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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갈바를 알지 못하고 (히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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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는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많이하셨다. 찬송가에도 어디든 지 주를 라라 함께 가려네라는 구절이 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는 '보이는 주님'을 '보고' 따를 수 있었으나, 지금은 어떻게 주님을 따르는 것이 진정 따르는 것인가중대한 일이면 서도 관념적으로 생각하고, 습관적으로 행동하며, 주관적으로 판단해 버린다. 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개념들이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목회 자의 길을 가는 것' 이라고 생각하고 '신학교와 목사'를 생각한다.

 그러나 과연 그 길만이 주님을 따르는 길인가

결코 신학교나 목회자의 길이다 '주님을 따르는 길'만은 아니다. 그 것은 다만 '사람의 생각' 일뿐이다. 이 말에 펄쩍 뛸분들이 많을 것이 다. 그러나 이 말의 참뜻은 '주님의 길'이 모두다 '사역의 길'만은 아 니라는 말이다. 사역은 어디까지나 삶에서 나온 것이어야지, 사역 자 체가 삶이라는 착각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사역'이나 '삶'이 같은 말인것 같지만 사역은 젖이 나오는 기관 같 다면 삶은 그 내용물과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교회나(외 형적) 목사직은 사역자의 일터요,자격이지, 사역의 '원동력'이나'내 용'은 아닌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때 아무리 훌륭한 교회(기준이 무 엇인지가 문제지만), 실력있는 신학교육을 받은 목사라 할지라도 삶이 없는 사역, 얼마나 힘들고 따분한 고행이겠는가

고로 사역은 삶의 결과요 열매일지언정, 사역 자체가(어떤 사역이든 간에) '주님을 따르는 길'이라고 보기에는 정당치 못하며 더욱이 주님 을 따르는 것이 목회자기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위험 천만한 생각인지 모른다.

 사역과 주님을 따르는 것! 사역이란 말은 그 단어 자체에 자기를 필요로 하는 대상을 포함하고 있다. 즉 '사람'이라는 대상이 있다. 그러므로 그 등식은 '사역자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나와 주님과의 관 계이다. 여기에 사람이 꼭 끼일 필요가 없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따른다해도 엄밀히 말해서 '그들과 나와의 관계'가 나와 주님 과의 관계만큼 중요하거나 심각하지 않다. 그들과는 상대적이라면 나 와 주님과는 절대적인 것이다. 그들이 나를 버리거나 떠날 수는 있어 도, 나는 주님을 포기하거나 주님이 나를 버릴 수는 없다.

 결국 '주님을 따르지 않는 사역'은 있을 수도 없으며, '따르지 않는 사역자'가 무슨 '주님의 종'인가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는 삶이 선행 되어야 엄마가 섭취한 영양분에서 젖이 나오듯 풍성한 사역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예수님 당시의 제자들은 '보이는 주님'을 보고서 따랐지만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요 20:29)은 어떻게 하는 것이 따르는 것인가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아 브라함 역시 '보지 못하고'믿은 분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성경은 .....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세 갈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다라고 기록하고 있다.우리는여 기서 나아갔다라는 말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어떻게 길을 떠나는 사람이 갈바를 알지 못하고나갈 수 있느냐 하는 말이다.

 많은 사람이 이런 경우에 '무조건 믿음으로'를 외치며 결행했다가 무 참해도 낭패를 당하고 다시 원점(갈대아 우르)으로 돌아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믿음은 '무조건'이 아니다. 좌냐 우냐를 결정해야 한다.

 갈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다라는 말은 사실 어떤면에서 믿음의 삶 이란 꼭 어떤 목적지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또한 그 목적지 때문에, 혹은 목적 때문에 믿음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엄밀하게 하 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엄밀하게 말해서 믿음생활이라고 말할 수 없 다. 믿음을 가진 사람이 사는 삶을 믿음생활, 혹은 신앙생활이라 해야 할 것이다. 믿음을 얻고자 하는 신념을 가지고서 노력하는 사람의 삶 을 신앙생활이다 하면 안된다. '신념생활을 한다'라고 말해야 옳을 것 이다.

 마찬가지로 천국을 가려고 신앙생활하는 사람은 결국 천궁에 못갈지 도 모른다. 다만 현재 천국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만이 천국에 가는 것이다. 그는 또한 지금 천국의 삶을 사는 것이기도 하다.

 이 세상에서 천국생활의 예해연흡을 해보자! 그래서 좋으면 당신은 천국갈 자격이 있을 뿐 아니라 천국 삶을 영원히 즐기며 살수 있을것 이다. '천국' 이 맹목적이 되었다가는 큰일날 수도 있다. '천국' 이 목적이 아니라 천국이 삶의 목적이어야 한다. 천국 삶은 곧 믿음의 삶 이다. 그것은 또한 목적이 성취된 것이기도 하다.

 삶 자체가 목적인 사람은 그 삶을 사는 것은 곧 목적 자체가 성취된 사람이었고 이미 그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기 때문에 꼭 목적지가 정 해져야 할 필요성이 없었다. 목적지 때문에 답사를 한다거나 스케줄을 철저하게 짤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갈바를 알지 못했지만 그것이 그가 나아가는데 그를 주저하게 하거나 망설이게 하거나 가로 막지는 못했다. 방향이 어디이든, 위치가 어디이든, 환경이 어떻든 상 관없이 그는 그 어느곳에서도 그의 목적적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과연 내적으로 어떤 만족한 삶을 살고 있는가, 그 삶은 방안 에 있든지 밖에 있든지 나가든지 환경이나 조건적 영향을 받지 않고 있는가.

 님의 나라를 골방이나 광야같은 환경적 천국이아니며, 여기있다 저기 있다 하는 지역이나 장소적 개념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속에 있는것 이다.(눅17:21). 이러한 현세적 천국 삶을 누리는 자, 또 즐기는 자만 이 영원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있으며,천국의 참으로 천국다운 모든 혜 택 들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천국은 누리는 자들의 에덴 동산이 요 즐기는 자들의 낙원인 것이다. 그러면 내재하는 실존적 믿음은 무 엇을 말하는가 성경은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에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여(창11:31)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 갔더라(창 12:5) 라고 기록하고 있는가 하면, 히11:13은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 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 같이 말하는 자 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여기서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하였고 이같이 말하는 자 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내는 제스츄어일 뿐이다. 그가 찾고 사모하

는 본향은 이 땅에나 또는 가나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 에 있 는, 하나님이 ... 저희를 위하여 예배하신 한 성이었다.

 그러면 그들이 이 땅에서는 무엇으로 살았는가 이 사람들은 다 믿 음을 따라...(히11:13), '믿음으로 .. 같이 장막에 거하였다고 말하 는 그 믿음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이 믿음은 무엇인가우리가 아는 히11장1절을 살 펴보자 히브리 기자는 실상 (휴포스타시스) 를 본서에서 3회 사용하 고 있다.

 히1:3과 3:14과 11:1 그런데 1:3에서는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 시요 본체의 형상이시라에서 '본체'로 번역되었다. 이 말씀을 직역하 면 이는 (2절의 아들) 영광의 광채시요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이라 할 수 있다. 이 말씀은 하나님과 아들의 관계성을 묘사하는 말씀인데, 하나님은 영광과 본체로, 아들은 광채와 형상으로 비유된다.

 또 3:14 에서는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 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에서 '확실한 것'으로 번역이 돼있다.

 믿음은 '개념'이 아니라 존재요, '인간적 신념'이 아니라 신적 꿈틀 거림이다.

 이 믿음의 역사(役事)가 역사(歷史)를 이어오신 것이다.

그리고 믿음이 완성을 이루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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