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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물동이를 버린 여인 (요 04:2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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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4장은 예수님과 한 이름없는 여인과의 만남에 관한 기사로 채워 져 있습니다. 그녀가 누구의 딸이었는지,나이는 얼마나 됐는지, 교육수준은 어느 정도인지, 그런 것들에 대해선 언급이 없습니다.

 다만 어느날 물길러 나왔다가 우물가에서 예수를 만나게 되었고, 얘기 끝 에 영원한 생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했다는 것이 본문의 줄거리인 것 입니다.

여자라고 다 이름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사라,리브가,한나,마리아 등 성 경 속엔 여러 명의 여인들의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미라아 여인의 경우는 이름이 없습니다. 그런가하면 그녀의 과거 는 철저하게 밝혀져 있습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남편이 없다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이 대화는 여자로선 가장 아픈 상처인 과거를 들춰내고 있습니다.

그녀는 바로 그 과거 때문에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 다녔고, 사람접촉을 피 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외출이 뜸한 한 낮을 골라 물을 길러 나 왔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녀의 과거를 끄집어 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자신의 과거 를 부인하지 않고 시인했다는 점입니다.펄쩍 뛰며 웬 사람잡을 소니랴고 잡 아뗐다면 그날 에수님과의 만남은 무위로 끝났을 것입니다.

 바로 이점이 중요합니다. 주님 앞에 서는 사람, 주님을 마나는 사람에게 이름이 없으면 어떻게 과거가 드러나면 어떻습니까

마태복음 15장에 나오는 가나안 여인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주 겠느냐"라는 극단적인 굴욕을 당하면서도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 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며 주님께서로 더 바짝 다가 섰습니다. 그리고 응답을 받았습니다.

 얼마 전 서울시내를 누비며 운전하는 영업용 택시 기사들에게 설교할 기회 가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지금까지 교통법을 한번도 어긴 일이 없는 사람 은 손을 들어보라"고 했떠니 단 한명도 없었습니다. 모두가 다 범법자들이 었습니다. 우리들의 경우도 예외가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범법자 아닌 삶은 없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경우 그날 예수님을 만나 여섯 남편에 관한 이야기를 하 지 않았더라면 일생 어둔 그늘에 묻혀 살아야 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녀의 과거를 들추고 상처를 건드리신 것은 상처를 주고 아픔을 주기 위해서는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상처를 싸매시고 치료하시고 구원하시 기 위해서였습니다.

어렸을 때 종기 수술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매일 병원에 가서 수술부위에 부쳐놓은 거즈를 떼낸 후 소독약으로 상처를 닦아냅니다. 그때 그 아픔은 말로 형언할 수가 없습니다.

너무 아파서 악을 쓰며 울었습니다. 그리고 간호사나 의사가 사정없이 미 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주일이나 열흘씩 거즈를 떼내지도 않고 닦아내 지도 않고 약도 바르지 않는다면 환부는 썩어 고름이 흐르게 될 것입니다.

 사람은 사람을 무시하고 멸시하고 천대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과거를 들추고 괴롭히고 그것을 약점삼아 악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러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과거를 말함은 악용 치유하기 위해서이며, 주께서 상처를 건드리심은 그 상처에 고여있는 피고름을 닦아 내고 고쳐 주시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1. 예수님과 그 여인의 대화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 그녀와의 대화를 위해 제자들을 마을로 보냈습니다.

그것은 곁에서 이러쿵 저러쿵 거들고 나서는 제자들이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단 둘이 나눴던 대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13-15절을 보면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 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 르지도 않고 여기 물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장소가 우물가였기 때문에 화제는 자연히 물로 시작되었습니다. 여자는 마 실 물을 달라고 했고, 주님은 생명의 물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단계는 신앙의 초보단계인 것입니다. 먹는 것이나 마시는 것이 신앙의 주된 관심이라면 그것은 신앙의 초보단계입니다.

먹고 또 먹어도 배고픈 것들, 마시고 또 마셔도 갈증나는 것들이 세상 것 들입니다.

도대체 얼마나 벌고, 얼마나 소유하면 "이제 그만"이라고 손을 저으며 만 족할 수 있을까요 [프랭클린]은 "만족은 가난한 사람을 부하게 만들고 불만은 부한 사람을 가난하게 만든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 전서 6:17에서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라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라"고 했습니다.

정함이 없다는 것은 재물이란 한 곳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이동성 고 기압과 같아서 언제 어디로 옮겨갈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를 받 고 가지면 된다는 상한선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부를 하는 목적도, 사업을 하는 목적도 잘 먹고, 잘 살고, 부자되는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그것이 실현되지 않고 깨어지게 되는 날이면 절망하고 좌절하고 스스로 목숨까지도 포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녀에게 "내가 주는 물은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될 것이 라"고 하자 그는 바로 그런 물을 내게 달라고 했습니다.

예를 들어 대학강의실에서 물마시는 것, 밥먹는 것, 숫가락질하는 것, 줄 서는 것, 신호등 보고 길 건너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면 그 꼴이 뭐가 되겠 습니까 그런 것은 유치원에서 배우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의 차원과 신앙의 차원을 한 단계 높입시다.

영원히 솟아나는 생명의 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봅시다.

 2) 예배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물에 과한 이야기가 20절에서 갑자기 예배에 관한 것으로 돌변합니다. 화 제가 바뀐 것입니다.

화제를 극적으로 바꾼 것은 "네 남편을 데려오라"는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라는 그녀의 대답 속에는 진짜 남편이라고 믿고 살았던 사람은 없었다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과거가 불륜과 부도덕으로 일관된 삶이었다는 실토이기도 한 것입니다.이유는 남편아닌 여섯 남자와 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의 과거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안고 있는 도 덕적 갈등과 고민과 함께 영적 갈망을 헤아리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남자나 바라보고 웃고 우는 그녀의 일차원적 삶을 영원하신 하나님을 바라 보고 예배하는 삶으로 끌어내 주신 것이빈다.

23절을 보면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고 했 습니다.

금년들어 재벌기업들의 신입사원 채용규정이 변했다고 합니다.

남녀 성차별 없앤 것은 이미 오래고, 전 같으면 병역필,명문대학, 성적 등 이 우선조건으로 꼽혔지만 금년부터는 그 사람의 인성, 적응 능력, 인간관 계, 창의성, 품성 등 주로 인격적 조건이 중시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찾으십니까 "자기에게 예배하는 사람"입니다. 그리 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 것입니다.

본래 예배(라트뤼오)라는 낱말의 뜻은 "고용된 하인"이라는 말에서 유래했 는데, 그 뜻은 봉사하다, 섬기다라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봉사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 사람들은 예배를 써비스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나님을 예배하라고 가르쳤을까요 그것은 지금까지 세상섬기고,남자섬기고,그것도 제 남편도 아닌 남자들에 게 시달리며 살던 그녀에게 눈을 들어 하나님을 섬기며 살도록 하시기 위해 서였던 것입니다.

 여기에 그녀의 위대한 삶의 전환이 있는 것입니다.

참된 변화가 무엇입니까 세상에 매어달리고, 사람에게 매어 달리며 살던 사람이 그것들을 떨쳐 버리고 하나님 섬기며 살게 된 것이 참 변화입니다.

삶의 방향과 질이 달라진 것이 참 변화인 것입니다. 드디어 그녀는 사람답 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게 된 것입니다.

 2. 그녀의 변화된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1)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갔습니다.

28절을 보면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라고 했습니다.

물동이는 식수수단이며, 생활수단입니다. 지금처럼 상수도시설이 없었던 당시로서는 물동이가 없으면 물을 길어다 먹을 수가 없스빈다.

그런데 그녀는 그것을 버렸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더 좋고 귀한 시간이 터졌기 때문입니다.

모래퍼서 밥만들고 풀잎 잘라 반찬만들어 노는 소꼽장난이 끝나고 진짜 밥 먹으러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은 모래밭에 그것들을 그대로 버려두고 갑니 다. 그 밥상을 가지고 들어가는 아이들은 없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지금껏 죄에 파묻혀 살면서 여섯명 씩이나 남자 파트너를 바꿔가며 소꼽장난 같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생활은 고독했고 허무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우물가에서 예수님 만나고 거듭났습니다. 그래서 물동이를 버 렸습니다.

그녀에게 물동이는 그의 지나간 과거였고, 어두운 삶의 상징이었습니다.

우리에겐 버려야 할 것들과 버러선 안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소중한 것, 귀한 것, 필요한 것, 가치있는 것은 버려선 안됩니다. 그러나 해로운 것, 유익하지 않은 것, 나쁜 것들은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간 그 여인은 결단은 우리에게 많은 도전으 로 다가섭니다. 진실로 예수를 만난 사람은 동네도, 사람도 겁날 것이 없는 것입니다.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뛰어들어가던 그 여인의 모습을 영상처럼 보십 시다. 발걸음 가벼웠을 것입니다. 어깨는 덩실거렸을 것이고, 입에선 노래 가 흘러나왔을 것입니다.그리고 그의 눈에는 감격의 이슬이 맺혔을 것입니 다.

그 이야기는 오늘 나의 이야기라야 합니다. 그 모습은 바로 내 모습이 되 어야 합니다.

 2)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말했습니다.

29절을 보면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은 와 보라 이는 그리스 도가 아니냐"라고 했습니다. 그날 그 여인의 간증과 증거 때문에 39절을 보 면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42절입니다. 예수를 믿게 된 사마리아인들이 그 여자에게 "우리가 믿는 것 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 신줄 앎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날 우물가에서 죄많은 여자에게 엄청난 사건이 일어나게 하셨 습니다. 그리고 사미라아 동네에도 사건이 터지게 하셨습니다.

예수 바라보고 믿는 것이 진짜입니다. 예수님이 던지는 폭탄이 진짜 폭탄 입니다.

물동이를 버리게 하신 것도 그토록 저주스럽던 동네로 뛰어들어가게 하신 것도 눈에서 펑펑 눈물이 쏟아지게 하신 것도 예수님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줄을 서 예수를 믿게 된 것도 예수님 때문이었습니다.

주여! 나도 그렇게 만들어 주소서, 나도 그렇게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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