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네 자녀와 후손을 위하여 (창 15:12-21)

첨부 1


자녀를 기르면서 아픔없이 건강하게 잘 자라 주었으면 하는 것이 부모의 바램이지만 그렇게 부모의 바램대로 되는 자식은 많지 않습니다. 자녀를 위한 뜨거운 눈물어린 기도가 있을 때 그 자녀가 잘될 줄로 믿습니다.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가정은 하나님이 세우신 최초의 기관입니다. 우리 모두는 가정을 맡은 청지기요 관리자입니다. 가정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평생 관리하고 충성해야 할 최우선의 기관입니다.
가정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잘 관리하고 이끌어 가는 사람만이 주님의 몸된 교회에도 충성할 수 있습니다. 가정생활에서 행복과 보람을 찾는 사람만이 다른 일들에 있어서도 가치와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자녀문제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최근 자녀문제, 청소년 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를 죽이고 방화로 위장하는 유학생도 나왔고, 아버지를 죽이는 대학교수도 나왔습니다. 세상에 어떻게 자식이 부모를 죽일 수 있느냐고 혀를 차지만 잘못은 양자에게 다 있습니다. 심은 대로 거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자식이 부모를 죽일 수 있느냐 하는 부분에 있어서 심각하게 반성도 해야 하지만 이와 동시에 어떻게 자식을 길렀으면 자식에 의하여 죽게 되었느냐 하는 입장에서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특별히 박한상 군의 가정은 예수 믿는 가정이었습니다. 아버지를 살해한 김성복 교수는 자신은 기독교인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어떻게 길렀기에 기독교 가정에서 어떻게 그런 패륜아가 나왔는가를 반성해야 합니다. 어떤 신앙을 소유했기에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이 자기 아버지를 죽일 수 있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가 정말로 잘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이 분명하게 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어떤 일이든 저절로 잘되는 법은 없습니다. 논에 모를 심어만 놓았는데 농사가 잘되는 법은 없습니다. 자식을 낳아 출생신고만 하고 내버려 두었는데 그래도 잘되는 법은 없습니다.
저희는 최근 들어 아이들을 키우면서 자식을 낳는 것보다 기르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드는가를 절감하고 있습니다. 자식을 낳는 것은 죽을 각오하고 죽을 힘을 다해 낳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식을 기르는 것은 죽을 때까지 온갖 고생 다해가며 기르는 것입니다. 저희 아이들은 성격이 직선적이고 난폭한 경향이 좀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도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식이 어리니까 지금은 저 모습을 보고 귀엽다고 하지만 나중에 커서도 저러면 큰일이요. 아이들을 위해서 더 많이 기도합시다.”
때로는 자식을 위하여 매도 들어야 하고, 때로는 밤을 새워가며 기도해야 하고, 때로는 예레미야처럼 자식을 위하여 눈물을 물 쏟듯 해야 할 것입니다. 머리맡에서 두 손을 들고 자녀의 생명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밤 초경에 일어나 부르짖을찌어다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 쏟듯 할지어다 각 길머리에서 주려 혼미한 네 어린 자녀의 생명을 위하여 주를 향하여 손을 들지어다 하였도다”(애 2:19)
그게 사랑입니다. 그래야 바른 자녀교육입니다. 자식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고 바른 인격으로 자라갈 때만이 나의 미래가 행복으로 보장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소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부르심을 받는 날, 예수 잘 믿는 자녀를 이 땅 위에 남기고 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당당한 것이 그것 외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말씀을 통해 어떤 어머니, 어떤 아버지가 되어야 그 일이 가능한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1.아름다운 영적 유산을 물려주는 어머니가 됩시다.
누구나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접하는 사람은 어머니입니다. 자식의 인격과 신앙에 최대의 영향력을 입힐 수 있는 사람은 어머니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어머니의 신앙을 유전 받아 훌륭한 믿음의 인물로 자란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이 종살이하는 애굽에서 살해의 위협 가운데서도 살아남은 사람입니다. 어머니 요게벳은 모세의 유모로 궁궐에 들어가 모세를 길렀습니다.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 11:23-26)
사무엘은 어머니 한나의 눈물어린 기도를 통하여 태어난 자식입니다. 한나는 하나님께 드린 서원기도를 따라 어려서부터 사무엘이 성전에서 자라도록 떼어 놓았습니다. 가까이서 보살피고 사랑해주지 못하는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비록 육신으로는 떨어져 있었지만 자식을 위한 기도를 평생토록 잊지 않았습니다. 그 기도가 가장 위대한 선지자 사무엘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디모데는 외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의 신앙의 울타리 안에서 자랐습니다. 우리는 흔히 품안에 자식이라는 말들을 자주합니다. 품에 안고 기를 때 어머니는 그만큼 많은 영향력을 자녀에게 끼칠 수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이스라엘 남자가 외국 여자와 결혼하면 태어난 자식을 유대인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유대인 여자와 외국 남자가 결혼하면 자식을 유대인으로 인정해 줍니다. 어머니가 자식에게 그만큼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만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 능히 자녀를 유대교 신앙으로 기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어머니는 자녀에게 있어서 절대적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는 나의 가장 좋은 학교는 어머니의 무릎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좋은 어머니 밑에서만 좋은 자녀가 만들어집니다. 어머니의 영향력은 그만큼 지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어머니가 잘못된 신앙을 가졌거나, 인격적인 결함을 가졌을 때는 자녀에게 악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습니다.
창세기 35장에 야곱이 가장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베냐민을 낳다가 죽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라헬의 생명을 거두어 가셨습니다. 야곱이 라헬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아십니까
20년 종살이의 서러움을 라헬 하나만을 바라보고 참았습니다. 아버지 집으로 돌아갈 때에 형 에서가 400인의 병사를 데리고 20년 전의 원한을 갚기 위해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이때를 보면 라헬에 대한 야곱을 사랑을 더욱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형에게 두려움을 느낀 야곱은 종자와 양과 소와 약대를 두 떼로 나누었습니다. 한 떼가 공격받으면 한 떼라도 살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영 마음이 놓이지 않았습니다. 다시 예물을 택하여 형에게 미리 보냈습니다. 그래도 불안하기만 한 야곱은 얍복 나루를 건너 에서를 만날 때 어떻게 했습니까
여종 빌하와 실바와 그 아들들을 선두에 세웠습니다. 레아와 그 아들들은 그 다음에 두었습니다. 라헬과 요셉은 자기 뒤에 두었습니다(창 33:1-2).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다른 아내, 다른 자식들은 다 죽어도 라헬과 요셉 너희들만은 살아다오” 하는 뜻이었습니다. “화가 난 형이 나까지 죽인다 해도 요셉과 라헬 당신만은 행복하게 살아주오” 했던 것입니다. 그만큼 야곱은 라헬을 사랑했습니다.
둘이 한 몸 되어 사랑하며 살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 하나님이 남녀가 서로 사랑하는 것을 시기하시겠습니까 둘이 행복하게 일평생 해로하는 것을 하나님이 왜 기뻐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라헬을 도저히 살려두실 수 없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라헬은 우상을 버리지 못하는 여자였습니다. 야곱이 하나님과 환도뼈가 위골 되기까지 씨름하는 자였다면 라헬은 아비집을 떠날 때까지 우상을 포기하지 않는 여자였습니다. 라헬이 낳은 자식이 요셉과 베냐민입니다. 요셉이 누구입니까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하여 세운 사람입니다(창 50:20). 애굽의 총리가 되어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고 땅끝까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증거해야 할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와 같은 요셉에게 가장 크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은 어머니 라헬입니다. 우상숭배 하는 사람은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주님의 복음을 전해야 할 요셉에게 잘못된 영향력을 입히지 못하도록 미리 라헬을 데려가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상반된 두 가지 경우를 놓고 볼 때에 여러분은 자녀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 어머니가 되고 계십니까 요게벳입니까 한나입니까 유니게입니까 아니면 라헬입니까 바른 어머니가 됩시다. 아름다운 신앙의 유산을 자식에게 물려주는 믿음의 어머니가 됩시다.

2.후손을 축복 받게 하는 아버지가 됩시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 12:1-3)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부르시면서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은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위대한 신앙의 거장입니다. 아들을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죽이는 자리까지 끌고 올라감으로 믿음이 무엇인가를 보여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의 생애 가운데 전혀 실수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여러 차례 잘못된 실수가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은 그 실수 가운데서도 가장 큰 실수와 잘못을 범했습니다.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저에게 업으로 주실 증거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이 물을 때 하나님은 “삼 년된 암소, 암염소, 수양과 집비둘기, 산비둘기를 쪼개서 바치라”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아브라함에게 모든 짐승을 잡아 쪼개서 번제 제물로 바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다른 것을 다 쪼개면서 집비들기, 산비둘기는 작기 때문에 쪼개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엄청난 실수가 되었습니다.
쪼개는 것과 쪼개지 않은 것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입니까 쪼개지 않은 것이 왜 그렇게 큰 죄가 됩니까 통채로 드린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아브라함의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를 무시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을 그가 경홀히 여긴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제사할 수 있는 동물은 소와 양과 염소와 비둘기로 제한되어 있습니다. 제사의 방법은 가죽을 벗기고 배를 갈라 내장과 정갱이는 물로 씻어야 합니다. 그리고 쪼갠 고기를 번제단에 올려 불로 재가 될 때까지 태워 그 향기를 하나님께 올리는 제사입니다. 그렇게 드린 제사만을 하나님이 받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다른 동물은 다 쪼갰으나 산비둘기, 집비둘기는 작기 때문에 쪼개지 않았습니다. 번제 제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그가 우리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어주신 그 희생을 인하여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행위는 부분적으로나마 그리스도의 피의 대속을 부인한 처사가 되었습니다. 피를 통한 대속의 제사에는 하나님이 임재합니다. 그러면 사단은 결박되고 마귀는 떠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잘못된 제사를 드리자 솔개가 제물을 먹고자 날아 다녔다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잘못된 제사를 드리므로 마귀가 그 제사를 받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제사는 마귀가 받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20에 “대저 이방인에게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했습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경홀히 여긴 잘못된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그는 제사, 곧 예배에 있어서도 모범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경홀히 여겼습니다. 실패한 것입니다. 그 결과로 “피를 우습게 여긴 후손이 400년 동안 종살이하리라” 이것이 창세기 15장입니다.
레위기 17:11에 피는 곧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14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다고 했습니다. 또 요한계시록 12:11에는 어린양의 피가 사망권세를 이겼다고 했습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 17:11)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4)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계 12:11)
하나님은 사단의 권세를 이길 힘을 피에 주셨습니다. 피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피를 통해서 결국 세 가지를 설명하셨습니다.
①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선지자
피의 제사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②죄를 사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제사장
피는 생명이 있기에 사망을 잡아먹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2)
③사단권세를 꺾었습니다-왕
사단을 완전히 꺾고 그를 굴복시키는 길은 피 외에 없습니다.
아벨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이 비밀을 알고 양을 잡아 희생의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피의 제사에는 그리스도의 세 가지 사역에 관한 비밀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비둘기를 쪼개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대속을 무시한 결과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속의 아브라함은 아직 자녀가 없습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후손들이 아브라함의 잘못된 예배로 인하여 자손 사대가 어려움을 당하게 될 것을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겪게 되는 400년 간의 종살이를 말합니다.
귀빈으로 애굽에 내려간 야곱의 후손들은 요셉과 그 시대 사람들이 다 죽은 뒤에 노예로 전락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생육이 중다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자 바로는 그들로 하여금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했습니다. 그래도 이스라엘 백성의 수가 점점 늘어가자 산파를 시켜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그 자리에서 죽이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죽이지 않자 나중에는 사내 아이는 나일강에 던지도록 명령했습니다.
지금은 태아가 남아인지 여아인지 알 수 있습니다만 당시로서는 불가능했습니다. 결혼한 남녀가 아기를 임신했다면 그것은 축하할 일입니다. 그러나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극도의 두려움의 시작이었습니다. 열달 동안 불안 속에 살다가 사내 아이가 태어나면 젖꼭지를 물려보기도 전에 아기는 나일강에 던져져 고기밥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불행의 원인이 무엇 때문입니까 잘못된 예배 때문입니다. 누구 때문입니까 아브라함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가증히 여기는 것이 형식적인 예배입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출 20:4-5)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수많은 재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사 1:12)
내 자녀가 잘되고 못되는 것은 모두 내 손에 달렸습니다. 아직 낳지 않은 자녀가 잘되고 못되는 것도 실상은 내 책임입니다. 내 신앙에 달린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잘 섬기면 자손 천대가 복을 받지만 내가 우상을 섬기면 자손 삼사대가 저주를 받습니다. 행복과 불행은 인간이 좌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예배를 대상을 바로 하는 것, 예배의 태도를 바르게 가지는 것, 이것이야말로 축복의 첩경입니다.
자녀와 후손이 잘되기를 원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동일합니다. 가정은 인간행복의 마지막 보루입니다. 모든 사람의 이 땅에서의 마지막 소원은 자녀에게 있습니다. 후손에게 있습니다. 남편에게 실망하고 좌절한 사람의 마지막 소망은 자식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그가 어떤 좋은 조건에 있을지라도 자식에게 소망을 둘 수 없는 사람은 절망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가정과 자녀를 하나님이 세우신 청지기로서 바르게 가꾸어가야 합니다. 자녀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로 세우지 못하면 하나님 앞에 가서 준엄한 추궁을 받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못해도 우리가 자식만큼은 바로 세워야 할 것 아닙니까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라헬과 같은 어머니가 되지 마십시오. 아브라함과 같이 잘못된 예배를 통해 후손을 종살이의 고통에서 신음하게 하는 조상은 되지 마십시오. 바른 예배의 대상, 신앙의 대상을 찾읍시다. 또 바른 예배의 태도, 바른 신앙생활의 태도를 가집시다. 나와 자녀와 후손이 잘되는 길이 이 길을 떠나서는 없습니다.
여러분을 통하여 자녀와 후손이 천대까지 축복 받는 아름다운 가정들이 되시기를 살아 계신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