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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옥합을 깨뜨리자 (눅 07:3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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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절을 엿새 앞두고 예수님은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가셨습니다. 그는 또 바리새인이라고 오늘 본문 36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창기는 한 마을에 살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은 예수님이 베다니에 오신 것을 알자 자신의 의로움을 나타내고자 집으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초청했습니다. 모두가 식탁에 둘러앉았을 때 죄많은 여인이 예수님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었습니다. 당시에 죄인의 대명사로 불리던 사람은 남자의 경우는 세리요, 여자는 창기였습니다. 본문 37절에 죄인인 여인이라고 말한 것을 보아 이 여인은 몸을 파는 직업의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1.모든 사람은 다 죄인입니다.
그들은 한 시대 사람입니다. 그들은 한 마을 사람입니다. 두 사람이 동시에 예수님 앞에 있지만 그들이 주님 앞에 선 이유는 서로 달랐습니다. 한 사람은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하려고 섰고, 또 다른 한 사람은 큰 죄를 용서받고자 섰습니다. 그들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섰든지 관계없이 성경은 선언합니다.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본문은 영적 자만에 빠져 주의 은혜에 대해 냉랭한 바리새인과 자신의 죄성을 통절히 인식하고 오직 사죄의 은혜만을 애타게 기대하는 여인과의 극명한 대조를 보여줍니다.
마태복음 26장 6절을 보면 이 바리새인은 문둥이 시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당시로서는 문둥이로서 바리새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아마 바리새인으로서 문둥이가 된 듯 싶습니다. 자신도 보잘것없는 문둥이면서 남을 멸시하고 천대하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문둥이가 되어서도 「나는 의로운 사람이다」라는 영적 교만을 벗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딤전 1:15) 고백할 줄 알았기에 복음을 위해 전폭적으로 헌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수치를 모르는 뻔뻔스러움을 도리어 자랑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문둥이 바리새인 시몬은 바로 우리들의 자화상입니다. 통곡하는 죄인이 예수님 앞에 있을 때 “나는 저 사람과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말하는 뻔뻔스러움이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주여, 나에게는 더 중한 죄의 병이 있습니다. 나를 고쳐 주옵소서!” 하는 절박한 고백을 듣기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1-32)”
예수님을 초청한 바리새인은 여인을 대하는 주님의 태도를 보고 크게 실망합니다. ‘저 분은 선지자가 아니다. 만일 저가 선지자라면 자기에게 향유를 붓는 여인이 얼마나 추한 여인인 줄 왜 모르겠는가’
그러나 예수님은 다시 말씀하십니다. “죄 없는 자가 이 여인을 돌로 치라” “남의 눈에 티가 있으면 네 눈에는 들보가 있느니라” 우리는 남만 보지 말고 그를 통해 자신을 살필 줄 아는 믿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주님은 우리 인간들에게서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하는 고백을 듣고 싶어하십니다. 그럴 때 예수님에게 용서를 구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2.옥합을 깨뜨립시다.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하는 교만한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위하여 아무 것도 하는 일이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자기를 위해 일해 주기를 기다립니다. 칭찬해 주길 바라고, 상을 달라고 손을 내밉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책망하셨습니다.
“ ....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눅 7:44)
바리새인은 해 주실 것을 기다리느라 아무 것도 예수님에게 아무 것도 드리지 못했습니다. 손님이 자기 집에 들어오면 물을 떠다가 발을 씻겨주는 것은 이스라엘의 관례였습니다. 바리새인은 가장 기초적인 예의도 예수님께 갖추지 못했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사람은 아무 것도 주님을 위하여 일하지 않습니다. 자기 외에 다른 사람을 인정해 줄 때 시기, 질투합니다. 자신을 알아주지 않았을 때 분개합니다. 그러나 이 죄많은 여인은 어떻게 했습니까1)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셨습니다.
2)그 머리털로 발을 씻었습니다.
3)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4)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이 여인은 부끄러운 여인입니다. 부끄러운 일을 통하여 부끄럽게 돈을 벌었습니다. 돈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고는 도저히 살 수 없었습니다. 여인은 죽기보다 싫은 일을 해 가며 살았습니다. 여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눈물을 흘리며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여인은 생명과도 같은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에게 부은 향유는 요한복음 12장을 보면 삼백 데리나온이나 되는 많은 양이라고 했습니다. 삼백 데리나온은 남자 장정이 일년을 일해야 겨우 벌 수 있는 큰돈입니다. 여인은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겨 드렸습니다. 어떤 죄도 용서하시는 예수님 앞에 감히 고개도 못 들고 자신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빌며 발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부끄러운 일을 했기에 그 향유는 더 눈물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여인의 생명과도 같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하여 모두 부었습니다. 더 못 드리는 것을 아쉬워하면서 부었습니다. 따가운 바리새인 눈길 앞에서 부끄러워하면서 눈물로 발을 씻기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차라리 가난한 자들에게나 나누어줄 것이지 쓸데없는 일을 했다고 책망하는 가롯 유다의 욕설 앞에서도 여인은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향유를 아낌없이 부어드렸습니다.
예배하는 우리에게도 이 여인과 같이 죄를 통회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뜨거운 회개의 눈물이 필요합니다. 그 발에 입맞추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사랑하기에 옥합을 깨서 쏟아 부을 수 있는 향유가 필요합니다.
금요일에 가까운 교회에서 간증 전도 집회가 있어 참석하여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강사는 인천 새소망 장로 교회 손원근 집사였습니다. 그는 개척한지 2년 만에 성도가 없어 빚에 쪼들리다가 문을 닫기로 폐쇄 결정한 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교회를 위하여 목사님과 함께 눈물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바로 옆의 건물로 60평 건물로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손원근 집사님은 다섯 식구가 사는 지하 셋방의 보증금을 뺐습니다. 400만원을 하나님의 성전에 드렸습니다. 목사님도 집사님도 살 곳이 없어서 교회 뒤를 막아 살고 계셨는데 그것을 다시 둘로 막아 목사님 가정과 같이 교회에서 생활을 했습니다. 교회가 이전할 때 돈 한푼 헌금하지 않은 집사님이 왜 교회에 젊은 사람이 교회에 빌붙어 살아가느냐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참기 힘든 모독이었으나 주님을 위한 사랑 때문에 참았습니다.
하나님이 천주교인인 그를 그리스도인으로 바꾸어 사용하시고자 인생 맨 밑바닥까지 낮추셨습니다. 5년 여 세월을 지독스럽게 연단하셨습니다. 연단이 끝나자 하나님이 그를 놀랍게 축복해 주셨습니다. 어느 날 교회에 생소금을 판매하는 장로님이 오셔서 건강에 관한 강연을 했습니다.
장모님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너무 가난하여 생소금 한 봉지를 사 드리지 못했습니다. 모두가 돌아가고 난 뒤에 몸이 불편한 장모님은 부엌에 가셔서 소금을 후라이팬에 볶기 시작했습니다. 손원근 집사님은 과거에 도자기 공장을 운영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도자기 속에다 구어 봐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의 도자기 공장에 가서 도자기 안에다 소금을 넣고 고열로 가열했더니 모든 독성이 사라진 순수한 소금이 나왔습니다. 그 소금을 가지고 장로님에게 갔다 드렸더니 소금만 만들어다 주면 자기가 다 팔아 주겠다고 했습니다.
도자기 속에 소금을 구어 판매했는데 너무 잘 팔려 처음으로 6500만원이라는 거금을 만지게 되었습니다. 한푼도 남기지 않고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에게는 그가 깨칠 수 있는 옥합이었습니다. 다섯 식구의 삶의 보금자리인 지하 단칸방의 400만원 보증금을 하나님께 드릴 때 그것이 그에게는 그가 깰 수 있는 유일한 옥합이었습니다. 실로 5년만에 만져 보는 6500만원도 그에게는 옥합이었습니다. 그것도 그에게는 옥합이었습니다.
서울의 어느 교회에서 12,000평 예배당을 건축하는데 장로님 한 분이 100억원을 건축 헌금을 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옥합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옥합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간증을 들으면서 느낀 것은 손원근 집사님이 드린 모든 헌금은 최악의 조건에서 깨쳐 드리는 옥합이었습니다.
눈물로 드리고, 피를 쏟으며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희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오늘 이 시간 예배하는 우리들의 시간은 다같은 시간은 아닙니다. 수능시험을 3일 앞둔 학생에게는 이 시간이 옥합입니다. 수술한 후 도저히 나올 수 없는 건강을 가지고 예배하러 나온 분에게 이 시간은 그가 깰 수 있는 옥합입니다.
예수님은 그 옥합을 받으시고 자신도 감격하여 우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옥합을 깨서 드려야 합니다. 주님이 감격하실 만한 옥합을 깨서 주님께 드려야 하겠습니다.

3.놀라운 축복이 여인에게 주어졌습니다.
여인이 옥합을 깨어 주님에게 부어 드렸을 때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먼저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까1)옥합을 깨니 향기가 진동했습니다.
옥합 속에는 값비싼 나드가 가득히 간직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머리 위에 부어지자 집안 가득 향기가 진동했습니다. 옥합을 깨뜨리기 이전에 발냄새 진동했습니다. 거만한 바리새인 시몬은 예수님의 발도 씻겨 드리지 않았습니다. 시몬과 예수님, 12제자들의 발냄새가 집안 가득 진동했습니다. 그러나 여인이 옥합을 깨자 집안에는 그 고약한 발냄새를 잠재우는 향기가 가득했습니다. 여인은 눈물로, 향유로 주님을 씻어 드렸습니다.
옥합을 깨기 이전에 발냄새도 지독했습니다만 더욱 지독한 것은 인간의 교만이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듣기 싫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자화자찬입니다. 남은 헐뜯고 자신을 추켜세우는 이야기는 어디서는 듣기 싫습니다. 시몬은 자신을 떠벌이면서 주님께 인정받기를 원했습니다. 그 소리는 누구도 듣기 싫은 소리입니다. 자기에게 자기 혼자 말하고 혼자 듣기 좋은 말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남의 허물을 가려 주고 자기를 끝없이 낮추는 말은 언제 보아도 아름답습니다.
문둥이 시몬의 집에 이 여인이 와서 옥합을 깨뜨리지 않았더라면 이 집은 인간의 교만과 죄악으로 냄새나는 장소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이 와서 옥합을 깸으로 너무나 아름다운 장소로 돌변했습니다. 우리도 스스로 잘났다는 이 교만을 버리고 여인처럼 우리의 삶의 자리가 향기로 진동할 수 있도록 옥합을 깨뜨려야 하겠습니다.
2)죄를 용서받았습니다.
여인은 사실 지은 죄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죄를 용서받으므로 더욱 주님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선언하셨습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눅 7:48)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눅 7:50)
3)주님의 죽음을 준비한 것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이 여자가 내 몸에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마 26:12)”
죽음에는 두려움이 있지만 또 한 가지는 외로움입니다. 죽음에는 동반자가 없습니다. 같은 날, 같은 자리에서 죽어도 모두 각자의 죽음을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은 외로운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더 더욱 외로운 것이었습니다. 그는 제자에 의하여 은 삼십에 팔렸습니다.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에게 세번이나 모른다고 부인 당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제자들은 십자가에 달리는 순간 모두 달아나 버렸습니다. 철저하게 외면 당했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앞둔 예수님은 참으로 외로웠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이 모든 사실을 미리 다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더욱 무겁고 외로운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죄많은 이 여인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구원자로 인정해 주었습니다. 인류의 죄를 대속하실 메시야, 그리스도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발 앞에 엎드려 눈물로 용서를 구했습니다.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발을 씻긴 것이 죽음의 길을 향해 가시는 길에는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발에 계속 입맞추며 머리에 향유를 부었을 때 예수님은 그 여인을 인하여 더욱 굳은 결심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 아무도 없어도 내가 너와 같은 이가 있음으로 기쁘게 죽을 수 있구나. 딸아 안심하라 네 죄가 사함 받았느니라 기쁘게 네 죄를 용서하마” 가롯 유다를 비롯한 모든 무리가 여인에게 쓸데없이 향유를 허비하였다고 책망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막 14:6-8)
4)영원히 기록되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향유를 쏟은 마리아의 일을 얼마나 주님이 기쁘게 여기셨는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막 14:9)
이 이야기는 마태복음에는 26장에, 마가복음에는 14장에, 누가복음에는 7장에, 요한복음에는 12장에 각각 기록되었습니다. 4복음서에 빠진 곳 없이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여인의 일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셨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얼마나 큰 축복과 은혜인지 알 수 없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향유를 쏟으면 쏟는 만큼 축복입니다. 손원근 집사님은 그 엄청난 고난 가운데서도 끝까지 하나님에 대한 신실한 사랑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이 너무나 좋은 공장을 예비해 주셨습니다. 그의 평생 소원이 매월 천만 원의 십일조를 하는 것이었는데 무일푼에서 그것이 가능하도록 축복해 주셨습니다.
지난 해에는 회사 매출액 말고 자신의 순소득만 16억이 되게 하셨습니다. 한번은 교회에서 땅을 사는데 돈이 부족했습니다. 그때 마침 기술 개발비로 1억 6천만 원을 예금해 둔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모두 드리고 하나님께 개발비 드린 것 이상의 지혜를 구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성경 열왕기하 2장 19절로 22절까지의 말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엘리사가 여리고 성에 있을 때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이 성은 심히 아름다우나 물이 좋지 못하여 나무의 열매가 익지 못하고 자꾸 떨어집니다. 어떻게 대책을 세워 주십시오” 엘리사는 물의 근원을 찾아 그곳에 소금을 뿌렸습니다. 그랬더니 물이 고쳐졌고 열매가 떨어지는 법이 없었습니다.
손원근 집사님은 거기에 나오는 단어를 죽 열거해 보았습니다. 「물-흙-소금」 그는 이 세 가지에 힌트를 얻었습니다. 사람은 생수를 먹어야 살게끔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물에 비상이 걸릴 만큼 오염된 상황 속에 살아갑니다. 약수물이 좋지만 좀 알려지면 많은 사람들이 찾게 되고 오염이 되어 금방 사용을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정수기입니다.
기존에 나와 있는 정수기들은 일정 기간을 쓰면 휠터를 갈아주어야 합니다. 오래되도록 정수기의 휠터를 갈아주지 않으면 오히려 수돗물을 그냥 마시는 것보다도 더 나쁜 물을 마시는 결과가 됩니다. 휠터 값도 만만치 않으니 서민들에게는 크게 부담이 됩니다. 그래서 손원근 집사님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휠터가 필요없는 정수기를 만들었습니다.
과거 우리 조상들은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항아리에 부어 놓고 그 물을 떠서 마셨습니다. 그 원리를 이용했습니다. 항아리 같은 도자기에다 밑에 수도꼭지를 달았습니다. 도자기 내부에는 특수 유약을 발라 물이 오래되어도 상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맑게 정화되게 했습니다. 그리고 매일 정수기 안팎을 항아리 닦듯이 씻어 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의 옥합을 깨뜨릴 때마다 하나님은 천국 문을 여시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다음 주일은 추수 감사 주일입니다. 하나님 앞에 어떤 감사를 드리시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의 가장 귀중한 옥합을 깨뜨리시기 바랍니다. 옥합을 깨는 것은 어리석음이 아닙니다. 낭비도 아닙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가룟 유다는 마리아의 행위를 부질없는 낭비라고 요한복음 12장 4절에서 몰아붙였습니다. 그는 가난한 자들에게 그 돈을 썼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했지만 돈에 대한 자기 욕심에서 나온 말이었습니다. 결국 그 마음에 마귀가 예수님을 팔려는 마음을 넣었고 그는 가장 치욕스러운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가장 값진 것을 가장 겸손한 자세로 주께 바치고도 부족하여 더 없음을 한탄해 마지않는 죄많은 이 여인의 숭고한 사랑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그 사랑의 마음으로 여러분의 옥합을 깨뜨리시기 바랍니다.
일년 365일.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생명의 날 동안 날마다 최선의 감사를 드려야 하겠습니다만 다음 주는 특별히 추수 감사 주일입니다. 특별히 일년을 결산하면서 주신 은혜를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옥합을 깨뜨려 감사해 보시기 바랍니다. 도저히 깰 수 없는 옥합을 깨뜨려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성전 이전과 건축을 위해 또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도 여러분의 옥합을 깨뜨려 보시기 바랍니다. 아름다운 향기가 진동할 것입니다. 남이 비난해도 주님은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이 여인의 이름이 사복음서에 빠짐없이 기록된 것처럼 하늘나라 창고에 보화가 가득 쌓이고 그 사랑을 예수님이 기억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과 땅에서 주님이 축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 주실 것입니다.
금년 추수 감사 주일에는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옥합을 깸으로 충만하고,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이 축복으로 넘쳐 나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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