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주저앉지 맙시다 (욘 04:1-11)

첨부 1


우리는 그 동안 요나서를 생각하면서 거기서 주시는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지난 시간 말씀드린 요나서 3장을 읽다가 4장을 읽게 되면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의 변화를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생각하게 되는 요나서 4장의 요점이라고 할 수 있는 말씀이 5절입니다.

“요나가 성에서 나가서 그 성 동편에 앉되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 앉아서 성읍이 어떻게 되는 것을 보려하니라” 여기 두 번 반복되는 동사가 있습니다. 그것은 ‘앉는다’하는 말입니다.

지난 시간 말씀드린 3장에서는 요나가 ‘일어나’ 하나님과 함께 뛰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생각하게 되는 4장에서는 요나가 다시 주저앉습니다. 요나가 주저앉은 것은 일이 다 끝났기 때문이 아닙니다. 요나는 이제 구경꾼의 자리로 변모하기 시작합니다.

3장에서 보면 요나가 얼마나 열심히 일했습니까 그는 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4장에서는 방관자의 자리에 머뭅니다. 그는 주저 앉아서 저 니느웨 성읍이 어떻게 되나 하고 구경합니다. 일꾼이 갑자기 방관자로 변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 4장 1절을 보세요.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라고 말했습니다. 요나가 무엇을 싫어했습니까 하나님이 니느웨 성을 저주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니느웨 성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긍휼히 여기사 그들을 구원하시는 일을 요나는 심히 싫어했습니다.

2절을 보세요.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그 복음을 막고 있는 커다란 장애물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요나의 모습을 통해서 장애물 세 가지를 발견합니다.

그 하나가 이기심입니다.

요나는 자기가 싫어하고 미워하는 원수 나라 국민이 망하기를 원하는 민족적인 편견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 편견 때문에 니느웨성 사람들이 회개하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우리가 이기심의 벽을 뛰어넘지 못하게 되면 우리는 절대로 선교할 수가 없습니다. 왜 우리가 주님의 선교명령 앞에 순종하지 못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아직도 내 마음을 이기심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민족적인 이기심이든 아니면 개인적인 이기심이든 이기심은 언제나 선교를 가로막습니다.

우리를 미워하고 시기하고 그래서 나에게 손해를 주는 사람에게 전도하는 일이 쉬울까요 솔직한 말입니다마는 우리 한국 사람에게는 일본 사람들에 대한 우리 민족 특유의 감정이 밑바탕에 흐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일본과 어떤 운동경기를 하면 우리는 왜 그렇게 흥분합니까 그 사람들이 잘 된다면 어딘지 모르게 기분이 언짢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을 그 사람에게도 전하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요나를 이해 할 수가 있습니다.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이런 이기심이 요나로 하여금 갑자기 한 순간에 걸음을 중단시켰습니다. 자기 본위의 편견과 이기심이 주님을 위해서 일하고 뛰던 우리의 발걸음을 붙잡아 맨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자기 본위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요나가 생각한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원수 나라인 니느웨를 망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하나님을 자기 멋대로 생각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요나와의 대화를 통해서 요나의 마음 속으로 생각하는 하나님을 바로 잡아 주십니다.

우리는 내가 편리한대로 하나님을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데 왜 어떤 사람을 지옥에 보내실까’하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이 생각도 하나님께 대한 일종의 편견입니다. 지옥이 없기를 바라는 자기 편견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신다면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거나 말씀의 교훈을 받을 때 사랑의 하나님은 받아들이지만 공의의 하나님은 받아들이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천국을 예비하신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지옥을 예비하신 하나님은 믿지 못해서 그럽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을 내 중심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요나가 그랬었습니다. 니느웨를 저주하고 벌하실 하나님으로만 알았지 니느웨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실 줄 몰랐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2절에서 요나는 하나님을 새롭게 생각하게 된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요나는 이제야 알았다고 고백합니다.

여러분, 구약성경에 이미 하나님이 이런 하나님이시라고 이미 계시되지 않았습니까 인애의 하나님, 자비의 하나님, 용서의 하나님,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말씀되어져 있었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이신 것을 성경이 얼마나 강조하고 있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가 받아들이기 싫은 것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 앞에 올바른 반응을 보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교훈의 전체를 편견없이 응답해야 합니다. 요나는 아직 저주의 하나님으로만 알고 있다가 이제 새로운 하나님의 모습을 배웁니다. 용서하시는 하나님,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배웠습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시며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배웠습니다.

한때 하나님께 그토록 방항하던 니느웨 백성들을 그들이 진정으로 회개할 때 그 품안에 안아 주시는 이 크신 사랑의 하나님을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교정이 될 때 선교를 향한 시선의 폭은 그만큼 넓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피곤과 낙심입니다.

4절 이하에 보면 요나가 무척 피곤해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육체적으로 너무 피곤해 있을 때 하나님의 사역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 가운데서 인간의 육체를 귀하게 보는 종교는 기독교밖에 없습니다. 초대교회의 가장 무서운 이단이었던 영지주의(Gnosticism)에서는 육체를 정죄하고 육체를 더럽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영지주의에서는 영혼과 육체를 철저하게 구별했습니다. 그래서 영혼만 깨끗하고 육체는 언제나 더러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더구나 우리의 영혼을 더 깨끗이 하기 위해서는 육체를 억압하고 학대해야 하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의 바울 서신과 일반 서신은 대부분 바로 영지주의라는 이단을 경계하기 위해서 기록된 것입니다. 요한 일서 4장에 보면 사도 요한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그 영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고 했습니다. 또한 요한은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적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영지주의들은 육체를 정죄하다가 커다란 교리적인 과오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더러운 육체를 입고 세상에 오실 수가 있는가’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정하게까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육신을 입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육신 그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육체 그 자체를 악하다고 정의하지 않습니다. 성경처럼 인간의 육체를 존중히 여기는 데도 없을 것입니다. “너희 몸은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다”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우리의 이 몸은 성전입니다. 이 얼마나 귀합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 몸을 건강하게 깨끗하게 잘 간수해야 합니다.

사람이 육체적으로 피곤하게 되면 그것이 영적인 일에도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체를 너무 학대하는 것은 합당치 못한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육체를 너무 학대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이 몸에 대한 청지기 직분을 성실히 감당해야 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서 피곤한 요나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 피곤이 아마 요나를 주저앉게 만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일하다가 너무 피곤하면 만사가 다 귀찮게 생각되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적인 생활이 메마르게 되고 순간적으로 영적인 침체 속에 빠지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요나의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일꾼의 자리에서 구경꾼의 자리로 돌아서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요나를 그대로 벼러두지 않으십니다. 요나를 아직도 쓰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은 요나가 그대로 주저앉아 있게 내버려 두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주저앉은 요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 하나님이 일하셨습니다. 여기 아주 중요한 요나서의 교훈이 나옵니다. 이 마지막 교훈은 요나서의 절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6절을 보세요.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 넝쿨을 준비하사 요나 위에 가리우게 하셨으니 이는 그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 괴로움을 면케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 넝쿨을 인하여 심히 기뻐하였더니”했습니다.

주저앉은 요나의 머리 위에 박 넝쿨 그늘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이때 요나는 심히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이 상황은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교훈을 주시기 위해 사용하신 하나님의 교육현장이었습니다.

7절을 보니까 “하나님이 벌레를 준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 넝쿨을 씹게 하시매 곧 시드니라”했습니다. 박 넝쿨도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그늘 아래서 쉬고 있던 요나를 위해서 이번에는 벌레를 준비하셨습니다. 요나는 시원한 박 넝쿨 그늘 아래서 좋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벌레가 오더니, 그늘을 이루고있는 박 넝쿨을 다 씹어 먹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8절을 보세요.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버리에 쬐매 요나가 혼곤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벌레를 통해서 박 넝쿨을 다 거두어 가신 다음 이번에는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눈에 띄는 낱말이 ‘준비’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폭풍을 준비하셨습니다. 큰 물고기도 준비하셨습니다. 박 넝쿨도 준비하셨습니다. 벌레도 준비하셨습니다. 동풍도 준비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교훈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만유의 주님이십니다. 그분은 바람의 주인이십니다. 그분은 물고기의 주인이십니다. 그분은 박 넝쿨의 주인이십니다. 그분은 벌레의 주인이십니다. 그분은 동풍의 주인이십니다. 그 주인께서 뜨거운 동풍이 불게 하셨습니다. 요나를 가리던 그늘이 없어졌습니다. 뜨거운 바람이 계속 불어옵니다. 요나는 미칠 것만 같았습니다. 요나는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고 말했습니다.

9절을 보세요.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박넝쿨을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이때 요나가 뭐랬어요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합당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 그나마 시원한 그늘에 의지하고 이제 살만하다 했더니 그 그늘까지 거두십니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이 박 넝쿨의 교훈을 통해서 하나님은 얼마나 놀라운 교훈을 우리에게 주십니까 여기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가치여부의 순서를 잘 보세요. 식물과 동물과 인간이 하나님의 안목 앞에서 날카롭게 구별되고 있는 모습을 자세히 보세요.

하나님은 이 많은 식물보다도 동물을 훨씬 더 귀중히 보십니다. 니느웨 성에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육축도 많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나 보세요. 육축의 숫자는 세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니느웨 성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숫자는 주께서 세셨습니다.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사람들이 십이만 여명이요” 어떤 사람은 좌우를 분변치 못한다는 말을 선악을 분별하기 어려운 어린아이들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니느웨 성의 영적인 어두움과 영적인 빛을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 전체를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니느웨 성의 모든 사람들의 숫자를 세고 계셨습니다. 천하보다 귀한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 십이만 명 그 영혼들을 내가 아끼는 것이 왜 합당하지 아니하냐고 말씀하십니다.

이 교훈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무엇입니까 요나는 니느웨 성에 있는 그 많은 잃어버린 생명을 향해서 설교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전파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요나는 그 영혼들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요나는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 니느웨로 가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우리 주변에 수많은 영혼들이 멸망을 향해서 그리스도 없이 잃어버려져가고 있습니다. 영혼들에 대한 애정이 결핍된 오늘날 성도들의 모습을 우리는 요나서를 통해서 보지 않습니까 그들을 위해서 하나님은 벌레를 준비하십니다. 우리가 시원한 박 넝쿨 아래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명과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주저앉아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박 넝쿨을 거두어 가시기 위해 벌레를 준비하십니다.

우리가 돈을 벌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귀한 교훈을 망각하고 있을 때, 아니 더 중요한 일을 잊어버리고 있을 때 하나님은 그 박 넝쿨을 거두어 가십니다. 내게 정말 소중한것이 무엇인지 알게 하시기 위해서 박 넝쿨의 시원함을 즐기고 있는 그 순간 내게 찾아오는 것은 권력의 침몰, 재산의 몰락일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하나님의 징계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수많은 영혼을 다 아끼십니다. 그분은 50억이 넘는 이 지구상의 인구 한 사람 한 사람을 아끼십니다. 남한의 4천 5백만 인구를 아끼십니다.

“내가 그들을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은 이렇게 관심을 가지시고 아끼시는데 우리는 이 영혼들에게 얼마나 뜨거운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희어져 추수하게 된 이 지상의 수많은 영혼들을 누가 책임지겠습니까 지구상의 기독교 인구가 3억이라고 말하나 이 중에서 참으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성경을 알고, 말씀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1억 미만일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1억의 그리스도인에게 세계 52억의 인구를 주님 앞으로 인도할 사명을 맡기십니다. 그런데 이 막대한 선교의 사명을 위임받고 있는 오늘의 성도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만 생각해서 예수 믿어 평안히 지내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그리스도 없이 죽어가고 있는 수많은 영혼을 향해서 관심을 가지십니다. 아마도 선교사업에 동참하고 계시지만 선교하는 일을 위해서 함께 기도하고 힘을 모으는 일에 동참하십시다.

이 사명을 우리가 감당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어쩌면 시원한 박 넝쿨의 그늘을 즐기면서 세계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중요한 사명을 불순종하고 있는 오늘의 요나가 될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어느 날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들을 정리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거니와 여기 요나 보다 더 큰 이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요나보다 더 크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의 우리에게 이 복음의 사명을 맡기십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선교의 사명을 위해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선교를 위해 기도하면 됩니까 매달 얼마의 선교회비만 내면 됩니까 구체적으로 할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 목양회에서는 금년부터 우리 주변에 구원받지 못한 심령을 위해서 전도의 수고를 감당해 보려고 합니다. 전도하는 일이 쉬운것이 아닙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온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일이 그렇게 쉽겠습니까 그러나 못할 일 또한 아닙니다. 먼저 우리 마음 속에 다른 사람의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금년도 우리 교회의 생활표어가 “서로 사랑합시다.”입니다. 사랑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수고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병이나면 그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옆에서 얼마나 수고합니까 그래서 병에서 놓임 받고 건강이 회복되는 모습을 볼 때 치료하기 위해서 수고를 아끼지 않은 사람의 기쁨이 얼마나 큽니까 마찬가지로 죄로 말미암아 죽어가고 있는 영혼을 만 병의 의사가 되시는 예수님께로 데려오면 고침 받고 영원히 살 수 있겠는데 우리가 이 일을 위해서 얼마나 수고하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내가 이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임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멀리 갈 것 없이 멀지 않는 내 친구,내 이웃, 내 친척, 내 친지 가운데 한 사람 이상의 이름을 적을 수 있는 카드를 나눠드렸습니다. 이 주간에 그 이름을 적으셔서 다음 주일 오실때 교회에 제출하시면 우리 함께 이 심령들을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힘쓸 것입니다.

그 동안은 할 마음 없어서 안했습니다. 관심도 없었습니다. 요나같은 생활을 했습니다. 이번에 이 잘못된 과거의 생활을 온전히 회개하고 요나처럼 일어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십니다. 그 심령이 구원받고 못 받는 것은 우리에게 달린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달렸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줄 믿습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