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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창 03:16-20)

첨부 1


창세기는 인간과 만물의 시작과 근본을 밝혀주는 책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모든 문제의 원인과 해답을 우리는 창세기 성경에서 찾아야 합니다. 창세기는 세 종류의 인간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① 원래 인간입니다.
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처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어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신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온갖 축복들을 다 누리며 살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인간은 흙으로 지음 받은 보잘 것 없는 존재지만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와 생령이 됨으로 만물 가운데 유일하게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영원한 것이며 그 능력은 무한한 것이었습니다.
오직 한 가지,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않는 조건 속에서 인간은 마음껏 자유롭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물고기는 물속에서 무한한 능력이 있고 행복할 수 있는 것처럼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 그 안에서 무한한 능력을 공급받을 수 있었습니다.
② 타락한 인간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살아야 할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범죄함으로 인간은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타락한 인간에게 가장 먼저 찾아온 것이 무엇입니까
㈎ 하나님과의 영적관계가 끊기고 그들의 육안이 밝아졌습니다.
㈏ 벗을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해입었습니다.
㈐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었습니다.
㈑ 죄를 변명하기 시작했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과 분리되었습니다. 이 때부터 인간에게 다양한 형태를 불행을 가져다주는 세 가지 근본문제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근본문제가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과 함께 살아야 할 인간이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둘째 죄 가운데 빠져 저주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셋째 사단에게 완전히 장악되어 그의 지배 가운데 살아가게 됩니다. 이 때부터 인간에게는 연속적인 문제가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떠나 찾아온 문제는 아무리 인간적으로 해결해 보려고 노력해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면 할수록 더 깊은 문제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 때부터는 종교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하는데 이것이 곧 우상숭배입니다. 우상숭배는 정신병 등과 같은 영적인 질병을 가져오고 마음의 안식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시간이 가면서 육체도 병들고 계속적으로 생활에 문제가 찾아옵니다. 세상에서 온갖 고난에 시달리다가 결국은 죽어서 지옥 가게 됩니다. 죽은 후에는 제사라는 종교적 유산을 후손에게 물려주는 것입니다.
③ 회복되는 인간입니다.
이와 같은 불신자의 여섯 가지 상태에서 빠져 나오는 것이 구원입니다. 여기에서 빠져 나오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임마누엘의 축복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사랑의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자 마자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구원의 방법까지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바로 창세기 3장 15절과 21절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3:15)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창3:21)
여자의 후손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떠난 인간에게 하나님을 다시 만나는 길이 되셨습니다. 죄와 저주 가운데서 건져주시는 제사장이 되셨습니다. 사단의 권세 아래서 우리를 구원하는 왕이 되셨습니다. 그가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주심으로 모든 근본문제의 해결과 구원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이렇듯 창세기 성경은 인간의 근본문제와 해답을 가르쳐주는 중요한 책입니다. 인생은 이 근본문제를 해결해 놓고 출발해야 합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신분부터 바꾸는 일이 우선입니다. 구원받아 놓고 신분을 변화시켜 놓고 다른 일을 해야 합니다.
어린 아이 홀로 길을 걸어가면 위험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교만한 인생은 언제 무너져도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야만 하는 존재로 인간은 처음부터 지음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임마누엘 되셔서 지금도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새롭게 열리는 한해, 구원받은 자로서 하나님과 함께 시작하여 끝까지 동행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새해에는 무엇을 할 것입니까
매일 같이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반복적인 삶을 살아가던 사람이 덜컥 병을 얻어 죽었습니다. 그는 천사들의 손에 이끌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곳으로 갔습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매일 먹을 것이 풍성했고, 뭐라 말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천국이 이런 곳이로구나’ 생각하며 신나게 며칠을 놀았습니다.
그런데 여러 날이 지나다보니 따분하기 이를 데가 없었습니다. 그는 천사를 불렀습니다. “심심해 죽겠어요. 그 곳이 지옥이라도 좋으니 나를 내가 좋아하는 일할 수 있는 곳으로 보내주세요.” 그 때 천사는 정색을 하며 말씀하셨습니다. “아니, 그럼 너는 지금까지 이곳이 천국이라고 믿고 있었다는 말이냐 이곳이 바로 지옥이다. 이곳에서는 네가 원하는 일을 천사들이 다해주지만 너 스스로는 단 한 가지도 네가 하고 싶어하는 일을 스스로 할 수는 없다”
그렇습니다. 주를 위하여 자기를 위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곳, 그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천국은 어떤 곳입니까 오직 하나님에게 찬양과 영광만을 돌리는 곳입니다.
주를 위해서 우리가 이 땅에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이요, 은혜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맞이한 새해 첫시간은 결코 단순한 시간이 아닙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살아보기를 소원했던 시간이었습니다.
오늘 다시 그분이 간절히 생각이 납니다. 제가 1년 반을 다니면서 다락방을 했던 장주익 성도가 있었습니다. 그분은 뇌종양이라는 불치병을 통해서 신앙을 처음으로 접한 분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난 뒤 그렇게 간절히 치료해 주시기를 기도했는데 지난 해 가을 하나님은 그의 영혼을 불러 가셨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저와 절친한 친구 목사 한 분이 병상에서 사경을 헤메이고 있습니다. 저는 장주익 성도가 그렇게 살아보기를 원했던 96년이라는 새해 신년을 건강한 몸으로 맞이했습니다. 다행이라는 안도감보다는 그분이 살지 못한 시간을 내가 대신 살고 있다는 부담감이 무겁게 저를 짓누르고 있습니다. 아파서 병상에서 몸부림치며 고통받는 친구 목사님 몫을 건강한 내가 대신해야 한다는 책임이 저를 압박해 옵니다.
내가 원해서라기보다는 나를 통해서 이루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기 때문에 저는 오늘 여기 이 자리에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96년 새해에 아무런 계획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무슨 일이라도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해가 가고 한해가 오는 이 중요한 정점 위에서 우리는 내가 무슨 일을 해야 합니까 하나님 앞에 물어야 합니다.
나를 살려주신 주님, 나에게 건강주신 하나님, 지난 한해 나를 놀랍게 축복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 내가 무슨 일을 해야 합니까 하나님께 물어야 하고 그분의 대답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시작해야 합시다.
사람은 아무 일도 안하는 것으로는 결코 행복이 없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육신을 떠나면 그 때는 일하고 싶어도 일하지 못합니다. 일할 수 있는 시간과 일할 수 있는 건강을 주신 것을 감사하며 죽도록 충성하는 한해가 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가장 중대한 일은 자식을 낳는 일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 무슨 일일까요 그리고 가장 기쁜 일이 무슨 일일까요 아기를 낳는 일이며, 자식을 얻는 기쁨입니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창3:16)
보통 창세기 3:16-20은 범죄한 인간에게 내리신 저주로만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조금 다른 전도자의 시각에서 조명해 보면 은혜와 축복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범죄 이전에 인간은 해산의 수고를 없었습니다. 범죄 후에 해산의 수고가 주어진 것입니다. 여자의 해산의 수고를 우리는 전도자가 새로운 생명을 얻기 위한 수고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다 죄인입니다. 죄인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습니다. 물로 거듭난다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사 못 박혀 죽으심으로 그의 보혈의 피공로를 통하여 거듭난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말씀은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성령을 소유한 자가 구원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에 자식을 낳는 일보다 힘든 일이 없습니다. 죽을 각오를 해야 가능한 일이고, 죽을 힘을 다해야 아이를 낳을 수 있습니다. 젖 먹던 힘까지 다해야 합니다. 제 아내는 첫애를 낳고는 아예 까무라쳐 버렸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큰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아내에게서 한 번도 낳느라고 고생한 일 때문에 아이를 미워하는 모습이나 후회하는 말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자식은 수고함으로 낳는 것입니다. 자식이 왜 우리에게 생명처럼 소중합니까 생명 걸고 낳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16은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이면서 동시에 한 생명을 얻기 위해 수고하는 전도자의 고통이기도 합니다. 자녀를 낳는 일에는 반드시 수고의 고통이 뒤따르게 됩니다. 영혼을 살리는 전도자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도자는 절대로 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쉽게 전도가 되게 하지는 않습니다. 반드시 수고하게 하고 땀흘리게 하십니다. 그래서 얻은 생명을 인하여 큰 기쁨을 얻게 합니다. 그리고 그 생명을 인하여 행복하게 하십니다. 믿지 않는 자식을 거듭나게 하는 일은 육신적으로 그 자녀를 낳는 일보다 힘이 들 수도 있습니다. 불신 남편을 영적으로 중생하게 하는 일은 수고의 눈물과 기도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96년에는 많이 땀흘리고 많이 수고하십시오. 심은 만큼 거두게 될 것입니다. 수고 이상의 큰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3. 전도는 구원받은 모든 자의 사명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우리의 신랑이라고 비유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받은 구원은 곧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결혼입니다. 여자가 결혼을 했으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아이를 낳아야 합니다. 그런데 아이 낳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도 아이는 낳아야 합니다.
요즘은 아이를 적게 낳는 추세에서 더러는 아예 안 낳는 경우도 볼 수 있습니다. 요즘 부부들이 아이를 적게 낳거나 안 낳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말로는 적게 낳아 잘 기르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봅시다. 정말 그렇습니까 세상에 인구가 많으니까 인구정책에 기여하기 위해 적게 낳아 잘 기르기 위해 아이를 적게 낳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인구정책, 이런 데는 아예 관심이 없습니다.
아이 낳는 고통이 싫고, 아이 낳아 기르는 수고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아이 때문에 내 인생을 빼앗기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이기적인 목적 때문에 아이를 적게 낳고 안 낳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이를 안 낳으면 행복합니까 아닙니다. 보통 하는 말이 아이가 없으면 외롭고, 아이가 있으면 괴롭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제가 볼 때 외로움은 괴로움보다 더 견디기 힘든 고통입니다.
오늘날 여자들, 부인병이 다 어디서 왔습니까 아이 낳는 일을 기피하면서부터 왔습니다. 과거에 아이를 생기는 대로 낳을 때는 부인병이 없었습니다. 여덟, 아홉, 열을 낳을 때는 부인병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를 적게 낳거나 안 낳을 때부터 병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주간에 친구 목사님 누님이 병원에서 부인병으로 수술을 하셨습니다. 그분은 나이가 40이 넘어 결혼을 했습니다. 아이는 하나도 안 낳았습니다. 그런데 병이 생겨서 수술을 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에서 많은 비난을 받아가면서 위기에 몰리고 있습니다. 누구 때문입니까 아이 낳기를 싫어하는 사람들 때문입니다. ‘내가 예수 믿어 구원 얻었으니 이제 내가 할 일은 전도다’ 이렇게 생각하고 복음전하는 일에 발벗고 나선 사람들은 문제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받아들여 구원받았기는 했으나 전도에 관심이 없어 영적 출산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문제입니다.
우리 교회나 다른 교회나 여러분 눈뜨고 자세히 한번 보세요. 전도에 모든 관심이 가있는 사람이 문제입니까 아닙니다. 전도에 관심 없는 사람들이 걸핏하면 예배에 빠지고, 늦고, 예배시간에 끄떡끄떡 좁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신앙생활 만사가 다 귀찮고 짜증스럽기만 합니다. 억지로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일평생 신앙생활을 해도 만족과 기쁨이 뭔지 도무지 체험하지를 못합니다. 괴로운 인생길을 가다가 끝나는 것입니다.
정말로 신앙의 기쁨을 누리기를 원하십니까 주님의 위하여 사십시오. 주님의 가장 큰 소원인 전도를 위하여 여러분 인생을 걸어 보십시오. 전도하기 위하여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세요. 전도하기 위하여 밥을 먹고, 전도하기 위하여 사람들도 만나세요. 전도하기 위하여 직장에 가고, 전도하기 위하여 공부도 하세요. 전도자의 삶은 고난이 있을 수 있으나 태어난 영적 생명을 통하여 기쁨이 넘치는 삶입니다.
남편이 없을 때는 해산의 고통이 없습니다. 남편이 있으므로 해산의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해산의 고통 뒤에는 자식을 얻은 큰 기쁨이 있습니다. 자식을 낳는 고통과 자식을 얻은 행복은 감히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처녀가 죽었을 때는 장례도 치뤄주지 않습니다. 자식을 낳은 여인은 장례를 치뤄줍니다. 교회 안에서 성도로 제대로 된 대우를 받으려면 우선 전도부터 해야 합니다.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요16:21)
요한복음 16:21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앞에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여자는 누구를 가리킵니까 전도자를 말합니다. 해산의 고통은 십자가에서 내가 죽는 고통입니다. 그 고통을 통해서만 한 생명이 세상에 태어날 수 있습니다. 창세기 3:16의 하와와 아담의 고통은 전도인의 고통입니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창3:16-18)
하나님은 전도인에게 해산의 고통을 크게 더하시겠다고 했습니다. 그 결과 아이 낳는 기쁨도 크게 더해 주시는 것입니다. 가시와 엉겅퀴가 나는 땅은 갈아엎는 수고를 해야 합니다. 이마에 땀이 흐르고, 눈에서 눈물이 나는 수고를 해야 진정한 생명의 열매의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3:16이하의 말씀은 전도자의 인생여정입니다. 전도자는 많은 수고를 하지만 생명을 얻고, 기쁨과 행복을 누릴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도자에게 모든 관심을 다 기울이십니다. 돌에 맞아 순교할 때 스데반은 보좌에서 일어나 자기 영혼을 받으시는 주님을 보왔습니다. 일반적으로 주님은 보좌에 앉아 계신 분으로 묘사됩니다. 일어서서 그 영혼을 받으셨다는 것은 전도자에게 주님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모세가 가나안 정복을 위해 이스라엘 백성의 수를 계수 하였을 때 20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남자의 숫자만을 세었습니다.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의 그 종족을 따라 이십 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자가 이스라엘 중에서 다 계수함을 입었으니 계수함을 입은 자의 총계가 육십만 삼천오백오십 명이었더라”(민1:45-46)
이스라엘은 전통적으로 사람의 수를 헤아릴 때 여자와 어린이와 노인은 제외시켰습니다. 꼭 남자 장정의 수만 세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의 장면에서도 여자, 노인, 어린이를 빼고 남자 장정의 수만 세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구원 받은 자의 수를 셀 때도 남자의 수만 세었습니다. 여기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전쟁에 나갈 싸울 만한 군사의 수만 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관심을 갖고 주목하시는 것은 언제나 많은 다수가 아니라 영적 전투에 나갈 싸울 만한 십자가 군병의 수입니다. 이런 의미로 한번 각자에게 물어봅시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주목하시는 군사의 수에 포함되고 있습니까 나는 하나님의 관심에 드는 사람인가 내가 만약 하나님이라면 나와 같은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축복하시겠는가 내가 먼저 알 수 있습니다.
96년 신년에는 하나님이 관심을 갖는 사람이 됩시다. 하나님이 축복하실 수밖에 없는 가정이 됩시다. 하나님이 역사 하실 수밖에 없는 교회가 됩시다. 전도자가 되기로 결심합시다. 전도자의 가정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기도합시다. 안디옥교회처럼 주의 손이 늘 함께 하시는 교회가 되게 합시다. 새 마음으로 새 은혜를 바라보며 새롭게 출발하는 96년이 되시기를 그리스도 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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