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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 시대의 거울 (말 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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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한 시대의 끝
“여호와께서 말라기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말1:1)
우리가 이미 아는 대로 말라기서는 구약의 마지막 책입니다.
말라기 선지자의 예언이 그친 다음 신약으로 넘어오면서 나타난 세례 요한을 신약의 사람으로 혼돈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구약의 사람입니다.
세례 요한이 율법과 선지자의 마침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대가 도래하는 것입니다.
말라기부터 세례 요한까지는 약 400년의 시간적 공백이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이스라엘 땅에 400 년 동안 말씀이 끊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으로부터 말씀을 받을 수 없었던 그 시대는 완전히 암흑시대가 된 것입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파사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와 예언을 하게 되는데 학개나 스가랴 선지자들로부터 약 100 년 후쯤의 일로 주전 432년부터 424년 사이가 됩니다.
말라기가 예언을 시작하면서부터 구약의 모든 예언은 실질적으로 막이 내리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말라기 선지자는 구약과 신약 사이의 변혁기에 있었던 예언자입니다.
지도자들 가운데 변혁기에 있는 지도자는 불행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옛 시대도 아니고 새로운 시대도 아닌 때에 옛 것을 청산해야 되는 반면에 새로운 것도 받아 들어야 되는 많은 고통이 뒤따르게 됩니다.
마치 한국의 오늘 상황이 그 비슷한 단계에 있는 것같습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과거만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니고 미래도 보아야 했습니다.
마17:110절을 보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했습니다.
엘리야는 말라기서 3:1절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말3:1) 의 말씀 가운데 ‘내 사자’ 를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엘리야의 심정을 가지고 오는 세례 요한을 가리킵니다.
이와 같이 말라기 선지자는 메시야가 오시기 직전에 엘리야가 오는 것으로 예언을 마치고 말라기서를 마치므로 구약의 예언들을 매듭을 짓습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과거만 본 것이 아니라 현재의 입장을 보면서 말씀을 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보려면 말라기서를 보면 됩니다.
말라기서에는 마치 거울로 우리 시대가 비쳐지는 것같이 반영이 되어 나오는데 여기에는 ‘어떻게’ 라고 하는 말이 일곱번 나옵니다.
‘어찌 그리 할 수 있습니까’ 하면서 말라기가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2.어찌하여1).쓴 원망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말1:2)
이 말은 감사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원망의 소리입니다.
“주께서 어떻게 나를 사랑한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나를 사랑하십니까.” 참으로 불쌍한 일입니다.
어떻게 사랑하기는 어떻게 사랑합니까. 에서와 야곱이 있었지만 나는 야곱을 사랑했다. 그렇게 사랑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렇게 사랑하십니다.
선택적 사랑입니다.
2).큰 원망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말1:6)
눈먼 것, 저는 것을 바치고도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느냐고 원망하고 하나님을 괴롭게 해드리고도 어떻게 여호와를 내가 괴롭게 할 수 있습니까라고 항거합니다.
말로 하나님을 괴롭게 했다는 말은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운 자들입니다.
3).거짓행위 합리화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말1:7)
더러운 것을 단에 드리고도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니 주님을 멸시하고 자기 행위를 합리화하는 행위입니다.
4).자기정당성 주장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로우시게 하였나”(말2:17)
여호와를 말로 괴롭게 하였습니다.
말로 자기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아내가 남편 두 사람이 서로 자기 정당성만 주장하는 가정에는 화평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정당성을 빨리 포기해야 합니다.
십자가에 달린 한편 강도는 자기 정당성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예수야, 너는 천하를 다 네것이라고 떠들고 다녔는데 거기서 내려와 나를 좀 구하라” 자기는 구원받을 자격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한편의 강도는 자기 정당성을 포기했습니다.
“나는 죽어 마땅하거니와 예수여,, 당신이 낙원에 이를 때에 기억만 해 주십시오” 자기는 죽어 마땅하고 지옥갈 인생으로 생각을 굳힌 것입니다.
5).핑계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말3:7)
참으로 기막힌 일입니다.
돌아 오라 하시면 돌아오면 되는데 어떻게 돌아옵니까 하니 핑계입니다.
안 가겠다는 말입니다.
이유를 자꾸 댑니다.
노새와 같습니다.
가라면 안 가고 가지 말라면 더 갑니다.
이것이 마지막 때의 인간의 모습입니다. 아주 천박해집니다.
6).자기방어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말3:8)
십일조를 도적질하고 하나님께 바쳐야 할 것을 바치지 않고도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합니까 하니 자기방어를 하는 것입니다.
도적질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바쳐야 할 것을 바치지 못하면 그것이 도적질입니다.
감사한 것은 최근 들어 교회에 십일조를 바치는 교인이 급증하는 것입니다.
7).자기 칭의 주장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말3:13)
‘무슨 말로’는 어떻게‘ 라는 말입니다.
완악한 말로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
말라기서에 ‘어떻게’ 라고 하는 말이 일곱번 나왔다는 말은 인간의 허물과 약점을 그대로 노출시킨 것입니다.
이 시대의 거울입니다.
주전 400여 년 전에 있었던 일만이 아니고 오늘 우리 시대의 일을 그대로 투사시킨 것입니다.
바로 내 문제입니다.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고 내옆에 있는 형제들이 그렇고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다 이런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어찌하여, 어찌하여’ 하지 말고 하나님을 사랑할 자리에서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할 자리에서 듣고 떠나야 할 죄를 떠나고 하나님 앞에서 핑계하는 성도가 되지 않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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