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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개인적인 간증의 중요성 (벧후 01: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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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신앙 간증은 매우 큰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문서 중에 간증서가 많고 또한 교회에서 신앙 간증을 자주 시키는 것을 봅니다. 어떤 개인의 좋은 간증을 들으면 기독교의 진리나 하나님의 능력이 쉽게 이해되고 공감이 되어 청중들을 설득시키는 효과적인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 간증을 하거나 들을 때, 조심하지 않으면 그것이 성경에 기록된 간증들과는 성격이 전혀 다른 결론이 엉뚱한 인간 스토리로 전략될 위험이 있습니다. 간증은 개인의 주관적인 체험이기 때문에 자칫하면 자기 이야기로 각색되거나 자기 자랑으로 선전되기 쉽습니다. 개인이 역경을 견디고 일어선 이야기나, 과거의 못된 인간이 복음을 믿고 새 사람이 되었다거나, 혹은 기독교를 박해하던 자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주님을 열심히 섬긴다는 말을 청중들이 들으면 대부분 큰 감동을 받습니다. 그러나 개인의 간증은 성경의 진리에 대한 그릇된 이해로 말미암아 성경 말씀을 개인의 환경에 아전인수격으로 적용시키거나, 인간의 공로를 추켜세우는 자기 의(義)에 빠지거나, 인정(人情)에 호소하는 감정적인 복음 증거에 머물거나, 천박한 농담으로 청중의 귀를 즐겁게 해 주느라고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다가 개인의 인기나 헌금의 유혹에 넘어가기 쉬우므로 경계해야 합니다. 신앙 간증은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신앙 간증에서 그리스도가 높여지고 기독교의 진리가 바르게 소개되지 않으면 결국은 십자가의 영광 대신 자신의 영광이 선양되는 모순이 드러나고 맙니다. 또 그런 간증들을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고 감격해 하며 주님을 찬양한다면, 인간의 자랑을 듣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노래하는 격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먼저 성경에서 증언하는 신앙 간증이 어떤 것인지를 잘 익혀서 우리 개인들의 간증에 바르게 도입시켜야 합니다. 본문에 보면 베드로의 신앙 간증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는 과장이나, 자기 선전이나, 자신의 인생 경력을 장황하게 떠벌리지 않았습니다. 그의 간증은 오직 진실에 대한 깨끗한 고백이며, 그리스도의 영광과 주님이 어떤 뿐이신지에 대한 정직한 진술이었습니다.
진리의 중요성
베드로는 하나님의 진리가 그의 수신자들의 마음 속에 항상 깔려있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럼 베드로가 거론하는 진리는 무엇입니까 그는 예수님에 대하여 증언하고 있습니다. 15-16절에서 베드로는 주님의 신분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드러내며 그분의 영광을 중거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택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기름부음을 받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죄인들의 구주이십니다. 천사도 요셉에게 증언하였습니다. (마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을 통어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주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들을 개인적으로 소유하시며 동시에 교회 전체의 주인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베드로는 “이런 것”(1:12, 150들을 생각나게 하여 그의 수신자들이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더욱 잘 알기를 원하였습니다. 12절에 나온 ‘이것’들은 믿음,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 우애 및 사랑입니다.(1:5-70. 그러나 15절의 ‘이런 것’들은 예수님이 누구이신가에 대한 내용들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신적 능력에 대해 말합니다(1:3, 16). 예수님은 구주이십니다. 예수님은 멸망된 남녀노소들에게 놀라운 구원의 능력을 가져다 주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신자들을 넘어지지 않도록 지켜주시는 분입니다(1:10, 유1:24)
(유1:24)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자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들을 하늘 본향으로 안전하게 인도하실 분이십니다(1:11).
베드로는 이러한 진리들을 그의 회중들에게 상기시키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가 항상 너희로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베드로는 예수님의 진리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계속해서 반복되어야 한다고 믿었고 또한 그 사역이 자신의 중요한 관심사였습니다. 그는 본서신의 수신인들이 복음의 진리 안에 서 있음을 잘 알면서도 그들에게 구원의 진리를 재삼 상기시켰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에 대한 성도들의 열성이 쉽게 식어진다는 것을 잘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사는 동안 그의 수신자들을 “일깨워 생각하게 함이 옳은”일이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에게도 이와 똑같은 책임과 의무가 지워져 있습니다. 목회자들의 주된 기능 가운데 하나는 기독교의 진리의 행실에 대한 기본적인 사실들을 항상 회중들 앞에 제시하고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국제 갤럽 기구의 죠지 갤럽 씨는 1989년 말, 미국의 기르시도인들에 대해서 이렇게 언급하였습니다. “오늘날의 기독교 문제의 핵심은 교인들이 믿음에 굳게 서 있지 않기 때문에 넘어지기 쉽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가장 신실한 교인들도 죄에 넘어질 수 있음을 새삼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들을 위해서 돌아가셨다는 사실도 늘 새롭게 들어야 합니다. 구원과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대한 이같은 진리들은 너무도 당연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독교의 기본적이고 원리적인 가르침을 분명하게 숙지하지 못할 때 초래되는 과오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진실되고 진지한 교인들이라면 기독교의 근본적인 가르침들을 반복해서 듣도 익히는 일을 결코 지루하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성찬 때에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전11:24-25)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이 잘 잊는다는 것을 아셨으므로 우리를 위하여 항상 기억될 수 있는 성례전을 제정하셨던 것입니다. 한 유명한 신학자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설교는 복음을 귀에 들려주고, 성찬은 복음을 눈에 보여준다”(R.B쿠퍼). 베드로는 흩어진 당시의 성도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거듭 상기시키는 것이 믿음 안에서 강해지게 하는 비결이라고 믿었습니다. 성도들의 안전과 최선의 방어책은 그들이 소유한 진리 속에서만 발견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지상 생활이 곧 끝나게 되리라는 사실을 그의 수신인 성도들에게 상기시키는 일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1;14). 그는 첫번째 서신에서 신자들을 나그네들이라고 하였습니다(벧전1:1, 2:11). 이제 베드로는 동일한 비유를 사용하여 자신의 몸을 하나의 장막이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을 비롯한 족장들은 유목민이었으므로 장막에서 살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영구적인 집이 없었습니다. 베드로와 바울은 자신들의 죽음을 마치 장막을 걷고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유목민의 이주(移住)에 비견하였습니다.
장막 거주자들은 한 장소에 오래 머물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인생이 짧다는 한계에 직면하면 사물을 바른 관점에서 보게 됩니다. 임박한 죽음은 베드로로 하여금 자신의 필생의 사역에 더욱 열심을 내게 하였습니다. 그의 사역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을 공경하며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일찍이 베드로가 순교자의 죽음을 당할 것이라고 예고하셨습니다. 요한복음 21:18-19절을 읽어 보십시오. 베드로가 그의 두번째 서신을 썼을 때에는 고령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죽음이 가까이 왔음을 느컸습니다. “나도 이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1:14).
베드로는 자신의 지상 생애가 끝나기 전에 그의 수신인 성도들을 상기시킬 일이 또 있었습니다. 1:5절에서 베드로는 “더욱 힘써”그리스도의 품성을 닮으라고 가르쳤습니다. 이제 그는 복음의 진리들이 그의 사후에라도 기억되도록 자신이 “힘써” 최선을 다한다고 말합니다(1:15). 그런데 본 절에 언급된 “이런 것”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아무도 확실하게 지적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마가복음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인정됩니다. 베드로전서5;13절에는 베드로와 마가의 밀접한 교분이 적혀 있고 또한 마가복음에는 베드로의 실수들이 아주 분명하게 지적되어 있습니다. 베드로는 마치 마가에게 “내가 얼마나 크게 잘못을 범하였는지를 분명히 지적하라,”고 말한 듯합니다. 또한 우리는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에 대한 핵심적인 진리들을 가장 간명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베드로가 떠난 후에 그의 수신인 성도들로 하여금 기억하도록 하려는 것이란 마가복음을 두고 한 말인 듯합니다. 그는 마가를 시켜서 마가복음서를 집필하도록 “힘써” 최선을 다할 것일이었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에 관한 진리들이 문서로 보존되어 성도들에게 전달되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리스도의 재림
베드로는 그의 수신인 성도들의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분명히 개닫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재림 사건을 다시 상술하였습니다. 기독교계에서는 강림절이 되면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던 일을 기억하게 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여기서 예수님의 성육신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뜻하는 강림은 베들레헴의 아기 예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재림입니다. 예수님은 한 때 아기로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마지막 때에 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하여 다시 오실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크신 능력으로 재림하신다고 말합니다. 성경의 마지막 책은 다음과 같이 증언 합니다.
(계1:7)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예수님은 그의 영원한 나라를 세우기 위해 다시 오십니다. 베드로는 이것이 사실이라고 고백합니다.
(벧후1: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베드로는 2장에서 거짓 교사들이 나타나서 매우 자극적으로 지어낸 거짓말로써 성도들을 유혹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그의 말뜻은 거짓 교사들의 말을 듣지 말고, 예수님에 대한 진리를 가르치는 사도들의 교훈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사도들이 주님의 오심에 대하여 안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이미 맛본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변형 사건을ㄹ 목격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7:1-8, 막9:28, 눅9:28-36절을 읽어 보십시오. (벧후1:16)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그 “거룩한 산”(1:18)에서 예수님이 영광스러운 왕으로 변형되는 모습을 목격하였습니다. 우리들은 이 변화산의 위치를 정확히 모릅니다. 그러나 주께서 그 곳에 계셨기 때문에 그 산이 거룩하고 영광스러웠던 것입니다.
주님이 계신 곳에서는 어디서나 영광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주님이 쓰시기 위해 세상으로부터 따로 떼어 놓았기 때문에 거룩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거룩을 볼 때에는 주님의 광채와 영광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목격자의 증언은 가장 효력있는 증언입니다. 베드로는 말합니다. “예수님에 관하여 만들어 낸 이야기들을 듣지 마십시오. 우리들의 눈으로 직접 주님의 영광을 보고서 진리를 말하는 우리 사도들의 증언을 들으십시오.” 아마 그 당시에 벌써 예수님에대한 터무니없는 거짓된 ‘복음들’이 항간에 나돌았는지도 모릅니다. 오늘날은 물론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에 관해서 계산을 하고 점을 치듯이 날짜까지 알아 맞추어 보려는 부질없는 시도를 하면서 성도들을 우롱하는 사이비 기독교 단체나 거짓 목회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오직 하나님의 성경 말씀에서 분명하게 계시된 진리만 믿어야 합니다. 인간의 환상이나 꿈이나 무슨 영험한 체험이나 입신 등의 허무맹랑한 자극적인 거짓말들에 귀를 기울이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을 자신들의 거짓 교리나 주장에 억지로 끼우 맞추는 식의 그릇된 해석도 경계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의 사도로서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도 보고 또한 주님의 신성을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도 직접 들었던 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소리에 대하여 두 번 언급하였습니다. (1:17,18).
(벧후1:17)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도 이와 똑같은 말씀이 하늘에서 들렸습니다.
(벧후1:18) 이 소리는 우리가 저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서 나옴을 들은 것이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어찍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형체로 이 세상에 오셨고 다시 크신 영광으로 재림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와 그분의 크신 사랑을 힘써 증거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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