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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방언하는 것의 유익이 무엇인가 (고전 14:3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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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하여 많은 체험을 갖게 됩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획기적인 체험은 성령세례를 받고 방언을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방언은 방언하는 당사자뿐 아니라 방언하는 것을 보고 듣는 자에게도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증거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방언은 성령께서 우리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으로 특별히 통역의 은사가 내리기 전에는 방언은 하는 자나 듣는 자나 모두가 무슨 말인지 알아 듣지 못합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이 이런 질문을 합니다.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은 무엇 때문에 합니까” “방언하는 유익이 무엇입니까”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오늘 저는 여러분께 대답하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 선생은 고린도전서 14장 18절에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도 신학생 때 성령세례를 받고 방언의 은사를 받은 후 지금까지 36년 동안 줄기차게 방언기도를 해오고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제게 방언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신 것을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1. 방언을 말하는 자는 하나님께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것임
고린도전서 14장 3절에 보면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방언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대화용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대화할 수 있도록 주신 기도의 언어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방언은 사람 들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아 내가 방언 은사를 받았으니까 사람들이 다 듣게 해야지’하는 생각으로 사람들 들으라고 요란스럽게 방언을 하는 것은 주신 목적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방언은 사람을 향해서가 아닌 하나님을 향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방언으로 많이 기도하면 하나님과의 많은 대화가 이루워 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말로써 기도를 오래 할 수 없는 사람은 방언을 하면 오래도록 기도할 수 있습니다. 방언은 자기 힘으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성령이 그 입술과 혀를 붙잡아서 말씀하게 하는 것이어서 조금도 힘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방언은 알아 듣는 자가 없고 비밀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비밀은 친한 사람들과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방언을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깊은 비밀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방언기도는 천사도, 마귀도 주위에 있는 사람도 알아듣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만이 알아 듣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친밀해 지며 교통이 깊어지는 것입니다.
제 개인의 경험에 의하면 웬지 마음이 억압되고 하나님이 내게서 멀리 계시다는 감정이 생길 때에 방언기도를 많이 하면 순식간에 하나님의 영광이 마음 가득히 임하시고 내가 하나님의 영광속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곧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 비밀을 말하게 됨으로 하나님과 나 사이의 간격이 좁아지고 깊은 친밀함이 다가오기 때문인 것입니다.

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움
‘덕’은 헬라어로 ‘호이코 도매오’라고 하는데 이는 ‘호이코스’에다가 ‘대모’란 말을 보탠 말입니다. ‘호이코스’는 집이란 말이고 ‘대모’란 집을 짓기 위해서 벽돌을 한장, 두장, 쌓아올라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집’+‘벽돌쌓기’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 신앙의 덕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목회자가 설교를 잘하면 듣는 성도들에게 신앙의 덕이 끼쳐집니다. 믿음이 커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덕을 끼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가 덕이 있어야 합니다. 이 ‘덕’이라는 것은 신앙의 집을 지어올라가는 것입니다. 방언을 많이 말하면 할수록 신앙의 벽돌이 한장한장 쌓아올려져서 신앙의 집을 크게 지어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특히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는 주의 종이나, 우리 지.구장님들께서 말씀을 증거하러 갈 때에는 방언기도를 많이 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무 필요없는 방언을 우리에게 주실 리가 만무합니다. 스스로 신앙이 약하고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성령세례 받으시고 그 표적으로 방언을 선물로 받아 방언으로 많이 기도하십시오. 여러분의 신앙이 놀랍게 장성하는 것을 체험하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3. 방언은 통역할 수 있음
고린도전서 14장 13절은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찌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방언은 하나님께서 통역의 은사를 주셔서 통역하면 그때야 천사도, 마귀도, 사람도 알아듣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차례 방언 통역을 통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을 받아본 적이 있습니다. 제가 불광동에서 목회할 때에 엎드려서 기도만 하면 방언만 나왔는데 하나님께서 통역해 주시기를 “너는 온 천하 만국에 나가서 복음을 증거할 터임으로 지금부터 준비하라. 너는 은빛 날개를 타고 온 천하에 나가서 복음을 증거할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때 그 방언 통역을 듣고 저는 속으로 씁쓸하게 웃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비가 철철 새는 천막에 다 떨어진 가마니를 깔고 먹고 살기도 힘든 처지에 내가 무슨 수로 온 천하에 나가 복음을 증거하랴 하는 생각에서 였습니다. 그래도 방언기도만 나오면 똑같은 통역을 해주셨습니다. “너는 이제 성경도 영어 책으로 읽어라 생각도 말도 영어로 하라”
그래서 할 수 없이 그 말씀을 좇아 영어성경을 읽고 영어로 생각하고 말도 혼자 영어로 중얼거리며 지냈습니다. 그런데 오랜 세월 후 보니 성령께서 방언 통역해 주신 것이 그대로 맞았습니다. 지금 저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증거하고 있지 않습니까!

4. 방언은 개인예배에 큰 축복이 됨
고린도전서 14장 15절에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방언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는 말로 기도하다가 지치면 방언으로 기도하고 또 지치면 아는 말로 찬송하고 또 방언으로 찬송하기를 되풀이 하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방언 찬송의 덕을 많이 보았습니다. 제가 아프리카, 구라파 등 전 세계를 다니며 성회를 인도하는데, 그 나라 사람들이 자기들의 말로 찬송을 부르면 저 혼자 가만히 서 있을 수가 없어요. 곡조도 가사도 다 다르니 나는 방언으로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방언찬송을 부르면 희한하게 성령께서 내가 배우지도 듣지도 못한 그들의 곡조를 따라 할 수 있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선생이 “내가 영으로 차고 아는 말로 찬미하고 영으로 기도하고 아는 말로 기도하리라”고 말씀한 것처럼 행하면 우리의 예배가 굉장히 풍성해 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방언기도는 개인의 예배에 큰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5. 방언은 마음의 안식을 가져 옴
이사야서 28장 11절에서 15절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 전에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이것이 너희 안식이요 이것이 너희 상쾌함이니 너희는 곤비한 자에게 안식을 주라 하셨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셨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고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사 그들로 가다가 뒤로 넘어져 부러지며 걸리면 잡히게 하시리라....”
사람들에게는 엑스타시(ecstasy) 즉 황홀감의 체험이 절대로 필요합니다. 우리가 축제같은 것을 벌이는 것은 평범한 생활에 지쳐 있는 마음에 온 동리나 도시가 한마당이 되어 축제를 벌임으로 엑스타시를 통해 지루함과 피곤을 털어버릴 수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것이 있어야 삶의 바퀴에 기름이 되어서 잘 굴러가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와서 교훈에 교훈을 더하고 율법에 율법을 더해서 늘 꾸짖는 말씀만 들으면 그만 지쳐서 넘어지고 맙니다. 신앙생활 속에는 황홀감이 있어야 합니다. 엑스타시, 즉 끌어오르는 기쁨과 평안, 소망이 있어야 하는 것인데, 이것이 어디에서 주어집니까
성경은 말씀하기를 ‘내가 떨리운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고 이것이 너희 안식이요, 이것이 너희 상쾌함이니 너희는 곤비한 자에게 안식을 주라 하였으나 저들이 듣지 아니하였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이 안식을 듣지도 않고 받아들이지도 았습니다. 그러므로 교훈에 교훈을 더하고 율법에 율법을 더하고 더하다가 피곤해서 중도에서 낙심해 버리고 만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께서 방언으로 기도하면 이 방언기도는 여러분의 마음속에 굉장한 안식과 휴식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방언기도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우리의 깊은 잠재의식에까지 들어가서 우리속에 있는 것을 다 씻어냅니다. 우리가 비를 들고 집을 청소하는 것처럼 성령께서는 방언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아는 의식 세계뿐아니라 잠재의식 속, 어린 시절부터 경험했던 슬픔과 고통과 억압과 침울함 등. 먼지와 티끌처럼 쌓여 있는 것들을 싹 소재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상쾌하고 가볍고 평화롭고 즐거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방언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은 우울증이 없어지고 정신병에 걸리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잠재의식 속의 상처들로 인해 불안, 초조, 공포에 시달리게 되는데 이러한 억압된 스트레스를 방언을 통해서 모두다 풀어놓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방언을 많이 사용하시길 빕니다.6. 방언은 성령님의 대신 기도임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6-28)
방언기도는 우리를 통해서 성령이 직접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앞날에 일어날 것을 전혀 모릅니다. 앞날에 다가올 위험도 모르고 고통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령은 이것을 알기 때문에 미리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께 간구함으로 장차 다가올 여러가지 시험과 환란들을 방지해 주는 역할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자매님 중에 남편이 버스 기사로서 시골에서 일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어느날 그 자매님이 부흥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낮부터 교회에 가서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마음에 위기감이 느껴져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기도하라, 기도하라’는 음성이 들리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기도할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자매님은 눈물을 흘리며 방언으로 기도했습니다. 부흥강사가 와서 설교하는 것도 듣지 못하고 교회에 엎드려서 계속 방언으로 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약 1시간쯤 기도하고 나니까 마음이 후련해 지면서 ‘이제는 괜찮다’라는 심정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 자매님은 시계를 보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남편이 퇴근시간도 아닌 이른 시간에 부들부들 떨면서 집에 들어왔더랍니다. 자매님이 남편에게 ‘왜 이렇게 떨어요’라고 물으니 남편이 말하기를 ‘오늘 나는 정말 죽을 것을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살았다.’고 하더랍니다.
그 남편이 차를 운전해 가다가 경사진 곳에서 엔진이 꺼져서 뒷바퀴에 돌을 받쳐놓고 승객들을 다 내리라고 했는데 그만 돌이 빠지면서 차가 뒷걸음질을 해서 벼랑에 가서 앞바퀴만 매달려서 대롱대롱했습니다. 그가 핸들을 잡고 앉아 있었는데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는 기절초풍할 정도로 놀래서 벌벌 기어나왔습니다. 그후 크레인 차가 와서 버스를 끌어올렸는데 이런 기적도 일어날 수 있느냐고 모두들 감탄을 했더랍니다.
그 시간을 보니 그 자매님이 교회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방언기도하던 시간과 일치하더라는 것입니다.
또 우리 지역장님이 구역예배 인도하러 가던 중 종로 네거리에서 강하게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 주저앉아 한 30분간 방언기도를 하니까 사람들이 둘러서서 구경을 하고 교통경찰이 교통위반이라고 경찰서로 끌고 갔답니다. 왜 그렇게 기도했는지는 자신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예배 인도 후 집에 가보니 그 시간에 강도가 드러와서 온집을 헤집어 놓았습니다. 옷가지를 마당에까지 흩어놓았는데 서랍에 있는 돈과 금붙이에는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그는 비로소 자신이 방언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의 천사가 와서 그 도둑의 눈을 가렸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만약 그것들을 모두 잃었다면 불신 남편에게 온갖 구박을 받았을 터인데, 오히려 남편도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계기가 되고 지금은 주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 남편은 경찰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은 사람으로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인 것입니다. 이러므로 기도 목적을 모르는데 하나님께서 여러분께 간절히 기도시킬 때는 방언으로 많이 기도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7. 방언은 믿는 자의 표적이 됨
마가복음 16장 17절에는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으며 병든 자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같이 계신다는 분명한 증거와 표적이 따르는데 그중의 첫째가 사람들을 괴롭히는 귀신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쫓아낼 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받는 다는 표적으로써 새 방언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방언을 알아 듣던 못알아 듣던 구원받고 사랑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증거를 받았으니 그 증거가 없는 것보다 얼마나 좋습니까!
제가 20살에 처음 신학교에 들어왔을 때 저는 방언을 못했습니다. 그런데 42세에 신학생이 된 최자실 목사님은 늘 방언기도를 하셨습니다. 저는 시기와 질투가 나는 나머지 공연히 비난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최 집사님은 늘 예수믿는 기쁨을 가지고 지내셨는데 저는 이따금 ‘정말 하나님이 계실까 만약 안계신다면 잃어버린 내 청춘을 누가 보상해 주지’하는 생각에 시달렸습니다.
저는 학생회장이고 최 집사님은 전도부장 이었는데 매주 토요일 파고다 공원에 나가 전도하면 최 집사님의 서투른 설교에 많이 사람이 회개를 하고 예수를 믿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있는 힘을 다해 지식적인 설교를 해도 사람들이 비난과 질문 공세만 퍼부었습니다. ‘야! 나보다 훨씬 무식한데 나이든 여자라고 봐주나보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집사님은 성령받고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의 증거를 가지고 확신있게 설교하는데 나는 지식으로 설교하되 확신이 없었습니다. 후에 제가 성령을 받고 방언을 말하며 확신을 가지고 말씀을 전하니 두 날 가진 검보다 예리한 말씀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므로 방언은 신자 개인의 신앙적 성숙과 촉복을 위해 주신 것으로 공중예배 용은 아닌 것입니다. 공중예배시에는 아는 말 깨달은 말로써 설교하고 대화해야지 방언으로 말하면 알아 듣는 자가 없어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방언은 내 개인기도에서 하나님과 나 사이에 질서있게 사용하면 신앙에 크나큰 이득이 되고 그로 말미암아 내가 신앙에 덕과 능력을 얻어서 다른 사람들이 아는 말로 기도하고 전도하고 설교할 때에 크나큰 위력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성령세례를 받고 방언의 선물을 받아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증거를 심령에 뚜렷이 가지고 확신에 찬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서 주신 방언의 기도를 통해서 신앙을 크게 성장시킬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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