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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풍랑 만난 사람들 (욘 0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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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후반의 세계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흔들리는 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폭풍이 휘몰아치는 바다에 떠 있는 배는 그것이 크건 작건 상관없이 흔들리는 것과 같이 지금 세계는 동과 서,선진국과 후진국,개발국과 개발도상에 있는 나라를 망라해서 격동으로 몸부림 치고 있습니다.
배가 풍랑을 만나면 선장실도 흔들리고 1등실도 흔들리고 3등실도 흔들리고 기관실도 흔들리고 갑판도 흔들리는 것처럼,집단이나 개인을 막론하고 지구촌 전체가 성난 풍랑으로 흔들리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성경에 나타난 풍랑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살펴 나가면서 우리 시대의 풍랑 만난 사람들과 비교해 보려고 합니다.그리고 왜 풍랑을 만났으며 어떻게 그 풍랑으로부터 구출되었는가에 대하여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풍랑 자체보다는 원인과 해결이 중요한 것입니다.

1.요나의 잘못 때문에 일어난 풍랑
요나 선지자가 활동하고 있을 당시 앗수르라고 하는 나라는 이스라엘의 주변에 있던 강대국으로 이스라엘의 숙적이었습니다.그들은 집요하게 이스라엘릉 위협했고 침략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나라의 수도인 니느웨로 가서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라는 것이 요나에게 대한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우린 여기서 니느웨에라도 가서 복음을 전해야 된다는 선교 명령을 발견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공산권,회교권,불교권을 포함한 전세계 어느 곳에라도 복음은 전파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미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겐 전도할 필요가 없습니다.아직까지 믿지 않는 사람이 선교의 대상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단 종파들의 경우 믿는 사람들만을 골라서 찾아 다닙니다.그것은 선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요나는 도저히 그 명령에 수긍할 수가 없었습니다.이유는 어떻게 원수의 나라에 들어가 구원의 소식을 전할 수 있겠느냐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니느웨로 가는 척하고 전혀 방향이 다른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그러나 그 배는 항해 도중 엄청난 풍랑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풍랑아 우상을 섬기고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공격을 일삼는 니느웨 사람들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요나 때문에 일어났다는 데 있습니다.
요나는 우리들 모두의 그림자입니다.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요나 자신이 풍랑의 원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시오.당신들이 이 풍랑을 만난 것은 다 나 때문이오”라고 교백한 것과,요나을 바다에 던졌을 때 바다의 풍랑이 잔잔해졌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제아무리 큰 풍랑이라도 원인만 제대로 빨리 찾으면 해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모든 원인이 나한테 있다고 고백할 때 의외로 문제가 빨리 풀린다는 사실입니다.
가령 요나가 끝까지 버티면서 자신의 정체를 숨겼다든지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오기를 부렸다면 그 배는 침몰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한글의 “나”라는 글자는 굉장한 변수르 가지고 있습니다.점 하나를 밖에 찍으면 “나”자가 되지만 안에 찍으면 “너”라는 글자가 되기 때문입니다.점 하나에 역사의 판도가 달라지고 개인의 운명이 좌우되고 문제의 실마리가 결정됩니다.
“나”와 “너”의 의미의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처럼 큽니다.
“나 때문이다”라고 할 때와 “너 때문이다”라고 할 때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그 차이를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걷잡을 수 없는 격랑으로 기우뚱거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길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4천만 동푸와 그 중의 1천만 기독교인이 모두가 “나 때문입니다”,“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시오”라고 말하면 됩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꼭 던져야 될 사람을 던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나 바다에 던진다고 해서 풍랑이 잔잔해지는 것은 아닙니다.선장을 던져도 안되고 기관사를 던져도 안되고 선원을 던져도 안됩니다.요나를 던져야 합니다.
심청전을 보면 시집 안 간 처녀를 던져야 바다가 잔잔해지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그러니까 죄도 없고 결혼도 하지 않은 처녀를 던져야 바다가 고요해진다는 것입니다만,요나서의 경우는 죄있는 장본인이 바다에 들어가야 잔잔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역사의 비극은 바다에 들어갔어야 할 주인공들은 떵떵거리고 활보하고 있는가 하면 죄없는 사람들이 풍덩풍덩 바다에 뛰어들고 있기 때문에 바다가 더 흉용해 가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 서로 “나 때문이오”라고 말합시다.미국 FBI(연방수사국)의 보고에 따르면,1983년부터 1987년 사이에 일반 범죄율은 2퍼센트 감소한데 반해 청소년 범죄율은 살인이 2

2.2퍼센트,강간이 1

4.6퍼센트나 증가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청소년들의 연령은 18세 이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청소년의 범죄를 유발시키고 자극하는 요인이 음란비디오,TV,도색 잡지,영화,광고물 따위 등이며,부모의 무관심,방치,가정 파괴 등이 주원인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청소년의 탈선이나 잘못은 그 원인이 청소년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기성 세대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른들은 마치 청소년이 바람에 밀려온 휴지쪽이나 되는 양 개탄하고 비난만 퍼붓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탄식입니다.
요나도 처음에는 자기 때문에 풍랑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풍랑을 만난 후 그는 그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늦긴 했습니다만,우리도 빨리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 때문입니다.”라고 고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그리하면 이 풍랑이 잔잔하여질 것입니다.

2.백부장의 오판 때문에 겪은 풍랑
사도행전 27장을 보면 로마 황제에게 재판을 받기 위해 바울이 배로 호송되고 있는 장면이 나옵니다.물론 그 배는 여객선이기보다는 무역선 내지는 곡식을 실어 나르는 곡물선이었을 것입니다.그 배에는 죄수들이 타고 있었기 때문에 백부장아 호송 책임관으로 함께 승선했습니다.
배가 미항에 정박했을 때 바울은 떠나면 풍랑을 만날 것이라고 경고했고 선장과 선주는 떠나도 상관없다고 우겼습니다.일이 그렇게 되자 최종 결정을 내려야 할 사람은 군인인 백부장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7:11을 보면 “백부장아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마보다 더 믿더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배는 미항을 떠났습니다.
사도행전 27장과 28장을 보면 그러한 백부장의 오판(誤判) 때문에 그 배는 풍랑을 만나게 되었고,배에 실었던 모든 하물과 기구들까지 모조리 바다에 버려야 했으며 죽음의 바다에서 죽음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상식적으로는,백부장이 죄수의 말보다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는 것이 당연합니다.그러나 상식은 신앙 앞에선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 상식과 내 경험과 내 지식으로 판단했던 일들이 엄청난 실패를 가져올 때가 있다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고집과 독단과 불신과 교만 때문에 쓴 경험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좀 창피스럽더라도 백부장이 바울의 말에 귀를 기울였더라면 그토록 큰 불행을 겪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연세 대학교 박봉석 교수 팀이 실시한 “흡연의 경제적 손실”이라는 연구 보고서에 의하면 흡연으로 일찍 사망하는 데 따르는 생산 감소액이 매년 약 4천2백90억 원이나 된다고 합니다.거기에 치료비,교통비 등 관련 비용이 약 6백49억원,화재 손실 약 37억원 등을 합하면 모두 5천57억 1천8백만원의 손실이 매년 담배로 인하여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규모는 교육세 규모의

1.57배,보건 부문 예산의

1.2배,사회보장과 복지 부문 예산의

1.3퍼센트에 해당하는 엄청난 규모라는 것입니다.
금연 운동 협의회 김일순 박사에 의하면 매달 1,500명 정도가 소리 소문도 없이 죽어가고 있으며,우리나라 인구 4천만명 중 1천만명의 목을 움켜잡고 있는 살인마가 있는데 그것이 곧 담배라는 것입니다.
현재 전세계적으로 연간 2백50만명이 담배 연기를 마시고 죽어가고 있다고 합니다.담배에는 20여 종의 발암 물질 외에도 4천여종의 유해 화학 물질이 들어 있으며,20년동안 흡연하면 폐 세포 400만개 가운데 60퍼센트가 파괴되어 제 기능을 못하게 되는데,문제는 겉으로는 아무런 이상도 나타나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그래서 경고를 무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공짜로 주어도 피우지 말아야 할 것을 달러까지 주어 가면서 외제 담배를 피우고 있으니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좋은 충고,좋은 말은 듣는 것이 좋습니다.지위나 경제력이나 학벌이 나만 못한 사람일지라도 그가 하는 좋은 말이나 영적 권고는 듣는 것이 좋습니다.
지중해에서 풍ㅇ랑을 만났던 사람들은 결국 바울의 말을 듣고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하라”와 “이렇게 하지 말라”로 구분해서 교훈하고 있습니다.그대로 하면 인생의 풍랑을 면할 수 있고 이길 수 있습니다.

3.불신 때문에 겪은 풍랑
바태복음 14:22 이하를 보면,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떠나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고 있었습니다.물론 갈릴리는 호수입니다만 바다처럼 큰 호수입니다.그런데 그 갈릴리에서 그들은 깊은 밤에 풍랑을 만났습니다.
같은 풍랑이라도 밤에 겪는 풍랑은 더 고생스럽고 위험합니다.
제자들은 죽게 되었다고 아우성 치기 시작했습니다.
우린 이 사건 속에서 제자들도 풍랑을 만난다는 사실과 믿음이 있노라는 사람들도 풍랑을 만나면 겁내고 소리 지르고 몸부림 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만일 그때 제자들이 배를 타고 먼저 가라고 하신 분이 예수님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면,그토록 겁에 질려 아우성 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자기네들끼리 예수님 몰래 도망치는 길이었다면 몰라도 예수님이 “너희들끼리 번저 배 타고 건너가라”고 해서 떠난 길이라면 책임자가 따로 있기 때문에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됐을 것입니다.
문제는 믿음입니다.믿음이 있으면 풍랑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그러나 믿음이 없으면 모든 것이 다 문제가 되고 사건이 되고 탈이 됩니다.
사형을 앞둔 사형수의 목 뒤에 조그만 침을 꽂아 놓고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결박한 다음 사형수의 목에서 피가 떨어지는 것처럼 다른 동물의 피가 병 속으로 떨어지게 만들어 놓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병에 네 피가 가득 차면 너는 죽을 것이다”고 했답니다.그랬더니 그 병에 피가 가득 차 가자 사형수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더니 병에 피가 가득 차는 것을 보는 순간 그는 죽더라는 것입니다.
죽는다면 믿음이면 죽습니다.그러나 산다는 믿음이면 삽니다.
야고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 얻는 믿음을 산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갈릴리 바다의 풍랑보다 더 격심한 역사의 풍랑과 사업과 생활과 가정과 심령의 풍랑을 잔잔케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면 된다는 산 믿음으로만이 가능합니다.
베드로처럼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믿고 소리 칠 때 우리는 풍랑을 이기고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산 믿음으로 풍랑을 이깁시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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