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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에스겔이 본 이상 (겔 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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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에서 난해한 책들 가운데 하나인 에스겔서, 그러나 주께서 인도하 심을 따라서 위대한 하나님의 예언과 교훈이 담겨진 이 에스겔서의 멧세지 를 조심스럽게 같이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서론 시대적 배경 때는 유다 왕국의 몰락기입니다. 당대의 강국(强國)이었던 바벨론 제국으로 끌려왔던 유다 나라의 젊은 포로였던 선지자 에스겔의 이야기와 삶과 교훈 과 체험이 에스겔서의 멧세지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주전 597년경이 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전 597년, 그러니까 여호야긴 왕 시대였습니 다. 유다 왕국은 바벨론의 침략으로 결정적 패배를 당하고, 유다의 수많은 젊은이들과 귀족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운명을 감수하게 됩니다. 그 시 대적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 열왕기하 24장 10절 이하의 말씀을 보십시오.

그 때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신복들이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그 성을 에워싸니라 그 신복들이 에워쌀 때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도 그 성에 이르 니 유다 왕 여호야긴이 그 모친과 신복과 방백들과 내시들과 함께 바벨론 왕에게 나아가매 왕이 잡으니 때는 바벨론 왕 팔 년이라 저가 여호와의 전 의 모든 보물과 왕궁 보물을 집어내고 또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만든 것 곧 여호와의 전의 금 기명을 다 훼파하였으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저가 또 예루살렘의 모든 백성과 모든 방백과 모든 용사 합 일만 명과 모든 공장과 대장장이를 사로잡아 가매 빈천한 자 외에는 그 땅에 남은 자가 없 었더라(10-14절).

사실상 유다 왕국은 말기에 바벨론 제국에 의해서 세 차례의 침략을 받아 서 완전한 멸망에 도달하게 됩니다. 열왕기하 24장에 보면, 드디어 유다 왕 국은 바벨론에 의해서 완전히 포로로 잡혀가게 되는 것입니다.

잡혀간 일만 여 명의 유다의 포로들 가운데에 에스겔이 끼어 있었습니다.

에스겔 외에 다니엘도 있었을 것입니다(다니엘은 주전 605년에 이미 포로로 잡혀와 있었습니다).

아마도 에스겔과 다니엘은 서로 안면이 있는 사이였을지 모릅니다. 포로도 한두 명이 아니라 굉장히 많으니까 서로 모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데 아마 궁중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다니엘은 너무나 유명했으므로 다른 모 든 포로들에게 알려졌을 것이고, 에스겔도 충분히 다니엘을 알고 있었을 것 으로 생각됩니다. 에스겔서 14장 14절을 보십시오.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거기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기의 의 (義)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에스겔은 여기서 특별히 누구를 인용하고 있습니까 인용된 사람 가운데 다 니엘을 포함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몇 번씩 에스겔이 다니엘의 이야기를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다니엘은 에스겔을 몰랐 을지라도 에스겔은 다니엘을 충분히 알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에스겔서 전체의 멧세지를 살펴보면, 에스겔서의 내용은 다니 엘서의 예언보다는 차라리 예레미야서의 예언과 더 흡사한 내용들을 더 많 이 간직하고 있음을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중심 멧세지 예레미야서나 에스겔서의 멧세지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멸망 직전의 유다 왕국 혹은 이미 몰락해 버린 유다 왕국인 자기의 조국을 바라보면서 에스겔이 외치는 예언의 멧세지를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그 첫번째 멧세지는, 오늘 우리는 우리의 범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두번째 멧세지는, 그러나 주께서는 반드시 우리 조국의 영광을 다시 한번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죄 때문에 그들이 당하고 있는 고난의 현실을 해석하고, 하나님은 아직 그 왕국에 관한 하나님 자신의 섭리를 포기하지 않으셨으며 유다 왕국을 다시 한번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는 소망을 바라보면서 오늘을 견디도록 하는 것, 이것이 예레미야서나 에스겔서의 모든 멧세지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 다.

 2. 본문 연구 저자 에스겔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을 때의 나이가 아마 스물다섯 살 정도였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에스겔이 멧세지를 받은 나이는 아마도 삼십 세였 을 것입니다. 정확한 고증은 어렵습니다만은 대략 삼십 세였을 것이라고 생 각합니다.

에스겔서 1장 1절의 제 삼십 년 사 월 오 일이 에스겔 선지자 자신의 나이를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어떤 연대를 말하는 것인지에 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상당한 논란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비록 에스겔의 나이 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이때쯤 에스겔의 나이가 삼십 세쯤 되었으리라는 사 실에 성경학자들 대부분이 동의합니다.

그는 약 스물다섯 살에 포로로 끌려왔습니다. 젊은 나이에 이국땅에서 포 로 생활을 하고 있는 에스겔의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그의 마음 속 에는 숱한 질문과 의문이 꼬리를 물고 지나갔을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은 살아 계실까 살아 계시다면 우리에게 무엇 때문에 이와 같 은 어려움을 안겨 주실까 그분은 과연 전능하신가 우리가 지금 포로로 끌 려와서 이 모양인데,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 계시다는 말인가 그분은 정말 전지(全知)하신가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일까 포로 생활 하는 우 리의 고독과 우리의 고통과 말할 수 없는 우리의 절망을 알고 계실까 아니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그 하나님은 바벨론에서도 우리와 함께하시는 가 이 바벨론 제국의 강대한 땅, 이 넓은 땅, 황량한 이 땅의 한 지역에 볼모로 잡혀와 있는 우리들을 하나님은 보고 계실까 아니면 역사를 그대로 방관하고 계시는 것은 아닌가 아니 도대체 우리 민족이 오늘날 경험하고 있는 이 고통의 원인은 무엇일까 내가 지금 있는 이곳에서 약 1,120km 떨 어져 있는 조국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우리 조국의 미래는 어 떻게 될 것인가' 이런 숱한 질문들이 에스겔의 머리를 스쳐 지나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앞으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포로로서 내 사랑하는 조국을 위해서 내 가 할 일이 과연 있을까' 그러나 이때에, 에스겔은 드디어 한 이상(비전)을 보게 됩니다.

제 삼십 년 사 월 오 일에 내가 그발 강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더니 하늘 이 열리며 하나님의 이상(異象)을 내게 보이시니(겔 1:1).

이런 고독과 고통과 의문 속에서 살아가던 어느 날, 포로 생활 5년만인 주 전 593년경, 하나님의 이상을 보게 된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그발 강이라는 지명이 나옵니다. 3절을 보십시오.

갈대아 땅 그발 강가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부시의 아들 제사장 나 에스겔 에게 특별히 임하고 여호와의 권능이 내 위에 있으니라.

그발 강은 바벨론의 동남쪽을 흐르는 대하(大河)였습니다. 이 강이 흐르고 있는 강변의 어느 마을에 아마도 포로 수용소가 있었나 봅니다. 3장 15절을 보면 이 마을의 이름이 델아빕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기에서 때 로는 한숨 지으며 고통스러워하기도 하였지만, 한숨과 고통을 기도로 바꾸 어 살아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도하고 있었던 어느 날 갑자기 하늘이 열 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에스겔서의 시작입니다.

1-3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제 삼십 년 사 월 오 일에 내가 그발 강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더니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이상을 내게 보이시니 여호야긴 왕의 사로잡힌 지 오 년 그 달 오 일이라 갈대아 땅 그발 강가에 서 여호와의 말씀이 부시의 아들 제사장 나 에스겔에게 특별히 임하고 여호와의 권능이 내 위에 있으니라.

에스겔의 아버지, 부시는 사독 제사장의 계열을 타고 난 가문의 한 사람이 었습니다. 즉, 에스겔은 제사장 가문의 후예였습니다. 그러니까 그가 만약 고향에 있었다면 제사장이 되었을 것입니다. 제사장이 될 수 있는 나이가 삼십 세이기 때문입니다. 보통 제사장은 30세에서 50세까지 약 20년간 활동 합니다. 그러므로 30세가 된 이 젊은, 제사장 가문의 후예인 에스겔의 마음 속에는 얼마나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을까요 `내가 지금 조국에 있었더라면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본격적으로 뛰어 들었을 텐데... 포로된 이 몸으로 내가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이러한 한숨과 고통을 기도로 바꾸어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그 순간, 하늘 이 열립니다. 찬란한 비전이, 이상이 그를 향해서 내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상 가운데 멧세지가 들려옵니다. 이것이 포로된 에스겔로 하여금 포로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역사의 새벽을 가져오기 위해서 새롭게 삶을 살기 시작하는 한 분기점을 형성하게 하는 것입니다.

에스겔이 본 비전 절망을 극복하려면 비전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를 원하는 사람마다 비전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비전을 보아야 합니다.

야곱이 브니엘의 나룻터에서 놀라우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발견하 고 그 하나님과 하룻밤을 씨름한 후에 그의 삶이 뒤바뀌었습니다. 그는 이 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사람으로 변신하여 자기 삶의 위대한 출발을 합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성전에 들어갔던 이사야 역시 거룩한 하나님의 환 상을 보고 주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는 놀라운 사람 으로서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이기 위하여, 유대 종교에 대한 충성심을 나타내기 위하여 다메섹으로 가고 있던 젊은 사울도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는 음성으로 자기를 찾아오신 거룩하신 주님을 바라보 고 그 주님을 만났던 순간, 위대한 사역자로서의 삶으로 방향을 바꿉니다.

또 한 사람의 포로가 있었습니다. 사도 요한, 그는 밧모 섬에서 포로된 자 로서 자기의 모든 삶의 기대가 차단당한 채 자기 인생의 마지막 시간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직도 그를 통해서 하셔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주(主)의 일이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포로된 그 상태에서 절망 하지 아니하고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하늘이 열렸습니다. 주의 신에 감동이 되었을 때, 그는 온 세대에 걸쳐서 이 지구상에 펼쳐질 일에 대한 위대한 계시를 받는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변화시켰던 이 위대한 비전, 이 찬란한 이상이 어느 날 그발 강가에 서 있었던 젊은 포로, 제사장의 후예였던 에스겔에게도 임하자 마자 그는 이 환상을 붙들고 새로운 새벽을 향해서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도 이 말씀을 공부하는 가운데, 비전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시대를 향한, 우리 가정을 향한, 나 개인을 향한 하나님의 비전을 발견했을 때에 우리의 삶은 똑같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상을 접하자마자 우리의 삶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에스겔은 세 개의 비전을 봅니다.

첫째/네 생물의 비전(4-14절) 이 네 생물을 가만히 보면 신기하게 생겼습니다.

그러나 저는 우선, 이 에스겔서 해석의 첫 부분에서 예언서나 혹은 상징이 나 비유를 해석하는 중요한 원칙 하나를 강조하고 싶습니다. 본문에 네 생 물의 여러 가지 모습들이 나오는데, 이것을 너무 구체적으로 해석하려고 하 면 오히려 오류에 빠지기 쉽습니다.

비유를 해석할 때의 중요한 원리 중에 하나는, 비유란 주님이 한 가지 교훈을 전달하시기 위해서 든 예를 말한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런 데 그 한 가지 교훈을 제쳐놓고 비유를 너무 상세하게 추구하려다 보면, 오 히려 그 비유를 말씀하신 의도를 벗어나기가 쉽습니다.

때때로 저는 예언서에 나타난 이런 상징도 같은 차원에서 접근해야 할 것 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너무 지나치게 한 부분의 의미를 억지로 짜내기 시작하면, 하나님이 참으로 전달하시려고 하는 중요한 멧세지를 오히려 상 실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유월절에는 어린 양을 희생 제물로 바칩니다. 이는 물론 장차 오 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이것은 적합한 해석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를 구체적으로 해석하기 위해서 `이 유월절 어린 양의 뒷다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콩팥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염통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등의 의문을 갖는다면 주님의 본래의 의도를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전혀 해석 없이 지나갈 수도 없습니다.

이 네 생물을 통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전달하시고자 하는 멧세지는 무엇일 까요 이에 대해 우리는 조심스럽게 접근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한 유대인 랍비는 이 네 생물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재미있게 해석합니다.

네 생물은 어떤 형상의 생물입니까 네 가지 얼굴을 가진 생물입니다. 첫 째 얼굴은 무엇과 같습니까 사람입니다. 그 다음은 사자입니다. 그 다음은 무엇이었습니까 소입니다. 그 다음은 독수리입니다. 모두 네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은 피조물 중 가장 위대한 존재이고, 사자는 들짐승 중 가장 위대한 존재이며, 소는 가축 중에 가장 위대한 존재라고 할 수 있 으며 또한 독수리는 새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네 개의 생물을 하나님이 부리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통치하신 다는 사실에 관한 묘사가 아니겠습니까 사람은 그 지능에서 뛰어납니다.

사자는 용기에서 뛰어납니다. 우리는 또한 힘으로써 봉사하는 소의 우직함 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독수리의 비상력(飛翔力)을 또한 기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며 다스리신다는 것입 니다. 이는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의 주권자이심을 나타내는 얼마나 아름다운 그림입니까 그러나 저는 네 가지 생물이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어떤 사실적 존재의 기 능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 네 개의 생물은 영적인 존재들인 천 사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보여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천사들의 기능 을 나타내기 위한 상징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10장 15절을 보십시오.

그룹들이 올라가니 그들은 내가 그발 강가에서 보던 생물이라.

그발 강가에서 보았던 생물, 그 생물을 그룹들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룹들이 란 천사의 한 종류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어떤 것에 대한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사실적으로 존재하는 영적 존재인 천사들, 그들이 하는 놀라운 일들 을 상징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천사들을 부르셔서 하나님 자신의 사역을 수행하고 계시다는 사 실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하 22장 11절 을 보면 그룹을 타고 날으시는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천사들을 타시 면서 천사들을 부리시사 이 인류 역사 안에 진행되는 여러 가지 사건들 속 에 개입하시고 간섭하시면서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그렇게 묘사한 것입니다.

천사들은 때때로 하나님의 보좌를 옹위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천사들은 그 하나님으로부터 명령을 받아 심부름을 수행합 니다.

본문의 네 생물을 통해서 나타내시고자 하는 멧세지는 이것입니다. 즉, 하 나님은 천사들을 부리셔서 역사 속에서 아직도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 다.

그런데 본문 1장을 보면 많이 나오는 표현 중의 하나가 날개입니다. 이것 은 문자 그대로 날개로 이해하기보다 영적인 존재인 천사들의 자유로운 운 행의 이미지로 생각하여야 합니다. 즉, 이들을 부리시사 자유롭게 운행하시 는 하나님의 이미지입니다. 또한 날개 아래 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 나 있습니다. 이것은 천사들의 봉사의 사역의 그림일지 모릅니다. 곧은 다 리와 두툼한 발바닥은 봉사적 자세로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고 있는 천사 들의 모습에 관한 이미지라고 생각합니다.

어거스틴을 포함한 옛날 교부(敎父)들은 그리스도야말로 이 네 가지 그 룹의 모습을 완성한 야훼 하나님의 종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서 어거스틴은 사복음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특성이야말로 천사들의 가장 아름다운 네 가지 사역의 완성이라고 말했습니다.

마태복음의 중심 멧세지는 무엇입니까 왕으로 오신 예수님입니다. 마 가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여호와의 종으로 오 시사 수난을 받으시고 일하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또 누가복음에 나타 난 예수님의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인자(人子)로 오신 예수님, 참 사 람의 아들로서 오신 예수님, 예수님의 인간성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요한 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은 어떤 예수님입니까 하나님의 아들로서 오신 예 수님입니다.

이상 사복음서가 나타내는 예수님의 모습을 본문과 비교해 보면 적절하게 상응합니다. 왕이신 예수님을 다른 말로 하면 밀림의 왕자인 사자와 같 으신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에서 나타내는 종으로 오신 예수 님은 우직하게 열심히 일하는 소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 나 타내는 인자인 예수님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사람 의 모습입니다. 요한복음의 완전한 신으로서의 예수님은 무슨 별명을 붙이면 적절하겠습니까 독수리 같은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오셨기 때문에, 이 본문은 예수님 의 위대하신 사역을 보여 주는 하나의 측면이라고 옛 교부들은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그발 강가에서 포로 생활을 했던 에스겔은 하나님이여, 하나님은 우리를 망각하셨습니까 도대체 어디 계십니까라고 외쳤을지도 모릅니다. 그때 드디어 이상이 나타났습니다. 이 신기한 생물을 타고 날으시며 일하시는 하 나님의 환상! 에스겔은, 하나님은 침묵하셨으며 이 역사에 아무런 상관을 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하고 그분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 다. 그러나 이 환상을 통해서 발견한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은 일하고 계셨 다는 것입니다. 실망한 에스겔에게 하나님은 역사를 주관하시기 위해서 이 그룹들을 데리고 분주하게 일하시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 환상은 어떤 모습으로 등장합니까 여기 나타난 모습을 4절에서 보십시 오.

내가 보니 북방에서부터 폭풍과 큰 구름이 오는데 그 속에서 불이 번쩍번 쩍하여 빛이 그 사면에 비취며 그 불 가운데 단쇠 같은 것이 나타나 보이 고.

폭풍, 구름... . 그 이미지가 어떻습니까 기분이 음산하지요. 이것은 이제 잠시 후면 벌어질 유다 왕국의 최후의 사건을 예고합니다. 유다 왕국이 거 의 멸망했지만 완전히 멸망하지는 않았습니다. 잠시 후에 완전히 멸망합니 다. 그 완전한 멸망을 예고하는 것이 이 불길한 폭풍과 검은 구름입니다.

그러나 완전히 부정적이지만은 않습니다. 폭풍과 구름 가운데서 찬란한 빛 이 쏟아져 나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희망을 보여줍니다. 유다 왕국 의 최후의 멸망의 징조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쏟아져나오는 빛 가운데서 구름을 타고 일하고 계십니다. 이는 유다의 역사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하나 님의 선언입니다. 유다 민족을 통해서 아직도 일하셔야 할 과제가 남아 있 다는 희망의 선언, 이 아름다운 멧세지가 바로 이 환상과 이상을 통해서 에 스겔에게 전달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에스겔이 본 첫번째 비전입니다.

둘째/수레바퀴의 비전(15-25절) 1장 15절부터 25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여러 가지 묘사가 등장합니다. 이 바 퀴에 관한 특성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 이 바퀴는 구름에서 내려오는데 땅 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땅에서 굴러가고 있는 바퀴입니다. 하늘에서부터 내 려와서 땅에 연결되어서 굴러가고 있는 바퀴의 모습, 이것은 역사 속에서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이미지입니다. 그분은 저 먼 곳에 계시는 하나님이 실 뿐 아니라 구체적으로 이 땅에 간섭하십니다. 수레바퀴의 이상은 이 땅 에서 진행되고 있는 민족들의 사건 속에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이미지를 가 장 아름답게 보여주는 실체라고 생각됩니다.

17절을 보면 바퀴의 한 가지 특성이 나타납니다.

행할 때에는 사방으로 향한 대로 돌이키지 않고 행하며.

이 바퀴는 마음대로 갈 수 있습니다. 좌, 우 사방으로 어디로나 자유자재로 굴러다닐 수 있는 바퀴입니다.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어디든지 갈 수 있는 바퀴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무소부재성에 관한 아름다운 증언입니다. 이 바퀴가 동서남북으로 자유로이 운행하며 마음대로 굴러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돌리시는 바퀴, 하나님이 부리시는 바퀴는 어디 든지 자유롭게 운행되고 있습니다. 그분은 살아 계십니다. 우리 가운데 와 계십니다. 그분은 어디에든 계십니다. 우주 속에 충만하신 그 하나님은 자 유롭게 지금도 일하십니다.

18절을 보면 바퀴의 또 하나의 특성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 둘레는 높고 무서우며 그 네 둘레로 돌아가면서 눈이 가득하며.

눈이 하나 둘이 아니고 눈으로 가득 찬 바퀴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계속 돌아가는 이 바퀴에 눈이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주 안에 충만하셔 서 어느 역사에서나 무소부재하신 분일 뿐 아니라 그 하나님은 지구상에 일 어나는 모든 사건들을 감찰하십니다. 그분의 눈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그분 이 안 계시는 곳은 없습니다. 그분은 당신을 보고 계십니다. 나를 보십니 다. 그분은 역사를 꿰뚫어보십니다. 유다 역사의 황혼을 지켜보시는 하나님 이십니다. 그리고 이 역사 너머 이 민족을 위한 희망을 계획하시고 이 민족 의 장래를 보십니다. 그 하나님의 눈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눈에 대한 묘사를 성경을 통하여 좀더 공부하기 위해 몇 구절을 찾아봅시다.

역대하 16장 9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 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일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은즉 이 후로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 하매.

여기에는 여호와의 눈이 어떻게 묘사되어 있습니까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 하는 자를 위하여 온 땅을 두루 다니며 감찰하시는 눈으로 묘사되어 있습니 다. 이는 하나님의 전지성(全知性)에 관한 아름다운 상징입니다. 이처럼 주 님의 눈동자는 어디에나 계십니다.

또 하나의 표현을 찾아 보십시오. 스가랴서 4장 10절입니다.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행 하는 여호와의 눈이라 다림줄이 스룹바벨의 손에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여기에서 하나님의 눈은 고정된 것으로 묘사되어 있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묘사하는 하나님의 눈동자는 항상 돌아다니는 눈, 두루 행하는 눈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꿰뚫어보십니다. 유다의 최후를 보고 계십니다. 포로 로 끌려온 에스겔의 절망을 보고 계십니다. 자신의 미래를 한탄하는 젊은이 를 보시는 하나님의 눈, 그 눈은 여기에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아름 다운 묘사입니까 쉴새없이 움직이는 바퀴에 눈을 가지고 사방으로, 자유자 재로 굴러다니면서 모든 것을 통찰하는 이 아름다운 눈동자, 이는 하나님의 무소부재성, 하나님의 전지성에 관한 얼마나 적합한 묘사인지 알 수 없습니 다.

이 네 생물들이, 천사들이, 그룹들이 바퀴를 타고 다니면서 모든 것을 지 켜보며 사역하는 장면을 보십시오. 그러니까 이 이상은 점진적입니다. 생물 이 나오고 그 다음에 네 생물 곁에 그들이 타고 다니는 바퀴가 나옵니다.

이 바퀴는 사방으로 굴러다니면서 눈을 가지고 모든 것을 꿰뚫어보며 다닙 니다.

하나님은 침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은 활동하십 니다. 그분은 역사하십니다. 우리 가운데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눈동자는 지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을 꿰뚫어보면서 일하십니 다. 이것이 수레바퀴의 이상이 전달하는 멧세지입니다. 즉, 하나님은 역사 의 모든 실상을 통찰하시면서 섭리의 수레바퀴를 돌리시며 역사를 주관하신 다는 것입니다.

셋째/네 보좌의 비전(26-28절) 본문 26-28절을 보십시오.

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그 모양이 남보석 같 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더라 내가 본즉 그 허리 이상의 모양은 단 쇠 같아서 그 속과 주위가 불 같고 그 허리 이하의 모양도 불 같아서 사면으로 광채가 나며 그 사면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내가 보 고 곧 엎드리어 그 말씀하시는 자의 음성을 들으니라.

이 구절들에서 같아서(like)라는 말이 여섯 번이나 등장합니다. 주님의 보좌가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있는 그대로 묘사할 수가 없어 ... 과 같다 라는 표현을 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보좌의 모양이 남보석 같다고 말합니다. 푸른 빛의 보좌, 아주 아름다운 보좌입니다.

그런데 이 보좌 위에는 누가 앉아 있었습니까 사람의 모양 같은 분이 앉 아 있었다고 말합니다. 성경학자들은 이는 성자(聖子) 하나님의 모습일지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성삼위(聖三位) 하나님 가운데서 육신을 가지고 계시 는 하나님, 성육신(成肉身)하신 하나님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십니다. 그 러므로 보좌 위의 형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보좌 위에 앉아 계십니다. 다시 말하면, 그 성자 하나님은 보좌 위에 앉아 서 역사 속에 간섭하시며 천사들을 부리시며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섭리를 펼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육신이 되신 하나님,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 그 자체가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간섭에 대한 선언입니다.

역사를 그대로 두고 보실 수 없어서 하나님은 역사 속에 자신의 뜻을 이루 기 위하여 어느 날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찾아오셨습니다. 우리 가운데 구원의 역사를 펼치시기 위하여 그리고 역사 속에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하 여 하나님은 육신을 입고 역사 속에 뛰어들어오셨습니다.

 3. 결론 그분은 저 높은 보좌 위에 앉아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와 무관하게 저 먼 곳에서 우리를 구경하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육신을 입고 우리 인간의 모든 현실을 같이 아파하시며 같이 공감하시면서 관심을 갖고 통찰 하시며 천사들을 부리시면서 이 역사 속에서 일하십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백성들의 평안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소망이 있 습니다. 비록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역사가 어두운 황혼이라 할지라도, 내 개인의 삶이 치욕스럽고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절망이라 할지라도, 나의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그 하나님이 내 삶 속에 간섭하기를 원하시는 하나 님이시라면 그리고 기어이 한 민족 한 개인 속에서도 자신의 계획과 뜻을 가지고 일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이 분명하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을 포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삶에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민족을 향한 뜻을 갖고 계십니다. 개인을 향한 뜻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의 눈동자는 이 순간에도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이 젊은 포로, 고국을 떠나 이역만리에서 외롭고 슬픈 나날을 보내는 이 젊은이, 내일에 대한 꿈이 꺾여 버린 이 젊은이에게 놀라운 이상으로 등장 하셨던 하나님의 모습을 연상해 보십시오.

처음에는 무엇을 보여 주셨습니까 네 생물들입니다. 날개를 타고 분주하 게 일하고 있는 천사들의 모습, 그 다음에는 무엇입니까 수레바퀴를 굴리 고 다니면서 가득한 눈동자로 모든 사물을 꿰뚫어보시는 모습니다. 세번째 로 하나님은 에스겔을 이끌어 무엇을 보여 주십니까 하늘 저 높은 곳에 푸 른 보좌 위에 앉아 계신 사람의 모양 같으신 놀라우신 분에게로 인도합니 다. 그분이 우리의 희망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의 빛이십니다. 이 놀라우신 주님으로 인하여 에스겔은 포로의 유형지(流刑地) 같은 삶 속에서 벌떡 일 어나 새로운 내일을 설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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