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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작은 것에서 큰 것을 (마 25:3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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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드 저드슨(Adoniran Judson 1788-1850)은 미국 교회가 해외에 파송한 최초의 선교사입니다. 그는 지금의 미얀마인 버마로 건너가 37년 동안 버마의 복 음화를 위하여 애쓰다가 1850년 4월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회중교회의 목사 아들로 태어난 (아도니람 저드슨)은 젊은 시절 한때 하나 님을 등진 때도 있었으나,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한 후, 우여곡절 끝에 1813년 버 마 랭구운에 상륙하게 됩니다.

 당시 버마는 종교의 자유를 허락지 않아 그의 선교 사역은 고통과 궁핍과 좌 절의 연속이었습니다. 열병과 이질로 인한 아내와 자녀의 죽음은, 버마를 향한 그의 선교에 대한 열정을 감소 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6년만에 처음으로 결신 자 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후에 굳게 닫혀 있던 버마의 복음의 문이 열리게 되었습 니다.

 그는 계속적인 성경 번역 작업으로 23년만에 성경의 전권을 버마어로 번역함 으로써 버마 복음 화에 결정적 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아도니람 저드슨)은 작은 민족, 작은 나라를 사랑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 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업신여기는 나라와 국민을 귀중히 생각하는 사람이었습 니다. 그는 작은 것을 사랑하다가 죽어 간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도니람 저 드슨)은 우리 모두에게 작은 것을 사랑했던 소리 없는 영웅으로 영원히 기억되 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온통 큰 것, 많은 것, 높은 것을 추구합니다.

현대인들의 추구하는 대상은 모두가 큰 것에 대한 집착입니다. 큰 집, 많은 재물, 높은 지위를 원합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는 작은 것, 적은 것, 낮은 것은 무시 하는 생각들이 많습니다. 작은 승용차를 타면 경찰관이나, 회사의 수위들에게도 무시를 당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가난하게 사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기 때문 에 교인들도 목사들의 심방을 꺼리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다 보니, 그런 무시 를 당하지 않으려고 없는 가운데서도 있는 것 척하기 위하여 큰 차를 사서 타고 다니고, 없으면서도 있는 척하기 위하여 비싼 옷을 해 입고 다니는 것이 현실입 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작은 것을 위한 삶, 적은 것을 소중히 여기는 삶, 낮은 것을 사랑하는 삶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작은 것 을 통하여 큰 것을 바라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1. 하나님은 작은 것에서 큰 것을 보시는 하나님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지극히 (작은 자)란 소외되고, 무시되고, 하찮게 여기는 자들을 가리킵 니다. 그들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박애 정신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의 이름으로) 라는 단서가 들어가 갑니다.

내 이름으로 이 소자중 하나를 영접하는 자는 하늘에서 상이 크다고도 하였습니 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제부터 성경에 가르쳐 준 그대로 실천하는 운동입니 다. 작은 것에서 큰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려야 하겠습니다.

 무엇에서부터 작아져야 하겠는가 자신의 삶의 고백에서부터 작아져야 하겠습니다.

더더욱 신앙의 성숙을 위하여 작아져야 하겠습니다.

대부분의 덜 성숙한 사람에게는 여유가 없습니다. 교만으로 차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낮아진다는 것은 그마큼 여유를 가졌다는 증거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스스로 낮은 자리로 내려 오셨습니다.

오늘까지 우리는 너무나 높은 자리들만 쳐다보면서 살았습니다.

작은 것, 낮은 것, 그리고 스스로 작아지는 것, 그런 신앙적 훈련을 받아야 하겠 습니다.

 2. 작은 것에 관심을 가지는 한 큰 것을 맡겨 주십니다.

작은 것에 충성하는 자는 큰 것에도 충성하고, 작은 것에 불 충성한 자는 큰 것에도 불 충성한다고 했습니다. 교회 안에 봉사도 마찬 가지입니다. 얼마나 남 이 하찮게 여기는 일을 크게 보고하였습니까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살피시는 하나님입니다.

 성경의 인물 중 큰 자가 변하여 작은 자가 된 경우의 대표적 인물은 바울일 것입니다. 그는 본래 사울이란 이름을 가졌던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이란 본래 큰자란 뜻입니다. 그 이름에 맞도록 그는 세상에서 큰 사람이 되려고 온갖 노 력을 다했습니다. 그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벤야민의 지파요, 율법으로 는 바리새인이요, 학문으로는 다소 대학의 가말 리엘 문하에서 당시에 헬라 철학 을 통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자기가 믿는 신앙의 기준으로도 완전 한 사람이었습니다. 대제사장들도 그를 인정하는 촉망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 기에 그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하여, 나사렛 예수를 따르는 무리를 압송해 오도록 권력을 위임해 주었습니다. 어느 날 예수를 따르는 이단을 믿는 스데반이라는 한 청년이 붙잡혔습니다. 그를 돌로 쳐죽이는 일에 가표를 던질 만큼 사울을 당당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부터는 완전히 변해 버렸습니다.

그렇게 큰 자라고 자부하면서, 또 그렇게 높은 사람들과만 교제하려던 그가 이제는 가장 작아졌습니다. 과거의 자랑거리를 다 버렸습니다.

이제 그는 생의 전환점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두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대한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알기를 원치 아니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일컬어 만삭되지 못하여 난자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죄인 중에 괴수라고 까지 하였습니다.

사람이 변해도 이렇게 변할 수가 있을까 하리 만치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이것이 작은 사람이된 대표적 경우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바울과 같이 변화된 사람들이 한 두 사람이 아닙니다.

과거에는 주먹으로 세상을 주름잡던 사람들이 봉사의 일꾼이 되었고, 과거에는 온통 감투라감투는 혼자 쓰기를 좋아하던 사람이 아무도 모르게 세상 의 소금으로 자신을 녹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들 가운데도 아마 그런 사람들이 있을 줄 압니다.

만일 예수를 모르고 살았다면, 오늘 이 자리에 나와 앉아 있겠는가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일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스스로 낮아 질 수밖에 없습니 다. 왜냐하면, 그가 스스로 하늘 보좌를 버리고 강생하여 죄인의 모습으로 이 세 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 나셨다고 하면서도, 높아지기 만 좋아한다면, 그것이 과연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3. 신앙인 은 모름즉이 스스로 작은 것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어햐 합니다.

바울은 그후에 그 이름처럼 바울 즉 작은 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온갖 큰 것들을 다 포기하고, 오로지 한 생명을 천하보다 더 크 게 보고 복음을 들고 나셨습니다. 그러면서 궁핍과, 고난과, 매맞음과, 갇힘과, 잠 못 잠과, 소란을 몸소 겪어야 했습니다. 요즘 이렇게 바울처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잠못잠을 겪으면서 선교하는 선교사들이 얼마나 될까 한번쯤 생 각해 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나 자신을 살펴 보기도 합니다.

 저는 신앙의 가정에서 태어나, 부모님들의 신앙적 분위기에 성장한 모태신앙 자입니다. 그러기에 어려서부터 보고 들은 것이 오늘의 다져진 신앙의 터전이 된 줄 압니다. 저는 오늘까지 한번도 내 자신이 훌륭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 다. 모두 우리 부모님들의 못 먹고, 못 누리면서 증거한 전도인의 희생적 봉사의 결과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 아버님의 기도의 능력에 비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 아버님의 영역에 충만한 말씀 증거에 비하면 나는 비교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한 사도 바울 처럼 나도 마찬 가지입니다. 오늘의 나의 모든 것은 나 자신의 것이 아니고, 부모님의 물려 준 신앙의 유산의 힘이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작은 것에서 큰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열게 해 준 은혜를 결코 등한히 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오늘까지 살아오면서, 누구를 넘어뜨리고 그 자리에 타고 올라앉아야 하겠다는 생각은 가져 보지도 못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 자체가 어쩌면 어떻게 들려지 겠는지 모르나, 나의 진실을 말하는 것뿐입니다.

 욕심을 버리면, 사람들은 낮아 질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을 비우면, 작은 것에서 큰 것을 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금년 새해에는 작은 것에서 큰 것을 보수 있는 한해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사회의 허풍을 빼어 버리는 운동은 바로 작은 것에서 큰 것을 볼 줄 알아 야 하겠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그런 사람들을 찾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무슨 직분, 무슨 직분 하지만, 평신도로 있으면 어떻습니까 직분이 없어 신앙생활 못하는 것도 아니고, 맡은 직분이 없어 봉사할 수 없는 것 도 아닌데, 작은데서 큰 것을 볼 줄 아는 눈들이 열리게 되길 바랍니다.

쓰레기 하나도 바로 보고 치울 줄 아는 그런 눈, 교회의 기물 하나 하나를 바르게 원 위치에 돌려놓을 줄 아는 그런 눈, 바로 그런 눈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큰 것만 보이는 눈은 아무래도 장애자의 눈입니다. 신앙의 장애인이기 때문에 큰 것만 본다는 것입니다.

작은 것에서 예수님을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작은 자, 하찮은 자, 보잘것없는 일, 그곳에서 예수님을 볼 수 있을 때, 그 사람 이야말로 주님의 옳은 편에 설 사람들입니다.

 심판 날에 왼편에 선 사람들의 변명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도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도하고, 주의 이름으로 권능도 행하고, 주의 이름으로 이것도 저것도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라고 할 때 불법을 행한 자들아, 내가 도무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고......오늘 본문에도 저주를 받을 자들아! 나 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고.....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바라옵기는, 이 한해 동안 작은 것에서 큰 것을 볼 수 있는 귀한 한해가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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