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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기도문1 (마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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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주기도는 이름 그대로 주께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신 기도이다 . 이렇게 가르쳐주심은 결코 기도문을 머리숙여 외우고, 혹은 입술로 부르짖는 방법 을 가르쳐 주신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앞서 언급되어 온 것처럼 외식하는 기도일 뿐 이다. 이 기도는 얼마든지 외식하는 기도로 사용될 수 있다. 즉 주기도문은 또 하 나의 방법이나 혹은 입술로만 외우는 내용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다만 너희 의 기도는 이러해야하고 이렇게 해야 된다는 것을 보여 주시는 것이다.

아주 초보적인 내용일 터이지만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 하나 있다. 기도는 누가 하는 것이며, 그리고 누구에게 하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그렇다. 기도는 다름 아닌 내가 한다. 그리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가 대상이다. 여기에 기도성립의 기본적인 출발점이 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여 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기도문의 서두에 나오는 호칭으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는 말이다.

이는 그러한 기도를 하고 있는 나의 신분에 대한 본질적인 변화가 있기 전에는 결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고 하는 말이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이것은 주문(呪文)이나 기도문일 수 없다. 기도문으로 사용하라고 가르쳐 주신 것이 아니다 . 하늘에 계신 분이 우리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시는 아버지여야 한다. 그것은 종교 적인 관념 속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부자간의 관계가 이루어져야 비로소 아버지 가 되는 것이다.

밑도 없고 끝도 없이 지나가는 이에게 아버지 하고 불러댄다면 이는 정신나간 짓 에 불과하다. 그런데 한술 더떠서 돈푼이나 있고 재산이 많은 것을 탐내어 내가 당신의 아들입니다 라고 해보라. 아무리 뒤가 구린 사람이라도 친자 확인 과정을 거쳐서 아들인 것이 확인되기 전에는 결코 내 아들아 하지 않는다. 비록 정상적 인 부자의 관계를 맺지 않았다 해도 천륜으로 엮어진 부자 관계라면 내 아들이 아니 라고 부인한다 해도 아들이다. 그에게는 정당한 아들로서 분깃에 대한 권리가 있다 . 그러나 아무리 내가 당신의 아들입니다. 라고 주장하고 큰 소리를 치면서 아들 노릇을 하려 해도 이는 미친 녀석의 망발에 불과하며 허튼 수작에 불과하다. 그에 게 있어서 상속권은 커녕 도리어 몽둥이 세례 밖에는 받을 것이 없다. 그래서 성경 은 내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고 경고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 주기도문을 하기 전에 두려움을 갖자. 그리고 친자 확인 부터 하자. 여전히 땅에 속해 있으면서, 땅엣 것을 좋아하며 하늘에 계신 운 운하지 말자. 옆집 아저씨가 재산을 많이 가지고 있는듯 보이니까(그것도 자기 생각 이지만) 괜스레 관심은 엉뚱한데 있으면서 그것을 탐내어 아버지 해보아야 아무 런 소용이 없다. 그래서 탐심은 죄라고 하지 않던가 그래서 주기도문을 외우면서 주기도를 모를 때보다도 더 큰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경우는 그래도 차라리 조금은 봐줄 수 있다. 한 집안에 살고 있으면서 모시고 있는 부모에 대하여 부모이기 때문에가 아니라 부모가 재산이 있기 때문에 모시려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으니까. 이런 경우 때문에 아버지! 하고 부르는 것이 반가운 것이 아니라 차라리 토해내고 싶으신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 어떻게 아버지의 이름 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실 수 있겠는가아무리 허튼 소리로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소리친다 해도 그 분의 이름이 거룩해지는 것은 아니다 . 도리어 욕만 될 뿐이다.

하나님이 거룩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라고 기도해야 하고 그 래야만 그 분이 거룩해지시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기도하라는 말씀이 무엇인가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 라는 말은 나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내가 그분의 이 름을 거룩히 여길 수 있는 자가 되게 해달라는 간절한 탄원이다. 다시 말하면 그러 한 자가 되도록 긍휼을 요청하면서 사는 삶을 말한다.

왜 그러해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의 삶이 어떻게 살아져야 하는지의 문제와 관련이 되어 있다. 그것이 우리의 살 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애초부터 거룩하신 분이 기 때문에 새로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셔야 되는 분이 아니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찌어다. (딤 전 6:16)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 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히 2:11)

그렇다. 오직 그분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거룩함이 있으시기 때문에 그로 말미 암지 않고는 아무도 거룩해질 수 없다. 또한 거룩한 자만이 비로소 거룩을 알 수 있 다. 거룩이 무엇인지 모르는 자가 어떻게 거룩을 말할 수 있겠는가 거룩한 분을 거룩하게 여길 수 있다는 것은 거룩을 알 때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할 때 거룩하신 분과 하나가 될 수 있으며 거룩의 삶이 우리에게 나타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 기 때문에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 라는 말은 바꾸어 말하면 나로 하여금 거룩을 아는 자가 되게 해주소서 하는 말과 다름없다. 내 안에 거룩한 것이 들어 있지 못 하면 결코 거룩히 여기지 못한다. 개는 결코 진주를 진주로 여길 수 없다는 말이다 . 이는 나로 하여금 진주의 가치가 무엇인지 알 수 있는 자가 되게 해주소서 라 는 말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할 때에만 그분의 이름이 비로소 내 안에서 거룩히 여 김을 받으시는 것이다. 그러면 누가 사느냐 하면 내가 살게된다. 내가 행복하게 된 다. 내가 기쁘고 구원의 삶을 살게 되기 때문에 그분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이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또한 기도문이 된다는 데에 여전히 문제가 있다. 기도굴에서 말 몇마 디로 거룩하게 해달라고 요청해서 되는 문제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기도는 다만 기 도여야 한다. 우리의 삶이 거룩에 대한 희구는 전혀 없이 그저 복 달라고 기도하며 , 그러한 차원에서 거룩하게 해 달라고 한다면 그것은 눈가리고 아옹하는 격 밖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의 속성은 교회가 부흥해야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생각하고 그 저 교회부흥이라는 욕심덩어리를 잔뜩 걸머지고 신앙생활한다면 그것이 무슨 거룩을 위한 기도가 될 수 있는가 충성이니 봉사니 하면서, 면류관이 무엇인지도 모르면 서 맹목적으로 밀어부치는 욕심덩어리들. 사업이 잘되어야 하고 집안이 잘되어야 하 고 축복을 받아야 하는 쪽으로 관심이 충만한 사람들에게 거룩은 도무지 거리가 있다 .

왜냐하면 욕심하고 거룩하고는 전혀 별개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삶은 그러하면서 주 기도문을 한다거나 거룩하게 해달라거나 거룩히 여기는 자가 되게 해달라고 떼쓰는 것은 가증스러운 것 밖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성경은, 어떻게 거룩하게 하시는 자에 의해 거룩히 여김을 받을 수 있게 된다고 말하 고 있는가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 17:16-19)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일군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 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 것이 성령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 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 (롬 15:16)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 심을 입은 자들과. (고전 1:2)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 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고전 6:11)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 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 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 5:25-27)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딤전 4:5)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 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히 2:11)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히 10:10)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히 10:14)

이러한 말씀들을 비추어 보면 우리의 거룩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함이요 진리와 말씀 을 인함인 것이 너무나 명확하다. 그런데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와 진리의 말씀으로 인함이라는 것에 속고 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그것이 하나의 추상적인 개념으로만 머물러 있기 때문에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라는 것이 있다. 오히려 역설적으로 우리의 삶 속에서 그 많은 세상의 것들을 구하고 있고 구하려는 자신의 속성들에 진절머리를 치면서 진리에 이르고자 하는 목마름이 있는 삶이 기도이다. 그러한 자신의 참모습을 발견하고 오히려 기도 를 못하는 것이 기도이다. 거룩하게 하는 주체는 결코 내가 아니지 않은가 그러므 로 우리로서는 거룩함에 대한 목마름과 안타까움밖에는 가질게 없다. 무슨 표현 방 법이 또 있겠는가 다만 긍휼을 기다리는 몸짓으로 여러가지 제스츄어를 할 뿐이다 . 그렇게라도 하는 것 뿐이라고나 할까 그러해야 거룩함을 입을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그렇게 밖에는 할 수가 없을 뿐더러 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세상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저 자연과 우주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충만한 진리 의 세계이다. 다만 이렇게 가지런한 세계와는 정반대로 우리의 사고와 삶의 세계는 온통 헝크러져 있고 복잡함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다. 왜냐하면 순리와 진리에 의해 붙잡혀사는 것이 아닌 역행적인 삶을 살기 때문이다. 왜인가 곧 선악의 열매를 먹으면서 살기 때문이다. 그것이 모든 인생들의 아버지이며 출발점이요 종착역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이러한 세계를 일컬어 세상이라고 한다. 오직 혼돈과 공 허와 어두움만이 충만하다. 이러한 선악적 세계관 하에서 고급가치를 추구하는 것의 매력과 아름다움이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여전히 엉켜 있으면서도 말이 다. 그래서 이것이 빠져 나가는 것이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진리 의 말씀에 의한 것이라든가 혹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룩해 졌다는 것은, 어 떻든 결과적으로 이러한 세상적인 요소가 빠져나갔을 때에 성립 가능한 말이다. 아 무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를 하고 말씀을 읽고 말씀대로 살려는 몸부림을 치고 있다해도 그것이 또 하나의 욕심의 소산물로 그러고 있다면 그것은 결코 거룩 하고는 거리가 있는 생활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곧 말씀으로 라거나 예수 그리 스도 로 말미암아라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며 오히려 그것은 세상으로 가득한 모습일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룩해진다는 것은 반드시 이러한 세상적인 선과 악이 빠 져나가고서야 시작되는 모습이다. 선이 유혹할 수 없고 악이 넘보지 못하는 세계가 하나님 나라요 하나님은 바로 그러한 세계에 좌정하고 계신다. 이곳이 생명의 세계 이며 이곳에 계신 이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가 8복이 성취된 자요, 충만한 자 이다. 그러기 때문에 주기도문은 이제까지의 종교인들의 세계에서는 감히 알 수 없 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구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외식하는 기도에 익숙해 있는 저희 들과는 다른 참된 기도의 삶을 너희 는 이렇게 해야 한다고 가르쳐 주고 계신 것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여러분의 평안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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