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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 기근, 기갈의 뜻 (암 08: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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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넓은 사막을 정처없이 방황하며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지고 있는 물이 다 떨어져가고 있는 것을 알고 걱정과 불안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빨리 오아시스를 찾아야 합니다. 그러다가 사람의 발자국을 발견하고는 “이젠 살았다” 하고 소리를 쳤습니다. 발자국만 따라가면 분명 오아시스를 만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계속 따라갔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따라가도 발자국은 끝이 없고, 해는 점점 기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야 그는 자기 발자국을 자기가 되밟아가면서 맴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윽고 저녁 노을과 함께 북극성이 반짝였습니다. 별을 보고 그는 제대로 방향을 찾아서 바른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언제까지 똑같은 길을, 내가 내 발자국을 쫓아가며 거기에 길이 있는 것처럼 한평생을 살아가야 합니까 이제는 생각을 바꾸어서 하늘을 쳐다보아야 합니다. 하늘을 쳐다보는 새로운 계기를 만들어야 비로소 내 생의 궤도가 바른 길에 서게 될 것입니다.
경제라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특히 먹는다는 것은 참 심각합니다. 예로부터 우리는 ‘의식주(衣食住)’라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피난 다닐 때에 보니까 그게 아닙니다. 식의주입니다. 옷을 벗어주고라도 음식을 먹어야 됩니다. 그 당시 저한테 시계하나가 있었는데 옛날에는 그것이 참 소중한 물건이었습니다. 한 동리에 하나 있을까 말까 할 정도였지요. 피난길에 저는 그 시계를 끌러주고 고구마 다섯 개를 얻어 먹었습니다. 그 따끈따끈한 고구마를 손에 들고 하나님 앞에 감사기도 드릴 때에 눈물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아마도 그런 순간은 다시 경험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먹어야 하는 것, 참으로 절실합니다. 우리네는 너무 오랫동안 못먹고 살아왔습니다. 보릿고개니 뭐니 해서 참 배고팠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 어른들께 배운 인사법이 있습니다. “진지 잡수셨습니까” 이것이 어른들께 드리는 인사입니다. 그러면 “오냐, 너는 밥 먹었느냐” 이것이 아이들을 대하는 어른의 인사입니다. 그런가하면 나이를 물을 때에도 “너, 몇 살 먹었니”하고,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에는 “애를 먹었다”고 합니다. 공금횡령을 가리켜서 “공금 해먹었다”, 기억이 없다는 말을 “잊어 먹었다”, 욕을 할 때에도 “빌어먹을 놈”이라고 합니다. 또 가족 구성원을 식구(食口)라고 불렀습니다. 한 가정을 책임지고 있는 가장의 입장에서 볼때에는 전부가 입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곧, 식구가 몇 명이라는 것을 입이 몇 개다, 라는 것입니다. 겁나는 얘기입니다. 모든 것을 먹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것 밖에 보이지 않았고, 그것 밖에 생각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제는 먼 옛날 얘기처럼 들리겠지만 그런 현실 속에서 우리가 살아왔습니다. 먹어야 삽니다.
그러나 요새는 두고도 안먹는 데에 문제가 있어요. 어떤 보고서를 보니까 우리네 아가씨들의 40%가 골다공증에 걸렸다는 것입니다. 이 병은 주로 나이 50이 넘어 폐경기를 맞는 여성에게 생기는 병인데, 처녀들이 음식을 안먹어서 이 병이 걸린답니다. 평지에서도 넘어지고, 부러지면 접골이 안됩니다. 몸이 병든 게 아니라 아예 뼈가 병들었어요. 또 지난 12월 7일 한겨레신문 사회면에 실렸던 얘기입니다. 급식시행 국민학교 음식오염 쓰레기몸살 국민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매일 300g의 점심 급식을 하고 있는데 그 중의 20-50%가 그냥 남는다는 것입니다. 남은 음식은 곧바로 쓰레기가 됩니다. 그래서 국민학교 마다 이때문에 큰일이라는 것입니다. 이것, 죄받을 얘기 아닙니까 애들을 어떻게 키워 놓았기에 그렇습니까 입맛 없다고 안먹고 일부러 굶는답니다. 보십시오. 한편에서는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굶어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못먹어서 생기는 후유증으로 1년에 3천만명이 죽어갑니다. 그런데 멀쩡한 음식을 쓰레기로 버려야 한다니요 이게 우리의 현상입니다. 자, 이러고도 복을 달라고 할 것입니까 복받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음식을 두고도 안먹어서 병든 것 가지고 건강을 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깊이 생각할 문제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도 절대 필요 요소가 있습니다. 첫째가 음식입니다. 먹어야 살지 않습니까 둘째, 지식이 있어야 됩니다. 셋째, 말씀이 있어야 됩니다. 좋은 음식을 먹어서 우리가 건강을 유지합니다. 좋은 지식을 얻어서 우리의 건강이 건강합니다. 잘못된 지식을 배우면 일생을 망칩니다. 또 좋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서 영혼이 건강해집니다. 예로부터 건강한 몸으로 건강한 정신이 난다고 했습니다. 일리가 있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얘기가 다릅니다. 건강한 정신에서 건강한 몸이 나옵니다. 건강한 영혼이 있고야 건강한 정신이 있고, 건강한 철학이 있고, 건강한 이성이 있습니다. 오히려 육신이 병들었기 때문에 정신이 건강해지는 사람이 많습니다. 육신이 병들었기 때문에 바른 신앙을 찾고, 바른 인격을 찾고, 바른 경건을 찾아서 건강한 영혼이 얼마든지 그런 사람들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이 병들었을 때에는 사상이 병듭니다. 정신이 병들고 나니까, 육체까지 병들고 맙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저는 우리교회 교인이 간증 삼아 하는 얘기를 듣고 참 고맙게 생각한 일이 있습니다. 교회에 나온 지 얼마 안되었지만 교회에 나오면서 자기도 모르게 생활이 점점 깨끗해지고 경건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만 친구에게 이끌려서 주일날 골프도 치러 가고, 낚시질도 가고, 이렇게 몇 주일 예배에 빠졌습니다. 그래 전에는 꾸준히 나왔었지만 나오다 안나오다, 그렇게 얼마동안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황폐해지고, 빈약해지고, 어느 사이에 깊은 죄악 속에서 들어가 있는 것을 발견했답니다. 깜짝 놀란 그 분은 이것 안되겠다, 이제는 모든 일 다 제쳐놓고, 주일날이면 꼭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공급받아야겠다, 그래야 비로소 내가 바로 살 수 있겠다, 모든 생활 중에 이것을 최우선으로 하자, 라고 결심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얼마나 말씀을 중요하게 생각합니까 한두 주일 교회에 빠져도 괜찮겠습니까 간간이 걸러도 괜찮은 것입니까 영양실조에 안걸리겠습니까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자기 몸 병드는 것은 알지만, 영이 병들어서 어느 사이에 마음이 황폐해지고, 비틀어지고, 썩어져나가는 것은 깜빡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 예수님께서는 아주 강하게 말씀하시고, 또 증거를 보여주셨습니다. 광야에서 사십 일 금식기도를 하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심히 두렵고 배고팠다고 말씀합니다. 그 절박한 시간에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 하셨습니다. 이것이 어느 시간에 할 수 있는 말씀입니까 여러분, 사십 일을 굶은 그 절박한 시간에도 말씀이 먼저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절대적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내 영이 살 수 없고, 이것이 없이는 내 정신이 살 수 없고, 이것이 없이는 내 육체도, 사회생활도, 인격도 없는 것입니다. 이 원리를 인정하고, 이 안에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아모스 당시에 있었던 얘기입니다. 그 당시 국제정치는 이스라엘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을 끈질기게 괴롭히던 앗수르 나라가 아랍과의 전쟁에 휘말려서 나라 기반이 흔들립니다. 이 공백을 이용하여 이스라엘은 유리한 고지에 서게 됩니다. 여로보암 2세는 주변국가들을 다시 점령하고, 솔로몬 때의 왕국을 재건하고자 했습니다. 백성들은 기대감에 가득찼고 풍요와 번영이 저들의 현실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사치해졌습니다. 타락했습니다. 아모스 2장 6절 이하에서 보듯이 빈부격차가 심해졌습니다. 5장 11절 이하에서 보듯이 부정부패가 있었습니다. 관리들은 부패하고, 백성들은 타락하고, 사치하고, 방종했습니다. 바로 그 때에 하나님께서 선지자 아모스를 통하여 이 메세지를 주십니다. 무서운 선언을 하십니다. 얼핏 생각하면 큰 심판같지 않게 느껴집니다. 당장 바벨론 나라가 쳐들어와서 망하리라, 당장 경제가 망하리라, 당장 지진이 나리라, 당장 재난으로 인해 다 죽어버리리라, 하시지는 않습니다. 조용한 것 같으나 가장 근본적인 무서운 말씀입니다.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11절)” 이 땅에 기근을 보내리라, 굶주림을 보내리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굶주림은 경제적 굶주림이 아닙니다.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11절).” 그래서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12절)” 말씀의 무서운 기근을 보내겠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사실 종말적 통고입니다. 참 기근이 무엇입니까
여러분도 동남아라든가 아프리카 등지의 어려운 나라들을 많이 여행해보셨을 것입니다. 혹은 책이나 텔레비젼에서도 그런 나라들의 풍물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끔여기에 대해 제게 질문하는 분도 있습니다. “저들은 왜 저렇게 못삽니까 세상에 저렇게 비참하게 몇백 년 몇천 년을 삽니까 왜 저 모양입니까” 정말로 그네들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비참합니다. 그 이유가 뭡니까 하나같이 종교문제 때문입니다. 종교가 잘못되었습니다. 잘못된 종교에 시달리면 인간성, 지식, 경제, 정치, 문화, 가릴 것 없이 다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누나도 분명합니다. 필시 종교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정신과 육체와 사회생활과 가정생활이 다 무너지고 맙니다. 몇 년 전 아프리카에 한발(旱魃)이 심해서 경제적으로 여렵고, 식량이 없다고 하여 우리 대표자들이 한번 가보았습니다. 정말 그 땅에 물이 없어요. 그런데 땅을 파보니까 물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땅을 파서 물을 끌어낼 생각을 안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네가 ‘우물 파주기 운동’을 해서 여러 마을에 우물을 파주었습니다. 그 마을들은 그 우물로 물도 먹고 농사도 지어서 잘살게 되었답니다. 세상에, 우물 하나 팔 생각도 못하다니, 왜 그랬을 것 같습니까 그저 자기들의 우상 앞에서 물 달라고 빌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늘이 주는 재앙이다. 그러니 가만히 앉아서 죽자’는 생각입니다. 이렇듯 종교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모릅니다. 여러분, 말씀이 끊어지면 지금 있는 부귀영화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말씀이 들려지지 않는 순간, 그 건설이나 번영은 하루아침에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고로 말씀이 들려지지 않을 때가 가장 어려운 것입니다.
또 하나, 말씀이 믿어지지 않을 때에 문제가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말씀이 들려지지 않고 선지자가 떠나는 것도 큰 문제지만, 가장 불행한 것은 교회에 나와서까지 하나님 말씀을 못듣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제일 불쌍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안들려지는데 어떻게 하겠어요 안믿어지는데 어떻게 하겠어요 또 한하나, 듣기는 들어도 자기를 향하는 말씀으로 들리지 않고, 꼭 다른 사람을 향한 말씀으로만 들리는 것이 문제입니다. 어떤 때에 설교하다가 보면, 젊은 사람 둘이 앉아 있다가 제가 사랑하라, 하면 서로 쿡 찌릅니다. 마치 한쪽에서 ‘네가 사랑해라’ 이쪽에서는 ‘너나 사랑해’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서로 자기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또 분명히 자기가 말씀을 들으면서도 “이 말씀은 우리 며느니가 들어야겠는데, 이 말씀은 남편이 들어야겠는데, 이 말씀은 누가 들어야겠는데....”하며 열심히 필기합니다. 대개 필기하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리고는 집에 돌아가서 잔소리가 많습니다. 모두들 다 모여라 해서 집안 식구들에게 열심히 설교하는 것입니다. 이것듣기 싫어하는 젊은이들이 많아요. 은혜는 자기가 받을 생각을 하는 것이 우선이지요. 자기는 전혀 예외시하고, ‘너희들 이것 들어라’ 하다니요. 얼핏 고마운 것 같으나 문제가 있습니다. 말씀은 항상 내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개인적인 말씀, personal한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듣지 않고, 사회가 틀렸다, 누가 틀렸다, 누가 잘못됐다고 전부 다른 사람들에게 향한 말씀으로만 들려진다면, 여기에 앉아서 계속 그 생각만 하고 있다면, 이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말씀이 떠났습니다. 말씀의 역사가 떠났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에스겔, 예레미야, 이사야 등 선지서를 보면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가서 전하라,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전하라, 그리하여 선지자가 있다는 것을 알려라 선지자가 떠나면 끝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절박한 어려움을 겪었을 때가 말라기서 이후부터 예수님 오실 때까지 입니다. 그 사백 년동안 선지자가 없었습니다. 말씀이 끊어졌어요. 이스라엘로서는 가장 무서운 암흑기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장 온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우선 어딘가에는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바른 말씀이 들려지고 있어야 합니다. 어딘가에 선지자가 있어야 구원이 있는 것입니다. 말씀이 떠나면 안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 가운데 선지자가 있은 줄은 알지니라(겔 2:5)” 하나님의 말씀이 아직 떠나지 않았음을 알리라고 계속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은 내가 기근을 보내리라, 그후에는 말씀을 들을래야 들을 길이 없으리라, 아무리 말씀을 들으려고 헤매도 들을 길이 없으리라, 하십니다. 이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제가 평양에 갔을 때에 제일 마음 아팠던 것이 이것이었습니다. 그곳에는 말씀이 들려지지 않습니다. 교회라고는 하지만 예배드린 후에는 성경책을 고스란히 놓고 돌아가야 합니다. 절대 가져가지 못합니다. 교회에 와서 성경책 보고 찬송 부를 때에 눈물 흘리며 감격합니다만, 그토록 갈급하게 말씀을 사모하는 데에도 불구하고 성경책 하나를 집으로 가져가지 못합니다. 또 이제는 오래 전의 얘기가 됐습니다만 옛날에는 모스크바에도 성경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마다 성경구절을 사방에 써붙였습니다. 예배 두 시간 전부터 교인들이 교회에 나와서 성경구절을 필기합니다. 그리고는 일주일 동안 이 말씀과 함께 살았어요. 여러분, 말씀을 얻으려고 그렇게 애써도 얻지 못하리라고 하시는 심판의 말씀이 여기 있습니다. 왜입니까 이미 주신 말씀을 저버렸기 때문입니다. 또 말씀이 끊어질 때에 그 사치와 그 번영과 그 타락이 어떻게 된다는 얘기입니까 아주 멸망으로 치닿고 만다는 것입니다.
영국의 한 저널리스트가 국회의원과 의사, 교수 등 지도자급 인사들에게 이런 앙케이트를 내보았다고 합니다. 당신이 만약에 부득이 3년동안 감옥에 가 있어야 된다는 그 동안에 읽고 싶은 책이 무엇이냐 그랬더니 98%가 성경이라고 대답했답니다. 여러분, 나이가 점점 들면서도 읽어야 할 책이 무엇입니까 성경 밖에 없습니다. 제가 아는 장로님한 분은 92세인데, 책을 좋아해서 그 분 서재실이 굉장히 컸습니다. 그 집에 갈 때마다 참 부러웠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가보니 그 많던 책이 하나도 없어요. 오직 책상 위에 성경책 한 권 밖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큰 글자로 ‘나는 이제 이것 밖에는 필요없다’고 써놓았습니다. 나는 신문도 안본다, 나는 이 말씀 외에는 아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느 싯점에 있습니까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말씀이 없음 말씀이 떠나고, 말씀을 등한히 여김으로 오는 그 엄청난 멸망과 파멸을 생각해보았습니까 부정, 부패, 부리, 부도덕의 원인이 어디 있다고 생각합니까 이 나약함과 이 비굴함이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바로 말씀의 충만함이 없음이요, 말씀의 빈곤 때문입니다. 풍요 속의 빈곤, 풍요속의 기갈 이것은 바로 말씀의 기갈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다시 한번 들어보십시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 4:4) 주님께서는 말씀으로 많은 시험을 다 이기셨습니다.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종교개혁자 칼뱅은 세상을 떠날 때에 오직 한 절의 말씀에 의지했습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이 말씀을 25번 외우면서 이 말씀에 의지하고, 승이로 세상을 끝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사랑합니까 얼마나 절실하게 생각합니까 우리의 마음의 촛점을 여기에 맞출 때에 비로소 우리의 영이 윤택해지고, 우리의 미래가 보이고, 오늘도 승리의 생활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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