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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존심 (요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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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을 통하여 요한복음 8장의 결론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바리새인과 서기 관들이 간음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데리고 와서 예수님을 고소하려는 출발한 이 사건은 마침내 예수님께서 도리어 책잡으려는 그들의 깊은 곳을 찌르게 됩니다. 오 늘은 그 결론으로서 이제껏 우리가 썼던 가면이 무었이며, 아직 해결되지 못한 것 들이 무었인지를 확인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저들이 예수님께 가지고온 시험거리는 이것이었습니다. 법대로 할 것이냐 아니면, 사랑으로 할 것이냐는 것입니다. 여기서 법대로 하자고 하면 사랑이 저촉될 것이 고 사랑으로 하자고 하면 의(의)에 저촉되는 문제였습니다. 이것은 해답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이 문제로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을 책잡기 위해 계획 적으로 도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문제로 인하여 책잡히시지도 않았고, 오히려 그 문제를 제기한 사람들에게 그들 자신이 어떤 상황 속에 있고 자 신들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확인시키는 작업으로 사건을 진전시켰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이 사건이 끝나는 구절에 이어서 12절의 말씀을 보시면 "예 수께서 일러 가라사대나는 세상에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 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는 선언을 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자는 어두움에 다닌다는 말씀입니다. 다시말해서 예수님의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은 다 어두움에 있다는 말슴입니다. 32절에 이르러서 죄와 선을 선택해서 가지는 것이 아니라 죄 밖에 지을 수 없다는 지적을 하고 계십니다.

32절에;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하셨고, 34절에서는 "진실 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너희는 죄가 그 본질이고 그것 외에는 할 수 없는 자들이니라는 지적으 로 말씀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요한복음 전체의 맥락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이렇게 저 들을 지적한다고 하여서 그 말씀으로 자신이 누구이며 이제 어떻게 처신해야 될 것 을 알아 들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만큼 그 반응조차 캄캄한 것입 니다.

예수님을 책잡으려 하였던 그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오히려 자신들이 예수님께 책잡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러자 어른들로 시작해서 어린아이들까지 하나씩 하나씩 다 돌아가 버렸다고 되 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을 향하여 죄 없다고는 아니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나도 너 를 정죄치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의 속뜻은 그녀가 죄인이라는 것을 간과한 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건 이후에 지적하시기를, 너희는 너희의 아비가 죄인이고 거짓 말장이며 살인한 자이기 때문에 너희도 거짓말장이고, 살인밖에 할 줄 모른다. 너 희 뿌리가 그렇고 종족이 그렇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과 자신 과 다른 차이점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본문 29절을 보면,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여기서 우리는 죄라는 것이 어떠한 형태로 우리를 넘어뜨리는가를 가장 명확히 알게 됩니다. 죄로부터 자유한다는 것은 곧 자신으로부터 자유한다는 것을 의미합 니다. 세네카의 말 중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으로부터의 자유보다 자 기의 노예가 되는 것만큼 불행하고 비참하고 절망적인 것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흔히 자유를 생각할 때에 다른 사람으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진 리와 생명과 아름다움과 선한 것으로부터 자유해서 자기 자신에게 노예가 되는 것 을 자유인 것처럼 늘 혼동을 합니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우리가 생각하는 자유의 개념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나는 내 스스로 원하는 것을 하러 온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이루여 왔으므로 그가 기뻐하는 대로 한다 '고 하였습니다.

보통 우리가 자유라고 말할 때마다 우리가 혼동하는 이유는 다른 것에 예속되는 열등감에서 벗어나고, 속박받는 것에서 벗어나는 것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 서 우리로 하여금 진정으로 자유하지 못하도록 얽어 매는 것은 바로 자존심입니다.

다시말해 죄란 곧 자존심이라는 것입니다. 즉 자기자신이라는 것에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하나님 마저도 자기 앞에 무릎을 꿇리고 싶은 마음이 자존심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8장 마지막 부분에서(32절) 이 문제에 대한 해답으 로 주님께서 말씀해 주시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32절에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시니 33절에서 저들이 대답하기 를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 케 되리라 하느냐"고 반문합니다. 그러나, 우리 속에도 바로 이같은 문제가 있다 는 것이 여러 면에서 드러나곤 합니다.

우리는 상당한 수준에 있는 사람으로부터의 지적은 그런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러 나 나와 비슷한 수준의 사람이 나에게 지적을 하고 있을 때에는 참기가 어렵습니다 바로 이러한 면들의 우리의 죄의 본질의 파편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 이 사소한 것이거나 작은 일일 때에는 우리의 자존심이 슬쩍 넘어가지만, 가장 근 본적인 문제를 제시 받았을 때에는 양보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진리와 생명에 관한 문제일 때는 절대 말을 듣지 않습니다. 아주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이제 예수님과 유대인들 간의 대화를 추적해 봄으로 문제의 핵심이 무었인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38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 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고 말하였더니 유대인들이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우리의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날카롭게 꾸짓습니 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해야 할 것이 아니냐'며 반 문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이어서 이런 무시무시한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 다. 40절에서 말씀합니다.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구나 아브라 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지적에 대하여 유대인들이 대답합니다.

"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 분 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 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육신의 아버지는 아브라함이고 영의 아버지는 하나님이십니다'라는 이야 기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누가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까 물론 주님이십니다. 그런 데 주님께서 진리를 말하기 위해 그들을 견주게 되자, 죄인들은 진리의 진리됨을 추적하기 보다 끝없이 자신들을 보호하고 변명하려고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 이 지적 앞에 주여! 도우소서!라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계속 거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틀렸다고 하는 한이 있더라도 항거하며 자신들이 옳다고 우기는 것입니다 게다가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는 한이 있어도 그들 자신이 틀렸 다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같은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 두어야 합니다. 이 일의 결말은 이렇게 매듭지어 집니다.

본문 59절을 보면 이 대화에서 유대인들이 대답할 말이 궁색해 지자 이렇게 합니 다. "저희가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이같은 사건은 결코 그 당시의 사건으로만 한정지어서는 안됩니다. 오늘날 우리들 도 결단코 한 치도 더 낫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우 리는 예수님이 옳으시다는 정답을 알고 있는 점입니다. 반면 같은 점은 그들이 갖 고 있던 예수님께 대한 적대감과 자기 보호의 본능은 유전처럼 지니고 있다는 점입 니다.

예수를 믿고 신앙 생활을 하는 중에 가장 큰 장애물은 떳떳해 지고 싶은 감정입니 다. 교회에 나와서 봉사를 할 때에도 최고의 어려움은 봉사를 떳떳이 하고, 진정으 로 훌륭한 땀을 흘리고 난 다음이 문제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상해, 봉사하는 기 쁨을 몰라' 이런 식으로 혼자서 좋았으면 되었지 괜히 다른 사람을 물고 늘어지면 서 견주어 비난합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 자기편이지 하나님편이 아닙니다. 자기 중심적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와 다른 종교와의 차이입니다. 인간이 만들어 낸 종교는 공통적 으로 이런 성질을 가집니다. 즉, 자기 치장을 하는 것입니다. 어떤 도를 깨우쳐서 초월의 경지에 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버릴 존재로는 생각지 않습니다. 단 지 자신들을 개발할 것이 있는데 개발을 하지 못한 존재로 생각할 뿐이지, 자신들 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고 저주 아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종교는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다릅니다. 기독교에서는, 우리가 스스로 무었을 깨우칠 수 있거 나 어떠한 자리에 나아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제3자의 도움이 필요하다 고 외치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정도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언제나 부족감을 가지 는 것입니다. 늘 자신의 존재가 별볼일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도우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은혜가 필요하고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으로 대접해 주 시지 않으면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이 늘 확인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요즘 목사들 이 썩었다는 소리를 많이 듣습니다. 우리의 할 일은 이렇게 정죄하는 일이 아닙니 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을 정당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 여러분들이 스스로에게 나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느냐를 질문하지 않는다면, 또한 변화되고 새로이 결심 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이것만큼 우스운 모순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에덴 동산에서부터 잘못된 자유 즉 자존심에 걸려있는 자입니다.

아무도 운명을 거스릴 자가 없으며, 이길 수도 없지만 인간은 운명에 잡아 먹히는 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고개를 들고 죽겠다는 자존심에 메여있는 존재입니다. 그래 서 첫 범죄가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고도 당당하게 견주고 싶어서 선악과를 먹었던 것이었습니다. 또한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에게 노예가 되려는 것이 인간 의 죄악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자존심과 자유는 인간의 본능으로서 하나님으로 부터의 분리요, 하나님 께 대하여 고개를 쳐드는 것입니다.

인간이 화가나면 제일 먼저 고개 근육이 긴장을 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바로 성질 의 문제라고 그럽니다. 개성이 강하면 고개가 빳빳해지고 어느날 머리속의 핏줄이 터지게 되며 그것이 바로 고혈압이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늘 경책하시는 말씀 가운데 '목이 곧은 백성들 아!'라고 꾸짓으시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것은 감정으로 늘 하나님께 항거한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논리적이거나 이성적이 아니라, 늘 감정 적으로 반대하였습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늘 고개를 들려하고 사 탄은 그런 낌새만 나타나면 우리와 동업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잊지마시기 바랍니다 인간은 권위의 냄새가 나는 것에 대하여 늘 반대하고 싫어하는 기질이 있습니다.

그래서 생겨난 말이 '아들은 운명적으로 아버지의 배반자이다'라는 말입니다. 왜냐 하면 아버지가 갖고 있는 권위가 그 냄새를 피우기 때문입니다.

가정이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은 아버지의 보이는 권위로써 보이지 않 는 아버지의 권위가 계심을 메시지화한 것입니다. 그 메시지가 바로 부권입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도 아버지의 말을 신중하게 듣지 않으려 합니다. 대부분의 가정이 그렇습니다. 만일 그렇지 않은 자식이 있다면 잘 생각해 보십시오. 어렸을 때에 말 썽을 부리지 않고 잠잠하면 거의 뭔가 큰 일을 저지르고 있는 때가 많습니다. 그것 은 중심으로 아버지의 권위에 굴복하고 있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거저 겉으로만의 모양만을 갖추고 있을뿐 때가되면 반드시 그 본색을 드러내 놓고 마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본래부터 권위를 싫어합니다. 우리는 권위에 대해 거부하고 대신에 자기 자신이 신이고, 나머지는 신하처럼 거느리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신들의 전쟁시대라고 합니다. 모두가 신입니다. 모두가 이기주의 신입니 다. 자기의 이익만을 위해 모두가 항복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평화를 기원 하고도 있습니다. 책임의 한계가 있고 권위의 절제가 어느 부분에서인가 타협이 이 루어져야만 공존이 되고 평화가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인간은 절대로 타협하지 않습니다. 공존 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법은 논리성도 아니고, 상식도 아니고, 정당한 어떤 근거들도 없습니다. 바로 인간의 법은 힘입니다.

인류 역사는 자고 이래로 힘 이외의 법이 제대로 시행된 적이 없었습니다. 예전에 는 칼이었다면 지금은 총이고, 돈입니다. 그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인간을 조화있게 공존시키지 못합니다. 약자는 그저 참고, 있는 자는 오만하여 큰소리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 세상 어디에 공정함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에 미국이나 유럽은 공정함이 있다고 메스컴들이 우리에게 도전을 주고자 합니다. 그 러나 가서 한번 살아보십시오. 인간이 사는 곳이란 공정함이 없다는 것을 알게될 것입니다. 우리나라이기 때문에 요모양 요꼴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미국, 영국, 프랑스, 스웨덴.... 어디든지 마찬가지 입니다. 좀더 교활할 뿐이지 부익부 빈익빈이요, 양육강식이요, 있는 자가 없는 자를 착취하고 군림해 있으므로 평화를 유지해 있는 것 같을 뿐이지 결코 평화는 아닙니다. 일방적인 착취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평화를 달라고 할 것이 아니라,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바 뀌어야 됩니다. 환경이나 세상이 바뀌기를 원하지 말고 우리 모두가 죄인들이며 자 칭 신들끼리 모여서 살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있다는 것을 제발 확인해야 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대로만 하라' 이것보 다 더 큰 요구는 없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이해시키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또한 굴복시키겠다거나 설득시키겠다는 뜻도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이것이 좋다고 하시면 그것을 좋아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신앙이 여러분을 이해 시키고 납득시킬 것이라고 일차적으로는 기대하지 마십시오. 성경은 그런 면에서 훨씬 강압적이고 권유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을 수긍하겠는가 안 하 겠는가 하는 싸움입니다.

권위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두 고집장이가 서로 싸우지 않고, 만족시킬 수 있고 서로 공존시킬 수 있는 책임과 권리의 한계를 그어줄 수 있는 기회와 능력을 권위 라고 합니다.강압하고 짓밟는 것을 권위라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부족해서 그리 고 모두가 자기 욕심에 충만하기 때문에 정당한 선을 그을 수가 없습니다. 또한 한 계선을 지킬 힘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모두가 만족할 수 있고 굴복할 수 있는 선을 그을 수 있는 지혜와 힘을 가지셨다는 차원에서 하나님을 권위로우시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어느 누구도 만족하고 사는 사람은 없지만, 예수를 믿고 사는 사람은 만족하고 살 이유가 바로 하나님의 권위 아래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중요한 싸움은 우리가 죄로부터 자유하여져서 나는 죄를 안지었다는 자리에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자리에 나를 집어 넣는 싸움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사탄이 와서 거는 시험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탄은 정당하고도 필요로 하는 것을 미끼로 던져서 하나님의 휘하에서 그를 독립시키려는 목적이 그 시험의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아무리 필요하고, 아무리 해야 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휘하를 벗어나는 것으로 그 일이 성취된다면, 그것을 거절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께서 사탄의 시험을 처리하는 것의 골자입니다. 이 문제는 오늘 날 우리들도 생각해야 할 심각한 문제입니다. 서로가 '나는 정당하다. 죄를 짓지 않았다는 것에만 머물기 때문에 한국교회는 그토록 말이 많은 것입니다.

죄짓지 않는 다는 것은 죄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휘하에 들어가 항복하지 않는 한은 죄를 지을 수 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정당하게 행한다 고 할지라고 오히려 그 정당한 일로 죄를 짓고, 옳은 일을 행하면서도 죄를 짓게 되는 것입디다. 그러므로 생명을 손에 쥐고도 사람을 죽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8장의 중심 내용입니다.

하나님 앞에 항복한다는 것을 그래서 우리가 늘 명심해야 되고, 신앙 생활에서 가 장 굵은 촛점으로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늘 명심해야 합니다. 주 님께서는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 외에는 그의 생활의 원리도, 방식도, 목적도 없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빌립보 2장 5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 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이 말씀 중에 예수님께서 어떻게 우리에게 오셨는가를 유의해 보십시오. 죄인이 아닌데 죄인의 모습으로 오셨고, 자기를 비우시고 종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을 아 셔야 합니다.

우리의 말에 이런 말이 있지요. '저 친구는 배알도 없나'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배알도 없으셨습니다. '저 사람은 오기도 없나' 예, 우리 주님은 오기도 없으셨습 니다. 이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었인지 아시겠습니까 또한 그의 죽으심은 수 치스러운 죽음이었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원래 십자가란 형틀은 오래토록 고통을 주는 것이고, 수모를 당하게 하는 형벌입니다.

만일 우리가 십자가에 달렸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그 수모가 부끄러워서 심장이 폭팔할 것 같지 않습니까 우린 언제나 하나님 편이 아니고, 내 편으로만 살았기 때문에 나의 자존심이 감당치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믿는 신자들이 언제나 부딪치며 좌절하는 문턱이 무었이냐 하면 바로 창피함 을 못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이를 위해서는 창피뿐만 아니라, 목숨, 배알, 쓸개, 필요 하다면 오장육부를 다 내어 놓으셔야 됩니다.

우리는 신앙을 정당한 범주의 것들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난 저렇게 안 했어'하는 자들과 그렇게 한 자들을 똑같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말 의 뜻은 과연 오늘 자신이 죽고 있느냐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내 목숨이 붙어 있 는 한 한 사람을 위하여 품어주고, 업어 주면서 내가 누군가에게 필요하고 도와주 어야 할 존재라는 것을 명심하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었으 며, 오늘 우리에게 요구되는 삶입니다. '내가 당신보다는 더 옳다'는 싸움은 우리 의 분깃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합니다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지니라"( 마16:24) 이 말씀이 무슨 말씀입니까 여기서 십자가란 대속이 아니라, 죽음을 말합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므로 선택할 권리가 없습니다. 죽은 자는 배알이 없습니다. 그 런데 바로 우리가 죽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자신의 문제와 결 부시킬 때보다, 공의와 명분을 위해서 적용시킬 때 훨씬 실수를 잘 합니다.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는 것 때문에 우리는 얼마나 쉽게 이 시험에 빠지는지 모릅니다.

'나는 괜챦은데 교회가 이 꼴을 당하는 데는 못 참겠어!'라는 상황만큼 우리를 잘 넘어지게 하는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공의와 명분을 위해서라도 절대로 실수에 빠지지 말고 죽을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사6:8-10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내가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 꼬 그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 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 기게 하라 욤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 을까 하노니" 여기에 놀라운 말씀이 있습니다. 이사야가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고 있습니다.

그는 성공을 위해서 보냄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아무도 성공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실패를 위해서 사람을 씁니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그 방법만 이 꼭 열매를 맺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시이기에 자연 생태계에서 그 어느 것도 땅 속에 심기어져 쩍어지지 않고는 열매를 맺는 경우가 없습니다.

봉숭아 씨를 쇠고기 속에다 파묻어 보십시오. 고기를 양분으로 공급한다고 해서 그 봉숭아 꼿이 더 빨리 자라고 좋은 꽃이 됩니까 오히려 잎도 내지 못하고 맙니 다. 식물에게는 잘 맞는 거름과 비료를 주어야만이 잘 자랍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늘 뒤집어 써야 되고 썩어져야만 되는 존재인 줄을 아십시오.

다시말해 실패를 위해서도 보냄을 받았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에게서는 실패없이 성공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끝장 21절을 보시면,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또한 그렇게 보내십니다. 예 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슴하셨습니다. 요21:18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베드로의 사역은 오직 그의 열심과 충성이 받아들여져서 이룩되는 것이 아니었습 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수정 작업은 자신을 죽이는 작업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해야 된다는 말씀을 하셨을 때, 앞을 가로막으면서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이 주를 버릴 찌라도 저만은 주를 따르겠습니다. 감옥에도, 죽는데도 같이 가겠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깨우치시기 위하여 계속 간섭하셨습니다. 다시말해 '네 열심과 네 정열로써 나를 좇아올 생각은 마라 내가 원하는 것은 너의 죽음일 뿐이다 네 성격과 네 고집과 네 혈기를 죽이고 내가 네게 무었을 시키고자 하는지 들으라! 내가 시키고자 하는 일은 네가 죽는 일이다!'라고 하시는 말씀이 요한복음 21장의 말씀입니다.

<결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죽는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 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는데서 하나님께서는 꽃을 피우십니다.

사시기에 삼손이 이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사자를 죽이고, 돌아가던 중에 다 시 보니 벌들이 시체 속에 꿀을 쳤습니다. 남을 잡아만 먹던 짐승이 죽음으로 인해 서 남에게 줄 양식이 생겼다는 말입니다. 삼손은 그의 평생에 그 메시지를 깨닫지 못하고 밤낮 죽이다가 끝나고 맙니다.

여러분도 삼손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삼손, 참으로 멋진 자입니다. 그러나 그는 실패한 자였습니다. 두 눈을 빼앗기고 마지막에 기껏한다는 소리가 '하나님 한 번 만 더 힘을 주사 이 원수들과 같이 죽게 하소서!' 믿음의 위인으로서 유언이 왜 이 렇게 초라합니까 적어도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소서!'라고 해야 되지 않겠 습니까 우리의 신앙의 스타일도 바로 이렇게 삼손쪽으로 굳어 있는 편이 많습니다. 그 분 이 기뻐하시는 길은 바로 죽음의 길인 것을 명심하셔서, 매일 죽음의 삶의 사십시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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