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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과 세례 (마 01: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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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육신을 입고 세상에 나신 성탄절입니다. 오늘 교회에서는 성탄절을 맞이하여 세례 예식을 행하였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신 분들에게 축하의 말씀을 드립니다.
교회의 예식은 그 형식이 중요하지 않고, 그 형식에 담긴 의미가 중요합니다. 예식은 그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우리는 성탄절을 맞이하여 세례와 성만찬 예식을 행했습니다. 예식의 의미를 바로 알고 기억하는 일은 우리에게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이 시간은 말씀을 통해 세례의 의미를 생각해 보고 성탄절을 우리가 왜 기뻐해야 하는지 살펴보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1. 세례에는 과연 무슨 뜻이 담겨 있습니까
세례는 일치와 연합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세례는 예수님도 받았고, 우리도 받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받으신 세례와 우리가 받는 세례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이 받으신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① 성육신 자체가 하나님이 인간이 되시는 연합을 의미합니다.
성탄은 하나님이 인간과 연합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도록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마귀의 꾀임에 넘어가 죄를 짓고 하나님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할 만한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이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도 하나님이 하나님으로만 계시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해결할 때만 인간의 근본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 시작이 성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성탄의 소식은 온 세상에 미칠 큰 기쁨의 소식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② 세례를 통해 예수님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확인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요단강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가셨습니다. 요한이 말했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어찌하여 당신이 나에게 나오십니까 그 때 예수님이 말씀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니라.”
세례는 일치와 연합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일은 요한의 말처럼 어떻게 보면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요한은 인간이요, 예수님은 하나님입니다. 요한은 피조물이요,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신분상으로 보면 예수님이 요한보다 훨씬 높은데 어떻게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수 있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가지는 의미 때문에 굳이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것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 앞에 공포하신 것입니다. 안 받으셔도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래도 받으신 것은 온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선포요, 선언인 것입니다.
우리가 받는 세례는 사람으로서 하나님과 연합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28:19)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례를 지상명령으로 주셨습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라 하셨습니다. 인간의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과 성령의 인치심으로 이루어집니다. 구원은 성삼위 하나님의 공동의 사역입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세례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세례는 무슨 뜻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은혜에 우리가 연합하는 것입니다. 구원을 위한 인간의 어떤 노력도 그 목적을 달성할 수는 없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은혜로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을 때 우리의 세 가지 신앙고백이 필요합니다.
① 내가 죄와 허물로 죽은 자라는 고백입니다.
아담이래 모든 인류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죽은 자로 출생합니다. 영적으로 이미 죽었고, 육신적으로 죽을 것이며, 영원한 지옥의 형벌에 이를 수밖에 없는 신분으로 출생하는 것입니다. 죽은 자는 움직일 수 없습니다. 죽은 생명이 살아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생명되신 하나님과 연합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부활이요 생명입니다. 죽은 우리가 다시 사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연합하는 방법 외에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② 나는 죄인입니다 하는 신앙고백이 필요합니다.
다윗은 죄악 중에 모친이 자신을 잉태하였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죄악 중에 태어나 죄 가운데 살다가 죄값으로 영원한 지옥의 형벌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죄의 심판을 면하기 위해서는 죄를 용서받아야 합니다. 죄를 용서받는 길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서 담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연합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불의한 자로서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죄사함을 얻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그의 의가 우리의 불의를 씻고 깨끗한 자가 됩니다.
③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자라는 신앙고백이 필요합니다.
인간은 강한 듯 하지만 가장 약합니다. 인간의 그 어떤 노력도 마귀의 권세에서 자유케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기는 길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는 부활로써 모든 마귀의 권세를 다 깨뜨리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사단을 꺾고 죄와 저주와 사망에서 자유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세례는 생명없는 자로 영원하신 그리스도의 생명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세례는 죄인으로서 죄 없으신 그리스도의 의로움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세례는 무능한 자로 전능하신 그리스도의 권세와 연합하는 것입니다.

2. 성탄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① 성탄절은 하나님이 우리를 부요케 하기 위하여 육신을 입으신 날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계셨던 하나님입니다.(요1:1) 그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하나님입니다.(요1:14) 예수님의 근본은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습니다.(빌2:6-7)
그 하나님은 참으로 가난하게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너무 가난하여 태어날 때도 말구유에 태어나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사관에 있을 곳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돈이 없었던 것입니다. 가진 것이 없어 찢어지게 가난하여 밀리고 밀려서 마굿간 말구유까지 가신 것입니다.
가난은 얼마나 사람을 곤란하게 하는지 모릅니다. 지금도 생각하면 아찔한 기억이 저에게 있습니다. 첫애를 낳던 날, 병원에서 아내가 출산은 했는데 병원비가 없어 퇴원을 할 수 없었습니다. 참으로 난감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시던 날, 그가 비록 마리아를 통하여 요셉의 아들로 세상에 나시지만 하나님인 것을 알고 알고 있는데 그들 부부는 또 얼마나 난감했을까요.
예수님은 출생뿐만이 아니라 평소의 삶도 가난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마8:20)
예수님은 집이 없었습니다. 두 벌 옷이 없었고, 주머니에는 전대가 없었습니다. 무소유로 평생을 사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도 모든 것을 인류를 위하여 다 내어 주셨습니다. 그가 소유한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삶은 출생부터 죽으심까지 모두가 가난,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최대의 가난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의 형상을 입으신 것입니다.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의 가난을 입으신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가난하게 이 땅에 오셨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후8:9)
인간에게 에덴 동산을 잃어버린 것처럼 큰 가난이 어디 또 있습니까 또 천국을 소유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지옥갈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 있는 것보다 더 큰 가난이 어디 있습니까 영원한 생명되신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처럼 큰 가난이 어디 있습니까 다시 그 생명을 회복할 수 없다는 절망보다 큰 가난이 어디 또 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을 다시 만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가난하게 되신 것입니다. 그가 천국의 모든 부요를 포기하심으로 우리가 그의 생명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천국을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그의 가난으로 우리는 부요한 자가 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길과 진리와 생명이십니다. 그는 부활과 생명이 되십니다. 생명을 상실한 우리로 생명을 얻고 하나님을 만나게 하시고자 선지자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② 성탄절은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서 이 땅에 나신 날입니다.
예수님의 출생은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진 사건이 아닙니다. 창세기 3:15에 인간이 범죄 하자마자 하나님이 구원의 언약을 주셨습니다. 이사야 7:14에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 했습니다. 마태복음 1:23에 예수님이 오심으로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사도신경을 통한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은 의학적으로 전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전혀 이해가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사실을 인정하고, 이분을 우리의 구원자로 고백합니다. 인류를 구원할 분은 이 조건을 가진 분이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마태복음 1:18에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된 분이라고 말씀합니다.
마태복음 1:21에 그 이름이 예수입니다.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고 말했습니다.
마태복음 1:23에 오직 그분만이 임마누엘, 즉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시는 분이라고 말씀합니다.
신앙은 학문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래서 신앙을 교육하는 일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학문은 가르쳐서 이해시키면 됩니다. 그러나 신앙은 다릅니다. 학문은 알아서 믿지만 신앙은 믿을 때 깨달아집니다. 이해로 믿음에 이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믿으면 모든 영적 사실들이 이해됩니다. 예수님은 죄없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처녀 몸에 나셨습니다. 죄없는 자만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는 제사장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③ 성탄절은 사단의 권세가 처음부터 깨어지는 날입니다.
모든 역사를 통해 사단은 얼마나 철저하게 하나님을 대적해 왔는지 모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목마르게 메시아의 강림을 기다려 왔던 민족입니다. 그러나 막상 예수님이 그리스도로 이 땅에 강림하셨을 때에 그를 맞이한 사람은 불과 몇 사람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마귀가 사람들로 하여금 무관심하게 했던 것입니다. 사랑의 반대말은 무관심과 미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오시는 날 사람들은 무관심과 냉대로 그를 내몰았습니다. 돈에 눈이 어두워 인정, 사정없이 마굿간으로 내몰았습니다. 마귀는 예수 그리스도의 엄청난 출생의 사실에 대하여 무관심하게 하는 것입니다.
헤롯은 또 어떠했습니까 동방박사 세 사람이 헤롯을 찾아와 물었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마2:2)
헤롯은 그 당시에 유대의 분봉왕이었습니다. 그는 동방박사들이 와서 메시아가 나신 곳을 묻자 기겁을 한 것입니다. 내가 왕인데 어떤 왕이 또 있단 말인가 난리가 난 것입니다. 그는 흥분을 감추고 박사들에게 당신들이 경배하고 난 뒤에 나에게도 그곳을 알려 가서 경배케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박사들은 성령의 지시하심을 따라 그대로 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헤롯은 병사를 일으켜 베들레헴에 있는 두 살 이하의 남자아이는 다 죽이도록 명령했습니다.
헤롯의 발악은 사단의 최후 발악입니다. 그는 예수님은 죽이지 못하고 자기 백성만을 죽였습니다. 성탄은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궁극적 승리를 상징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마귀는 처음부터 강력한 기세로 나왔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능력의 권세 앞에 패배하였습니다. 십자가까지 사단은 방해하며 따라 왔지만 예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승리하셨습니다. 성탄절은 예수님이 사단의 모든 권세를 깨뜨릴 만왕의 왕으로 오신 날입니다.

오늘은 성탄절입니다. 오늘이 성탄절인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탄절의 깊은 영적 의미를 바로 알고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오늘 여러 사람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또 우리는 성만찬 예식을 행하였습니다. 교회의 예식은 그 형식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예식에 담긴 깊은 의미가 중요한 것입니다.
저는 어제 새벽송을 돌면서 밤늦게까지 흥청거리는 많은 남녀들을 보았습니다. 의미를 오해해 버리면 가장 큰 문제가 생겨납니다. 장사하는 사람들은 일년 중 매상이 가장 많이 오르는 날로 성탄절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오늘을 곗날이라서 모임에 간다며 갔습니다. 크리스마스는 일년 중 가장 죄많이 짓는 날로 자리잡아 가고 있습니다. 크리스마스 베이비라는 신종어가 생겨날 만큼 세상은 부패했습니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성탄절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메시아가 강생하신 구원의 놀라운 소식이 이 땅 위에 성취되는 축복된 날로 고백되어져야 하겠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로 나에게 임하시고, 그 엄청난 신분과 권세, 축복과 능력이 임하는 복된 날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최고로 영광을 돌리고, 최고의 기쁨이 우리에게 넘쳐 나는 축복된 날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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