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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산상수훈19(기도와 골방기도) (마 0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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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구제의 문제를 언급하실 때와 같은 어법으로 문장이 구성되어 있다. 또한 주제 는 다른 주제이지만 문제의 핵심은 같다고 볼 수 있다. 종교에서 빼어 놓을 수 없는 구성요소인 기도의 문제를 가지고 외식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아니 기도만 큼 또한 인간의 종교생활에서 자신을 속게하는 요소도 없을 터이다. 기도처럼 종교적 삶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또 있겠는가 기도처럼 중요한 요소도, 중요한 만큼 헛점이 많은 것도 없을게다. 어떻게 보면 성공적인()기도생활이야 말고 자신의 삶이 정상적으로 나아가게 하느냐 아니냐를 가름해 주는 기본요소가 된다. 기도 생 활은 곧 신앙생활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무엇을 기도라고 할 것인가와 어떻게 기도생활을 할 것인가하는 점이다. 이것 이 확실치 않기 때문에 기도에 있어서도 외식의 문제가 대두되며 헛된 기도로 허공을 치는 삶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 기도인지는 끊임없이 언급될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외식과 관련하여 본문에 서 언급하시는 흐름의 범위를 이탈하지 않는 선에서 살펴보자.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 하느니라.

이러한 표현은 얼마나 인간이 하고 있는 기도라는 것이 잘못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시는 말씀이다. 오늘날은 어떠한가 위의 표현과 조금도 다를바 없는 세태이 다. 40일 금식 기도한 것이 신앙이력에, 신문광고에 게재되는 형국이다. 그렇게 요란 스럽게 떠들지 않고 신사적으로 신앙생활 한다고 하는 이들도 역시 표현만 점잖을 뿐 심리는 마찬가지이다. 기도가 하나님의 의에 주리고 목마른 몸부림 속에서 이루어지 는 찾고 구함이 아니라 자기 신앙이력을 쌓아가는 수단이고 보니 무슨 말이 더 팰요 하겠는가 이제는 기도가 자기 의(義)를 축적해가는 수단이 되고 있다. 이런 이들에 게 있어서 기도는 많이 하면 즐거운 것이요 적게 하면 불안한 것이 된다.

이것은 마치 펜으로 장작을 패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장작을 팼는지 안팼는 지는 알 수 없지만 하루종일 그짓을 하고나서 내가 장작을 이만큼 많이 팼다 라고 하며 저 혼자 즐거워하고 있는 것과 다를바가 없다. 우연히 장작이 쪼개진 것이 눈 에 보이면 하나님은 살아계시다고 마치 혼자서 하나님을 대변이라도 하는양 떠들어댄 다. 한마디로 이것은 광대 놀음에 불과하다. 거대한 정신병동에서 이뤼어지고 있는 장면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죄라는 것은 정상적으로 날아가야 할 화살이 과녘을 맞추지 못하고 빗나가는 것을 죄 라고 말한다. 성경에서는 오늘 새벽기도를 했느냐 안했느냐, 담배를 피웠느냐 안피웠 느냐를 가지고 따지지 않는다. 더더욱 신호등을 지켰느냐 안지겼느냐를 가지고 죄인 이냐 아니냐 하며 시시 비비를 가리는 것이 성경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는 성경을 가지고 그렇게 하고 있다. 성경의 관심사를 엉뚱한 곳에 집중시켜 놓고는 전 생애를 결단하고 헌신하게 하고 에너지를 쏟게 한다.

유감스럽게도 성경은 그래서 인간을 죄인이라고 한다. 바로 그러한 무지를 죄라고 일 컫고 있는 것이다. 방향이 잘못된 것이다. 화살이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고 있기 때문 이다. 그런데 인간은 그러한 궤도를 수정하려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 이 그들의 천국이기 때문이다. 놀라운 사실은 기독교인이라면서도 기독교의 용어와 종교적인 행사와 종교적인 모든 제스츄어는 갖추고 있으면서 여전히 그러한 궤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은 죄인인 것이다. 하다 못해 회개기도를 얼만큼 했느냐 않했느냐를 따지고 있으니 어떠하겠느가. 웃지 못할 용어 인 회개한 죄인 이 되는 것이다. 회개한 죄인이란 표현은 성립불가능한 말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정정당당하게 쓰이고 있다. 그러한 표현은 아무렇지도 않게, 아주 자연스럽게 사용되고 있다. 무슨 말이냐 하면 회개하고도 말마다 나는 죄인입니다 라는 말을 평범하게 사용하고 있는 현실을 말하는 것이다. 즉 그렇기 때문에 그러 한 회개는 회개하는 것 자체가 죄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한 기도는 기도 가 곧 죄요, 회개가 곧 죄요, 그러한 신앙생활 자체가 죄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속히 살 길은 기도부터 멈추고 회개부터 하지 않는 것이() 급선무이다. 그것이 곧 회개이다. 여전히 회개 기도를 하고 있는 동안은 당신은 회개를 하지 못한 것이 된 다. 열심히 회개하고 열심히 철야기도를 하고 금식기도를 한다 할지라도 화살은 엉뚱 한 곳을 향하여 날아가고 있기 때문에 헛된 수고를 하고 있음이요, 잠시 물거품이 아 름다워 보일런지는 모르지만 금새 사그러 없어지는 것이 된다. 속히 그러한 기도로부 터 돌이켜야 이제 기도를 시작할 수 있다.

기도는 자기치장의 요소로 작용될 성질의 것이 결코 아님을 알아야 한다. 더구나 기 도가 무슨 시국에 대한 의사 표시로 사용된다거나 정치적 압력수단의 개념으로 사용 될 수 있는 그러한 것이겠는가 그것이 아무리 순수한 동기와 목적을 가지고 있다 하 더라도 마찬가지이다. 기도는 기도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기 전에는 기도를 외식으로 밖에는 할 수가 없다. 어떻게 외식이 아닌 기도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차라리 외 식으로 하는 것이 그들의 운명이요 행복이다. 기도하면서 얻는 기도했다 는 즐거 움 밖에는 상급으로 주어질 것이 없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물론 그러한 기도도 한 사람이 생을 살면서 그 자신에게 미치게 되는 역할을 결코 과 소평가 할 수는 없다. 어떠한 것보다도 큰 만족이요 상급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은 아니라는 것이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원문의 표현은 앞의 외식하는 기도와 강한 대조법을 사용하고 있다. 문장도 그러나 ()라는 접속사로 시작하면서 외식과 대조되는 기도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소위 유명한 너희 기도는 골방()기도 이어야 함을 가르쳐주고 계신다. 기도는 너 의 골방()에 들어가서 너의 문을()닫고 그리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너의 아버지께 기도 하라는 것이다. 몇가지 규칙이 제시되고 있다. 장소와 갖추어야 할 자세와 기도의 대 상이다. 이 모든 것은 기도의 성격을 말해주고 있고 동시에 기도가 무엇인지를 말해 주고 있으며 아울러 기도의 결과도 가르쳐 주고 계신다.

외식하는 기도에 익숙해 있는 인간은 이 말씀 때문에 한가지 더 외식의 모양을 추가 한다. 골방 기도를하기 위해서 기도굴을 만들어 놓고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혼자 만이 목이 터져라 기도한다. 혹은 가정에 기도실을 따로 만들어 놓고 이용한다. 그러 기 때문에 개인의 은밀한 골방을 갖을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기도실이따로 있고 기도굴이 있는데 무슨 또 골방이 필요하겠는가 무슨 말인가 하면 오늘날 신앙생활에 있어서 대부분이 다 이런식이라는 것이다. 정작 필요한 것에 엉뚱한 것이 주인으로 행세하면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모두가 그렇게 열심히 하고 있는 줄로 착각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지극히 상식임에도 불구 하고 그렇다. 기도를 하고 있기 때문에 기도를 하지 못한다는 아이러니, 골방기도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정작 필요한 골방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뿐더러 그 러기 때문에 골방기도를 못하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부족하고 흡족하지는 않더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이 거처로 삼고 계실 자리가 없는 것이다.

즉 지금까지의 남편이 생생하게 살아있기 때문에 새로운 남편은 꿈도 꾸지 못할 뿐더 러(롬7장 참조) 그러한 생각을 해본다는것 자체가 불경한 일일 뿐이다. 한마디로 전 기독교인의 지탄을 받아 마땅한 망언에 불과하다. 그러한 망언을 이천년전 예수는 서슴없이 하셨다. 유대종교 신앙의 상징이요 결정체인 철옹성 예루살렘 성전이 돌하 나도 돌위에 남지 않고 무너질 것이며 무너져야 하리라는 것을 예언하셨고 공공연히 말씀하고 다니셨다. 그는 그러한 망언의 덕분에() 십자가의 죽음을 맛보셨지만, 그 것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제 아무리 별소리를 해도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의 무지 때문에 어쩔수 없다.

그러한 무지의 세계를 벗어나서 새로이 골방으로 들어가서 은밀한 중에 계신 너의 아 버지()께 나아가 그와 함께 더불어 기도해야 한다. 그 속에서 찾아야 한다. 아니 그 속에만 있다. 그안에 있는 것을 찾을 때 그 분은 은밀한 중에 계셔서 결국 자신을 나 타내 주심으로 갚아주신다. 금을 찾는 광부는 금을 캐기 위해 광맥을 찾아 헤맨다.

오직 금광을 찾는 것만이 그의 전생애의 목적이다. 광맥이 예견되는 곳을 파고 들어 간다. 파고 또 판다. 마침내 발견한다. 금이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 자 신이 묻혀 있던 그 곳에서 나타나는 것 뿐이다. 이것만이 가장 큰 상급이다. 금을 찾 고 있는 동안 다른 것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금을 찾는 이에게는 오직 금만이 기쁨 이며 보상이며 목적이다. 때로는 금 아닌 것이 금 인줄로 여겨질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상관이 없다. 금이 아니라는 것은 곧 바로 판명이 될터이니까. 다만 금광이냐 아니냐가 우선적인 과제이다. 석탄을 캐는 탄광에서 금을 캐려고 한다면 쓸데 없는 것이 된다. 그 곳에서는 석탄만 캐면 된다.

당신은 무엇을 구하는가.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을 보석으로 삼고 있는가 석탄을 캐 려면 석탄광으로 갈 일이다. 괜스레 마음은 다른 곳에 있으면서 진리 운운 하지 말라 는 말이다. 골방은 바로 은밀한 중에 보시는 그분이 숨어 계신 곳이다. 그래서 그분 을 드러남 가운데 만나기 위해서는 골방에 드러가서 찾아야 한다. 그것이 유일한 즐 거움이며 주야로 묵상하는 삶이다.

기도는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 하는 것이 아니다.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햐 들으시 는 줄을 착각하지만 그것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기도라는 것은 말을 많이 하는 것이 기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중언부언()이라는 말은 소문난 말더듬이 라는 의미 이다. 지루하게 재잘거린다는 뜻이며 공연히 반복한다는 말이다. 기도가 그러한 것이 겠는가.

그는 이미 우리가 그분을 구하기()전에 우리의 필요를 너무나 잘 알고 계신다. 혹자 는 하나님이 오죽이나 내 신세를 잘알고 계실 것이며 또한 어련히 잘 돌봐주실 것 이며 복을 내려 주실 것인가 라고 말씀하실런지 모르지만 이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 다. 그것은 내가 생각하는 나의 필요일 뿐이지 하나님이 인간에게 필요하다고 여기시 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더구나 마6:8에는 구하는 것의 내용이 명확하게 명시 (明示)되어 있다. 즉 구하는 이가 적어도 그분을()구하는, 무엇인가 구할 것을 알고 기도하는 경우임을 알 수 있다.

이 내용은 기도하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싸전에서 옷을 사려고 해서는 안된다.

산에 가서는 나무를 구하는 것이 정상이지 생선을 얻고자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일이 오늘 우리 기독교에서는 지극히 아무렇지도 않게 이루어지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바다속에 생선을 얼마든지 만들어 놓으시고 필 요에 따라 구하는 이에게 얻도록 하셨다. 그런데 왜 교회에 와서 까지 생선을 달라고 찰야기도를 해야 하는가 기도 한답시고 직장 승진과 사업 번창을 요청하면 그분은 어안이 벙벙해 지신다. 그리고 그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를 못하시기에 중언부언 해 보아야 아무런 쓸데가 없는 것이다.

인간에게 본질적으로 필요한 것은 무엇이겠는가 하나님의 편에서 볼 때 그것은 당신 자신이시다. 그것만이 인간에게 살길이요 구원이기 때문이다. 가장 급하고 급선무일 뿐더러 전체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없는 기도의 전부이다. 그러시면 서 이렇게 기도하라고 유명한 주기도를 가르쳐 주신다. 다음에는 주기도문을 살펴보 자.

여러분의 평안을 기원합니다.

김창호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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