도 진리인 것입니다. 근본 문제는 어디에 근거하고 이 같은 환상을 보고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누가 이 일을 이루시며 누구에게 이루시는가 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이는 어떤 땅에 있는 변화나 조건에 관계된 바가 결코 아닙니다. 역사를 초월하여 존재하시며 역사의 주인이시며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께 근거한 환상이며 꿈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수하시며 하나님이 이 일을 있게 하시며 하나님께서 이 일을 허락하시며 하나님께서 그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이를 친히 성취하신다는 근본적인 사실을 기억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이만이 역사의 주인이시요, 만유의 주재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헛된 노력을 비웃고 계십니다. 그는 인간들이 자기 이름을 위하여 자기들 스스로의 안정을 위하여 스스로를 높이며 쌓아 놓은 바벨탑 건설 같은 교만한 건설을 결코 버려 두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어리석음과 하나님을 부인하며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앙적인 황당한 계획을 결코 묵인하지 아니하십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인정하며 그 앞에 무릎을 꿇게 하십니다. 반드시 이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수하십니다. 하나님의 창조적인 역사 안에서만이 생명적인 사건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의 창조적인 권능과 구속적인 사랑 안에서만이 소망과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누구에게 이를 이루시는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적인 아름다운 세계는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며 여기에 들어갈 자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이루실 때 누가 들어갈 수 있을 것이며 또 누가 소유할 것인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좀더 나아가서는 하나님께서 누구를 통하여 이일을 이루실 것이며 누구에게 주실 것인가 하는 문제인 것입니다. 본문 8절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먼저는 깨끗지 못한 자는 그 길도 지나지 못하겠고, 다음은 우매한 자는 그 길을 범치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깨끗하다함은 애굽에서 나오는 구속적인 역사를 뜻하며 몸은 애굽에서 나왔으나 아직 애굽에서의 죄된 생활에서 스스로 벗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옛 죄된 생활에 젖어 있는 죄의 노예적인 생활을 뜻하는 것입니다.
우매한 자는 두마음을 품어서 바른 결단이 없는 자를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생명의 길은 모르며 진리를 바로 깨닫지 못하고 자기의 저주스러운 운명을 알지 못하는 탓에 스스로 멸망의 길을 가고 있는 자를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도 그를 죽이는 무리를 모르는 자라고 인정하였습니다. 그 사실이 얼마나 무서운 죄라는 것과 그리스도를 죽이는 자에게 내려질 형벌과 저주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분명히 알기만 한다면 그 누가 그같은 길을 갈 수 있겠습니까 결국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가장 큰 어리석음이며, 자기의 운명을 모르는 것이 가장 비참한 무지인 것입니다. 더욱이 생명의 길에 서서 그 길을 즐거운 마음으로 걷지 못하고 뒤돌아보는 나약한 마음은 더욱 어리석을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즉 구속함을 입은 자와, 속량함을 입어서 정결케 되며 위로의 지혜를 얻은 자만이 낙원을 소유케 되는 것입니다. 낙원으로의 길을 걷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28년 전에 고귀한 자유를 주셨습니다. 이는 큰 은혜요, 놀라운 선물이며 최대의 축복이었습니다. 모든 축복은 귀하되 이를 받을 그릇이 없으면 무효이며 감당할 능력과 지혜가 없으면 헛된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에게 주신 자유와 해방의 큰 축복을 우리는 감당하지 못하였고 잘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어찌하여 지키지 못했습니까 먼저는 본문대로 깨끗하지 못했습니다. 애국심에도 티가 있었고, 나라를 위하는 일에 너무나도 검은 사심이 있었습니다. 나라를 위하여 나라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하여 나라를 사랑하였던 것이 사실입니다. 욕심, 죄, 사악, 고집, 교만 그리고 불신앙적인 이기심에 사로잡혀서 그 귀한 기회를 다 놓쳤습니다. 너무나도 더러운 마음이었으며 너무나도 손에 피가 많이 묻어 있었습니다. 너무나도 악에 오염된 인격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우리들이 어찌 그 귀한 자유를 보전할 수 있었겠습니까 마침내 이 귀한 자유를 돈과 권력과 향락과 분쟁 그리고 무질서와 혼돈에 다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우매하였기 때문입니다. 자유를 위하여 얼마나 많은 희생이 지불되어야 하며 번영을 위하여는 얼마나 많은 대가가 지불되어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권리를 위하여 지불되어야 하는 의무조차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권리와 자유와 번영만은 누리고자 하였으니 그 얼마나 우매한 짓이었습니까 심지어는 죽는 길과 사는 길, 멸망과 생명마저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외국에 있을 때 외국인들이 625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공산주의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종종 물어왔습니다. 어째서 동족끼리 싸우느냐고. 이때마다 제일 답답했던 경험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같은 민족끼리 싸우고 죽였습니다. 다른 민족의 힘을 빌어서 우리 민족을 죽여야 했습니다. 이 동족상쟁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었습니까 싸우면 다 죽습니다. 그래도 싸워야 했습니다.
어리석음이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성경적으로는 불의한 자, 교만한 자, 거짓된 자, 하나님을 모르는 자를 어리석은 자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어리석은 위치에 있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직 깨끗한 자, 하나님을 아는 지혜가 있는 자, 속량함을 입은 자만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아름다운 세계로 들어갈 것입니다. 불의와 부정과 거짓은 힘의 원천을 마르게 합니다. 따라서 고집과 독선, 아집과 독재는 지혜의 원천을 마르게 합니다.
한국 민족이여, 진정 살기를 바라며 번영을 바라는가 광야에서 꽃이 피고 사막에서 물이 나는 기적을 바라는가 그러하거든 이제 곧 깨끗하라! 마음을 정결케하며 손을 깨끗히 하라! 그리고 스스로 겸비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와 지혜를 얻으라. 멸망의 길에서 생명을 찾지 말라!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힘입어서 속량을 받으라. 이 생명의 길에 서면 반드시 어려움 속에서 빛을 보며, 파멸의 구덩이에서 건설을 이루며, 절망의 우물에서 영원한 소망의 샘물을 긷게 될 것입니다.
본문 10절을 다시 봅시다.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 머리 위에 영원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로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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