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십자가의 도 (고전 01:16-18)

첨부 1


고린도전서 1장 16절 이하에 바울 사도는 "유대인은 이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구하지만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의 십 자가를 전하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또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노라"고 말하였으며 고린도전서 2장에는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 하였노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철학 종교 도덕 정치 사회 교육 문화를 아는 분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던가, 실로 이것은 전 인류에게 주어지는 가장 자극적인 산 교훈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바울이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외면으로만 보았을 때 오해만 하였습니다. 반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지위도 없는 무산자(無産者)요 한 노동자에 불과하고 그저 흔히 볼 수 있는 속인에다가 배운 것 없는 무학자로만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의 내면을 알게 됐습니다. 예수님의 인격, 예수님의 생활, 예수님의 영성을 알수록 차원이 다른 것을 알게 되었고 예수님의 전 생애의 정점(頂点)이라고 할 수 있는 십자가를 바로 알게 되었을 때 바울은 자신과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밀접해져서 재생의 생명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을 확인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도 전할 것도 없는 것을 체 험하였습니다.
골고다 언덕에 우뚝 서있는 예수님의 십자가 그것이 나의 생명이 되는 것이고 나의 생의 가치가 되는 것이고 그 십자가가 곧 나 의 십자가라고 하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바울은 십자가 없이 자신의 존재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십자가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생활이 된 것입니다. 먼저 바울은 십자가 앞에서 의지의 훈련을 받으며 승리의 생활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여, 할 수 있거든 이 잔을 나에게서
떠나가게 하여 주소 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 주소서"하고 피땀을 흘리시면서 기도하시고 십자가를 향하여 나가셨습니다.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무죄의 피로 재물을 드리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인생을 죄에서 건지시려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완전 복종하는 것뿐으로 십자가를 즐겁게 지신 것입니다.
야만인을 하나를 감옥에 홀로 가두워 놓았을 때는 조용하다고 합니다. 순종도 잘 합니다. 아주 점잖습니다.
제법 예의도 있습니다. 사리분별도 잘 한다고 합니다. 자기 혼자 있을 때 자기 나름대로의 자기 좋아하는 일들을 평온하게 잘 해 갑니다. 그러다가 한 사람의 문명인을 넣어준다고 했을 때에는 야만인의 얼굴 빛이 갑자기 변해진다고 합니다. 노기가 가득 찹니다. 증오심이 끓어 오르게 됩니다. 그 다음 순간 그는 새로운 침입자에 대하는 그 대항심 싸움, 그리고 죽는가 죽이는가 하는 그 투쟁적인 자세로 바뀌어지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잘 믿는 분의 간증입니다. 내가 완전히 구원을 얻기까지는 내가 아주 단끼 인 것을 몰랐다고 말하고 있습 니다. 비단 단끼 뿐 아닙니다. 온갖 고약한 악성이 그대로 우리 속에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음을 받지 않고는 이 이기주의라는 제왕이 전적으로 나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옛 사람 즉 육의 사람이 살아 꿈틀거리는 것 입니다. 이 육의 사람은 결코 영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고칠 수도, 깨끗하게 할 수도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의 구속으로만 변화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십자가는 두 가지의 부르심이라 볼 수 있습니다. 먼저는 죄인인 나 자신을 십자가로 인해서 구원하게 해 주시는 첫째의 부르심이고 또 구원받은 성도된 나에게 있어서는 고상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고난으로의 부르심이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영광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오로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우러러 보며 그 속죄 구원을 체험하는 동시에 온전히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뜻에 복종해 나가는 생활 이것만이 십자가가 주는
산 교훈이요 실제 체험의 생활이 됩니다. 바로 이 십자가가 후에 생명의 면류관, 의의 면류관이 있는 것입니다.
또 이 십자가가 앞에서 양심의 훈련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을 가르쳐 주실 때 원수를 사랑하라, 핍박하 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신 그 자체가 이것에 실천되어진 것이고, 또 십자가 상에 서 모두가 다 실행되어진 것입니다. 원래 십자가란 로마 제국에서 노예들에게 지우는 극형이었습니다. 그런데 전 인류의 가장 선 하신 분에게 이 십자가가 형을 지운 것입니다.
부당 중에 부당입니다. 불공평 중에 가장 최악의 불공평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어린양처럼 그 부당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아무런 원망도 미움도 찾아 볼 수가 없습니 다.
개인과 사회의 생명은 이 인간의 양심에 붙어 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 혔다"고 말하였으며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라 내 속에 그리스도가 살아 계시다"고 고백했습니다. 이 자아(自 我), 나라고 하는 죄가 죽어지고 그리스도가 살아 계실 때 비로소 나의 영성이 깨끗해지고 나의 양심이 변화를 받게 되는 것입니 다. 세속에 더럽혀지지 아니하는 양심으로, 권력에 굽히지 아니하는 양심으로 스스로 속이지 아니하는 양심으로, 화인 맞지 아니 하는 양심으로 바뀌어지는 것입니다.
이 20세기 후반, 타락할 대로 타락한 인류 사회에 필요한 것은 참 그리스도인입니다. 그 속에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셔서 온전히 왕노릇하시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의 입, 그리스도의 손, 그리스도의 발, 그리스도의 그 심장, 그리고 그리스도의 양심 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개조된 참 양심은 바로 이 십자가를 통해서 얻을 수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이 십자가는 무한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죽이고 죽임을 당하는 무시무시한 대립의 극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바로 그 십자가를 지시면서 "아버지시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그렇게 간구했습니다. 이 십자가는 죽이고 죽임을 당하는 그 극치가 아니라 이제는 기도해 주고 기도를 받는 그런 상징이 된 것이고 축복하는 자와 축복을 받는 자, 용서하는 자와 용서를 받는 자, 그리고 원수까지라도 사랑해 주는 관계로 변해진 것입니다. 사랑은 생명 이상으로 귀중합 니다. 우리는 사랑을 알고 있습니다. 친구 애도 알고 있고, 민족 애도 알고 있고, 부부 애도 알고 있고, 어버이 자식 간에 친자애(親子愛)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랑에서는 근본적인 변화가 오지 아니합니다. 완전한 개조(改造)는 없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인간적인 사랑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참 아가페의 참 사랑을 모르고서는 이 모든 사랑은 진정한 의미에서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참 사랑은 온 우주보다 크고 무한합니다. 바로 그 사랑이 십자가 애인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데서, 십자가를 생활화 하는 데서, 그런 데서 이 사랑이 실천궁행(實踐躬行)되는 것입니다.
우리 잘 아는 얘기입니다. 진젠돌프 백작이 어렸을 때라고도 하고, 혹은 젊었을 때라고도 합니다마는 어느 박물관에 들어가서 여러 가지를 구경하다가 중앙에 있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우신 그림을 보게 되었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심취되어서 무릎을 꿇고 손을 모으고 우러러 보게 되었습니다. 하늘에서부터 내리 비치는 손과 그리고 가시 면류관 자리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 다. 하늘을 향한 예수님의 눈동자 그리고 뒤틀린 온 근육과 또 손에 발에 못 자국과 옆 구리에 창 자국 거기 피가 흐르는 광경을 유심히 그렇게 아픈 마음으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맨 밑에 보니까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주건만 너 나를 위하여 무엇 주느냐 하는 성구가 기록되었습니다. 진젠돌프는 바로 그 시간 손을 꽉 잡고 "오 주님이시여,
나도 주님께 피 를 바치겠습니다" 그렇게 서약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후에 이 진젠돌프는 여러분들이 잘 아시다시피 모라비안 교단(敎團)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본래 어렸을 때부터 다서 여 섯 살 났을 대부터 아주 열심히 기도하고 교회 봉사하고 전도 활동하고 어린이들과 겨자씨 단을 만들어 가지고서 하나님의 일하려고 하는 그런 열심이 있었습니다. 또 그는 귀족 집안에 태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는 재가해서 실제로는 고아 처지가 됐습니다, 그렇지만 다행하게도 그의 할머니가 히브리어 헬라어를 능통하게 할 뿐만 아니라 조직 신학에 조예가 깊었고 또 경건파에 속하는 아주 훌륭한 신앙 생활을 할머니로서 그 영향을 많이 받아서 어렸을 때부터 아주 깊은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가 모라비안 교단에 책임자가 되었을 때 서슴지 아니하고 그 교단의 별명을 피의 교 단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이 십자가의 고난을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하며 그 속죄와 구원에 대한 그 확신을 재확인하면서 이제는 나의 피를 온전히 주께 바쳐서 십자가가 중심으로 십자가의 사랑을 실천할 것이다 하는 그런 강한 의지 표현으로서 그렇게 했습니다. 세계적으로 가장 큰 규모의 교단은 아니지만 비례적으로 선교사가 가장 많은 교단이 모라비안 교단입니다. 그들은 아주 열심히 자신의 신앙을 위해 힘쓰는 한편 예루살렘 부근에다가 나환자 치료소를 만들고, 결핵환자 요양소를 만들고 그리고 각 처에 많은 선교사들을 파송하며,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고자 하는 담대한 그런 천국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유럽의 한 때 침체되었던 개인과 교회의 신앙의 새로운 불을 일으킨 것이 모라비안 교도들임에 틀림없습니다.
십자가 애, 이것은 위대한 사랑입니다. 개인을 살리고, 교회를 새롭게 하고, 세상을 개조하는 위대한 힘이 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십자가를 통한 이 무한한 사랑을 체험하는 동시에 전파하는 생활 이것이 가장 귀중한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복종하는 생활을 할 수 있게 됐는데 그것은 십자가 때문이었습니다. 양심과 사상, 생활이 아주 깨끗하게 그리스도 중심으로 할 수가 있었는데 그것은 십자가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놀라운 아가페의 희생적인 사랑을 하나님 앞에 바치고 또 이 세상을 향해서 나아가서 실천할 수가 있었는데 이것 역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은 까닭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십자가만 알기로 작정했던 것입니다. 십자가만 자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를 체험하고 전파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입에, 마음에, 행동에, 생활에 십자가가 차고 넘쳐 있을 때 이 세상은 개조되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 우리 교회, 우리 사회 십자가를 높이 자랑하며 십자가로 말미암은 변화를 체험하며 십자가 중심의 생활을 해 나갈 수 있게 되어질 때 가장 위대한 승리의 생활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