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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소돔과 고모라의 최후 (창 18: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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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가까이 나아가 가로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그 성중에 의인 오십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하시리이까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만일 소돔 성중에서 의인 오십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경을 용서하리라. 아브라함이 말씀하여 가로되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 오십 의인 중에 오 인이 부족할 것이면 그 오인 부족함을 인하여 온 성을 멸하시리이까 가라사대 내가 거기서 사십오 인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또 고하여 가로되 거기서 사십 인을 찾으시면 어찌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사십 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 주여, 노하지 마옵시고 말씀하게 하옵소서. 거기서 삼십 인을 찾으시면 어찌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거기서 삼십 인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내가 감히내 주께 고하나이다. 거기서 이십 인을 찾으시면 어찌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이십 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말씀하리이다. 거기서 십 인을 찾으시면 어쩌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십 인을 인하여도 멸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즉시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

예루살렘 성지를 순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꼭 한번쯤 방문하고 싶어하는 아주 삭막한 바다가 있습니다. 이름하여 사해(死海)죽음의 바다입니다. 바다라고 하지만 실은 호수라 해야 옳습니다. 바다 수면보다 394미터나 낮은 하나의 큰 호수입니다.
길이 80킬로미터, 너비 16킬로미터가 된다고 하니 참으로 엄청난 크기입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호수에는 물 속에 어떠한 물고기도, 하다못해 피라미 새끼 한 마리도 살 수 없다고 합니다. 지독하게 짠 소금물에 절여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해 위를 날아가는 새들조차 먹이를 얻지 못해 한 마리도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름 그대로 죽음의 바다, 무서운 바다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볼 때에는 이 사해가 성경 말씀의 크나큰 증거입니다. 저 옛날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받아 멸망한 소돔과 고모라 성그 옛 성터라는 산 증거로 '죽음의 바다'가 우리들 눈앞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본디 아름다운 성이었습니다. 온 땅에 물이 넉넉하여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다고 합니다(창13:10). 땅이 비옥하여 농사가 잘되고, 경관이 푸르고 아름다워서 마치 에덴동산과 같았다는 것입니다. 그처럼 아름다운 성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침내 사해가 되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망한 것은 경제 문제로 해서가 아닙니다. 정치문제로도 아닙니다. 문화나 경영 문제로 해서도 아닙니다. 문제는 도덕적 종교적 죄악의 문제였습니다. 성경이 증거하는 바를 봅시다. "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창 13:13)." 사람이 악해졌다고 합니다. 자연이 악해진 것이 아니라 사람들 하나 하나가 악해지고 타락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6장 3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홍수로 진멸하실 때, 그때의 타락한 인간상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사람의 사람됨은 하나님의 형상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얼마나 남아 있는가, 얼마나 깨끗하게 살아 있는가, 얼마나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는가여기에 사람됨의 가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의 형상은 온데간데없고 육체만, 그 동물적인 고깃덩이만 남았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사람처럼 악한 동물도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서양 사람들은 개 키우기를 무척 좋아합니다. 어찌 보면 너무 지나치다 싶을 정도입니다. 상점마다 개를 위한 먹이가 따로 나와 있지를 않나, 미장원에 데려가지를 않나, 자동차에 태우고 다니지를 않나…… 뿐입니까 죽으면 비석을 세워 주고, 주인이 먼저 죽을 때에는 개한테 유산까지 남겨줍니다. 도대체 개를 개 취급하지 않고 사람보다 더 높게 대우합니다. 한번은 너무 하는 것이 아니냐고 제가 그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대답이 기가 막힙니다. "개는 결코 배신하는 일이 없다"이것이 저들의 대답입니다. 사람은 아무리 공을 들여도 마지막에는 나를 배신하고 후회하게 만들지만 개한테는 적어도 그런 배은망덕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답지 못한 사람을 가리켜 개만도 못하다고 합니다. 얼마나 자존심 상하는 이야기입니까 사람이 개만도 못하게 된 지도 오래입니다. 물어뜯지 않는다고 장한 일입니까 그것을 두고 개보다 낫다고 할 수 있습니까 천만에요. 인간의 타락상이란 여러분이 상상도 못할 정도입니다. 더럽고 치사하고 사악하고 썩어문드러진 것이 인간입니다. 그 간사하고 교활함이란 말로는 표현할 수 없습니다. 동물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성적 타락이 인간 세계에 만연되어 있습니다. 요새는 죄를 지어도 참으로 무섭게 짓습니다. 지능적으로 죄를 짓습니다. 특히 소돔 사람들의 죄는 '소도나이트(sodomite)' 라고 해서 음란죄의대명사가 되어버렸습니다. 더러운 음란 행위, 그 중에서도 남색자(男色者), 수간자(獸姦者)를 '소도마이트'라고 합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타락이 극에 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더는 참으실 수가 없어 유황불을 내려 진멸하셨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죄 때문에 망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좀더 깊이 생각해보면죄 때문에 망한 것이 아닙니다.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망한 것입니다. 어떤 죄를 지었더라도 회개하고 돌아오면 용서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소돔과 고모라는 끝까지 회개치 아니함으로 망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소돔과 고모라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서 이르노니 심판날에 소돔 땅이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마 11:24)." 회개치 아니하면 너희도 소돔과 고모라처럼 되리라, 죄 때문에 망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가없기 때문에 망한다는 것입니다. 끝내 회개가 없는 것-이것을 가리켜 성경은 악하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회개하기는커녕 오히려 말씀을 전하며 회개를 외치는 선지자를 죽이고, 하나님의 종을 핍박하는 그 교만이 바로 심판의 근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회개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경을 보면 롯이 사위들에게 심판의 메시지를 전할 때에 그들은 농담으로 여겼다고 했습니다(창 19:14).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 심판하신다 해도 농담으로 여깁니다. 그럴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불신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불신합니다. 끝내 믿지 않고 부인합니다. 그러니 이제는 어쩔 수없이 증거를 보여주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의 사악함과 교만함, 그리고 그 완악함과 허망됨을 마침내 회개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40일 후에 망하리라던 니느웨 성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시다시피 그들은 요나 선지의 메시지를 듣고 회개함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뿐입니까 개인적으로 국가적으로 마음을 다해 뉘우치고 회개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죄라도 용서하시고, 저들에게 심판 대신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끝까지 회개치 않아 망할 수 밖에 없었던 소돔. 고모라 성과는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여기에서 소돔과 고모라 성이 망한 까닭을 더 깊이 생각해 봅시다. 죄 때문만도 아니요, 회개 없기 때문만도 아닙니다. 의인이 없어서 망했습니다. 이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의 최후가 가지는 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진멸하시려 할 때에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사랑하는 조카 롯이 살고 있으니 기도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기도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유의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 같으면 아마 이렇게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제 사랑하는 조카 롯을 구원해 주십시오." 아브라함은 감히 그런 말을 하지 못합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그 성중에 의인 오십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하시리이까""삼촌이라도 그렇고 조카라도 그렇고 죄인이면 마땅히 망하는 것이 도리입니다. 제 아들이라도 죄인이라면 망해야겠지요. 그러나 의인과 악인을 함께 멸하심은 하나님의 공의에 합당치 않을 줄로 압니다. 하나님, 그 성에 의인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고 겸손하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처음에 제안한 숫자 50은 도대체 어느 정도의 비중이 있는 수치(數値)일까요 그 당시 소돔과 고모라 성의 인구는 약 오만 명으로 추산됩니다. 그러므로 오만대 오십은 대략 천 대 일입니다. 아브라함은 감히 묻습니다. "오만 명 중에서 천분의 일오십명이 의인이라면 하나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내, 오십 인을 보아서 오만 명을 용서하마.
어떠한 죄를 지었더라도 다 용서하마." 이 얼마나 큰 복음입니까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시원스런 대답을 듣고 나서 아브라함은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아무래도 오십 명이안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염치 불고하고 슬그머니 또 묻습니다.
"하나님, 죄송하지만 오십에서 다섯이 모자란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사십오 명이라도 용서하마." "사십 명이라면……" "괜찮다." 삼십 명, 이십 명, 마침내 열 명까지 내려갑니다. 아브라함이 마지막으로 아룁니다.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말씀하리이다. "거기서 십 인을 찾으시면 어찌하시려나이까내가 십 인을 인하여도 멸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허락을 받고 아브라함은 이제 됐다 싶었던 모양입니다. 조카 롯과 그 처, 두 딸과 사위들…… 이렇게 세어 보면 그러구러 열 명이야 못 될까 싶었지요. 그러나 그 열 명이 없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그래서 망한 것입니다. 죄 때문이 아니라 의인이 없어서 망한 것입니다.
의(義)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악인을 기준으로 하지 않으시고 의인을 기준하십니다. 악인의 수를 세시지 않고 의인의 수를 세십니다. 다수의 악인보다 소수의 의인에 더 관심을 가지시는 하나님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굉장한 말씀인지 모릅니다. 여러분, 사람들을 가만히 보십시오. 서로 많은 장점은 보지 않고 단점 하나에 눈을 크게 뜹니다. 그리고 그 단점 하나로 온 인격을 평해 버리는 수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품은 그렇지 않습니다. 장점 하나가 있으면 이것을 크게 보시고, 단점들은 다 눈감아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람도 사랑할 때에는 그런 것 같습니다. 친한 친구 하나가 결혼을 하는데 저는 피치 못할 사정으로 그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그후 그 친구 집에 놀러가서 처음으로 신부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결코 예쁜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좀 못생긴 편에 속한다고 할까. 그래 저 제가 친구에게 넌지시 물어보았습니다. "자네, 어디가 마음에 들어서 결혼했는가" 친구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조금만 기다려보라는 것입니다. 조금 후에 그 신부가 찻잔을 들고 들어왔습니다. 그것을 상위에 내려놓고 돌아서 나가는데 친구가 바로 저것이라고, 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보니 그 신부의 뒷모습이 참으로 아름답지 뭡니까 그제야 저도 '아하!' 하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어딘가 한군데라도 아름다운 점이 있다면 우리는 그 쪽을 보고 아름답지 못한 나머지 뒷면은 다 덮어 줄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어줍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은혜로우신 하나님이요, 자비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입니다. 아주 작은 것이라도 의로운 것이 하나 있으면 그것을 보시고 전체를 사랑해 주십니다. 그래서 오만 명 중의 열 명이라도, 의인 열 명만 있어도 그 열 명을 보고 오만 명의 죄를 사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어찌하면 좋습니까 그 열 명마저도 없으니, 이제 망하는 도리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신명기 5장 7절 이하를 보십시오.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안식일을 지키고 우상을 섬기지 않으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천 대까지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나 또한 당신의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벌을 주시겠다고도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요,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대하여서도 죄는 죄대로 있지만 의인 몇 사람만 있으면 그 성을 사하리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소돔과 고모라가 최후를 맞은 것은 의인 열 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잊지 마십시오. 사실, 나라도 그렇습니다. 가끔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를 여행해 보면 우리 나라는 너무 잘산다싶습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가 이만큼 경제적으로 성장하고 발전한 것이 어디 우리 모두가 똑똑해서입니까 알고 보면 단지 몇 사람의 힘입니다. 고속도로도, 정유공장도, 갖은 비난을 다 받으면서 건설되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반대했으나 현명한 몇 사람이 뜻을 굽히지 않았기에 우리가 이만큼이라도 살게 된 것입니다. 결국 몇 사람정치가 몇 사람, 경제인 몇 사람, 그 몇 사람이 바로해 주면 한 나라 전체가 혜택을 입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은 말합니다. '미국은 칠백 명으로 좌우된다.' 적어도 경제, 정치, 종교,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칠백 명만 바로 서 있으면 나라가 복을 받을 수 있다고 외칩니다.
저는 60년대 초에 약 5년 간 미국에서 유학을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1년에 몇 차례씩 그곳에 가보면 제가 공부하던 때와 달리 점점 타락해 가는 모습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미국이라는 곳이 점점 더 무서운 사회가 되어 갑니다. 폭력과 마약이 들끓고 사악함이 난무합니다. 그래도 저는 그 사회의 앞날을 절망적으로 내다보지는 않습니다. 그 중에서도 간혹 신앙의 사람, 청교도적인 깨끗한 믿음의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아,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 때문에 복을 주시는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얼마전 시카고에 갔을 때도 저는 아주 흐뭇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시카고에 '윌로우크릭 커뮤니티 처치'라는 교회가 있습니다. 딜레이 하이벨 목사님이 10년 전, 24세 때 세운 교회입니다. 젊은 나이에 목사가 되어, 그저 뜻맞는 몇 사람과 함께 시작한 교회인데 만 십 년만에 현재 이천 명의 교인이 모이고 있습니다. 수요일 저녁에 성경공부가 있다고 해서 가 보았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삼천 오백 명이 모인 것입니다. 한쪽에서는 마약과 폭력으로 광란하는 젊은이들이 있는 반면, 두꺼운 성경과 노트를 가지고 와서 한 시간 반 동안 진지하게 성경을 공부하는 젊은이가 삼천 오백 명이나 있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물론 미국 전체의 인구를 놓고 보면 삼천 오백이란 극히 소수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사람들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쓰는 몇 사람을 보고 미국 땅에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5장 1절을 봅시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 하나님은 소수의 의인, 마지막으로 그를 찾고 계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최후는 이 의인 몇 사람이 없을 때에 맞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의인의 수와 질입니다.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지금 소돔과 고모라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 같지만 실은 그것이 아닙니다. 롯을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입니다. 차마 조카의 이름만을 입에 올릴 수가 없어,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이 불가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어찌 그의 마음을 모르시겠습니까 창세기 19장 29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보내셨더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심정을 다 알아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기도에는 끈기가 부족했습니다. 의인 열 명까지는 잘 내려왔는데 거기에서 더는 나아가지를 못합니다. "내가 십 인을 인하여도 멸하지 아니하리라"하시는 하나님의 대답을 듣고서 아브라함은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의인 열 명도 없으면 망할 수밖에. 망해도 싸지.' 그리고 돌아섰을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아브라함이 한 번 더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정해 봅시다. 아브라함이 모세처럼 기도했다면 어떠했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우상을 섬기며 광란할 때 하나님께서 모세한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출32:9-10)." 모두 멸하고 모세의 후손만 가나안 땅을 밟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럴 때에 보통사람들 같으면 "아이고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다릅니다.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출 32:32)"'이 백성 망하는 것을 보면서 살고 싶지 않습니다. 차라리 내 이름을 생명 책에서 지워 버려주십시오' 하는 간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진노를 푸시고 그 백성을 긍휼히 여기시는 것을 성경에서 봅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 앞에 모세처럼 기도하든지, 아니면 "하나님, 제게 한번 더 기회를 주십시오. 제가 소돔과 고모라에 들어가서 전도해 보겠습니다" 하고 간구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이 없습니다. '에잇, 의인 열 명도 없으면 망해라! 나는 모르겠다' 하고 만 것 같습니다. 그래서 결국 소돔과 고모라는 망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13장에는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가 있습니다.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습니다. 3년을 기다려도 열매가 열지 않으므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13:7)." 그럴 때에 과원지기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1년만 더 시간을 주십시오. 제가 물을 주고 가꾸어 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이 조카를 염려했지만 소돔과 고모라를 사랑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과원지기처럼 선뜻 "제게 기회를 주십시오" 하고 간구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제 롯에 대하여 이야기합시다. 베드로후서 2장 7절에서는 롯을 '의로운 롯'이라 합니다. 그렇습니다. 롯은 의로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죄악이 가득한 성으로 인하여 고통을 당합니다. '이렇게 되면 망하는데…… 이러면 안 되는데, 안 되는데……' 하면서도 그 더럽고 악한 곳을 떠나지 못해 우물쭈물 소돔과 고모라에 남아 있습니다. 또한 이 성이 망하리라고 하는 천사의 말을 듣고'그렇지, 때가 왔구나, 망할 수밖에 없구나' 하고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받아들입니다. '이 성을 떠나라' 할 때에 빈 몸으로, 하나님의 말씀만 믿고 떠나는 믿음도 있습니다. 그리고 롯에게 하나의 의(義)가 있습니다. 작은 촛불같은 의손님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것은 전에 아브라함과 함께 살면서 배운 좋은 습관일 것입니다. 낯선 손님이 온 것을 보고 영접하며 집으로 모십니다. 손님을 위해 자기 딸을 나쁜 무리에게로 내보낸 것은 잘못이지만 어쨌든 손님을 보호하려고 애쓰는 그 마음 하나만은 갸륵하다 할 만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너희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막9:41)." 작은 일 하나에도 하나님께서는 큰 복을 내리시겠다고 하십니다. 롯이 가족이나 자기 생명보다도 손님을 더 귀히 여기는 모습이것이 마지막 한 가닥 그의 의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롯이 구원을 받습니다마는 한 가지 유감스러운 대목이 있습니다. 아내와 사위들을 잘 통솔하지 못하여 결국 저 한 사람 구원하는 것으로 끝난 것 말입니다. 그의 의는 미흡합니다. 겨우 자기생명 하나 건질 정도의 의밖에 없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건질 만큼의 의인은 되지 못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고 다른 사람을 구원할 만큼의 의는 가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롯의 아내는 어떠합니까 모처럼 남편을 따라 소돔과 고모라에서 벗어나기는 했으나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결과로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피동적 신앙, 나약한 신앙, 따라다니는 신앙이 고작이었기에 그는 뒤를 돌아본 사람모처럼의 구원받을 기회를 완성치 못한 불행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의인을 생각합니다. 그는 있었어야 했으나 없었고, 찾았으나 찾지 못한 사람입니다. 모세 같고 아브라함 같은 사람, 소돔과 고모라를 사랑해서 그 성과 함께 생명을 바치겠다고 하는 그 의인 한 사람이 있었다면 하나님은 그 성을 불쌍히 여기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의인이 없습니다. 그래서 소돔과 고모라는 망했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 시간에는 세상이 어떻고, 사회가 어떻고를 이야기하지 맙시다. 폭력, 무질서, 비윤리성……모두 괜찮습니다. 모든 것이 이대로 있더라도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과 소망교회의 이만 명 신도만 신앙 가운데에 바로 설 수 있다면 충분합니다. 서울이 구원받을 수 있고 우리 민족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잊지 마십시오.
특별히 이 본문을 좀더 깊은 차원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이 아무리 허물이 많고 부족함도 많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무엇 한 가지, 그 의로운 것이 있으면 하나님께서는 전인격을 사랑하시며 나머지 허물을 다 덮어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아시다시피 아브라함은 허물이 많은 사람입니다. 휘청휘청하다 쓰러질 때도 많았고, 실수도 많았습니다. 그래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순종, 그 믿음 하나를 의로 여기시고 나머지 부분을 다 덮어주셨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아브라함한테는 의인 열 명을 대신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이삭한테는 겸손이 있었습니다. 야곱한테는 진실, 간절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또 모세는 어떻습니까 허물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천하의 그 누구보다도 온유한 사람이라고 성경이 말씀합니다.
그의 온유 때문에 하나님께서 모든 허물을 덮어주셨습니다. 또 한사람, 다윗을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는 실수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정직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귀히 여기시고 모든 잘못과 실수를 용서하셨습니다. 우리는 의인 열 명과 같은 것,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의, 그 믿음의 의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참으로 무서운 세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후천성면역 결핍증(에이즈)에 대한 1989년 현재의 통계를 보십시오. 지구상의 2,500만 인구가 이 병의 감염 가능성을 안고 있으며, 이미 그 환자가 150만이요, 1년에 20만 명씩 이 병으로 죽어 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이 병이 함께 식사를 하거나 정상적인 가정 생활을 할 때에는 발병(發病)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95%가 동성연애와 같은 비정상적인 관계를 가질 때에 발병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말하기를, 하나님이 참고 참고 참으시다가 마침내 이것까지는 참을 수 없다, 끝이다 하고 내리신 심판이 에이즈라고 합니다. 어쩌면 1990년대에 가서 인구사망 원인의 50% 이상이 에이즈가 될 것이라는 예측도 있습니다. 이것은 먼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나라도 멀지 않았습니다. 1989년도「동아연감」에 나타난 통계를 보면 88년 한해에 95만 건의 범죄가 있었고, 하루에 2,600건에 달하는 살인, 강도, 강간이 있었습니다. 어디 이뿐이겠습니까 이것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무서운 죄악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낙심할 일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의인 열 명, 그 믿음의 의바로 이것만 있다면 이 땅은 지탱될 수 있습니다. 이름하여 중보적인 의인, 중보적인 의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존재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보시고 이 땅에 은총을 더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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