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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성2 (시 46: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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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이, 그 줄기들이 하나님의 성을 즐겁게 하도다. 마치 에덴 동산을 적시 는 강들의 풍경과 같이(창 2:10-14) 평화와 안정이 가득차 있는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하다. 2-3절의 재앙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인 모습이다.

강이, 그 줄기들이. 바닷물은 혼돈의 상징이지만 사시사철 흐르는 강물은 생명과 기쁨의 상징이다. 이스라엘 땅에는 강들이 많이 있지만 대부분 와 디(乾川)로서 비올 때는 물이 있지만 비만 그치면 말라버리는 강들이다. 오직 요단강만예외이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사시사철 흐르는 물을 '생명수 (마임 하임, 레 14:6)'로 표현한다. 때로는 '강'이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상징하는 단어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사 8:6:33:21).

 '하나님의 성' (이르 엘로힘)은 어느 성을 가리키는가 보통 예루살렘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예루살렘에는 기혼샘과 기드론 시내가 있었 지만 와디로서 그 성을 적실만한 강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예루살렘은 물 부족으로 곤란을 겪는 성이었다. 따라서 이 성은 실제로 존재하는 어떤 특정한 장소를 가리킨다고 보기보다 창세기(2:10-14)나 에스겔(28:11-19:47:1)에 나타나는 바와 같은 이상적인 도시를 가리킨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시 46편의 원래의 삶의 자리를 요단강이 발원하는 헐몬산 기슭 의 단으로 본다면 이 장소는 구체적이며 실제적인 장소일 수 있을 것이다.

의미를 예루살렘의 이상적인 모습을 비유하여 예루살렘으로 생각되었을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성이 결코 피안의 세계에 있는 성이 아니 라 우리의 삶 한 가운데 있는 성을 가리킨다는 점이며 찬양하는 자가 살고 있는 성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이해는 그 다음 이어지는 5절을 볼 때 더욱 분명해진다. 하나님의 성이 단이든 예루살렘이든 그 지역 사회 전체를 지 칭하는 말이며 그 지역 사회는 하나님의 거룩한 처소임을 강조하고 있다.

 '지극히 높으신 분' (엘욘)은 하나님을 지칭하는 또 하나의 명칭 이다. 구약에 26번 나타나는데 시편에 주로 집중되어 있다(20회). 참고로 ' 엘-엘욘'은 예루살렘에 있었던 여부스 족의 최고신으로 알려져 있다.

 ( 5절 ) 하나님께서 그 가운데 계심으로 (엘로힘 브키르바흐). 시46편에 나타나는 힘찬 신뢰와 용기와 희망의 근원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성전 안에, 지성소에 계신다는 성전 중심의 신앙이 있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도시 한가운데 성전에 계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있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그 성전에서 떠나시거나 안 계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파멸이었다. 하나님께서 성전을 떠나시는 것은 백성들의 죄악이 많고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떠나시는 것이다. 제사장이 임마누엘의 확신을 자신 있게 선포하는 것은 나름대로 근거가 있는 선포이다. 하나님께서 성전에 계신다고 확신하는 것은 백성들이 신속히 죄를 회개하였고 제사장들은 열성을 다해 그 당시의 방법인 속죄제나 속건제를 통해 백성들과 자신의 죄를 신속히 해결하여 성전을 하나님께서 계시기에 편하도록 정결하게 보존하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흔들리지 않는다 (발 티모트). 지진이 일어나고 재앙이 덮쳐와서 산이 흔들릴찌라도(2절) 하나님께서 계신 도시는 흔들리지 않는다. 2절과 5절이 서로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여 서로 대조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도움' (에즈라)이라는 단어도 1절과 5절에 나타난다. 1절에서는 도우시는 하나님 행동의 원칙을 명사 형태로 선포한 것이라면 5절에서는 구체적으로 언제 이러한 도움이 우리 가운데 나타나는지를 동사 형태로 말 하는 것이다. 추상적인 것을 구체화시키고 도움의 강도를 점층적으로 강화 시키는 찬양의 흐름을 발견할 수 있다. '동틀 녘'에 즉 사람들과 만물이 잠에서 깨어나기도 전에, 그리고 그들의 노력이 있기도 전에, 그들이 행동 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을 채워주시고 베풀어주시는 행동을 먼저 하신다는 것이다 (참조:삼상 11:9:대하 20:17:시 5:3:17:15:90:14 143:8).

 ( 6절 ) 민족들이 소란하고 (하무 고임), 왕국들이 요동하였구나 (마투 마믈라코트). 동사들이 완료형으로 표현된 것을 보아 민족들과 나라들이 소동을 부리는 것은 이미 시작된 실제 상황임을 알 수 있다. 국제정치적 상황이 악화되어 침략과 전쟁의 소용돌이가 일어난 상황을 말한다. 이스라엘은 강대국 틈바구니에 끼어 있었던 약소국가로서 수많은 원치 않는 전쟁을 겪어 온 나라이다. 나라의 정치와 경제적 운명이 강대국의 손아귀에서 춤추는 약소 국가의 상황 때문에 그들은 국제정치 상황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고 불안한 국제 상황을 최대의 재앙으로 받아들였다. 민족 분단과 상처를 안고 있는 한국 상황도 이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땅이 녹아날 것이다 (타무그 아레츠). 땅은 모든 나라들이 서있는 기반이다. 하나님은 그의 목소리 하나로 자만심에 가득한 강대국의 기반을 송두리째 없애버리신다는 것이다. 불안한 국제 상황에 대해 근본적인 처방을 내리시는 모습이다. '땅이 녹아난다'는 표현은 두려움 속에서온 땅이 주눅 들어 있는 모습 혹은 모든 계획이 녹아지고 허물어져 버리는상황을 묘사하는 표현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목소리는 종종 천둥 소리로 비유되기도 한다 (삿 5:4-5:삼상 2:10:7:10:12:16:사 30:30:미 1:3-4).

 ( 7절 ) 제사장의 확신 있는 선포에 대해서 회중들은 7절과 11절에서 한 목소리로 화답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만군의 야훼' (야훼 츠바오트)라는 명칭은 하나님의 힘, 구 체적으로 말한다면 하늘이나 땅에서 그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군사력을 표현하는 명칭이다. 하나님의 성에 사는 사람들을 충분 히 보호할 수 있는 능력의 하나님임을 나타내는 말이다. 만군의 야훼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이요.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사 7:14:8:8,10). 승리와 평안에 대한 희망과 확신의 근거가 바로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요 이러한 고백은 시 46편 전편에 걸쳐 가장 강하게 자주 반복되는 찬양내용이다.

야곱의 하나님. 즉 이스라엘의 하나님, 다시 말하면 우리(백성)의 하나님이라 부르는 친근한 명칭이다.

 ( 8절 ) 가서 보라 (르쿠 하주). 제사장의 강력한 초대의 명령이 마지막 부분 서두에 나타난다. 단순히 지식으로 알고 이해하는 차원을 넘어서 이제는 몸을 움직여 직접 야훼께서 하신 일을 보고 확신하며 본 것을 증거 할 수 있는 채비를 하라는 초대의 명령이다. 주님께서 하신 일이 무엇이냐 땅을 황무지로 만든 일이다. 이러한 표현은 땅 위에 세워진 모든 것들을 쓸어버린 현상을 묘사한 것으로 6절에서 선언하였던 말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그 사실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라는 것이다. 또한 땅은 자연 전체 를 대표하는 단어로서 하나님께서 자연을 장악하시고 움직일 수 있다는 표 현이기도 하다.

 ( 9절 ) 땅끝까지 전쟁들을 쓸어버리심이여. 전쟁에서 승리하시는 무적의 하나님 을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계시는 분이지만 동시에 그분의 통치 영역은 땅끝까지 이르는 우주적인 영역임을 말하고 있다. 활을 꺾고 창을 부수며 수레를 불사르는 것은 전쟁을 그만두고 평화를 추구하는 의미 보다 전쟁에서 승리하여 전리품을 불사르는 행동으로 우선 보아야 할 것이 다. 시 46편에 나타나는 회중들은 전쟁 없는 피안의 세계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이 계속될 수밖에 없는 현실 세계에서의 승리를 희구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들이 전쟁보다 평화를 좋아하고 하나님께서 주실 평화를 희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현실에서 일어나는 전쟁을 회피하지 않고 적절 히 대처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평화' 혹은 '건강' 등의 의미를 지닌 히브리어 샬롬은 피안의 세계에서나 볼 수 있는 평화를 말하는 것 이 아니라 땅 위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건강한 삶 을 말하는 것으로 전쟁도 포함하는 개념이다.

 ( 10절 ) 명령형이 나타나는데 여호와의 일인칭 목소리가 들린다. 이는 여호와의 나 타나심을 표현한 것이며 동시에 예배 중 제사장(설교자)이 하나님의 나타 나심을 수사학적으로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여호와가 우리 하 나님이신 줄 알라라는 표현을 설교자가 내가 여호와인줄 너희는 알라라 는 직접화법으로 표현하는 경우이다. 이러한 표현법은 설교자 자신을 내세 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강하게 부각시키는 방법이며 마치 하나님의 음 성을 듣는 듯한 효과를 내기 위해 사용하는 표현법이라 볼 수 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한다는 설명이 생략되어 있는 간결한 표현인 것이다.한편 그 당시 제사 의식에서 제단의 불꽃과 연기가 올라갈 때면 회중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시각적으로 체험하게 된다. 따라서 제사장은 하나님의 임재를 이러한 직접화법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8절과 더불어 10절은 설교자의 권유로 볼 수 있으며 10절은 보다 더 강도 높게 권유하는 형태임을 알 수 있다. 결단을 촉구하는 권유의 내용은 하나님의 성에서뿐만 아니라 온 땅에서의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조용히 하라 (하르푸). '내버려 두라' 혹은 '아무것도 하지 말라' 등의 의미를 표현하고 있는 하나님의 명령은 하나님의 통치 방식에 전적인 신뢰를 보내라는 명령이다. 내가 하나님임을 알아라. 창조주이시며 역사의 주관자이시며 동시에 우리의 주님이 되시는 하나님을 선포한 것으로 이 시편 전체의 부분이다. 열방들 가운데서 내가 높으며, 땅에서 내가 높으니라. 국제 사회에서나 자연을 포함한 온 우주적인 차원에서나 하나님은 통치자임을 분명히 선포하시는 대목으로 1-3절의 자연 재해와 4-7절의 국제 상황 악화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이 바로 여기에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V. 설교를 위한 신학적 메시지

1. 살아있는 예배 본문은 예배 가운데 제사장과 온 회중들이 서로 화답하며 부르는 확신에 찬 찬송이요 고백이다. 이들은 국제정치적 상황의 악화로 엄청난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전쟁이나 침략의 소용돌이 속에서 압박 당하 고 있었으리라. 약소국가의 백성으로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고 무능력을 자인할 수밖에 없지만 그들은 희망을 잃지 않고 성전으로 나아간다. 그들 의 예배는 날짜와 시간을 때우는 형식적인 예배가 아니라 예배를 통해 삶 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확신에 찬 예배요 예배 중에 궁극적인 승리를 경험하는 살아있는 예배인 것이다. 무엇보다도 예배 가운데 하나님과의 만 남을 체험할 수 있는 예배가 될 때 이 예배는 살아있는 예배가 되는 것이 다. 비록 국제 상황은 악화되어 있고 전쟁의 참혹함은 멈추지 않고 있다 하여도 그들이 예배 드리는 가운데 승리의 나팔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예배 가운데 삶의 기본적인 기쁨과 희망을 되찾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살아있는 예배요 고통 가운데 있는 성도들이 예배를 통해 받는 주님의 은 혜인 것이다.

 2.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성-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기에… 예배를 인도하는 제사장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 신다(5절)고 선포하고 있다. 제사장의 이러한 선포는 아무런 절차 없이 말 로만 하는 선포가 아니다. 제사장이 이러한 선포를 할 때는 온 회중의 죄 문제가 해결되어 하나님께서 성전에 평안히 계실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이 다. 즉 속죄제와 속건제를 드려 죄 문제를 해결하고 나서 이러한 선포를 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과 회중 사이를 가로막는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 고 이러한 선포를 하는 것은 제사장의 직무 유기요 그 선포는 공허하기만 하다. 즉 회개의 절차를 밟지 않고 선포하는 임마누엘의 메시지는 성도들 의 가슴에 파고들지 못한다는 것이다.

주님이 계시는 하나님의 성은 흔들리지 않는다고 하였다(6절). 그렇게 믿 었던 산도 흔들리고 믿었던 우방 국가도 흔들리지만 하나님의 성은 흔들리 지 않는 것이다. 우리 주위에는 도처에서 무너지고 흔들리는 소리가 들린 다. 도덕과 윤리가 무너지고 정신적 지주가 무너지고 때로는 가정적으로 경제적 기반이 무너질 때도 있고, 환경이 무너지며 국제 상황이 악화되고 전쟁과 테러의 소식이 끊이지 않고 있다. 우리의 삶을 받쳐 주고 있던 믿 었던 것들이 무너지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의 현실이고 이 시편 회중들 의 현실이기도 하였다. 비록 무너지고 흔들리는 소리가 있다 하여도 하나 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 한 우리의 가정과 교회와 사회를 송두리째 파 멸시킬 수는 없다는 긍정적이며 희망적인 태도로 우리의 삶을 살아가야할 것이다.

 3. 동틀 녘에 주님이 도와주신다.

시 46편에는 하나님의 도움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보다 더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전을 전통적으로 회막('만남의 장막')이라 부른다. 이 회중들이 고통 가운데서 기대하는 것은 '도움'이나 ' 힘'이라기보다 '만나주시는 하나님'이다(1절). 하나님은 우리가 당하는 고 통의 현장에 나타나시며, 그분은 이미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먼저 우리의 부족한 것을 채워주시며 우리가 일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구원의 행동을 하고 계시는 분이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의 행동에 신뢰를 보내고 '잠 잠히' 지켜보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 하신 일을 본 증인이 되는 것이다(8절). 이것은 우리가 방관자가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 님의 통치를 수용하고 하나님의 행동을 믿어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통치 하시는 현실의 삶을 긍정하고 하나님께서 확신하시는 승리에 함께 참여하 는 적극적인 신앙인의 태도인 것이다.

 4. 가서 보라 ! 제사장과 회중이 서로 화답할 때 회중의 확신은 제사장의 확신에 의해 인 도받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확신에 찬 목소리로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 니다라고 선포할 수 있는 제사장(설교자/목회자), 그리고 가서 보라!라 고 거리낌없이 무엇인가 확실한 것을 제시해 줄 수 있는 제사장(목회자)이 있기에 온 회중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만군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이 라(7, 11절)고 우렁차게 화창하는 것이다. 제사장이 제시해 줄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하신 일'이다. 주님께서 하신 일 가운데 가장 근본적인 일 은 창조의 일과 역사를 통치하신 일이다. 혼돈과 흑암 가운데서 새로운 세 상을 창조하실 수 있는 능력의 하나님, 택하신 백성을 인도하시며 구원하 시는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생생하게 보여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제사장(설교자)의 확신과 전달기술이 필요하다.

 5. 하나님의 성과 땅 끝 주님이 계시는 성전이 있는 도성을 하나님의 성이라 부르고 있고 회중들은 그 성에 살고있는 백성들이다(5-6절). 그들은 우리 도시에, 우리 마을에 주님이 계신다고 확신하며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하나님의 성'은 어디인가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전'이라 하지 않고 '하나님의 성'이라 하였다.

이것은 도시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예루살렘 뿐 만 아니라 어느 도시이 든 외국인들도 있고 나그네도 있으며 심지어는 이방종교인들도 있었다. 아 마도 야훼를 섬기는 사람들이 다수였으리라. 오늘날 '하나님의 성'을 좁게 는 하나님 섬기는 가정과 교회를 생각할 수 있지만 원래의 의미를 찾는다 면 삶의 현장인 지역 사회 전체를 생각해야 한다. 예루살렘 성이 무너질 때 예루살렘 성전이 불탔음을 상기하자. 이 지역 사회가 무너질 때 교회와 가정이 서 있을 곳이 과연 어디인가 우리가 선교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고 우리의 책임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시 46편은 하나님의 성의 안전함과 승리를 노래하고 있지만 그 시야는 땅 끝까지 이르고 있다. 하나님의 성의 안전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성 이외의 지역은 적대적인 지역 혹은 쳐 부수어야 할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이러한 모습은 시 46편의 회중들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모습은 아니다. 오히려 온 세계와 우주의 통치권을 장악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바라고 있다. 국제 사회에서나 온 우주에 걸쳐 높임을 받으며(10절) 그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면서 비로소 하나님의 성에 사는 회중들은 안심하고 기 쁨을 향유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에서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모습 은 온 세계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모습이며, 하나님의 성은 온 세계의 중심이고 동시에 세계인이 살아가야 할 삶의 터전 가운데 모범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개인 이기주의, 개교회 이기주의, 지역 사회의 이기주의, 국가적 이기주의 등을 극복하고 온 세계의 화평과 희망 속에 우 리의 희망을 자리매김할 때 비로소 우리는 가슴 속에서 우러나오는 삶의 기쁨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요 우렁찬 찬양의 울림이 땅을 진동하게 될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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