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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의 손 (시 13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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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39편은 서두에서부터 主의 탁월한 지식과 능력을 예찬하고 있습니다. 主의 투철한 鑑察(감찰), 나의 생각과 마음의 움직임을 아시는 洞燭力(통촉력), 그리고 나의 起居動作(기거동작)과 言行心思(언행심사)간에 熟知(숙지)하시는 全知(전지)하심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 전지하신 하나님이 『나의 前後(전후)를 두루시며』 그 전능하신 손이 배후에 있음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搖動(요동)치 않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길이 참는 농부의 거친 손이 있으므로 우리가 오늘 곡식으로 飽食(포식)할 수 있고, 風波(풍파)와 싸우며 그물을 던지는 海風(해풍)의 터에서 부풀은 손이 있음으로 오늘날 우리가 신선한 생선의 眞味(진미)를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금년에도 지난 23일(매년 11월 넷째 주간 목요일을Thanks-giving day, 즉 추수감사절로 지킴)에 성대한 칠면조 요리의 파티를 각 가정마다 열었고, 호화로운 街頭行列(가두행렬)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이 환희의 잔치는 그들의 조상인 淸敎徒(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May-flower號(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未知(미지)의 세계인 아메리카 대륙에 발을 내디딘 후 인디안들과 무서운 야생동물들과 메뚜기와 추위와 싸워 가며, 땅을 파고 곡식을 심어 千辛萬苦(천신만고)끝에 거둬들인 열매와 곡식을 하나님 앞에 쌓아 놓고 감사의 예배를 드린 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 조상들의 피와 땀방울 그리고 희생을 통해 오늘날 그들은 호화롭고 성대하게 추수감사절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월남전선 『닥토』875고지에서도 칠면조의 다리를 살아남은 장병들이 뜯었다고 하니, 그들의 주변에는 울창하게 우거졌던 숲의 광경도 어제의 꿈이었으며 지금은 불탄 자리만이 시커멓게 처절한 廢墟(폐허)를 이룩하고 있을 뿐이었다고 합니다. 한 흑인병사는 전우의 시체가 굴러 있고, 주인 없는 무기가 놓여 있는 사이에서 감사절 파티에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전우를 너무 많이 잃은 것을 생각하면...』하면서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고 합니다. 과연 전우의 屍山血海(시산혈해) 위에서의 『추수감사절 맞이』라고나 할까요?

한국을 세계 2위로 빛나게 한 여자 농구 팀의 선수들의 손은 여성의 아름다움인 柔弱性(유약성)과 纖細性(섬세성)을 상실한 연습과 시합에 시달린 거친 손이었습니다.
15세기에 독일에서 태어난 두 청년 Albrecht(알브렛츠)와 Hans(한스)는 知己之友(지기지우)의 사이였다고 합니다. 저희는 서로 교대로 노동을 하여 예술가로서 출세하기로 약속하였습니다. 먼저 알브렛츠가 미술공부를 시작하고 대신 한스는 노동판에 뛰어들었습니다.
알브렛츠는 열심히 공부하였고 드디어 많은 사람들로부터 아낌없는 찬사를 받는 유명한 화가가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고 주위에 몰려들었으나 알브렛츠의 마음은 한스를 찾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초라한 옷을 입은 한스를 찾아내어 감격의 악수를 하였을 때 알브렛츠는 놀라운 충격을 받았습니다. 한스의 손이 너무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거칠어져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도저히 그 손을 가지고서는 예술가가 될 소지가 없었습니다. 알브렛츠의 그때의 심경은 기가 막힐 뿐이었습니다. 너무도 죄송하다 할까, 감사 이상의 무엇이라 할까, 이루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알브렛츠가 후일에 Donau派(도나우파)의 대표적인 화가로 풍경묘사에 혜성적 존재로 성장하게 된 것은 그 밑에 거름이 되고 뒷받침이 된 한스의 손이 있었던 것입니다. 알브렛츠는 깊은 감사의 뜻으로 정성을 다하여 한스의 기도하는 손을 그렸는데 그것이 저 유명한 『한스의 손』이라는 걸작입니다.
고린도전서 15:10에서 바울은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나의 나 된 것이』 누구의 은혜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나의 공로도 아니요, 눈에 보이는 누구의 은혜도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主의 손의 은혜요 덕분인 것입니다.
화가 Stenbeik(스텐바크)는 돈을 벌기 위한 목적으로 『십자가상의 그리스도』라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이 화가의 모델인 베삐다라는 소녀가 이 그림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게 무슨 그림입니까?』하고 물었을 때 화가는 『그리스도가 인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힌 모습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대답을 들은 베삐다는 한참 동안 그림을 바라보더니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당신을 위해서도 그가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까?』 이 질문에 스텐바크는 쇠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소녀의 질문이 그의 마음 속에서 떠나질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그린 것에 대해 회개하고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성화로 그려서 無言(무언)의 붓으로 전도에 헌신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가 그린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라는 그림은 유명한 신앙가 진젠돌프 백작에게 일대 감화를 주었습니다.
우리는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늘의 보좌에서 영광을 누려야 할 그 손이, 천군천사에게 흠모의 대상이 될 그 아름다운 손이 왜 그토록 무참하게 찢어졌으며, 굵은 쇠못에 의해 죽음의 상처를 입어야 했는지?
본문 5절에 『主께서 나의 전후를 두르시며 내게 按手(안수)하셨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주님은 못자국 있는 손으로 우리에게 안수해 주십니다. 원하는 자에게는 누구에게나 위로부터 주십니다. 못자국 있는 손으로 위로부터 신령한 은혜를 즉 성령을 주시는 것입니다. 또 지금까지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나의 영혼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신명기 33:27에서 『영원하신 하나님이 너의 처소가 되시니 그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 있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主의 손은 우리의 모든 세상적, 세속적 염려를 맡아 처리하여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생활전체를 돌이켜 볼 때, 보이지 않는 주님의 손에 의해 惠澤(혜택)을 입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추수감사절은 금년에도 또 다시 찾아왔습니다. 농부의 많은 수고를 거듭한 손에 황금 같은 곡식이 가득히 담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의 못자국 있는 손에는 알곡 신자들이 가득히 담길 것입니다.
우리의 감사는 저 못자국 있는 손이 나를 죄에서 구원해 주심에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으로 감사하고 내가 알곡이 됨으로서 몸으로 감사의 산 제사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 손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내가 主의 神을 떠나 어디로 가며 主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나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主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主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시편 139:7-11)
우리는 못자국 있는 주님의 손을 바라보십시다. 그리고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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