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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위로와 소망의 하나님 (시 42: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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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으로 구분된 시편 전체를 가장 단순하게 묘사한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감 된 기도와 찬양의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시편의 시들은, 추상적이 아닌 인간 경 험의 특유의 표현들로 나타낸 진리에 대한 계시들이다.

이 계시된 진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정서와 소망 그리고 이들이 겪은 환경으로 인한 고난으로 수놓아져 있다. 이처럼 시편들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이기 때문에 인류 역사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이나 기독교인들을 막론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위로와 격려의 가장 위대한 원천으로 알려져 내려왔다.

우리는 여기에서 자신들의 어려운 문제들과 투쟁하는 고상한 영혼의 소유자들을 주시해 볼 수 있다. 그들은 마음을 찢으며, 자신을 조소하기도 하며, 격려하기 도 하면서 자신들에게 그리고 자기 영혼과 더불어 대화를 나눈다. 어떤 때는 용 기 백배했다가도 다른 때는 낙망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은 언제나 자신들에게 진실한 자들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자신에게 진실할 때는, 그들은 언제든지 우 리에게 진정한 가치를 가진 자로 부각되어지는 이유도 바로 이 진실성에 있다.

우리가 고찰하여 보려고 제시한 이 특별한 시의 시인은 불행한 고난 중에 있다.

그래서 그는 극적인 말들로서 울부짖고 있다. 내 영혼아 어찌하여 낙망하느냐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느냐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 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이 시에서 두번씩이나 볼 수 있는 이 어구는 그 다음 시에서도 역시 찾아 볼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시편 43편을 별개의 시로 보지 않고 동일한 시의 일부

로 간주한다. 이 문제는 확정지을 수 없다. 또한 분명히, 중요하지도 않다.

그러나 두 시에서 동일한 어구가 반복된 것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시편 43편 마 지막 부분에서도 역시 같은 어구를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시의 시인은 자신의 불행, 그의 영혼의 불안, 그가 이 시를 쓸 당시 겪었던 처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그는 우리에게 자신의 불행에 대한 원인을 말하 고 있다. 아마도 이 특별한 상황 하에서는 여호와의 집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공적 예배를 드리는 것도 허락되지 않은 것 같다. 그뿐 아니라 그는 분명히 원 수들에게 공격을 받고 있었다. 거기에는 그를 억압하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하 는 무리들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거기에 대해서 설명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의 시인이 당면한 상황에 대처한 방법과 자기 스스로 그 문제를 처리한 방법에 관심을 기울여 보기로 하자.

 우리의 주제는 바꾸어 말해서 영적 침체, 그 원인들과 치료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 특정한 주제가 성서에서 자주 다루어지고 있다는 것과, 이 사실에서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은 이 주제가 아주 일반적인 상태라는 것 이다.

영적 침체란 것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힌 듯하다. 이러한 상태가 구약과 신약에 묘사되어 있고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 자체만으로 이 주제에 관심을 기울일 충분한 이유가 되겠지만 , 그러나 내가 이 주제를 다루게 된 것은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특별한 고난을 당하는 것같 이 보이며 현재에도 특별한 어려운 문제들이 성도들을 괴롭히고 있기 때문이다.

영적 침체에는 여러가지 이유들이 있다. 이 주제에 대한 광범위한 분석을 위해 서 두 방향으로 계속해서 다루어 갈 것이다. 먼저 이 문제에 대한 성경적 가르 침을 취하는 것이다. 그러면 성경에서 그런 상태에 대한 확실하고도 주목할 만 한 예들이나 혹은 설명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관련 인물들이 어떻게 행동하였으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대하셨는가를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방법은 영적 생활 중에서 어떤 난제에 대처하는 좋은 방법이다. 성경 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항상 좋은 일이다. 성경 속에는 모든 상태에 대한 명백 한 가르침이 있고 그 속에서 적절한 예들과 예증들을 찾는 것도 바람직한 것이 다.

우리는 두 가지 방법으로 크게 도움을 입을 수 있다. 나는 여기에서 이 두 가지 방법의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한다. 어떤 사람들은 예증이나 이야기에만 흥미를 갖는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이야기들이 예증하여 주는 원리들을 끌어내는데 주의하지 않 으면 우리는 아마도 우리 자신의 상태를 악화시키는 것으로 끝을 맺게 될 것이 다. 혹시 실례들과 예증들을 주의깊게 살펴서 큰 유익을 얻는다 할지라도 우리 가 먼저 성경의 교훈을 취해야 한다는 것은 지극히 중대한 일이다. 많은 사람들 이 다른 사람들의 경험에 의존해서 살거나 혹은 다른 사람들의 경험에 탐닉하기 때문에 고난 중에 있는 듯하다.

그들은 먼저 교훈하는 바를 붙잡는 대신에 항상 다른 사람들을 주시하고 그들의 이야기에 눈이 팔렸기 때문에 너무나도 자주, 그것도 아주 심하게 타락하고 마는 경우를 본다. 성경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그러한 특별한 위험에서 우리를 경고 하고 보호하여 준다.

이 지식은 변함없이 두 가지 일을 하기 때문이다. 먼저 평이하고도 분명한 교리 적 가르침을 준다. 그 후에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 가운데 이 원리들이 실제로 역사하는 방법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예증을 더하신다.

 우리가 이 특별한 질문을 직시해야 하는 것을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를 설명 할 필요는 없으리라 믿는다. 내가 이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시편 저자 가 이 특별한 시에서 그렇게도 완전하게 묘사한 바와 같은 상태 하에 있는 자들 을 낙망, 불아정, 긴장감, 고통스런 상태에서 구하기 위함이다. 이 세계 도처에 있는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일생을 그런 불행한 상태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슬픈 일이다.

이 사실은 그들이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말이 아니다. 다만 그들이 많은 것을 읽 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이 너무 낳이 읽었기 때문에 그들만을 위해서라도 이 시편에서 분명하게 요약된 영적 침체의 전제조건을 탐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 하나의 더 중대한 다른 이유가 있다. 그것은 우리가 이 문제를 하나님의 나 라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직시하지 않으면 않된다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 있어서 침체된 기독교인은 자기모순이며 복음을 위해 힘을 쓸 수 없는 미약한 교 인이다. 우리는 실용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 현대 인간들은 우선적으로 진리 자체에 관심을 갖기 보다는 결과에 대해 관심을 기울인다.

오늘날 사람드리 즐겨 묻는 유일한 질문은, 그것이 도움이 됩니까라는 물음이 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만을 미친 사람같이 추구하고 있 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왕국을 부분적으로는 그의 백성을 통해서 확장시키 신다고 믿는다.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교회사 속에서 주목할 만한 일들 중에 어떤 것을 아주 보통 백성 중에 단순한 기독교적인 삶을 통해서 이루심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기독교인들은 불행해야하고, 슬퍼해 야하며, 병적이고, 기쁨을 억제하고 고생스런 나날을 살아가는 자들이라는 인상 을 주는 그러한 상태에서 벗어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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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인이 되지 않은 이유로서 이것을 들추고 있다. 그들은 그 들이 항상 소유하고 있을 수도 있는 모든 관심을 기도교 신앙 안에서는 포기해야 하는 줄 알고 있다. 그들은 말한다. 기독교인들을 보시오. 그들이 던져주는 인상을 주시해 보시오! 그리고 그들은 우리를 세상에서 자신들이 믿는 것에 의 해서 쾌감을 가지는 자들과, 그들이 어떠하던지 간에, 비교하기를 매우 즐겨한 다.

그들은 야구경기를 보면서 소리도 칩니다. 그들이 관람했던 영화에 대해서 이야 기도 한다. 그들은 완전히 흥분되기도 한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흥분 되어 있음을 알기를 원한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항상 우울해 보이고, 너무 자 주 불행스런 모습과 자유를 잃고 기쁨이 없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이런 사실 이 많은 수의 사람들로 기독교에 대한 관심을 사라지게 하는 중요한 이유중의 하 나이다.

우리는 솔직히 그들의 태도가 어떤 의미에서는 정당함을 인정하자. 그리고 우리 는 그들의 비판을 정당한 것이라고 고백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휘애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왕국과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 사 람들이 우리가 어떠한 환경 하에 있던지 간에 우리를 주시하므로, 기독교를 반대 하기는 커녕 기독교에 매력을 느끼고 끌려올 수 있는 그러한 방법으로, 하나님과 그의 뜻, 그의 메세지와 그의 능력을 나타내는 것이 우리의 임무이다.

그들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밖에 없도록 우리가 본이 되는 생활을 해야 한다.

나도 그렇게 살아야 할텐데, 나도 저 사람처럼 이 세상에서 살다가 죽을 수 있 다면 좋을 텐데 우리가 낙망 중에 있을 때에는 그와 같은 역할을 감당할 수 없 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잠시동안 나는 우리의 주제의 개괄적인 면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를 원한다. 나 는 일반적인 원인들을 조사하고 고찰하려고 한다. 우리가 노난 주에 있다면 그 상태에 일반적으로 대처할 방법을 찾기를 원한다.

먼저 대략적으로 검토하면 조건에 대해서 고찰을 할 수 있는 위치를 확보하게 될 것이다. 나는 그와 같은 일이 중요함을 강조한다.

만일 여러분이 이런 특별한 상황에 대처한 우리나33라 기독교 교회사 속에 가장 유명한 사람들의 업적과 문헌을 연구한다면 여러분은 그들이 언제나 그런 상황을 위와 같은 방법으로 대처해 나갔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그와 같 은 방법이 널리 쓰이지 않고 있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우리는 항상 조급해 하 면서 한꺼번에 모든 것을 원한다.

우리는 모든 진리를 불과 몇 분 동안 진술할 수 있는 것처럼 믿고 있다. 이에 대한 대답은 그렇게 될 수 없다는 말 밖에는 없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형식 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영위하려고 하는 이유는 그들이 자신을 살피는 데 시간을 투자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 가지 실례를 들어보겠다.

여러분들은 종종 의사의 처방대로 치료하여 나가는 데 어려움을 겪는 환자들에 대해 들을 것입니다. 환자가 의사를 찾아갑니다. 그러면 의사는 그에게 처방을 해 줍니다. 환자가 집으로 돌아올 때가지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분명히 아 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치료하는 일을 계속 하는 동안 의사가 그들에게 세밀한 부분까지는 지시해 주지 않았음을 알게 됩니다. 의사는 개략적인 말만 했지 세 밀한 부분까지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치료하는 자가 당황하게 되어 무엇 을 해야할 지 알지 못하고 치료조차도 어떻게 해야 할 지 기억도 할 수 없게 됩 니다.

가르치는 데에도 똑같은 원리들이 적용됩니다. 현명한 스승은 언제나 일반적인 원리들을 가르칩니다. 그렇다고 자세히 가르치는 일을 절대로 소홀히 하지도 않 습니다. 일반적인 진술 자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특별한 경우에 이르 기까지 언급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저는 당분간 일반적인 점을 다루기로 하겠 습니다.

첫째로, 영적 침체의 상태를 면밀해 주시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 시편 시인이 제공해 준 것보다도 더 좋은 묘사를 찾을 수 없습니다. 이 시편은 영적 침체에 대한 특별히 예리한 사실을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을 읽어보십시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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