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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저주에서 축복으로 (창 03: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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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이란 무엇입니까? 이런 「행복론」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유별난 인간이 아니라면,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소 박한 가정,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직장, 그리고 간혹 자연을 찾 아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여유가 있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평균 이 상의 행복한 인간임을 알아야 합니다.

저는 이 글에 동감합니다. 만약 가정이 깨어지고, 직장 생활이나 사업이 제대로 되어 가지 않으며, 게다가 각종 공해에 찌든 자 연을 바라보아야 한다면 이러한 삶은 저주입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류에게 내린 저주의 모습입니다. 인간이 죄지은 결과로 받은 저주를 다시 한 번 살펴봅시다.

 가정 생활의 고통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장소는 가정입니다. 가정 생활을 잘하면 가정은 문자 그대로 하나의 작은 천국입니다. 제가 「가 정 생활 세미나」를 할 때마다 항상 강조하는 대목이 그리스도인으 로서, 부모로서 자녀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 다.

사랑하는 아들아, 천국은 마치 우리집 같단다.

우리는 말로는 표현하지 않지만 삶의 모습을 통해 자녀들에게 지 옥은 마치 우리집 같아라는 인상을 주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습 니다. 남편은 바깥 일을 핑계로 늦게 들어오고 자녀들은 자녀들대 로 집에서 안정감을 누리지 못하여 거리에서 방황한다면, 이런 가 정은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받게 된 가정 생활의 고통은 다음 두 가지입니다.

 첫째로, 잉태하는 고통입니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16절).

어떤 학자들은 잉태라는 단어는 정확한 번역이 아니라고 지적합 니다. 사실 잉태 그 자체에는 고통이 없습니다. 고통은 출산할 때 따라옵니다. 그래서 이 단어를 잉태(conception) 보다는 출산, 해산(childbirth, childbeari ng)이라고 번역합니다. 어떤 번역본에는 잉태와 출산의 과정을 포함해서 아이를 기르는 전과정을 의미하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유태인의 현대판 『토라』에 보면 아기를 기른다는 의미로 번 역되어 있습니다.

 자녀를 낳아 기르는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소중한 축복입니다. 우 리는 자녀를 기르면서 수많은 기쁨을 느낍니다. 그런가 하면 자녀 들 때문에 속상해 하고 근심 가운데 사는 부모들도 많이 있습니다 . 부모들이 행복과 삶의 의미를 자녀들에게서 찾는 경우, 그 자 녀들은 부모들에게 갖은 고통의 근원이 되는데, 이것이 인간에게 내린 저주의 한 현상입니다.

 본문의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의 고통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로 『이쯔본』입니다. 이는 본래 육체의 고통만을 의미하는 단어가 아니라 정신의 고통까지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어머니가 자녀를 출산할 때 육체가 느끼는 고통 뿐만 아니라 기르는 과정에서 겪는 가슴앓이가 얼마나 더 큰 고통인지 부모가 되어 본 사람은 알 것입니다. 자녀는 축복의 소산이지만 한편으로는 부모의 걱정거리일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가정 생활에 내린 저주의 형태입니다.

 둘째로, 불안한 부부 관계의 고통입니다.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16절).

 사모라는 단어를 언뜻 보면 여자는 평생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 의 다스림을 받아야 한다는 의미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여기서 쓰 인 사모라는 단어는 악의 소원(evil desire)을 뜻한다고 합니다.

이와 똑같은 단어가 창세기 4장 7절에 나옵니다.

죄의 소원(desire)은 네게 있으나.

하나님이 가인에게 이르신 말씀 가운데 한 구절입니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로 『테슈카』인데 단순한 소원이 아니라 악한 소원입 니다. 그러므로 16절 말씀은 아내들이 남편을 악의를 가지고 대한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남편은 아내를 다스립니다. 이 다스림이 정도를 넘어서면 아내를 착취합니다. 남편에게 악의를 가지고 대드는 아내, 또 아 내를 잔인하고 무자비하게 대하는 남편,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본래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부부가 되게 하셨을 때 기대한 모 습이 아닙니다. 창세기 2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주께서 기대하신 부 부는 돕는 배필입니다.

서로 도와 인생의 여정을 함께 가는 정다운 배필이어야 할 부부의 모습이 죄로 말미암아 깨졌습니다. 이기심과 죄가 있는 곳에 부 부간의 단절과 갈등이 있습니다. 이 부부 관계는 축복이 아니라 고통과 저주의 산물입니다.

 노동의 저주 ^ 죄를 지은 인간이 받은 또 하나의 고통은 노동입니다. 이것을 현 대 상황에 바꾸어 말하면 직장 생활의 고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고대 농경 사회나 유목 사회에서는 노동이 유일한 생계 수단입 니다. 그 수고를 통해서 의식주를 해결하였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그런 수고는 아마 즐거운 노동이었을 것입니다 . 우리는 자칫하면 인간이 범죄했기 때문에 노동이라는 벌이 내려 진 것처럼 본문을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좀더 자세하고 정확 하게 창세기 기사를 읽어 보면, 노동은 태초부터 인간에게 주어졌 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2장 15절에 보면 하나님이 아담에게 에덴 동산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셨습니다. 이 말은 영어로 cultivat e인데 경작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경작이라는 노동을 이미 주셨습니다. 노동은 형벌이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주어진 노동은 즐겁지 않고 고통스럽다는 특징이 있습니 다. 우리는 더 이상 노동을 즐기지 못합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해야 할 우리들의 노동이 먹고 살기 위해서 할 수 없이 하는 고 통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당신은 어떤 자세로 직장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 오늘 도 제게 생존을 영위할 수 있는 직장을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찬양 가운데 출근하십니까? 아니면 어휴 , 지겨워 하며 짜증스럽게 맡겨진 일을 처리합니까? 감사나 감 격 없이 고통스럽게 직장 생활을 한다면 당신은 타락한 아담처럼 저주 아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본래 창조 의도 대로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 기쁨과 감사로 일해야 합니다. 저주받은 고통스런 노동을 타락 이전의 신성한 노동으로 되돌려야 합니다.

 환경의 저주

가정 생활의 고통, 직장 생활의 고통 뿐만 아니라 우리를 둘러싸 고 있는 환경 그 자체도 저주를 받고 말았습니다. 17절 말씀을 보십시오.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범죄한 인간이 저주를 받을 때 자연도 함께 저주를 받았습니다.

요즈음 지구를 되살리자는 운동이 한참 벌어지고 있는데, 저주받은 인간이 가는 곳에 오염이 뒤따르는 것은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릅 니다.

계속해서 18절 말씀을 보십시오.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인간에게 내려진 저주는 자연까지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아름다워야 할 자연,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자연에도 고통과 슬픔이 임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가슴아픈 일입니다.

 우리는 가정도 파괴되고 노동도 고통으로 바뀐 저주받은 세상에 살 고 있습니다. 이러한 삶에 무슨 즐거움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성 경은 희망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저주받은 땅에 서 사는 저주받은 인간에게 새로운 희망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은 두 가지를 제시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할 때 희망이 있습니다.

20절 말씀을 보십시오.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 가 됨이더라.

하와라는 이름을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생명을 주는 자라는 뜻입니다. 이 구절은 15절과 연결시켜서 읽어야 합니다. 아담 은 15절 말씀의 약속을 듣고 자기 곁에 있는 여자에게 이름을 지어 줍니다. 이것은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은 증거입니다.

 내가 죄를 지어 저주를 받았지만 하나님은 이 여자의 후손에서 메시야가 나게 하실 것이다. 그 메시야는 인류에게 새 희망을 품 게 할 것이다.

아담은 여자에게 산 자의 어미라는 이름을 지어 줌으로써 하나 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 하늘과 땅이 새로워집니다.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다시는 슬픔도 고통도 악의도 저주도 없는 전혀 새로운 나라에서 살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2천 년 전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이 땅의 저 주는 이미 극복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분이 우리의 죄와 저주를 담 당하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우리의 죄 값은 모두 지불되었습니 다. 예수를 믿는 자마다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습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저주받은 환경 속에서 고통스럽게 가정과 직장 생 활을 해 나갑니다. 그러나 구세주이신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분을 믿는 우리들은 삶의 고통과 저주에도 주를 찬양하고 하늘나라를 소망하며 늘 기쁘게 살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약속을 믿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일 때 희망이 있습니다.

약속의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신뢰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 혜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저주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22절 말씀 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 니라.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는 부끄러움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죄책감 이 들자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자기 몸을 숨기고 싶어했습니다.

그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서 무화과나무 잎으로 옷을 만들었습니다 . 그러나 옷으로는 부끄러움을 가릴 수도 없고 해결할 수도 없었 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위해 가죽옷을 지어 입히 셨습니다.

이 가죽옷을 만들기 위해 적어도 한 마리의 짐승이 죽었다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피 값을 치른 가죽옷을 인간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옷이 인간이 자기 노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모습을 상징한다면 이 가죽옷은 온전히 하나님 의 은혜를 나타냅니다.

 하나님이 지어 입히신 가죽옷은 장차 일어날 더욱 놀라운 사건을 예표합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지은 죄는 인간의 어떠한 선행(善行 )이나 윤리나 학문으로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 신의 힘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무진 애를 썼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무화과나무 잎으로만 계속 옷을 해 입었다고 상상해 보십시 오. 그들은 뜨거운 햇빛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할 수도 없을 뿐더러 자주 새 옷을 지어 입어야 하는 불편을 겪었을 것입니다. 무화 과나무 잎으로 만든 옷은 자기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인간의 허 무한 노력을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 가죽옷을 지어 주실 때, 아담이 하나님, 내 문제는 내가 해결하겠으니 간섭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했다면 당신은 어떤 느낌을 받겠습니까? 이와 똑같은 오만한 태도가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처지가 어떠한지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 그러나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임 을 깨닫고 그분께 구원과 죄 사함을 받는 사람들은 저주가 아니라 복이 넘치는 새로운 삶을 살 것입니다.

 어떤 성경학자는 창세기 3장 21절을 창세기에 나타난 요한복음 3장 16절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이처럼 사랑하사 짐승 하나를 예비하고 그 희생을 근거로 가죽옷을 주셨으니 이것을 입는 자마다 그 안에 서 즐거워하였더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요 3:16 참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구원을 얻게 되리라고 약속하십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 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이 약속을 믿는 자에게 구원이 임하고 진정 복된 삶이 시작됩니다. 당신도 이 약속의 말씀을 믿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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