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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보물과 세상 (마 06: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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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유명한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천국의 대헌장’이라고 한 말은 참 의미 있는 표현입니다. 로빈슨(Robinson)은 예수의 산상수훈을 가리켜 ‘인간 윤리의 최고봉’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마태복음 5장에서 천국 시민의 자격을 설파하였습니다. 그리고 6장에서 천국 시민의 실제 생활 문제를 설파하였습니다. 그 중에 ① 구제 생활(마 6:1-4)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사람과의 관계성을 나타낸 교훈입니다. ② 기도 생활을 말씀하셨습니다(마 6:5-15).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말씀하신 교훈입니다. ③ 또한 금식에 관한 교훈을 하셨습니다(마 6:16-18). 이는 자신과의 관계를 교훈하신 것입니다. ④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 물질 생활을 말씀하고 있습니다(마 6:19-34).
주님은 이 부분에서 보물을 땅에 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 두라(마 6:19-24)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의식주 때문에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을 신뢰하므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추구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멋진 교훈 가운데 ‘인생과 보물’이란 메시지를 나누며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오늘은 ‘보물과 땅’ 곧 ‘보물과 세상’의 부분을 만나 보기 원합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마 6:19)고 한 말씀에 유의해야 합니다. 보통 보물은 ① 금, 은, 주옥같이 썩 드물고 희귀한 물건이나 ② 예로부터 대대로 물려 내려오는 보배로운 물건이나 재산 등을 뜻합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 사용한 ‘보물’도 보통 일반적인 관념에서 사용된 말입니다.
본문은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마 6:19)고 하였습니다.
Ⅰ. 인생을 위한 보물이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본문에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마 6:19)이라고 한 말에 유의해야 합니다.
이 말은 보물을 위한 인생이 아니고 인생을 위한 보물이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인생이 주체이고, 보물은 그것을 따라오는 수단이란 말입니다. 보물을 위하여 인생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인생을 위하여 보물이 있어야 된다는 전제입니다.
그렇다면 보물이 인생을 따라다녀야 된다는 말입니다. 보물의 보물된 가치척도와 효용성은 인생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입니다. 보물 그 자체만 있을 때는 사실상 보물이 보물될 수 없는 것입니다. 저 미개의 땅이었던 아프리카의 바닷가에 널려 있던 진주들도 사람들이 가기 전에는 아무런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개화된 사람들이 그 땅에서 그것을 발견한 이후 보배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신 인생은 이 유한의 세상에 영존할 존재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이 세상에서 영생할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 주려고 오셨습니다. 골로새서 1장 13-14절에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사함을 얻었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은 인생의 영주지가 아닙니다.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는다고 하였습니다(히 13:14). 본질적으로 이 세상은 인류의 범죄로 자연까지도 저주를 받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인류는 죄의 삯인 사망으로 끝날 이 세상에서 죽음을 맞게 되었습니다. 태어나고, 살고, 죽는 유한의 과정을 밟게 되었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언젠가 생명의 부활로 영생 세계에 이를 자들이 있고, 사망의 부활로 영벌의 세계에 이를 자들이 있습니다(요 5:24-29).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인생이 한시적(限時的)일 동안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는 보물이라고 하는 것들도 한시적입니다. 그러므로 보물은 근본적으로 땅에 쌓아 둘 성질의 것이 못됩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18장에는 세상 보화(보물)의 센터였던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불꽃 속에 타 버리고 만다고 하였습니다. 인생을 위한 보물은 인생을 따라 다녀야 합니다. 그러므로 인생이 이 세상을 떠나고 마는 마지막 한날을 보신 예수님은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인생이 있는 곳에 보물이 있고, 인생이 가는 곳에 보물이 함께 따라가야 합니다. 인생 없는 그 어떤 것도 보물이 될 수 없다는 교훈입니다. 그래서 ‘너희를 위한 보물’이라고 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21-23절 가운데 보면 「…만물이 다 너희(인생) 것임이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Ⅱ. 이 세상은 본질적으로 보물을 간수할 수 있는 영구한 곳이 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1. 그 첫째 이유는 좀(σ)이 해하고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6장 19절에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라고 하였습니다.
‘거기’는 앞에 나오는 땅, 곧 이 세상을 말합니다. 여기 나오는 ‘좀’은 ‘옷을 갉아먹는 벌레’를 뜻합니다. 이 경우 ‘보물’은 옷을 두고 하는 말이 됩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재산 중에 하나는 값지고 정교하고 진귀한 옷입니다. 우리 성경에 한 부자가 있어 자색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했다(눅 16:19)고 하였습니다. 이 옷은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의 3,400배에 해당되는 고가(高價)의 것이라고 합니다.
저 구약에 나타난 나아만 사건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땅에 와서 완전 하나님의 은혜로 문둥병을 고침 받은 나아만은 엘리사에게 자기 수레에 싣고 온 금과 은과 옷으로 사례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때 엘리사는 이것을 단호히 거절하였습니다. 이것을 본 엘리사의 종 게하시가 주인 몰래 나아만에게 나아가 은 한 달란트와 두 벌 옷을 그 주인 엘리사의 이름을 빌려 거짓말로 요구한 일이 있습니다(왕하 5:22).
그리고 여리고성이 무너질 때 아간을 유혹한 물건 중에 하나가 당시 바벨론의 값진 옷이었습니다. 성경에는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중의 금덩이 하나」라고 하였습니다(수 7:21).
이렇게 값진 의복이 사람들의 마음에 자리잡은 ‘보물’입니다. 이 세상을 지나갔던 지난날의 수다한 인생들이 썩을 육체에 화려한 옷을 걸치고 인생을 낭비하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세계의 시장에는 역대 역사상의 이른바 귀공자들과 귀공녀들이 입었다고 하는 옷이 기하학적 액수로 거래되고 있는 사실을 종종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도 진귀하고 비싼 옷이라도 장롱에 있을 때 작은 ‘좀’에 의해서 그것이 씹히고 구멍 뚫리고 마는 것입니다. 또 혹 좀에 씹혀 해어지지 아니할 지라도 결국 시간 속에서 그 옷은 낡아지고 마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러한 말씀은 바로 인생 육체 향락의 한계성, 유한성, 종말성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아름답고 값비싼 보물 같은 옷은 인간의 육체적 향락을 위한 도구입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의 육체적 향락은 결국 자기 인생을 좀먹는 자신에 의해서 끝이 나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인생을 좀먹는 ‘좀’은 어떤 벌레가 아니라 바로 육체주의적이요 금세주의적인 인간 자신의 인본주의 그 자체라는 사실입니다. 무신론적이요 반신론적이요 유물론적이요 우상 숭배적인 인간 그 자체가 자신을 해치는 ‘좀’이 됩니다. 아무튼 그 어떤 경우든 이 세상은 ‘좀’ 때문에 보물을 영구히 간수할 장소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2. 둘째 이유는 동록(βρσι)이 해하고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마 6:19).
여기 ‘동록’은 금속의 부식을 말합니다. 곧 ‘녹슬게 하는 작용’을 말합니다. 이 동록은 다른 말씀에는 ‘식물’로 번역되기도 하였습니다. 썩는 양식(요 6:27), 식물(요 4:32, 롬 14:17, 골 2:16)로도 사용되었습니다.
‘동록’은 화학적인 작용에 의해 쇠붙이가 녹스는 현상을 말합니다. 원래는 ‘먹어 버리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아마 예수님이 이 말씀을 사용한 것은 창고에 가득 채워 둔 곡식을 쥐나 다른 벌레들이 먹어 버리는 경우를 염두에 두었을 것입니다.
이런 경우 그 많은 곡식은 쥐들이나 아니면 다른 벌레들의 희생 제물이 될 뿐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그 소유물은 영구성이 없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할 때 예수님의 이 말씀의 배후에는 사람들의 소유의 상징인 물질(재물)을 두고 한 말씀이 되겠습니다. 말하자면 사람들이 보물처럼 여기는 소유물(재물)에는 영구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 자신이 유한하고 재물 자체가 가변적이고 가동적입니다. 누가 취할는지 알 수가 없는 성질의 것입니다. 침식될 수 있는 곳에 보관된 보물은 보물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밭에 소출이 풍성했던 한 부자는 그날 밤에 그 소유를 모두 남겨 놓고 죽고 말았습니다(눅 12:20).

3. 셋째 이유는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 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마태복음 6장 19절 하반절에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뚫는다’는 말은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쉽게 이해되는 말입니다. 팔레스타인의 집들의 담은 대개가 진흙 벽돌로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도적들이 그 흙벽에 구멍을 뚫기란 아주 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흙집 속에 간수해 놓은 보물은 언제든지 도적의 손에서 좌우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그 보물이나 보물을 간수한 장소는 안정성이나 영구성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도적의 손에 좌우되는 곳에 어찌 보물을 보관할 수 있겠는가 말하자면 도적당할 수 있는 인간의 물질적이요 육체적인 향락은 진정한 향락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도적의 정체는 실로 천태만상입니다. 이 세상은 온갖 류의 도적들에 의해서 인간의 보물들이 도적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혜 있는 사람이라고 하면 도적당할 곳에 자기의 보물을 간수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에 사람이 자기가 갖고 있는 보물을 도적당할 수 있는 자리에 간수한다면 그는 실로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만약에 사람의 소유물인 재물이 보물이라고 생각된다면 그것을 영구히 안전한 곳에 보관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유명한 번즈(Burns)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쾌락이란 꽃을 피우는 양귀비 같다. 손이 닿으면 꽃잎이 떨어진다. 쾌락은 강물에 떨어지는 눈(雪)과 같다. 잠깐 희게 보이나 곧 녹아 버린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번즈의 인생무상을 나타낸 글입니다. 보물과 세상은 그런 성질의 것입니다.
12세에 기하학의 원리를 증명하고, 16세에 원추곡선론을 쓰고, 19세에 계산기를 발명하고, 23세에 고대 자연과학의 큰 오류의 하나를 타파하고, 그 이후에 과학 전체를 연구하여 그 허망함을 느끼고 기독교로 전향하여, 39세에 죽을 때까지 경쾌한 유모어와 강한 추리력으로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사상을 종이에 써 놓은 인물, 그는 바로 저 유명한 철학자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입니다.
이 천재 앞에 전 유럽은 경탄하였고, 당시의 공주와 왕자들마저도 파스칼과 악수하는 것이 가십(gossip)거리가 될 정도로 그 명성은 대단하였습니다. 그런 파스칼이 어느 날 사교 파티에 참석했다가 만취 상태에서 마차를 몰고 귀가하던 중 바퀴 하나가 세느강 다리에 부딪쳐 버렸습니다. 간신히 목숨만을 건진 파스칼은 그 순간에 큰 충격을 받고 유유히 흐르는 세느강물을 바라보며 ‘죽음과 영원’을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도대체 죽음이란 무엇인가 죽음 앞에서 너의 천재, 명성, 젊음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는 마침내 인간의 실존과 영원에 대한 생각으로 신음하고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이 세상에서 진귀한 보물로 여겼던 자기 자신과 여자들과 술과 쾌락과 명성들이 도대체 무엇들인가 인간은 영원 속의 한 순간인 이 세상을 살다가 어디로 가는 것인가 영원한 허무 속인가 아니면 신의 영원한 진노 속인가
킬케골이 자신은 7만km나 깊은 망망한 대해에 혼자 떠 있는 것 같은 불안감을 느꼈다고 하는데 당시 파스칼이 그런 불안의 늪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는 점점 신음하고 고통하며 수척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뜨겁게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결정적인 회심 체험의 은총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인생에 새로운 대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에게 없어서는 안된다고 귀중히 여기던 쾌락, 사치, 명예심을 버리고 가품(佳品)들과 말을 팔고 은장식과 장식품을 모두 처분해 버렸습니다. 식사 때에는 나무 젓가락과 질그릇을 사용하고 손수 설거지를 하였습니다. 새벽 일찍이 일어나 몇 시간씩 기도하고 때로는 단식과 금식과 철야 기도까지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그 짧은 나머지 인생을 철저하게 하나님께 봉사하고 그가 받은 재능을 학문의 허영을 위해 쓰지 않고 당시의 이단 사상과 투쟁하며 신앙을 변호하는 일에 사용했습니다. 파스칼은 자신의 허약 체질에도 상관치 않고 과도한 연구, 금욕, 고행으로 인하여 항상 질병에 괴로워하였습니다. 두통, 복통, 두 다리의 마비 상태로 인생의 심연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파스칼은 이렇게 살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질병을 하나님이 주신 은총으로, 세상을 떼어놓는 섭리의 은총으로 그리고 주님을 만난 준비케 하는 전령사로 감사하게 감수했습니다.
1662년 8월, 그의 나이 38세에 임종이 다가오자 “오, 주여! 저를 아주 버리지 마옵소서!” 하고 소천했습니다. 실존 철학의 선구자로 지목되기도 한 그는 그의 대표작인 ‘팡세’를 남겼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 오직 세 가지 종류의 인간이 있을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미 하나님을 찾고 섬기는 행복한 사람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아직 하나님을 찾지 못했지만 하나님 만나기를 소원하는 도리에 맞는 사람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찾으려고도 하지 않는 어리석고 불행한 사람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지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세상은 결코 보물들을 보관할 수 없는 불안의 장소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다(전 3:11). 그 영원을 향하여 애쓰는 삶의 지혜가 있습니다. 솔로몬은 이것을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미래를 추구하는 삶의 지혜 말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영구한 미래적 삶을 추구하라는 말입니다.
세상에서 좀먹어 버리는 성질의 보물은 영구성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에서 녹슬어 침식되고 마는 성질의 보물은 영구성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에서 도적당하고 말 성질의 보물은 영구성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좀이나 동록이나 도적들이 좌우되는 그것이 무슨 보물이 될 수 있겠는가’ 하시는 예수님의 교훈입니다. 그런 곳에서 자기 행복을 찾지 말라는 것입니다. ‘언젠가 없어질 것으로 기대되는 보배(보물)들은 결코 인생에게 행복을 약속할 수 없다,’(A. 세네카)고 하였습니다.
인생과 보물! 그것은 결코 이 세상에서 보관될 수 없는 영원의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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