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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정신건강과 신앙 (사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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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적으로는 정신건강을 어떻게 정의하고 저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활속에서 자주 절실하게 느끼는 것은 이 세상을 살아 가려면 정신적으로 건강해야 하겠다.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복잡해지고 여러가지 면에서 우리의 능력 이상의 많은 것을 요구하는 현실을 직시할 때, 내가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하면 이 현실을 건전하게 살아 가기가 어렵겠구나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 주변에 보면 생활에 대한 지나친 염려로 자기 자기 자신의 내적인 모든 균형이 깨어지는 것을 봅니다. 정신이 건강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조그만한 일로 쉽게 좌절해서 주저 앉아 버리고 다시 일어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을 요하는 이런 약한 자들이 우리 주변에는 많이 있습니다. 남이 모르는 불안과 공포 같은 것을 은근히 안고, 밤낮없이 시달리며,심지어는 육체의 병을 유발할수 있는 수준에까지 쫒기는 사람들을 봅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변에서 받는 스트레스나 또는 생활고로 오는 많은 중압감을 이기지 못해서 다른 사람들을 향한 그의 성격이 포학해지고 많은 사람들을 해치는 일들을 보는데, 이것도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결과라고 봅니다.
혹은 돈을 좀 번다든지, 생활이 갑자기 윤택해지면 도덕적인 기준도 다 잊어버리고 자기의 가치관도 잊어버리고, 생에 대한 의미도 상실한채 난잡한 생활.부도덕한 생활에 빠지는 것을 우리가 보는데, 그러면서도 전혀 가책을 받지 않는 것을 봅니다. 정신적인 질환잡니다.

우리가 잘아는대로 신앙과 정신건강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고, 신앙이 좋으면 정신도 건강하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이며,또한 성경적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교인들도 정신질환,신경성 병으로 고생하는 것을 보면, 신앙하고 정신건강하고 현실적으로 상당히 유리가 되어서 조화가 이루어지지 아니하는 모순들을 우리가 안고 있다는 것을 시인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서도 그 분 참 신앙생활 오래했고 교회생활도 잘하고 어떤 면에는 성경도 공부많이하고, 그래서 모든 사람이 신앙가라고 인정을 합니다마는 조그만한 사고가 잃어 났을때 반응을 보면,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것을 분명히 볼 수 있어요. 반히스테리적으로 사람이 변해 버린다든지 불안과 공포에 시달려 가지고 모든 신앙생활이 중단되어 버리는 것 같은 반응을 일으키는 사람은,
신앙하고 정신건강하고 전혀 유대성을 가지지 않는 별개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중에 그런 사람있어요. 이것은 성경적이 아닙니다.
심지어 예수 믿으면서도 자기의 정신적으로 약한 것을 정당화 시키는 사람들 있어요.
예를들면 나는 원래 신경이 약하니까-상대방보고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를 다니면서도 나는 본래 신경이 약한 것은 못고친다하는 전제를 던져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신앙하고 정신건강하고는 상관이 없는 이야기다.
나는 원래 신경이 예민해서 그럽니다. 왜 신경 예민하것을 못고치느냐말입니다. 예수 믿는 이유가 신경예민 한 것 고치려는 것일수도 있고, 또 예수 잘 믿으면 신경예민한 사람이-대단히 건전한 사람으로 바뀌고,
신경이 약한 사람.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사람.내적으로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이 예수를 통해서 분명히 치료 받는 것이 사실인데, 왜 그것은 치료 받지 못하는 영역인 것처럼 따로 제껴 놓느냐 그말입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들의 신앙의 모순입니다.

이사야 12장하고 정신건강하고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렇게 여러분이 반문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이 성경을 보면서 우리의 신앙생활이 이 12장에 있는 내용만큼 은혜스럽고 풍성하고 하나님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면, 정신질환이 어디있어! 정신적으로 약할수가 어떻게 있느냐! 그 말입니다.

이 12장의 배경은 앗수르 나라에 포로로 잡혀 갔던 이스라엘이 고국으로 돌아 올 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그 놀라운 축복들을 찬양하고 향유하는 하나의 내용을 담고있습니다. 뿐만아니라, 장차 메시야가 오시는 날 이 세계의 모든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누릴 영적 축복과 기쁨을 담고 있습니다.
저는 분명히 생각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12장이 주는 은혜와 능력과 부요를 신앙생활에서 그대로 유지 한다면, 우리의 정신건강은 항상 유지할수 있다.
왜 정신건강의 근본은 신앙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정신건강의 원천입니다.
신앙이 병들면 정신적으로 병듭니다.
정신적으로 병들면 육체적으로 병듭니다.
그러나 신앙이 바르고,신앙생활이 건전하면 정신적으로도 건전한 건강을 유지하고 동시에 육체적인 건강까지 유지하게 됩니다. 여러분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두가지를 분리하지 말고 같이 보라는 말입니다.

1절을 보면 그날에 라는 말이 나옵니다. 참 멋있는 말입니다.
언젭니까 이사야는 12장의 이 아름다운 파라다이스-꿈이 이루어지는 날,환상이 현실로 나타나는 날-를 현실로 보지도 못하고 예언만 하고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날에-그 날은 구원의 날이요, 은혜의 때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늘에 감추어 두신 모든 비밀과 보화를, 모든 축복을 그의 자녀들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신 그 날입니다.
바로 우리가 그 날에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축복을 다 받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아들도 아끼지 않고 우리에게 주셨는데 나머지 것도 아끼지 않는다고 약속하신 그 날이에요.
그 날에 우리가 사는데-정신적으로 약한 것, 정신적으로 불안한 것을 하나님이 안 고쳐 주시겠어요.
다 얻을 수 있는 축복의 날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2절에 보면,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하나님이 나의 구원이라는 말을 여러분이 어떻게 이해하고 계십니까
구원은 하나님이 손에 가지고 계시다가 주시는 물건이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내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조금더 심하게 말하면 내가 하나님이 되고, 하나님이 내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표현을 빌면, 내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이 내 안에 있는-그래서 예수님과 내가 통일을 이룬것을 일컬어서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은 구원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소유한 사람만이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자, 그렇다면 하나님을 내 안에 모시고 사는 이 구원받은 사람이 정신적으로 약하다 하는 말은 자신이 생각해도 참으로 적합하지 않다고 느껴지지 않으세요.
하나님을 소유하고 사는데 내가 이렇게 정신적으로 약하다니!
자 바울 한번 봅시다. 바울은 분명히 자기 자신을 두고 고백하기를 이제는 분명히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고,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고 했고, 그러므로 내가 믿고 신앙생활하는 것은 내 안의 그리스도를 밖으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갈2:20절에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생활을 한번 보세요. 그의 몸뚱이는 로마 감옥에 갇히어서 육체적으로 영양실조에 걸리고 많은 제제를 받고 있었습니다마는 그의 정신적인 건강은 전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감옥 밖에 있는 신자들을 향해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항상 기뻐하라. 다시말하노니 기뻐하라고 오히려 위로합니다.
그는 우리가 상상할수 없는 많은 고난과 역경의 삶을 살았습니다만 말하기를 나의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수 있느니라. 가난이 오라.부요가 오라.무엇이든지 오라. 실패가 오라. 성공이 오라. 위협이 오라 어떤 일이든지 다 오라.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무엇이든지 할수 있고, 적응할수 있고, 대처할수 있다.
나는 환경에 지배를 받는 병자는 되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바울의 자셉니다.
자신이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이 자신 안에 있기 때문에.....,
이렇게 구원 받은 자기에게는 정신적으로 약해진다든지 병이든다든지 하는 일은 있을수 없다는 이야깁니다.

그러면 왜 신앙이 정신건강의 원천이 되느냐에 대해서 4가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1. 신앙은 우리 마음 속에 도사리고 있는 공포로부터 완전히 해방시켜 줍니다.

1절보면 그 날에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는 내게 노하셨으나, 이제는 그 노가 끝났고, 그대신 나를 안위하시오니......, 이제는 두려움이 나에게 없나이다.
예수를 믿으면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불안이나 공포가 사라집니다.
심리학자들이나 정신병을 다루고 있는 의사들의 대부분의 공통된 견해는 정신적인 질병의 밑바닥에 항상 죄책감이라는 것이 깔려 있다. 이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죄책감-죄책감이 무엇입니까! 죄에 대해서 양심적인 가책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구에게 느끼는 것입니까 믿는 사람이든지 안믿는 사람이든지 자신에게 왜 죄책감이 드는가 한번 물어 보세요.
예수 믿는 사람은 하나님이라고 하는 존재-안 믿는 사람은 막연히 신이라고 하는 존재.그 존재와 자기 관계에서 불편하다 이야깁니다.
양심이 항상 이 작용을 합니다.
나의 양심에 있는 죄책감, 이것 때문에 옆에 있는 가장 가까운 사람도 모르는 내적인 공포를 안고 있습니다. 이 죄 때문에게 나에게 어떤 병이 오지 아니할까 이 죄 때문에 내가 어떤 벌을 받지 아니할까 하는 막연한 쫒기는 불안감. 이것이 공포증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이상이 없는 것 같지만, 사람들마다 이런 공포증에 대단히 많이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병이 나면 바로 내가 걱정하던 일이 터졌구나! 바로 내가 불안하게 여기던 일들이 내 눈 앞에 벌어졌구나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이 하나님을 볼 때에는 하나님은 언제든지 사납게 진노하시는 모습으로 쳐다 보시는 하나님입니다.

여러분, 인간이 얼마나 공포에 시달리는지 성경을 보면 압니다. 성경이 두려워 하지 말라는 말을 366번 이상하고 있어요!
세계적인 유명한 석학,대단한 철학자,하나님이 없다고 장담하던 사람들이-사람들을 만날 때는 전혀 불안하지 않은 것처럼 표현을 하면서 그 사람들이 눈 앞에서 사라지고 나면 자기 혼자 얼마나 떨고 두려워했는지 모릅니다.
마지막에 특별히 죽음 앞에서 얼마나 불안해 하고,가책을 느끼고,고통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 그 기록을 저는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이 공포라는 것은 진통제 하나를 먹고 나을 수 있는 병이 아닙니다.
이것은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예수 믿는 사람은 두려움에서 해방된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이 공포의 뿌리를 뽑아 주셨습니다. 공포의 뿌리가 죄책감이라고 한다면 죄에 대한 용서를 믿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나의 죄가 흔적도 없이 완전하게 용서 받았다고 하는 확신이 마음에 있습니까 정말 있습니까
제가 자주 여러분들에게 강단에서 질문합니다. 정말 확신이 있습니까 예수 안에는 정죄함이 없나니, 한번 하나님께서 용서하신 죄에 대해서는 재론하시는 법이 없나니..., 그러므로 과거의 죄를 놓고 하나님이 나를 징계 한다든지 나에게 저주를 하시는 법이 없나니, 예수 믿는 사람은 완전히 하나님과 화목된 사람이요,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서 과거의 죄 문제로 인해서 죄인 취급 받지는 않는다는 복음 !!!! 여기에 대한 확신이 있나요!
만약에 이것이 있으면, 여러분의 마음 속에 놀라운 평안이 찾아 올 것입니다.
그렇게 괴롭고,쫒기고,고달프던 마음에 큰 평안이 찾아 올 것입니다.

2. 믿음은 마음의 안정을 줍니다.

2절 중간에 보면,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니
신앙은 하나님이 나의 힘이요, 내가 의지할 자라는 것을 분명히 가르쳐 주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을 가지고 있는 마음은 안정을 얻게 됩니다. 속된 말로 믿는 구석이 있다는 말입니다.

어떤 가정에 사업을 하다가 거의 망하게 되었는데 찾아가 보니까 오히려 얼굴이 밝고, 든든한 자세를 가지고 대처를 합니다. 그럴 때에 이 사람이 믿는 구석이 있구나 그럼 그 믿는 구석이 뭘까 예수 믿는 사람이면 틀림없이 누구를 믿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 믿는 사람이 그렇게 하고 있으면 어떻게 해석을 하는지 알아요 사업은 망해서 자기 일생 살만한 것은 어디다 감추어 두었나보다. 아니면, 정치적인 배경이 있어서 그 정도 넘어져도 또다시 일어날수 있나보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그 든든함이 있습니다. 이 믿음 때문에 정신적인 혼란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시편 33:18절 이하에 여호와는 그 경외하는 자, 곧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 저희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저희를 기근에서 살게 하시는도다. 우리 영혼이 여호와를 바람이여, 저는 우리의 도움과 방패시로다. 아멘

오늘 우리가 정신적으로 깊은 수렁으로 떨어집니까 얼마나 깊이 깊이 우리의 마음이 파이는 때가 있습니까 여러가지 내 힘으로 감당 할 수 없는 내 영혼이 깊은 웅덩이가 파이는 것을 보지마는 그러나, 내 정신적인 건강이 무너지지 않고 지탱되는 것은 그 뒤에 밭쳐 주는 기둥과 손이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요! 하는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이것이 든든하게 나를 붙들고 있기 때문에 내가 정신적으로 어떤 상황 속에서도 혼란을 당하지 하니하며 병들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신앙하고 정신건강하고 구별을 하지 마세요. 따로 놓고 생각지 마세요. 영혼이 건강하면 정신이 건강한 사람입니다. 만약에 그것이 잘 안될 때에는 내 영적인 문제,신앙의 문제에 결함이 있는 것입니다.

3. 날마다 은혜의 체험을 하게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 3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구원은 하나님 자신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에게 가서 마치 목마를 때에 우물물을 떠 마시듯이 내가 그 때,그 때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맛보는 체험적인 삶을 살게 만드는 것이 믿음입니다.

여러분, 화장을 뒤로 미루세요.
설겆이를 뒤로 미루세요.
전화로 약속하는 것도 뒤로 미루세요
날마다,날마다 시간을 내어 놓고 하나님 앞에 가서,저 사마리아의 물동이를 이고 나온 피곤한 여인처럼 나의 물동이를 가지고,주님에게서 그날 내가 마셔야 될 샘물을 얻으세요.
기도와 말씀을 통해서!
주여! 내가 정말 건강한 정신을 가지고, 내가 이 험악한 세상을 살기 위해서는 주여, 물을 좀 마셔야 되겠습니다. 생수를 좀 주세요.
마음이 답답합니다. 위로를 좀 해 주세요.
내 마음에 은근히 겁이 납니다. 주여! 나를 강하게 붙들어 주세요.
나는 피곤합니다.
권태스럽습니다.
나에게는 막중한 짐이 놓여 있는데, 오늘도 나를 붙들어 주시지 아니하면 나는 할수가 없습니다.

그것만큼 귀중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청소보다 귀중한 것이요,
설겆이보다 귀중한 것이요,
친구와의 약속보다 귀중한 것이요,
사업과 장사보다 귀중한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에게 가서 생수를 날마다 떠 마시고 나면
내 얼굴이 밝아지고,
나에게 새로운 힘이 솟고,
어려운 문제를 볼 때에 당황하지 아니하며
하나님께서 도와주신다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믿습니까
이게 우물물을 마시는 것에요. 하나님이 날마다 줍니다.

4. 믿음은 입으로 표현하게 만듭니다.

4절 이하에 보면, 선포한다.감사한다. 찬양한다. 노래한다 말들이 계속 나옵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릴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표현하세요!
이 표현이 우리의 정신을 건강하게 만듭니다.
이 표현이 우리를 어떤 사람인가를 결정할 때가 많습니다.
찬송이 우리 안에 넘치면,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는 병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찬송이 줄어든다든지 찬송이 멈추면,
찬송하던 입에 마귀가 와서 불평 할 수 있는 모든 요소들을 집어 넣어 줍니다. 그러므로 내 입은 이미 불평의 입으로 변합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가 막혀 버립니다. 기도가 막힌 사람의 눈에는 모든 것이 불만스럽고 불평스럽게 보입니다. 정신적으로 벌써 잘못 되어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찬송을 얼마나 합니까
얼마나 감사하세요
얼마나 내입으로 표현합니까

폴란드 수도 근처에 조그만한 마을이 가면 아주 조그만한 오두막이 하나있고, 거기에는 동판으로 만든 표식이 붙어있는 집이 있다고합니다. 그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그 집이 무슨 집이며, 왜 그런 표식을 하고 있는가를 다 알고 있는데,
몇십년 전에 그 집에는 돌비라고 하는 아주 가난하고 예수를 잘 믿는 소작인 농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 농부는 신앙생활을 잘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판인지 농사가 잘 안되어서 그랬는지,가정에 우환이 있어서 그랬는지 지주 한테 계속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자꾸 빚을 지다보니까 갚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지주가 보니까 도무지 이제는 희망이 없습니다. 그래서 추운 겨울날 이제는 자기 땅에서 떠나라는 추방 명령을 받았습니다. 떠나야 되는 전날밤입니다. 멀리서 종소리가 울려옵니다. 그 당시에는 시간을 맞추어서 교회에서 종을 쳤나 봅니다. 그래서 믿음이 좋은 사람은 그 종소리를 들을 때에 기도도하고, 예배도 보고 했습니다.
돌비는 식구들과 함께 이제는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막막한 절망적인 상황을 앞에 놓고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예배는 울고불고 하는 예배가 아니라,하나님을 찬송하는 예배였습니다.
주의 손에 내 고통과 슬픔 다 맡기나이다.하는 찬송을 식구들이 둘러 앉아서 부릅니다. 한참 찬송을 부르는데, 창문쪽에서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자꾸 들려 옵니다. 그래서 돌비가 일어나서 가보니까 비둘기 한마리가 창문을 열려고 애를 씁니다. 문을 열어 주니까 방안으로 들어 왔습니다. 그런데 이 비둘기는 몇년전 떠났던 할아버지기 집에서 기르고 길을 들여 놓았던 비둘기였습니다.
비둘기는 입에 가락지를 물고 있었습니다. 생전 처음 보는 가락지였습니다. 큰 보석이 박혀있는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이틑날 확인을 해 보니까 왕이 끼는 반지였습니다.
왕이 어디서 잊어 버렸는지는 알수 없지만, 돌비는 그 반지를 왕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반지를 찾은 왕은 그 착한 농부가 너무나 감사해서 그에게 많은 하사금을 내렸습니다. 그 돈 가지고 빚을 갚고,오두막을 수리하고 살게 되었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감사해서, 비둘기의 형상을 그려 넣고, 반지를 새겨 넣고, 그 때에 부르던 찬송가 가사를 넣어서 동판을 만들어 벽에다 붙여 놓았습니다.

그래서 이 집은 많은 사람들이 볼 때마다 하나님이 마지막 절망적인 상황에서 찬송하며 하나님 앞에 마음을 열고 감사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대접하셨는가를 보여 주는 하나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찬송합니까
여러분 가운데 병든자들도 계실 것이고,
남이 모르는 마음에 무서운 고민을 안고 있는 사람도 있고,
내일 일이 당장 무서운 짐이 되어 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상처투성이가 되어 나오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지금은 평안하지만 이것이 어떻게 변하지는 아니할까하는 불안을 안고 계시는 분도 있을지 모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내 정신은 몹시 약해서 조그마한 일에도 가랑잎처럼 흔들리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찬송할세요
믿음으로 찬송하는 자에게 이 정신적인 불안,정신적인 병은 다 떠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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