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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재림의 때와 준비 (살전 0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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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에서 바울은 예수님의 재림 전에 죽은 성도들이 재림 때에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며, 동시에 그들과 함께 지상에 있던 성도들이 어떤 모습으로 변화되어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인가를 대단히 간략한 형태로 설명을 했습니다.
이 정도면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의문을 가지고 던졌던 질문에 대답을 충분히 했다고도 볼수 있는데, 다시 바울은 새로운 주제를 가지고 들어 갑니다.
그것은 재림의 때와 시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언제 재림하실까 하는 문제를 말합니다.

그런데 1절과 2절을 보면서 저는 상당히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대해서는 너희에게 쓸것이 없다. 왜 그런고하면, 주의 날이 도적같이 임할 것을 너희 자신이 너무 자세히 알기 때문이다. 그랬습니다.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그 말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언제 그 사실을 다 자세히 배우고 알았다는 이야깁니까 분명히 바울이 그곳에서 개척하던 3주간 동안의 교육을 통해서 배웠다는 것이 될 것입니다. 여기서 놀랍다고 하는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바와같이 신앙적으로 몹시 어린신자들을 앞에 앉혀 놓고 再臨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갓 믿은 사람들은 너무나 기초가 없기 때문에 예수님의 재림을 논한다든지, 예수님이 언제 오신다 하는 것을 가르쳐 주기에는 여러가지 어려움이 따름니다.
제가 15년 목회를 하면서 재림에 대해서 설교를 그렇게 많이 하지는 않았습니다. 재림이 언제 있을 것이라고 하는 주제를 가지고 반복해서 설교한 목사는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는 다른 목회자와 비교해서 이런 주제를 드물게 다루었다고도 말할수 있습니다.
왜 그런고하면, 교회의 성도들은 대부분이 신앙적으로 아직 어린 상태이기 때문에, 신앙에 귀가 열리기 시작하는 성도들에게 필요한 말씀이 무엇입니까 복음의 기초를 닦아 주는 것이요, 흔들리지 않도록 신앙의 자세를 바로 잡아 주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자연히 참 신앙의 기초가 될 만한 재료를 가지고 가르치게 되고, 설교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보니까 말세론이라든지,예수님의 재림의 때에 관한 그런 문제는 자주 언급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어린 신자들에게 재림 신앙을 넣어 주는 것은 혼란을 가져오기 쉽다는 제 나름대로의 판단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저의 생각과는 반대되는 입장을 가지고 목회를 했습니다. 짧은 3주간 동안 얼마나 예수님의 재림과 그 때에 대해서 열심히 가르쳤는지, 지금 떠나 있는 이 마당에도 그 문제에 대해서 쓸 것도 없고, 말할 것도 없다고 단정해 버릴 정도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바울은 확신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부지런히 가르쳤으면 그랬을까요
그러니 이제 예수 믿은지 1-2주 밖에 안되는 아주 어린 교인들을 앞에 놓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서 그렇게 세밀하게 가르쳤다면, 이건 좀 이상하다 하는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정말 놀랍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서 때와 시기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너무 예민하게 볼 필요는 없습니다. 두 단어니까 각각 다른 두가지 의미를 말한다고 느껴지기도 합니다. 성경을 해석하시는 분들도 각각 다른 의미로 해석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선택한 입장은 이것을 너무 예민하게,의미를 다른 것으로 볼려고 하다가는 이상해질수 있다는 것을 저는 압니다.
그래서 때와 시기는 당시에 헬라 문화권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일종의 관용구라고 보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고 또 정확하다고 저는 봅니다.
그러므로 때와시기는 타이밍입니다. 어느 시기를 말하는 관용구로서 붙어 다녔다고 이해하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와서 무엇이라고 물었지요. 이스라엘이 회복 될 때가 지금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여기에 예수님께서 때와 기한에 관하여서는 너희는 알바 아니요. 여기서 기한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만 시기라는 말과 꼭 같은 원업니다. 예수님께서도 때와 시기에 대해서 같은 의미로 놓고 대답을 하신 것이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면 바울은 예수님의 재림이 언제 있을 것이라고 데살로니가에서 가르쳤을까요 데살로니가 전후서에 나오는 내용에서 보든지, 다른 서신서에 쓴 바울의 입장을 종합해 보면, 두마디 밖에 안했을 것 같아요.
예수님은 언제든지 재림하실수 있다 그리고 곧 재림 하실수 있다 언제든지 와 곧이라는 이 두마디 말 밖에는 바울이 다른 말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보세요. 뭐 구체적인 무엇을 가르쳐 주어야 재미가 있지요. 시기를 얘기하면,년도를 가르쳐 준다든지 , 어느 때쯤 되겠다.이렇게 가르쳐 주어야 무엇인가 흥미가 생길 텐데, 지금이라도 오실수 있다. 언제든지 오실수 있다. 하는 그 이야기 이상은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하나도 다른 말은 못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열심히 그것을 가르쳤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잘못하면, 재림의 때와 시기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는 상당히 위험한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가급적이면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것을 풀어주기 위해서 다니엘서를 가지고 복잡하게 수치 계산을 해서, 어느 정도 윤곽을 드러내는 것처럼 말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와같은 위험한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다가 쓰러지고 맙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으세요. 보세요.
예를들면, 안식교의 교주인 윌리엄 뮐러 같은 사람의 예를 듭시다.
바울은 때에 관해서 곧,언제든지 오실수 있다.그저 막연한 이 말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뮐러는 예수님은 184

3.3.21부터 184

4.
3.20까지 1년 사이에 곧 오신다. 아주 구체적으로 날짜를 제시했습니다. 사람들이 어느 쪽에 더 흥미를 느낄까요
우리야 성경 바탕이 워낙 든든하니까 안 넘어 가지요 우리는 빼 놓고 일반적으로 어느 쪽에 더 관심을 갖겠느냐 말입니다.
뮐러의 이야기 같이 해석을 할 때에 사람들이 귀를 기울입니다. 아,그렇겠구나! 그것참 신기하다! 정말 그럴까! 하고 달려 들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수천,수만 명이 주님 오시기를 기다렸습니다. 마지막 날에는 산으로 올라갔지요. 그래도 안 오시니까 연착한다고 변명을 했습니다. 그래서 10월 22일 날 오신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이 말을 믿고 반년 동안 뮐러를 따르던 사람들은 거의 미쳐 버렸습니다.직장 가진 사람들은 직장을 포기해 버렸습니다, 농사를 포기해 버렸습니다. 부인들이 그냥 마음이 들떠서 가정도 돌보지 않았습니다. 금방 10월22일이 다가왔습니다. 소복을 입고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날이 어두워지고 한 밤중이 되어도 예수님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다시 변명했습니다.
우리들이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예수님이 공중에 지금 우리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 재림해 계시고,우리 눈에는 아직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래도 그것을 또 믿습니다.

참, 영적세계라는 것은, 우리가 말씀을 바로 깨닫고,바로 가르치고 방향을 바로 보지 않으면, 사람을 얼마든지 우롱할 수가 있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재림의 때와 시기에 대해서 열심히 가르쳤다는 이야기는 이렇게 그들을 세뇌 시켰다든지 우롱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우직하게 예수님은 지금이라도 오실수 있다. 그러므로 준비하시요.예수님은 곧 오십니다. 그러므로 방심하지 마시요. 하는 단순한 말을 가지고 3주간을 가르쳤다고 하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나는 그렇게 못하니까 더 놀랍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저는 생각해 봅니다.
바울이 3주간 동안 재림의 때에 대해서 그렇게 소상하게 가르쳤을까 아마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환란 중에 있었기 때문에 너무나 어려운 핍박을 당하는 그들을 위로 할려고 할 때에 예수님의 재림 이야기 밖에 더 했겠느냐 예수님의 이야기를 가지고 재림 이야기를 할 때에, 오랜 후에 오신다고 하면, 그들이 실망할테니까. 바로 오시니까 조금만 더 참아라. 조금만 더 참아라.하는 의미에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가르쳤을까 하고 생각해 봤습니다.
아마 이런 의미도 있었을 것입니다. 환난과 핍박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재림 신앙만큼 힘을 북 돋워 주는 것이 없습니다. 재림 신앙은 생숩니다. 환난과 핍박을 당하는 자에게 예수님의 재림이 지금 곧 임한다고 하는 그 말은 그야말로 모든 고통과 아픔을 잊어 버리게 하는 어떤 면에서는 하늘의 양식, 하늘의 음성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자말자 온 동네로부터 핍박을 당해 이리 쫒기고,저리 쫒기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위해서 바울은 예수님은 곧 오신다고 말했을 확률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것 만이 이유의 전부였을까 라고 물었을 때, 저는 그렇다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데살로니가 후서를 다음에 배우면 알겠지만,바울은 예수님이 곧 재림 하신다는 말씀을 가르치기는 했지만, 자기 당대에 예수님이 오시지 않을수도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에는 어떤 징조 같은 것이 보일 수 있을 것이라고 바울은 분명히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징조가 나타나기 전에는 너무 성급하게 재림을 기다리는 것은 신앙에 해를 끼칠수 있다는 것을 바울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 것을 알고 있는 바울이 단지 환난 받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지금 당장 오신다 고만 가르쳤다면, 어떤 면에서는 석연치 않은 느낌을 우리가 가질 수 있게 됩니다.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예를들어 봅니다.
이웃집의 애기를 맡아서 보아 주기로 한 아주머니가 있습니다. 애기 엄나는 급한 일이 있어서 아주 멀리 갔습니다. 저녁 10시 경에야 돌아 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엄마를 찾아서 못 견디게 만듭니다. 사람을 못살게 만들어요. 아무리 먹을 것을 주고,좋은 것을 주어도 견딜수가 없어요. 그래서 그 다음에는 애를 없고는 기차역으로 나가면서 다랩니다. ‘야, 저기 기차가 지나가면 엄마가 올거야,곧 엄마를 만난다구 하면서 늘 다니던 기차역으로 나갑니다. 그 때가 한 저녁 5시 쯤 되었습니다. 그러면 애가 울음을 딱 그치고 엄마가 오나보다 하고 눈을 반짝이며 기다립니다.

만약에 환난 당하는 데살로니가 교인을 그저 단순히 위로하기 위해서 재림의 때가 바로 지금 당장이라고 가르쳤다면 바로 이 아주머니나 무엇이 다를 바가 있느냐 그 말입니다. 목회를 꼭 이런 동기에서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런 식으로 가르쳐야 한다면, 어떤 면에서는 순수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바울이 그렇게 가르친 이유는 무엇일까
바울은 목회자의 양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언제 주님이 오실지 모르는 상황이라면 되도록이면,교인들로 하여금 정신차려서 주님 맞을 준비를 시키는 것이 낫다. 한사람이라도 주님 재림 때에 버림을 당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된다. 만약에 한사람이라도 버림을 당하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내 책임이다.하는 목회자로서의 양심에서 우러나서 그와같이 주님이 재림하실 때를 소상하게 가르쳤다고 봅니다.

여러분! 때를 모를 때는 서두르는 것이 최곱니다.
자, 비행기가 몇시에 도착할지를 모릅니다. 연착을 한다는 소식입니다. 그럴 때는 별수가 없어요. 서둘러 공항에 가서 한 시간이든,두 시간이든 기다리는 것이 상책입니다. 그렇지요.
예수님의 재림이 오늘일지, 내일일지 잘 모릅니다. 잘 모를 때에는 성도들로 하여금 날마다 기다리도록 서두르게 만드는 것이 옳은 방법입니다. 그래야 만이 그 사람들이 잠시도 방심을 하지 아니하고, 버림을 받을 위험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이와같은 목회자의 심정에서 3주간 동안 그들을 그렇게 열심히 가르쳤다고 봅니다.

여러분은 어떤 유형의 목회자를 원합니까
약간 우직스럽게 보이고, 좀 무식하게 보이면서도 귀가 아프게 중요한 말을 반복하는 목사를 원합니까 아니면, 좀 유식하고 여유가 있고, 논리적인 그런 기질이 있어서,예수님이 지금 당장 오신다고 말하는 것을 은근히 비웃는 좀 인테리 목사를 원합니까
데살로니가에서 바울은 좀 미련스럽고,우직한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지금 오실 것이라고, 당장 오실 것이라고,수십번 반복해서 그들을 가르친 목회잡니다. 여러분도 이런 목회자를 원합니까

저는 어릴 때 기억을 몇가지 가지고 있습니다.
국민학교 때 늦잠을 좀 잤으면 하고 생각했는데,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항상 잠이 부족해서 늘 괴로웠어요. 조금만 늦잠을 자면 이불을 걷어가고, 야단을 치시는 분이 계셨어요. 우리 아버지였어요.
부지런한 훈련을 시키실려고 그랬겠지요. 그러나 아버지의 지나친 엄격함 때문에 가깝고 친밀함을 느끼지를 못합니다.
또 저는 어린이 때부터 어른 예배에 참석을 했는데, 저의 어릴 때 목사님들은 한결같이 교인들을 못살게 구는 목사님들이었습니다. 이불을 걷어 가는 아버지와 비슷했습니다. 교인들을 달달 복는 못사님들이었습니다.
여러분, 깨어야 합니다. 자면 망해요. 예수님이 문 밖에 와서 두드리십니다. 깨어야 합니다.
늘 이 소리를 귀가 아프게 들어요. 그러니 육신의 잠도 마음껏 자지 못하고, 영혼의 잠도 잘 틈이 없이,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 잡혀서 살았습니다. 그 때의 목사님들은 지금처럼 講解說敎니 그런 말도 없을 때입니다. 설명도 잘 안해 주어요. 왜 깨어야 하는지, 또 깬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설명을 해 주면 귀를 기울이고 들을 수 있는데, 그저 허공을 쳐다보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깨라고만 소리칩니다.
그래서 눈을 붙여서는 안되는구나! 예수님 오실 때 잠자는 사람만큼 불행한 사람이 없다. 내가 깨어 있을 때 주님이 오셔야 된다.어린 마음에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철야 많이 하는 사람일수록 주님을 영접할 준비가 잘 되어 있고, 새벽기도 열심히 나가는 사람일수록 유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생각해 보면, 우직하게 똑 같은 말을 일년내내 반복하면서 교인들을 자지 못하도록 하던 목사님들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 분들의 그 소리가 지금도 귓전에서 맴돌고 있습니다. 내가 영적으로 잠들 것 같은 위험을 느낄 때마다 그 소리가 들릴듯 합니다. 늦잠을 자지 못하도록 늘 깨우든 아버지, 그 아버지도 저에게는 참 고마운 분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덕분에 지금 이만큼이라도 부지런해질수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요사이 현대교회의 성도들을 보면, 세련되고 유식한 것처럼 보이는 목사를 원하는 것 같습니다. 강단에서 재림이니,십자가니,피니,죄니,지옥이니 하는 이 원색적인 이야기만 반복하는 목사들을 안 좋아하는 것 같아요. 좀 무식하게 봅니다. 좀 시대에 뒤 떨어진 목회자로 봅니다.
그래서 많은 목사들이 좀더 유식하게 보일려고, 신학자의 이름을 들먹이고,영어 단어를 들먹이며,화려하고 고상한 단어들을 구사해 가면서 그야말로 빙빙 돌면서 귀를 즐겁게 하는 멧세지들을 전합니다.
여러분, 꼭 기억을 하세요. 황목사가 그와같은 목사라면, 여러분이 염려해야 합니다.
내가 여러분의 비위를 맞추려고, 좋은 말들을 골라 가면서, 가급적이면 같은 말을 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 설교를 하지 않았나 지난 목회의 시간들을 돌이켜 보면서 반성을 합니다. 그래서 지금이 이 모습이에요.
차라리 데살로니가에서 목회한 바울처럼 목회를 했더라면, 성도들이 좀더 깨어서 조금더 눈초리가 반짝이며 신앙생활을 했을지 모릅니다.

현대교회가 유식하다는 목사들 때문에 망하고 있어요.
바보처럼 무식하지 못해서 오늘날 교회가 타락하고 있어요.
1900년이 지난 다음에, 바울이 우리 사랑의 교회에 와서 황목사의 설교를 검토해 보았다면 아마 놀랄지도 모릅니다. 그런면에서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며, 마음의 가책을 받습니다. 두려움을 느낍니다.

사랑의 교회의 강단은 중요한 복음의 진리는 듣던지 말던지 반복해서 열심히 외치는 목사가 서게 해 달라고 여러분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의 영이 사는 길이에요.
아,저것도 전에 하던 말 또 하는구나!
그래서 날마다 새로운 것만 듣기를 원해요!
그러면 목사도 망하고,여러분도 망합니다.
요즈음의 자유주의 신학,흐트러진 신앙이 어디서 옵니까 날마다 새로운 것을 찾다가 보니까 성경이 고리타분해 보이고, 답답해 져서 학문으로 문학으로,예술적으로 찾아 다니다가 이렇게 되지 않았습니까

지금부터 정말 심각한 때가 닥아오고 있습니다.
바울이 3절에서 예언한 것처럼 어두움이 우리 주변을 지금 짙게 감싸고 있습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정신차릴 도리 밖에 없습니다.
등산을 갔다가 조난을 당해서 동굴 속에 갇힌 사람들은 잠자지 않을려고 서로 흔들어 주고, 서로 때리면서 정신를 차리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는 것입니다. 이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면 구조 되지를 못합니다. 잠들면 죽는 것입니다. 죽지 않기 위해서는 안자야 합니다. 안자기 위해서는 서로의 뺨을 때리면서라도 애를 써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는 바로 이런 시대라고 생각을 합니다. 목사는 성도들의 뺨을 때려야 할 것입니다. 성도들은 목사의 뺨을 때려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든지, 함께 자지 않도록 우리는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여러분, 3절을 보세요. 저희가 평안하다,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 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주님은 밤에 오신다는 말씀이 성경에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밤은 실제적인 밤이 아닙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에서는 이 밤이라는 단어를 실제적인 밤으로 믿고 있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부활절 저녁에 재림한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유대인들 중에서는 유월절 저녁에 주님이 재림하신다고 믿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 전체를 살펴보면, 이 것은 비유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밤은 무엇입니까
영적으로 깊이 잠들어 있는 사람에게 해당하는 시간을 의미합니다. 영적으로 깊이 잠들고 나면 그 사람의 모든 시간은 밤의 시간입니다. 꼭 같은 시간이지만,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에게는 모든 시간이 낮의 시간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는 잠자는 자들이 많이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의미에서 캄캄한 밤에 주님이 재림하신다고 볼 수있습니다. 영적으로 캄캄한 밤에 주님이 오신다는 것입니다.

잠자는 자들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까
3절에 안전하다. 평안하다. 도대체 위기의식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시대를 전혀 분별하지를 못합니다. 그저 자기 배만 부르고,편안하니까 지금이 제일 좋다는 이야깁니다. 이거야말로 보통 심각한 병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그와같은 증상이 있는지 한번 돌아 보세요.
누가복음으로 넘어가 볼까요 밤에 처한 사람 증세는 12:19절에 보면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여러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 하자 하리라.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이제는 먹고 즐기자는 이야깁니다. 영적으로 깊이 잠이 들어서 밤에 처하여 있는 사람의 생각은 즐기자,즐기자, 시간이 아직도 많이 있다하는 사고에 젖어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사업이 잘 되십니까 돈이 많아요. 걱정 안하고 남은 생을 살만큼 기반을 다 닦아 놓으셨나요. 건강해서 병을 모르시나요. 아직도 젊어서 죽을 생각을 한다는 것은 너무 망상처럼 들리나요.
아직도 여러분들이 자신만만하고, 모든 면에서 , 야, 아직 시간과 기회가 많이 남아있다고 생각한다면 여기의 어리석은 사람처럼 깊이 잠들어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저는 경고합니다.
세상적으로 성공하시는 분들, 주의 하시기 바랍니다. 성공 때문에 여러분 잠들 위험이 있습니다.
가정이 너무 행복한 분들, 주의 하시기 바랍니다. 가정이 너무 행복하기 때문에 여러분과 가족이 영적으로 잠들어 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세상에 대한 꿈이 너무 화려하고 대단히 큽니까 그 꿈 때문에 여러분의 영은 잠들 위험이 있습니다.
오히려 실패하고, 오히려 뜻대로 되지 아니하며,나 자신의 연약함을 자주 느끼는 한계점에 도달한 사람은 오히려 자신의 약함과 부족함을 알기 때문에 영적으로 깨어 있을 수가 있습니다만, 이 어리석은 부자와 같이 만사가 잘 되면, 그것 때문에 영적으로 심각한 어두움이 찾아 올 수가 있습니다.

눅 21:34절을 보세요.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 밖에 그날이 덫과 같이 임하리라. 마음이 둔해지는 것이 자는 것입니다. 감각이 없어요. 아무리 소리쳐도 감각이 없고, 아무리 아픈 데를 찔러도 가책을 받지 않습니다.
설교를 하면서 어떤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목사의 목소리가 올라갑니다.안타까워 소리를 치지 않을수 없는 절박한 심정이 설교자의 마음에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의 얼굴을 보면, 맹송맹송해 가지고 있는 분들이 많아요. 그 이유가 뭔지 아세요. 감각이 없어요. 속으로 왜 저러나! 한번씩 가다가 소리가 올라가는구나. 아예 목사를 손바닥 위에 올려 놓고 놀아요.
예수님 당시에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고, 곡을 하여도 울지 않는다고 한것처럼 요즈음 성도들은 아무리 외쳐도 듣지를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정말 그런 그 결과는 상상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민감도는 얼마 정도입니까
말씀을 들을 때마다, 기도할 때마다, 찬송할 때마다, 성령이 내 마음에 찔러 주실 때마다, 그 때 그 때 반응을 일으킵니까 살아 있는 사람이요,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둔합니까 감각이 없습니까 조심하세요!!!

베드로 후서 3:3-4절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쫒아 행하며, 기롱하여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된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무슨 이야깁니까 재림 재림 하지만, 우리 조상들이 다 그대로 있지 않냐 무슨 재림이야! 라고 재림을 이야기하는 사람을 희롱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은 영적으로 깊이 잠들어 있는 밤의 사람입니다.

몇 곳 성경을 찾아서 영적 잠자는 사람들의 상태를 알아 보았는데, 이런 상황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한 사람도 없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들은 절대로 이런데 빠지면 안됩니다.
밤에 속한자에게 재림은 무엇과 같다고 했습니까 도적같이 임한다고 했습니다. 해산의 고통이 임하는 여인처럼 당황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큰 위로가 있습니다.
다시 데살로니가 전서 5장으로 돌아 갑니다. 4절에 봅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다. 야 이거 대단한 이야깁니다. 그래서 너희에게는 예수님이 도적같이 임할수가 없다. 5절에 그래서 너희다 낮의 아들이요, 빛의 아들이다. 참 이거 대단한 이야깁니다. 어떻게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이렇게 자신만만하게 말할수 있었을까요
만약에 황목사에게-너희 교인들은 다 빛의 아들들이냐,예수님의 재림이 도적같이 임하지 못하겠느냐 라고 물을 때에 저는 빨리 대답하기가 어렵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해당되지만, 어떤 사라들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는 이야기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데살로니가 교인들아,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너희는 다 낮의 아들들이다. 예수님이 아무리 도적같이 임하고 싶어도 너희에게는 임할 수 없도다 아멘 !
이거 얼마나 대단한 말입니까 바울은 행복한 목회잡니다. 한사람도 의심이 가는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생각해 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정말 바울에게 이렇게 확신을 심어줄 만큼 완벽했기 때문일까 신앙면에서나, 생활 면에서 완벽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어떤 것에 근거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인가 저는 이 두가지를 놓고 생각을 해봅니다.
그런데 전자는 아닌 것 같아요. 왜그런고 하면, 우리가 잘 압니다마는, 아무리 사람이 믿음이 좋고, 모든 면에서 성결하다 할지라도 완전하지는 못하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한사람이면 어느 정도 가능할지 몰라도, 80-100명의 성도들을 놓고, 한사람도 어두움에 속하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삶이 완벽해서 그렇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는 12명 가운데서도 마귀가 하나 있었는데, 바울이 목회하던 데살로니가 교인들 중에도 염려스러운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어디에다 근거를 둔 것일까요
저는 9-10절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우리 모두에게 구원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9절에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10절에는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던지 자던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의 뜻이 무엇입니까 우리와 함께 영원토록 하나님 나라에서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선하신 뜻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예수님의 선하신 뜻을 놓고 볼 때에, 환난 가운데서도 예수를 믿겠다고 찾아 나온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예수님이 한사람도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확신이 바울의 마음에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완벽함에 있습니까 하남님의 선하신 뜻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에 있습니다. 이것에 근거해서, 너희들이 주님을 믿겠다고 나온 이상,너희는 어두움에 속한 자가 될수 없다! 고 자신있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이라면, 저도 우리 사랑의 교회 교인들에 대해서 바울처럼 말할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의 교회 성도들이여!
여러분은 어두움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아멘,
우리 모두는 빛에 속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잠잘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아무리 갑자기 오신다고 하더라도,도적같이 임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환한 대낮에 깨어 있기 때문에 우리 모르게 오실리는 없습니다. 저는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려고 하는 그 뜻을 믿기 때문에 담대히 말할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르게 오실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오늘도 영원한 나라에서 우리와 함께 영원토록 살기를 바라고 계시기 때문에 사랑의
교회 성도들을 향해서 바울처럼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우리가 어두움에 속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조심은 해야 합니다.
바울도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조심하라고 말합니다.
6절에 우리는 낮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근신해야 합니다.
자, 깨어 있다는 말은, 재림을 늘 생각하며 기다리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오실까 내일 오실까 주님은 꼭 오실텐데...., 하면서 늘 기다리는 것을 일컬어서 깨어 있다고 합니다. 제가 어릴 때 생각한 것처럼 잠자지 않고 눈 뜨고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생각이 주님의 재림을 소망하고 있는 자세를 놓고 깨어 있다고 합니다.
이런 면에서 여러분 깨었습니까

근신한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도덕적으로 타락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죄짓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죄짓지 않고,죄와 멀리하는 생활을 일컬어서 근신한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해서 깨어서 근신한 사람은 믿음과 사랑과 소망으로 완전무장한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8절입니다.믿음으로 흉배를 소망으로 투구를 몸에 쓰고, 이제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적군에게 패하지 않을 만큼 완전무장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남은 시간이 얼마나 있는지 모르지만, 깨어서 근신하며 항상 주의 일에 힘쓰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주의 일에 힘쓰기 위해서는 11절을 주의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 고 했습니다.
서로가 잠들지 않기 위해서 도와 주어야 합니다. 조난 당한 등산대원처럼 뺨을 때려 가면서 라도, 오늘 우리는 서로 붙들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만이 주님 재림 하실 때, 주님이 재림 하실 때, 우리는 기쁨으로 주님을 영접하실 수 있습니다.
나 혼자만 깨어있으면 된다. 하는 이기적인 생각에 물들면 안됩니다.
우리는 함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주님 오실 때 깨어 있으면 세가지 좋은 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즐겁게 주님 영접할수 있고,
둘째는 만약에 환난 전에 휴거 당한다는 설에 따른다면, 우리는 환난을 당하지 않아도 됩니다.(계3:10)
셋째는 영원히 주와 함께 사는 축복이 그 때부터 시작됩니다. 할렐루야!!!

얼마나 좋습니까 얼마나 좋아요!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것 손해 보는 것 하나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 다 TV 앞에 앉아 있고, 술마시고 노는데, 이렇게 밤 늦게까지 와서 참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바로 살아 보겠다고 하는 것, 이것 참 얼마나 멋있는 투잔지 모릅니다. 이거는 손해가 없어요. 아무리 시간을 바쳐도 손해가 아닙니다. 이와같이 영적으로 깨어 있을 때, 그 기쁨,그 영광 어디다가 비교하겠습니다.
우리가 이런 큰 소망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비록 현실에, 고통이 자주자주 우리를 괴롭히고, 끌어 당겨 넘어지게 합니다마는, 낙심하지 마세요. 주님 오시면 다 꿈과 같이 잊어 버리게 됩니다. 주님 오시면, 모든 고통 눈 녹듯이 사라집니다. 깨어서 근신하며 주님 오시기를 사모하고 있으면, 현실에 아무리 많은 상처와 고통을 당한다 할지라도 그 모든 것을 보상하고도 남는 놀라운 축복 주님이 오시면서 가져다 주실 것입니다. 이와같은 소망 가운데서 우리 모두 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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