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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는 자의 복 (행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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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그 요지가 간단하고도 명확합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는 것이요, 둘째는 구원받은 성도는 성령을 받아 사랑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사랑은 두 가지 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용서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는 것의 극치는 희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는 것』은 받을 수 있는 선행적인 기초 여건이 됩니다. 주는 자는 받게 되어 물질로, 긍휼로, 감사로, 마음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받을 것을 생각하지 않고 주는 것은 승화된 더 귀하고 가치 있는 행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주고받는다』는 理象(이상)은 서로 주는 마음이 선행조건이 되어 생겼나는 고귀한 것입니다. 서로 받는 것이 선행조건이 되어 강제적으로 전에 내가 주었으니 내놓으라고 할 때는 무가치한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소극과 부정에의 길을 택함에도 불구하고 영원한 긍정을 약속하고 믿는 종교가 다름 아닌 기독교인 것입니다. 그리고 기독교는 모든 인간의 지혜가 부정하는 내용을 긍정으로 바꾸는 깊은 근원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곧 사랑의唯神論(유신론)인 것입니다.
모든 허무와 懷疑(회의)는 마침내 어디서 오는가? 솔직히 말해서 그 마음과 정신 속에서 우러나오는데 그 마음이란 신을 믿을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마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회의와 허무는 언제나 신 없는 마음에 자라게 마련입니다. 기독교가 이러한 문제를 해결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은 기독교야말로 공자나 석가가 주지 못한 십자가의 희생을 주신 하나님을 믿는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기독교인도 세상사람과 같이 불행과 고통에 시련에 부딪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마음의 태도는 같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웃사람의 불행을 보며 친구 또는 가족 등의 죽음을 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보고 느낌으로써 참 인생이 무엇인가를 찾게 되며 영원한 실존에의 기대와 소망에서 마침내는 신에의 길을 여는데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 실제적인 과정을 말하면 인간이 그리스도를 발견하기까지는 모든 인간적인 것을 부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 인간적인 것을 부정한 뒤에는 모든 것이 다시 긍정이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부정을 통한 긍정의 종교인 것입니다.
주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줘야 할 대상은 누구입니까? 마태복음 22:37-39를 보세요.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첫째는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것이요, 둘째는 이웃에게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을 아는 자는 주되 먼저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 바치는 자가 복받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군목들 중에는 하나님께 바치라고 강조 못하고, 또 하기 싫어하는 목사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청렴한 것처럼 자랑하는데 사실 그것은 청렴한 것이 아니라 비겁한 것입니다.
목자는 양들로 하여금 축복 받게 해야 좋은 목자입니다. 신자들의 눈치나 보면서 헌금 얘기 못하는 목사가 좋은 목사가 아닙니다. 마땅히 가르쳐야 할 것은 잘 가르쳐야 합니다.
이 땅에 장로교회와 감리교회가 거의 동시에 들어왔습니다. 오히려 감리교회가 약간 먼저 들어 왔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감리교회와 장로교회를 비교해보면 장로교회가 훨씬 부흥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초기에 선교하는 자세의 차이에서 원인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한국교회 초기에 장로교회와 감리교회가 선교를 하는데 감리교회는 미국으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아 이 땅에 붉은 벽돌로 아름다운 교회당을 짓고, 주일이 되면 시장으로 나가 날품팔이하는 사람들에게 일당을 줘 가면서 교회로 끌어들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주일이면 교회당은 꽉꽉 채워졌습니다. 반면 장로교회는 어렵게 신자를 확보하고 확보된 신자는 철저히 가르쳤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십일조를 드리는 것부터 철저하게 가르치고, 교회를 위해 감당하여야 할 몫의 일들을 하도록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선교 초기에는 감리교회가 훨씬 앞서는 것 같았는데 어느 정도의 세월이 지나니 감리교회의 신자들은 대부분 떠나가고 장로교회 신자들은 남아서 자기의 맡겨진 사명을 잘 감당하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잘 바쳐야 합니다. 이것은 당연한 우리의 의무요, 또한 하나님께로부터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있는 비결입니다. 시어머니도 잘 대접해 보세요. 왜 핍박을 하겠습니까? 잘 대접을 하면 반드시 사랑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하물며 우리 하나님께서 잘 바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주는 현상이 없이는 이 땅이 밝아질 수가 없습니다. 불화와 원한을 푸는 실마리도 주는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종이 한장도 서로 맞드는데 보이지 않는 사랑이 통하고 여하한의 장애와 역경이라도 협력과 단결로 뚫고 나아가 목적을 달성할 깊은 것을 그 속에 간직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사랑은 주고받는 것』이라고 말합니다만 참된 사랑은 주는 것이 위주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될 때 이 땅에 공산주의가 꿈도 못꾸는 有物相通(유물상통)의 천국이 수립되는 것입니다.
평면상으로도 그러한데 수직상으로 영계의 하나님과 바치고 받는 것이 잘 이루어질 때 하나님과 나의 깊은 관계는 조성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뜨거운 피가 통하며 성령이 교통하며 성령의 아름다운 아홉 가지의 열매가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즉 사랑의 성품이 속에서 자라며, 희열이 충만해지고, 고귀한 평화의 생활을 하게 되고,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 특히 주님을 위해 고난받는 일이 있어도 참으며, 어렵고 연약한 사람들을 볼 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며, 선한 일을 도모하고, 쉽게 분노하지 않는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며,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절제할 줄 아는 아름다운 마음의 보화를 그 結晶(결정)으로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유대는 환난, 곤고, 핍박, 기근, 적신, 위험, 칼과 심지어는 죽음 등 이 지상의 여하한의 존재도 끊을 수가 없습니다.
『주여! 인생으로 태어난 우리에게 사랑을 다른데서 찾다가 속고 또 속아 절망으로 굴러 떨어지는 자가 되지 말게 하옵시며, 참사랑을 하나님 안에서 맛보게 하옵소서.
주여! 당신을 사랑하는 인생 최대의 행복의 길을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어서 영계와 주고받는 이 귀한 일을 이 시간부터 다시 힘차게 실현하게 하옵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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