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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역사를 바꾸는 기도 (느 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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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영국수상 윈스톤 쳐칠경은 그의 전쟁 회고록(War Memories)에서 1940.9.15을 가르쳐 자기 조국인 영국이 당시의 나치 독일과의 공중전에서 특별한 승리를 거둔 절정의 날이었다고 증언했다고 합니다. 당시 독일 공군기와 폭격기가 무차별 공격을 퍼붓는 상황에서 영국측으로서는 거의 방어수단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독일군 이 결정적인 승리를 목전에 둔 시점에서 독일 비행기들이 전혀 이유없이 10분동안에 걸쳐 전면적인 후퇴를 시작한 것입니다. 영국의 공군 전투 부대 사령관이었던 공군대장 다우딩(Dowding)경은 전쟁이 끝나자마자 이 날을 회고하며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으로 의당 일어나야 할 사건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엄청난 사건이었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그런데 노만 그럽이 쓴 탁월한 중보기도의 사람 리즈 하월즈(Rees Howells)에 보면 당시 웨일즈 성경대학의 학장이었던 리즈 하월즈의 영향으로 쳐칠수상은 두 번에 걸친 전국적인 기도의 날을 선포하여 온 교회 온 국민에게 기도를 호소했습니다. 리즈 하월즈 자신은 독일의 공습이 시작되자 학교강당에서 교직원 학생들과 함께 매일 아침1시간과 점심후 그리고 저녁 7시부터 자정까지 기도에 힘썼고 공습이 절정에 달할때마다 금식하며 기도했다고 증거합니다. 그는 독일공군이 이유없는 후퇴를 하던

9.15직전에 기도회를 인도하며 이런 메시지를 남겼습니다.잦은 공습으로 마음이 흔들리는 분들이 계십니까 여러분 자신이 지옥에서 구원받은 것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이 공습에서도 구원받을수 있다는 것을 왜 믿지 못합니까그러나 우리가 만일 이때에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수만 있다면 나치속에서 역사하는 마귀의 체제는 오래지 않아 종말을 고할 것이며, 고귀한 생명들을 보호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전쟁의 흐름을 바꾸시는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때의 리즈 하월즈와 영국 그리스도인들의 기도를 가르쳐 역사를 바꾸는 기도라고 할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역사를 바꾼 또 하나의 기도의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때는 주전445년이나 444년경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당시의 세계의 신흥제국 페르샤 정부에서 유대인 출신으로 아다사스다왕 1세의 비서실장을 지내고 있었던 느헤미야는 조국 이스라엘, 특히 수도인 예루살렘의 상황이 어렵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당시 그의 조국은 페르샤의 고레스가 바벨론을 정복함으로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어 조국으로 돌아와 새로운 조국건설에 헌신하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도 재건되었습니다. 그러나 성벽이 파괴되어 짐으로 백성들의 삶은 약탈과 무질서에 노출된채 깊은 절망에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느헤미야는 마침내 조국에 돌아가 자기 조국을 위해 예루살렘 성을 쌓아주기로 결단합니다. 고대 세계에서 성은 백성들의 삶의 안전과 미래의 번영을 보장하는 매우 중요한 보호책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위대한 사역은 그의 기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의 기도가 역사를 바꾸었던 것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는 역사를 바꾸어야 할 답답한 현실은 없을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역사를 바꾸는 기도를 시작할 수 있을까요

1. 역사에 대한 열린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역사에 대한 열린 의식이란 무엇입니까 역사적 현실에 대한 눈이 열려 있고 귀가 열려 있고 마음이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라야 진정한 기도를 할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흔히 기도 많이 하는 사람하면 어떤 사람을 연상하게 됩니까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이 세상을 향해서는 마음을 닫고 산으로 올라가서 주여 삼창하는 사람일까요 저는 역사의식이 닫힌 사람은 결코 역사를 바꾸는 기도를 할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의 기도는 기도해도 결코 자신과 가정을 위한 기복적인 기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자신이 아닌 이웃을 위해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이런 사람에게 기대할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 본문으로 돌아와 느헤미야의 기도가 어떻게 시작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2절에 보면 자신의 고국을 떠나 외국에서 장관하고 있던 이 사람이 어느날 고국을 방문하고 온 사람들에게 고국의 형편을 묻습니다.-유다사람과 예루살렘 형편을 물은즉했습니다. 그가 외국에 와서 출세하여 살고 있지만 고국에 대한 관심을 접치 못하고 있었던 증거라고 할수 있겠지요.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합니다. 그 내용이 바로 3절입니다. 그리고 그는 조국이라는 역사의 장에서 들려온 소식을 듣고 그 현실을 보게 된 것입니다. 4절은 느헤미야의 반응입니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이렇게 해서 그의 기도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역사의식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기도하지 않을까요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여러분 주변을 천천히 열린 눈으로 돌아보십시오. 여러분의 가정을 보십시오. 자녀들을 보십시오. 배우자를 보십시오. 찢긴 가슴으로 아파하는 이웃들을 보십시오. 한 나라의 지도자가 대통령 못해 먹겠다고 고백할 정도의 우리 사회, 우리 민족의 답답한 현실을 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이 역사의 장에서 들려오는 소식을 참으로 듣고 있다면 그 정직한 현실을 보고 있다면 그 아픔을 느끼고 있다면 어떻게 기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주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역사에 대한 열린 의식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엎드려 이 민족을 위해 이웃들을 위해 그리고 자신들의 가정과 미래를 위해서도 참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역사의 주인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역사를 바꾸는 기도를 하려면 먼저 역사의 주인에 대한 믿음이 전제되어 있어야 합니다. 역사의 주인이 누구이십니까 물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만이 역사를 바꾸시고 새롭게 하실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창조자이실뿐 아니라 섭리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가르쳐 영어로 'history'라고 합니다. his+story 두 개의 단어가 결합된 말입니다. 역사는 그분의 이야기 곧 하나님의 섭리의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역사를 섭리하시는 그분에 대한 믿음 없이 그분에게 기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을 역사의 주인으로 믿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믿는다는 말입니까
1) 하나님은 문제보다 크신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5절에 느헤미야가 하나님을 부르면서 제일 먼저 붙인 수식어가 '크신' 하나님(Great God)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민족이 직면한 문제가 아무리 커도 그가 기도하는 하나님은 문제보다 더 크신 하나님이신 것을 믿은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보다 문제가 여전히 더 크게 보인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 까요 결국 우리는 그 문제아래 눌리고 절망해 버릴 것입니다. 더 이상의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물위를 걷던 베드로가 물속으로 빠져 들어간 이유가 아니었습니까 그가 시선을 주님께 두고 있는한 파도가 두려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시선을 파도에 두기 시작하자 주님은 작게 보이고 파도만 크게 보인 것입니다. 그러자 그는 믿음없는 사람처럼 두려워하고 절망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가 아무리 심각하고 크게 보여도 아직 주 하나님이 더 크게만 보인다면 그리고 그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는 위대한 하나님이심을 믿을수 있다면 우리는 주저앉을 이유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오늘의 고단한 역사가 바꾸어지기를 소망하십니까 그러면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2)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5절에서 느헤미야는 기도를 시작하며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합니다. 지금의 역사적 현실이 아무리 참담해도 그는 아직도 자기 민족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약속의 책이고 성경의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오늘이 아무리 열악한 현실이어도 이 백성을 축복하시고 사용하시겠다는 약속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것을 그는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께 약속대로 이스라엘 민족을 회복해 주실 것을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또한 새 언약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면 그는 변함없이 오늘의 우리에게도 약속을 가지고 다가오십니다. 옛 언약인 구약은 일차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것이었지만 새 언약은 궁극적으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것입니다. 행전2:39을 보십시오. 사도 베드로는 메시야의 언약도 궁극적으로 오늘의 우리를 위한 것임을 역설하지 않습니까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오늘의 삶이 고단하십니까 그 고단한 환경에만 시선을 두지 마시고 약속의 말씀을 펴서 읽으십시오. 그리고 당신에게 희망으로 다가오는 말씀을 붙잡고 외치십시오. 주님, 나는 주께서 내게 주시는 이 약속을 지키실줄을 믿습니다고. 그러면 믿음대로 되실 것입니다.

3) 하나님은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바닥으로 가라앉을 때 우리의 마음속에는 이런 질문이 있을수가 있습니다. 도대체 이런 나에게 하나님이 관심을 가져 주실 것인가라는 것입니다. 19세기말부터 시작하여 20세기초에 기독교가 가진자들 소위 기득권자들에게만 관심을 가지는 종교로 오해되어 혹독하게 비판된 때가 있었습니다. 소위 기독교가 선교되는 과정에서 지나치게 식민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정치적이고 물량적인 방법들이 사용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기독교는 강자의 종교 혹은 강자만을 위한 종교로 곡해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20세기 초부터 일부 신학자들가운데 성경을 지배자의 관점이 아닌 눌린자의 관점에서 다시 연구하고 읽기 시작하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신학적 운동은 해방신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해방신학을 수용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해방신학의 강조점들 가운데는 오히려 반 기독교적인 것들이 적지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해방신학이 기독교계 전반에 기여한 분명하고 긍정적인 요인 하나가 있었는데 그것은 약자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에 우리가 주목하게 된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특히 구약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애정의 대상으로 언급되는 4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에 대한 언급은 문자 그대로 성경에 넘쳐 납니다. 이들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고아와 과부 가난한자들 그리고 나그네들인 것입니다. 한 신학자는 성경에 나타난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은 거의 편애에 가깝다는 표현까지 썼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런 하나님의 관심과 편애의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요 저는 그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속성 때문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에게는 이들을 사랑하실 수밖에 없는 어떤 속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긍휼이 무엇입니까 긍휼이란 약자들이나 약점을 지닌 사람들에 대한 불쌍히 여기심의 덕인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바로 이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입니다. 다시 5절의 하반부를 보십시오. 그는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고 기도합니다. 주께서는 이런 기도에 어떻게 응답하실까요 저는 이런 우리의 기도에 하나님은 너무나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시며 넉넉함으로 응답하신다고 믿습니다. 성경은 우리 하나님이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라고 증거합니다. 여기서 풍성함이란 끝이없는 넉넉함을 뜻하는 말입니다. 빈민선교 하시는 목사님이 바다 구경을 한번도 못한 가난한 빈민촌 청소년들을 데리고 자동차로 해안에 도착하여 모래사장에 내려놓자 한 아이가 바다를 보더니 울더랍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왜 우느냐고 했더니 목사님, 저는 오늘 태어나서 처음으로 넉넉하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볼수 있었습니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그를 꼭 안아주면서 그래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은 저 바다처럼 끝이 없이 넉넉하시지요하고 말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찍이 예레미야 선지자는 주의 백성들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아직도 살아 숨쉬는 이유를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심으로 우리가 진멸 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렘애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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