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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칠 줄 모르는 기도 (골 0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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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자 바울의 옥중 서신이라 불리우는 성경은 에베소서, 빌립보서, 빌레몬서와 골로새서입니다. 이 영감의 기록들은 바울이 제 1차로 로마에 투옥되어 있던 어간(A.D 61년 겨울-63년 봄)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옥중서신이라 부르게 됩니다.
골로새 교회는 바울이 그 현장에 직접 찾아가서 전도하여 세운 교회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교회는 분명히 사도 바울의 영향권 내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제 3차 전도 중심지를 에베소로 삼고 거거서 3년간에 집중적으로 전도 활동을 벌이고 있을 때, 그 복음에 은총을 받고 회심한 자들이 저들과 연고가 있는 여러 지방으로 내려가서 전도하여 교회를 세웠기 때문입니다.
이 어간에 루카스 계곡에 있던 세 교회, 곧 골로새와, 라오디게아와, 히엘라볼리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이 지역의 교회들은 바울의 전도에 의하여 은혜를 입은 에바브라의 사역에 의하여 세워졌다고 믿어집니다(1:7, 8 ; 4:12-13). 에바브라는 골로새 사람으로(4:12) 이 지역의 교회들을 위하여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4:13). 그래서 바울은 에바브라를 높이 평가하여 '우리와 함께 종된 사랑하는 형제'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실한 일꾼'이라고 격찬하고 있습니다(1:7). 그리고 그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고 하는 영예로운 칭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4:12).
지금 사도는 투옥 중에 이러한 에바브라를 통하여 골로새 교회가 예수에 대한 믿음과 성도에 대한 사랑과,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자라 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1:5, 8).
이 기쁜 소식을 들은 그날부터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이 골로새교회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않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칠 줄 모르는 기도, 쉴 줄 모르는 기도, 멈출 줄 모르는 기도, 말하자면 골로새교회를 향한 전도자들의 계속되는 기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기도일까

Ⅰ.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영의 은사를 위한 기도였습니다.

골로새서 1장 9절에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경험적인 산 지식을 가리킵니다. 철학적 이지(理智)나 금욕주의적 훈련에서나 율법주의적 지식으로 된 것이 아니라고 한 것입니다.
전도자들이 골로새 교회를 향한 기도의 본질과 최대 목적은 저들이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귀를 기울이시게 하는 것보다, 우리가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는 것이어야 합니다. 기도 중에 우리가 원하는 것은 하나님께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고 계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고 구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향하여 완전하고 충만한 축복의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기도해야 하는데, 실제로 나를 위하여 하나님의 뜻이 변해지기를 원할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전도자들은 골로새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아는 충만한 영의 은사가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중대한 기도입니다.

Ⅱ. 하나님의 뜻에 합당히 행하기를 기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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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1장 10절로 11절에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본문에 '주께 합당히 행하여'하는 말은 바울서신에 자주 볼 수 있는 말입니다. 예컨대 부름에 합당하게(엡4:1), 복음에 합당하게(빌1:27), 하나님께 합당히(살전2:12) 등의 경우입니다.
주께 합당하게 '행한다'는 말( )은 히브리말 할락(halak)과 더불어 '인생의 일반적 행로'를 말합니다. 그 행로의 목적지가 어디이고, 동행자가 누구이고, 유숙소가 어디인지 등에 관계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사람은 그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인생 여로에서 행동으로 나타내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말하자면 기도의 실제화, 기도의 행동화입니다. 기도의 현실화, 기도의 생활화입니다. 결코 기도의 결과는 현실도피가 아니라 현실 참여의 결과여야 된다는 말입니다. 현실 대처입니다. 기도는 명상이나, 상상이나, 추상이 아니라 기도의 결과는 바로 행동이요, 생활이요, 힘이요, 생산이요, 창조요, 진보요, 발전이란 말입니다. 기도는 바로 현실 그 자체입니다. 그 이유는 그가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변할 수 없는 확고부동한 것이고, 또 완전하고 거룩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필연적인 것입니다. 계획적이고, 목적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는 행동적 삶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무적의 영웅들로 역사의 한가운데를 달리게 됩니다. 그것이 저 출애굽의 용장이었던 모세의 걸음이요, 그의 뒤를 이은 여호수아의 걸음이었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신정 국가를 탄생시킨 사무엘의 역사였습니다. 그것이 히스기야 왕과 그 백성들이 산헤립의 군대 18만 5천명을 물리친 산 경험적 역사였습니다. 다니엘이 사자굴을,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풀무불을 불사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을 받았던 베드로와 사도들은 사람의 말을 듣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겠다고 유대교권주의자 앞에서 용감하게 행동하는 불사조와 같은 존재들이 된 것입니다. 기도 중에 마게도냐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환상을 확신하였던 바울은 서슴치 않고, 드로아 항구에서 배를 타고 구라파로 용진하고 말았습니다. 바로 그 길이 오늘이 선진 구라파를 창조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역사가 토인비 교수는 '그 때 바울을 싣고 가던 배는 구라파를 싣고 가던 배'라고 하는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사신 주님은 오늘과 내일과 모레에 나는 내가 가야 할 길을 가야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 결과 죄인을 위한 십자가의 대속을 성취하고 말았습니다.
우리 본문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합당하게 행동하면 범사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선한 일에 열매 맺는 축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일에 성장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영광의 힘을 받아 능력으로 능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기쁨 속에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거룩한 영의 성장 곧 성화의 축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사람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요, 기업의 후사입니다. 존재하는 세계는 바로 그 사람들을 위한 활동 무대입니다.

Ⅲ.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기를 기도하였습니다.

골로새서 1장 12절에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전도자들이 골로새 교회를 향하여 그칠 줄 모르고 올리는 기도의 궁국적 목적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어떤 하나님 아버지인가

1. 성도들에게 하늘의 기업을 상속으로 주신 아버지라고 하였습니다(1:12).
그 기업은 빛가운데서 얻어지는 기업이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예수 안에서 얻어지는 천국의 영원한 나라를 상속받는 은총을 가리킵니다.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도 빛 가운데 살고, 하늘나라에서도 빛가운데서 기업을 차지할 자들입니다(요1서1:7, 엡5:8, 마25:34, 계21:1, 25).

2. 우리(죄인)를 그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 주신 아버지입니다.
1장 13절에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흑암의 권세]란 어두움(사탄)이 지배하는 이 세상을 가리킵니다. '건져냈다'는 ( )은 단 한번만의 결정적인 구원으로 영원한 효력을 발생하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 사건을 가리킵니다. [옮겼다]( )는 말은 고대 세계에서 패전한 나라의 포로들을, 자국에서 타국으로 이동시키고, 구류하고 완전히 가두어 버리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러했고, 유다가 그러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말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속가를 지불하심으로 승리하여(요19:30), 우리들을 죄와 사망의 흑암에서 완전히 하나님의 나라로 이동시켜 영원히 거기에서 살도록 한 사실을 가리키는 말이 됩니다.
말하자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간 것을 가리킵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옮겨간 것을 가리킵니다. 저주와 형벌에서 영생으로 옮겨간 것을 가리킵니다. 세상에서 하늘로 옮겨가 버린 것을 가리킵니다. 대 이동 본질적 이동, 영원한 이동을 가리킵니다. 유한에서 무한에로의 이동입니다. 땅에서 하늘에로의 이동입니다. 육에서 영에로의 이동입니다.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에로 이동입니다. 실로 엄청난 이동입니다. 생명의 이동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구원'이라고 합니다. 영생이라고 합니다.
우리 본문은 이 엄청난 구원 역사의 이동을 가리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1. 암흑에서 광명에의 이동이라고 하였습니다.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어 옮겼다고 하였습니다(1:13).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생사의 분수령이 되는 빛을 주었습니다. 순교자 빌리(Bilney)는 예수 그리스도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읽었을 때 어두운 밤에 동이 트는 것 같았다고 하였습니다. 저 중세기의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도 이른바 그의 탑의 경험에서 로마서 1장 17절을 통하여 이 경험을 하였습니다.

2. 그것은 또한 노예에서 자유와 해방에로의 이동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곧 구속입니다. 속가 곧 값을 지불하고 사 냄(買)이 된 이동입니다. 1장 14절에 [그 아들 안에서의 구속]이라고 하였습니다. '구속'이란 말( =redemption)은 배상( )에서 온 말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 값을 하나님의 공의의 요구 앞에(율법) 지불하신 속가 행위를 가리킵니다. 이 낱말은 원래 노예나 포로 등을 값을 주고 찾아와서 원상 복구해 주는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밖에 있었을 때 공포의 노예들이요, 죄의 노예요, 자신의 노예요, 사탄의 노예들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가로 말미암아 사망의 노예에서 자유와 해방의 세계로 이동(옮김)이 된 것입니다.

3. 그것은 정죄에서 용서에로의 이동입니다.
골로새서 1장 14절이 설명하기를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의 자리에서 선고를 받아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자들이 아니고, 오히려 그 아들 예수의 십자가의 공로를 통하여 무죄 석방을 받고 아버지의 집으로 되돌아가는 사죄의 은총을 받은 자들이 되었습니다. 누가복음 23장 34절에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하는 예수의 사죄 기도는 지금도 계속이 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롬8:34, 히7:24-25). 그래서 우리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자들이 된 것입니다(요5:24).

4.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의 권세에로의 이동입니다.
우리 본문 1장 13절을 다시 보면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죽음을 정복하신 생명의 정복자 주님께서 우리를 사탄의 권세에서 구원하여 당신의 나라로 옮기신 사실입니다. 실로 거룩한 이동입니다. 사랑의 이동입니다. 은총의 이동입니다. 족보를 바꾸고 신분도 바꾸고 본적도 주소도 생의 방향도 의미도 목적도 아예 바꾸어 버린 본질적인 이동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는 골로새 교회를 향한 전도자들의 그칠 줄 모르는 기도를 생각하였습니다. 그것은 골로새교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아는 영의 은사가 있기를 기도하였습니다. 그것은 그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후는 그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행동적 역사(役事)가 있기를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에게 하늘의 기업을 주시고 그 아들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엄청난 구원 곧 생명의 이동(옮김)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기를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았습니다.
바로 이것은 오늘 전도자들이 여러분을 향한 그칠 줄 모르는 기도입니다. 부름 받은 전도자들은 이러한 사명에 자기 존재와 의미와 보람을 찾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말씀을 전하는 것과 기도하는 일을 전무(專務)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오늘 교회 교역자들의 사역의 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해서는 안됩니다.
그럼에도 이 지상교회 전도자들의 기도는 그칠 때가 있고, 그치지 아니한다고 해도 그 기도들이 약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확실하고 분명한 소망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향한 그칠 줄 모르는 기도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지금도 살아 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기도입니다.
로마서 8장 34절에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7장 24절로 25절에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중보자 예수님의 그칠 줄 모르는 기도!
이것이 2,000년 기독교 역사를 창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도 지구촌에서 대 이동 운동, 곧 사망에서 생명에로의 이동 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볼 때 1996년도 예외가 없이 하나님의 택자들을 흑암의 권세에서 불러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는 대 이동의 역사였다고 결론 내려야 합니다. 세상에서의 교회는 바로 이러한 대 이동 역사(役事)의 센타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가 받은 종교적 사명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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