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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소아시아 일곱교회에 보낸 편지 (계 02: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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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예수님이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보내신 각각의 편지 내용에서 우리는 오늘날 교회를 향해 주시는 말씀을 듣는다. 오늘날의 교회는 일곱 교회 중 한 형태에 해당하기도 하겠지만, 이는 극히 드문 일로 보인다. 오히려 일곱 교회의 다양한 모습이 동시에 혹은 시차적으로 한 교회 안에서 나타날 수 있다고 본다.

일곱 교회에 편지를 보내시는 분은 예수님이시다. 그런데 그 분은 좀 더 상세히 자신을 소개하신다. 이 소개를 통해서 편지를 받는 사람들의 관심을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께 집중시키신다.

여기서는 다음 세가지로 예수님의 나타나심을 정리할 수 있다. 먼저 예수님은 역사의 시작과 마지막이 되시는 전능하신 분으로서 세상을 구속하시기 위해 죽으셨으나 부활하시어 영원히 살아 계시는 분으로 소개된다. 또 교회를 돌보시고 지키시는 분으로 나타나시면서 교회의 주인이시요, 만왕의 왕으로 소개된다. 끝으로 순결하시고 거룩하신 분으로서, 모든 것을 살피시는 분으로서, 그리고 친히 싸우시는 분으로서 소개된다. 일곱 교회를 향한 개별적인 편지글의 서두에 발신인으로서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그 교회의 형편에 맞게 적확히 소개되는 것을 다시 보게될 것이다.

사도 요한이 어떻게 소개되고 있는지를 함께 살펴보자.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계1:9) 이는 예수님의 사도로서 성도들이 현재의 상황과 처지에서 동일한 고난과 시련을 겪어왔음과 그 동일한 형편 가운데서 주님의 말씀을 받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아무나 환란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 권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리라. 당시 성도들과 동일한 환난 가운데 처한 사도 요한을 소개함으로써 혼란하거나 휩쓸리지 않고 거룩하게 지켜가야할 교회에 대하여,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면서도 영광스런 소망을 이룰 인내에 대하여, 그리스도와 사도 요한의 고난 가운데서 걸어갈 길과 위로에 대하여 성도들의 마음과 생활을 추스리도록 하시는 것이다.

맨 먼저 주님은 에베소 교회에 편지를 보내셨는데, 에베소는 소아시아에서 제일 큰 도시이다. 육로와 해상 무역의 중심지였으며, 세계에서 제일 큰 아데미 여신전이 있어서, 여신상을 주물이나 조각으로 만들어 세계 각곳에 파는 것이 중요한 산업이었다. 계속되는 신전 축제가 있었고, 여신에 대한 충성 서약이 로마 황제에 대한 충성 서약과 함께 강요되고 있었다.

예수님은 자신을 오른손에 일곱 별(교회의 사자)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교회) 사이에 다니시는 이(계2:1)라고 소개하셨다. 주님이 친히 일곱 교회를 은혜와 진리로 돌보시며 거룩한 교회로 지키시는 분으로, 그리고 일곱 교회에 세우신 사자들을 세상 풍조에 흔들리지 않도록 오른손으로 붙드셔서 의롭게 세워가시는 분으로 자신을 소개하신다. 이는 에베소 교회가 처한 상황 가운데서 개입하시는 주님의 접근을 실제적으로 느끼게 한다.

진리 지키기

에베소 교회를 향한 주님의 인정하심과 칭찬은 환난과 시험 가운데서 부지런한 수고와 복음으로 인내한 모습에 있었다. 진리를 어긋나게 가르치는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그 거짓 가르침의 잘못된 것들을 드러내어 교회를 거짓으로부터 보호하고, 진리를 수호한 용기있는 모습을 칭찬하셨다. 에베소 교회를 향해 주신 주님의 인정과 칭찬의 내용은 오늘 우리 교회의 현실에서 한없이 부럽기만 하다. 교회의 우선 순위가 진리 수호보다는 다른 무엇을(교회 성장, 가정의 평안, 개인의 건강을 비롯한 문제 해결 등등) 위한 수단으로 변해버리지는 않았는가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기에 더욱 그러하다.

요즈음처럼 분별력이 요구되는 때도 없을 것이다. 성경에 대한 연구와 이해보다는 개인의 주관적 경험이 우리들의 우선되는 관심이 되었고, 이 부분에 만족을 주지 못하는 무엇도 우리들의 흥미를 끌지 못하고, 심히 우둔해 보이기까지 하다. 그러니 에베소 교회를 향한 주님의 칭찬은 우리에게 부럽기만 하다. 교회를 섬기는 지도자들이 이 시대를 분별하는 기준으로서의 진리를 성도들의 실제 생활 속에 활발히 적용할 수 있을 정도로 깊이있는 성경 연구가 계속되기를 바라며, 이를 위한 목회자의 시간 안배에서 우선적인 배려가 있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이는 목회자 개인의 결단으로 되지않는, 성도들과 함께 이루어가야할 부분으로 여겨진다.

처음 사랑, 처음 행위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계2:4)

이게 무슨 말씀인가 에베소 교회가 처음 사랑을 버린 사랑없는 교회라니 많은 수고와 믿음의 인내와 진리 수호에 앞장 서 온 에베소 교회가 처음 사랑을 버린 사랑없는 교회라니…. 충격이다. 처음 사랑을 경홀히 여겼다거나, 사용하지 않았다는 책망이 아니라, 처음 사랑을 아예 버렸다는 말씀은 인정과 칭찬을 받은 에베소 교회를 생각할 때 이해하기 어렵다.

많은 일을 하고 그 일을 성공적으로 잘 해내면 인정과 칭찬을 받고 그렇지 못하면 실패자로 낙인찍히는 우리 사회에서 에베소 교회에 주어진 주님의 책망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주님과의 처음 사랑 없이도 그런 일들을 힘써 할 수 있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사랑 없이도 사람들 보기에 훌륭한 일들을 많이 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이런 지적을 우리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지적을 실제로 받아들이는 것에는 가볍게 넘어가 버리는 자들이라는 데 그 심각성이 있다.

거짓과 싸워 이겼으면 됐지, 그 와중에 처음 사랑을 지켜갈 여력이나 있겠느냐고 오히려 주님께 그 상황을 들먹이며 따지고 나올 우리 세대는 아닌가 우리에게 옳다고 여겨지는 한 두가지가 있으면 그 일에 매달리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지지 않는가 그런데 주님은 '이것도 하고 저것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을 말씀하신다. 그것도 이것과 저것이 서로 합해지기 어려울 것같은 상황에서 말이다.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할 때 우리는 개인적으로 적용해서 예수님을 처음 믿게 되었을 때 드렸던 순수한, 헌신적인, 온전한 사랑 고백 없이 그냥 주어진 일에만 열심을 다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처음 예수님을 믿었을 때의 순수함을 찾아야 겠다고 다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상당한 효과가 있는 적용으로 보인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주님의 책망을 듣는 이는 에베소 교회이다. 에베소 교회 초창기 성도들이 지켜왔던 주님을 향한, 성도 서로를 향한, 교회 밖의 한 영혼 영혼을 향한 사랑이 지금의 에베소 교회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시간의 흐름 속에 상황이 주는 사안들은 잘 대처해 왔으나, 에베소 교회를 우리들의 조상이요, 신앙의 선배들인 성도들이 지켜왔던 처음 사랑은 버려진 것이다. 그 대안은 계시록 2장에 처음 행위를 가지라(Do the first works!)고 하신 말씀 속에서 더욱 분명해 진다.

어떻게 자신의 명예와 재산을 지키기 위한 것도 아니고,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성도들이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말인가 우리는 정답을 알 수는 없다. 다만, 교회가 역사 현장에서 일을 찾아하면서 또는 훌륭한 사람의 지도력을 따라 나아가면서도 이런 책망을 듣게 되는 것은, 교회를 향한 주님의 목적이 분명하게 서로에게 인식되지 않고 고백되어 오지 않았기 때문이지 않은가 생각해 본다. 역사 상황도 바뀌고, 시간이 지나면 지도자도 바뀐다. 이렇게 바뀌는 중에도 처음 사랑을 버리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시대의 상황이나 사람의 지도력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교회의 목적에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교회는 지금 어떤 형편에 처해있는가, 어떤 지도자들이 있는가를 살피는 동시에, 우리는 무엇보다도 우리 교회에 주님 주신 목적은 어디에 있으며, 그 목적이 어떻게 교회의 역사와 구조 속에서 선배 신앙인들에 의해 이루어져 왔는가를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초기 교회 성도들의 생각과 비전은 상황에 따라 수정될 수 있겠으나, 그들의 오랜 기도와 수고는 무시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교회의 목적으로서 처음 행위

오늘날 교회들은 꿈은 크나 현실적인 삶은 힘이 없다. 한 교회 안에서 모든 것을 다하려고 덤비지만, 곧 그렇게 할 수 없어 쓰러지기 때문이다. 초기 교회가 지향해 온 교회의 목적을 지속적으로 수정 보완하며 이루어나가기 보다는, 새로운 것, 새로운 것 하다가 둘 다 놓쳐버렸기 때문으로도 보인다. 교회 안에도 깜짝 행사들은 즐비하게 소개되지만, 도대체 교회 역사를 돌아보아 일관성 있는 발전상을 찾아 보기 힘들다. 교회는 처음 사랑을 버리고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주님은 말씀 하신다. 지금은 처음 사랑을, 처음 행위를 회복할 때라고.

기회를 주심이 은혜이다

만약 회개하지 아니하면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2:5)고 하신 엄청난 주님의 경고 속에서, 그 심각성을 우리는 무시해서는 안된다. 처음 사랑을 잃은 에베소 교회를 가지고는 주님이 원하셨던 교회의 역할을 도저히 할 수 없었기에 주님은 그 교회의 역할을 다른 곳으로 옮기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지금 에베소 교회의 모습은 사람들이 돌아갈 본향도 아니며, 주님의 새 백성을 맞이하며 함께 균형있게 성장할 공동체도 될 수 없다고 주님은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우리가 택한 일에만 몰두 할 것인가

지금은 처음 사랑을, 처음 행위를 회복할 때라고 말씀하시며 주님은 기회를. 개인적인 신앙 여정의 관점을 무시할 수 없지만, 우선적으로 우리가 속한 신앙공동체의 처음 사랑이 무엇인지를 확인하자. 그 처음 사랑이 교회마다 가닥이 잡혔으면 좋겠다. 우리 교회의 처음 사랑은 무엇인가요, 우리 교회의 처음 행위는 무엇으로 시작되었나요 그냥 좋은 질문이라고 넘겨버릴 것이 아니다.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이 물음의 정직한 답변을 통해 오늘날 우리 교회가 서로 별 차이 없이 비슷 비슷 흉내내기 바쁜 모습에서 벗어나, 우주적인 주님의 교회의 다양함 속에서 하나됨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서로 차이가 나지만 전혀 이상하지 않고 오히려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교회를 이루어가는 우주적 교회를 기대하자. 모방으로 얼룩진 획일적인 활동이 아닌, 사명의 독특함을 지닌 일관된 교회의 역사를 기대하자.

우리의 관심은 모두가 좋아하는 것일 수도 있겠으나, 오히려 우리에게 주님 맡기신 독특한 사명에서 찾아보도록 하자. 주님은 이렇게 약속하신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계2:7).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의 처음 사랑과 처음 행위의 일관성 있는 발전상을 가지고 만나 주님 안에서 새 백성, 새 공동체 이루기를 바라자.

이준행 목사 / 광주 초록빛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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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Voice online No.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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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마리

소아시아 일곱교회에 보낸 편지

강해설교 연재 2:요한계시록 2장 1절 ㅡ 3장 22절

우리 주님이 소아시아에 있는 교회들에게 보내신 글 가운데 두 번째는 서머나(Smyrna) 지역에 있는 교회에 보낸 편지였다. 이 교회의 특성은 한마디로 '핍박받는 교회(Persecuted church)'라고 말할 수 있다.

서머나 도시

서머나 도시는 에베소 북쪽으로 40km 위에 있는 도시로, 에게해의 미항으로 알려진 살기 좋은 곳이었다. 또한 당 지배국이었던 로마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 도시에 있는 서머나 교회는 바울의 제3차 전도 여행 때 설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교회에는 폴리갑이라는 유명한 감독이 있었는데, 그의 순교 이야기는 유명하다. 폴리갑은 86세의 나이로 화형당하면서, 86년 동안 나를 한 번도 배신하지 않으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이 앞에 놓였다 해서 부인할 수 없다고 말하고, 육체를 죽일 수는 있지만 영혼은 죽이지 못할 이에게 주(Lord)라고 부를 수 없다고 했다. 또 그는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는 인생에게는 반드시 영원한 형벌과 심판이 있을 것을 전하고 화형에 처해졌다.

당시에는 그리스도인이 되면 빈곤과 굶주림과 투옥과 때로는 사나운 짐승이나 불에 태워 죽임당하는 것을 각오해야 하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당대를 살아가는 것과 고난핍박은 늘 함께 고려되는 것들이었다.

이러한 서머나 교회에 편지하시는 주님은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로 나타나신다. 주님은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이 현재의 고통을 인하여 괴로워하고 있을 때, 창조주로서, 그리고 구속주로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셨다. 특별히 주님은 창조주로서의 위엄과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으신 고난의 주님을 보이심으로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시고, 주님을 바라보도록 하신다.

일상 생활 속에서 사람들이 경험해 보지 못한 핍박으로 인해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받게될 때, 사람들이 목말라하는 것은 무엇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핍박과, 그로 인한 고난에서 속히, 그리고 쉽게 벗어나는 것이라 말할 것이라고 한다면 너무 단정적일까 그렇지만 사실 우리가 내 자신에게서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보는 것은 고난에서 조금이라도 일찍 벗어나기 위해 온 힘(때로는 편법까지라도)을 다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주님은 핍박 중에 고난 당하는 성도들을 찾아오사 위로하시되, 그 고난을 어떻게 피할 것인가를 가르치신 것이 아니었다.

물론 고난의 성격이 자신의 실수가 아닌,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으로 인한 것이기에 독특하다(나는 이 부분에서 서머나 교회의 생으로서 성도들의 신앙을 부러워하고 있다). 고난의 주님을 바라보도록 하시고, 그런 유의 고난을 두려워 하지 않도록 하신다. 그리고 위로의 수준에서 끝나지 않고, 더 나아가 죽도록 충성하라고 권면하신다. 이 권면을 풀어 보면, 죽을 힘을 다해, 죽을 때까지,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충성하라는 것으로 들린다.

고난이 가져올 두가지 유익

여기서 우리는 두가지 점을 깨닫게 된다. 첫째는, 분명히 표현하지는 않으셨으나, 주님께서는 성도들이 이러한 핍박과 고난으로 어떤 유익을 얻게될 것인지를 알고 계신 것으로 보인다. 물론 고난 중에 있는 성도에게 말하기를, 고난이 다 지난 후에 있을 유익이 클 것이다 또는 시험에서 떨어진 학생에게 하나님이 크게 쓰시려고 그러신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 고난이 주는 아픔을 경솔히 다루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 십상이지만(그래서 주님은 이런 유의 가벼운 표현을 하지 않으시고, 고난의 주를 바라보게 하시고, 오히려 죽도록 충성하라고 요청하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 고난이 가져온 결과를 생각해 볼 때 성도들의 고난도 역시 성도들 자신에게 뿐 아니라 주의 백성을 모으는 통로로 구원의 도구가 될 것임이 분명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에 보낸 두 번째 편지에서 갖가지 고난을 성도들이 받게되지만 낙망하거나 절망하지 않을 것은 우리 안에 계시는 보배되신 주님이 드러나실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고린도후서4:7-15).

둘째는, 그리스도의 생명의 부요함이 어떠함을 확신하도록 하신 것이다. 나는 에수님 안에서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고 말은 하지만, 실제의 생활에서는 돈 만원을 손해보지 않으려고 말싸움과 몸싸움도 서슴치 않는 우리의 모습 속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의 부요는 땅에 곤두박질 치고만다. 그러나 주님은 죽음을 한발자욱 앞에 둔 성도들에게 죽도록 충성해도 좋을 복음을 소개하심으로 그리스도의 생명의 풍요로움 안에서 생을 아름답게 바라볼 힘을 주고 계시며, 비겁하지 않을 지혜를 주고 계신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우리의 형편과 처지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의 부요를 드러낼 기회를 얼마나 얻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이는 부담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굽어질대로 굽어지고, 냄새날대로 냄새가 진동하는 우리 시대에는 그리스도의 생명의 부요를 드러내기 그리 어렵지 않다는 자긍심을 갖자는 것이다. 죽느냐 사느냐가 아니라, 남을 위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갖고 생각하는 삶을 산다면 우리는 조그마한 돈과 시간과 수고를 나누면서 그리스도의 생명의 부요를 쉽게 이웃들에게 전할 수 있다. 아니, 감동시킬 수 있다. 자동차 차선과 신호를 지키는 아름다움에서 우리의 가진 달란트를 나누는 사랑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모습으로 그리스도의 부요함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를 매일 하늘로부터 부여받고 있음을 본다.

고난 중의 딜레마

다음으로는 핍박과 고난 중에 성도들이 더 큰 어려움에 빠뜨리는 것 한가지를 다루고자 한다. 그것은 지금 우리가 당하는 핍박과 고난이 어디서 왔느냐 하는 것이다. 많은 경우 성도들 중에는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실수로 또는 부덕으로 그와같은 고난이 온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이러한 표현이 이웃에게 상처가 되지 않도록 한다거나, 하나님께 욕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우회적 표현으로서 자기 내면에서는 그 고난의 실체를 알고 주님 안에서 싸워나가는 분들도 있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와는 달리 주변 사람들이 말하는대로 믿는 사람이 왜 그런 어려움을 당하느냐, 회개해야 할 것이 많은가 봐!, 안 믿는 사람에게 덕이 되지 않겠구먼 등의 말에 미리 배수진을 치면서, 겉으로는 자신의 약함으로 그리된 것으로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분을 이기지 못해 하는 분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이다. 고난이 자신의 실수로 온 것이라면 감당하기는 훨씬 쉬울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실수라 말함으로 신앙인의 겸손을 드러내면서도 그 겸손의 허위성으로 근본의 의문, 이 고통은 어디서 온 것인가, 왜 다른 사람이 아닌 내게 왔는가 하는 것이 자신을 계속 괴롭히는 가운데 더 힘든 싸움을 하는 분들을 많이 보는 것이다.

그러기에 주님이 서머나 교회가 당하는 핍박이 어디서 온 것과 그 핍박이 가져온 환난과 궁핍함을 아신다고 하신 말씀이 갖는 위력을 맞보아 알게된다. 얼마나 고맙고 고마운 말씀인지…. 고난 중에 있는 성도에게 이보다 신선한 물줄기가 또 있을까 서머나 교회가 당하는 핍박이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집단으로서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고 분명히 드러내신다. 사단의 지휘 아래 움직이는 세력에 의해 온 고난임을 분별하게 하심으로 성도들이 지금 영적 전쟁에 있음을 보게 하시고, 이 싸움의 장수는 우리 주 예수이심과 이 싸움이 서머나 교회 성도들과 집단 싸움이 아닌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보게 하신 것이다. 이로서 더욱 하나님을 의존하는 성도들이 되도록 촉구하실 뿐아니라, 더 나아가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왕권을 가지고 그리스도와 함께 함께 다스리고 있음을 확신시켜 주신 것이다.

오늘날 성도들이 갖가지 유혹과 고난과 핍박으로부터 자주 실패하는 것은 어디 있는 것일까 이 싸움을 개인전으로 여기거나, 집단 싸움 정도로 보고 마구잡이로 덤비는데서 비롯된 것이라 여겨진다. 우리에게 닥쳐오는 유혹과 고난과 핍박이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것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 속한 싸움이다. 하나님의 지혜를 가지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싸워야할 싸움이라는 것이다. 이는 우리 안에 하나님의 성품을 게발하기 위하심이고,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부요하심을 이웃에게 알리시기 위한 것임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다. 신의 성품에 참예함은 멀리있는 것이다. 생활 가운데 자주 만나게되는 하나님께 속한 싸움에 있는 것이다.

주님의 생명의 부요하심

끝으로, 주 예수님은 죽도록 충성하라고 권면하심으로 죽음을 뛰어넘으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으로 살아가는 자들의 능력이 어떠함을 보이도록 하신다. 이는 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심이 아니며, 악에 받쳐서 죽음을 내놓으라는 요구가 아닌, 그리스도 예수의 새 생명의 근본이 어떠함을 보이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삶을 살아오지 않았던가 그런 시각으로 본다면 주님의 요구는 도대체 받아들이기 힘든 것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주님은 생명의 면류관이 있음과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으리라는 말씀을 통해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날 동안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산다는 것이 주는 그 큰 능력이 어떠한 것임을 다시 생각하게 하신다.

뿐만 아니라, 핍박으로 인하여 궁핍한 성도들에게 실상은 부요한 자들이라고 하심으로, 성도들이 고난 가운데 그리스도의 부요함을 함께 나눈 자들이 많음을 생각하도록 하신다. 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부의 개념을 다시 생각하도록 할 뿐아니라, 우리의 관심이 돈의 기준을 따라 움직이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관점을 가지고 움직이도록 권면하고 계시는 것이다. 돈의 기준으로 움직이면 쌓을 수 없는 부요함이 그리스도의 생명의 신비 가운데 있음을 가르치신 것이다. 이는 관계 속에서 익어져가는 성숙에서 가장 많이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돈으로 평가되는 목표가 우선시 되는 사회 속에서, 우리의 부요함까지 돈으로 평가되도록 강요받는 사회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쌓을 수 있는 부요는 무엇인가 빗겨갈 수도 있는 고난을 자청하며 주님께 받은 것을 이웃과 나누는 것 아니겠는가

나는 왜 이글을 쓰는데 오랜동안 망설이고 있었을까 그것은 교회의 활동이 균형을 잡지 못하고 표류하는 곳에서 오랜동안 살아왔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고난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피해 온 삶을 돌아보면서 괴로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은 핍박받고 있으며, 앞으로도 일정한 핍박을 받게될 교회를 찾아오시고 격려하시는 것을 본다. 어느덧 습관이 되어버린 편안함으로 인해 너무 멀리있는 나를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작아진 내 모습으로 이 말씀을 담기에는 무척 힘겨웠음을 고백한다.

이준행 목사 / 광주 초록빛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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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Voice online No.24

강해설교 연재③:요한계시록 2장 12절-3장 6절

그동안 2회에 걸쳐 '처음 사랑을 잃은 에베소 교회'와 '핍박 받는 서머나 교회'에 주님이 보내신 편지들을 다루었다. 오늘은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교회에 보내진 편지들을 살피고자 한다. 교회가 속한 도시의 특성과 역사적 배경 등은 생략하고, 어떻게 타협하는 버가모 교회로, 부패한 두아디라 교회로, 그리고 죽은 사데교회로 불리워지게 되었는지를 중심으로 나누고자 한다.

타협하는 교회(Compromising Church)

버가모 교회에는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당의 교훈을 따르는 무리가 있었다. 발람은 이스라엘의 선지자로서 이스라엘 백성이 모압 땅을 지나는 것을 두려워한 모압 왕 발락에게 고용되어 공개적으로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는 것은 거절했으나 그는 결국 모압 여인들의 유혹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을 성적타락과 우상숭배에 참여시켜 하나님의 백성이 망하게 되는 방안을 알려준 인물이다.

민수기에 기록된 발락과 발람의 사건에서 얼른 발람의 잘못을 찾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는 은밀한 부분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범죄에 이르도록 허용한 사람이다. 여기에는 모압 왕 발락이 제안한 돈이 있었다. 오늘날 같으면 발람은 공개적으로는 의로우면서도 은밀한 부분에서는 자기 이익을 다 챙기고, 주변 사람들은 어떤 범죄에 빠지든 자신만 깨끗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언급되고 있는 니골라당의 교훈은 그 방향과 내용에 있어서는 발람의 교훈과 같은 것이나 그들의 가르침의 핵심적인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버가모 교회가 처한 상황에서는 제사음식을 먹지 않는 것은 그 부류에 참여하지 않는 표시가 되었기에 상당한 불이익을 받게 되어 있었다. 당시 경제적으로 뿐 아니라, 사회문화를 주도해 가던 대부분의 동업조합은 신전(神殿)의식을 중심으로 그 세를 과시했기에 더욱 그랬다. 그래서 교회 안에 니골라당의 교훈을 따르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타락한 세상일지라도 그들 가운데서 우리가 살아가려면 영적으로 자유함을 얻어 우상제물을 먹는 곳에 성적유희를 즐기는 곳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친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상당한 매력이 있다. '현실적으로 부딪히는 어려움을 해결하고 실천적인 신앙을 갖자'고 외치는 그들의 표어는 상당한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런데 주님은 이들의 가르침과 행위를 잘못된 것으로 책망하고 계신다. 그리고 이들이 교회에 허용되고 징계되지 않는 것에 대해 버가모 교회를 책망하고 계시는 것이다.

버가모 교회 성도들 중에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당의 교훈을 따르게 된 사람들은 처음부터 '자, 우리가 하나님을 대항하여 싸워보자'라고 하면서 그런 행위를 따른 것은 아니었으리라. 오늘날의 표현을 쓰자면, 자신들이 이 세상 문화에서 격리되어지는 것 같고, 점점 진리를 찾아가는 것이 따분하게 여겨지고, 성도들의 생활은 재미없는 진부한 것으로 여겨지고, 더 나아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그들과 같아져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 교회 성도들 중에는 교회 생활이 가져오는 현실적인 부담과 불이익으로 고심하면서 대안으로 발람과 니골라당의 교훈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께 인정받지 못했고, 그들의 행위를 징계하지 못한 교회가 책망 듣게 된 것이다.

어떻게 버가모 교회가 주님의 책망을 들을 수밖에 없는 교회가 되고 말았을까 이미 그릇된 가르침으로 판명된 두 교훈들이 어떻게 교회 성도들에게 그토록 큰 영향력을 미치면서 확산될 수 있었을까 갖가지 질문이 가능하겠지만 그 어느 질문도 오늘 우리가 속한 교회와 무관하지 않는 심각한 것들이다.

버가모 교회가 처한 문제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성도들 개인의 구원에는 적용 되면서도, 그들이 속한 사회구조를 변화시키는 복음의 능력으로는 활용되지도 가르쳐지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오늘날 교회 성도들이 실생활에서 세상의 가치와 방법들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교회가 사회, 경제, 문화의 영향력 아래서 어려움을 겪으면서 성도들의 삶이 복음의 능력을 따라 사회 속으로 스며들도록 가르치고 이끌어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세상으로부터 개인구원이라는 구명복을, 낙하산을, 탈출구를 제공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에서 전하는 복음이 개인적인 차원에서 위로와 소망을 주는 수준에 멈춰 버렸다는 것이다.

물론, 많은 경우 세상 속으로 들어가 변혁을 꿈꾸던 일들이 어려움을 겪은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어떤 극단에서는 아예 영성이 흐려진다는 이유로 문화와 담을 쌓아 버린 사람들이 교회 안에 있다. 경건한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우리는 여기서 세상문화가 하나님을 의존하도록 도전하기 보다는 너 자신에게 있는 것을 네 마음껏 드러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이러한 세상 문화 속으로 들어갈 때에 두배의 영성이 요구되고 있음을 간과하지 말자. 문화에 접근할 때 가장 근본적인 경건의 훈련과 경건한 삶을 배제하지 않는 성숙된 삶을 가지고 다가가도록 부단히 애써야 한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무시되면서, 경건이 진부하게 느껴지면서까지 문화변혁자로 나아가는 것은 한 번쯤은 그럴 수도 있겠으나 기본적으로 심히 어리석은 짓이다.

세상문화의 특성을 간파하고 세상문화에 취하려 하기 보다는 그들을 사랑으로 껴안고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사랑을 전하고 행하기 위해 그들 속으로 나아가려 한다면 두배의 영성이 강조되는 것은 지나친 일이 아니다. 그렇게 될 때, 갖가지 대상에 취한 사람들에게 말이 아닌 그리스도인의 성품은 분명히 다른 무엇을 보여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웃음 속에 사용되는 언어 사용이 가히 폭력에 가까운 것을 우리가 인정한다면, 그리스도인의 언어는 그들에게 진실이 주는 아름다움을 향하도록 동기부여 할 것이다. 많은 경우 그들은 웃음의 소재를 진실에서 찾기를 거부한 사람들처럼 살아가고 있다. 남을 비하시키고 바보 취급하면서 말 끊기를 예사로 삼고 웃어대는 그들의 빈약함을 그리스도인들은 슬퍼하며, 그들에게 새 언어(New Dialogue)가 주는 신선함과 진정한 웃음을 선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부패한 교회(Corrupt Church)

두아디라 교회는 교회의 지도자가 자칭 선지자라 일컬으며 성도들을 성적으로 타락케 하는 음녀 이세벨과 그 추종자들을 용납한다. 이에 대해 주님은 단호하게 '부패한 교회'라고 말씀하신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되묻고 싶을 것이다. 교회의 선한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주님이 아신다고 하면서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다고 인정해 주신 교회인데 과연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라고 물을 수 있다.

우리는 이세벨이 어떤 영향력을 발휘하며 성도를 유인하고, 교회를 혼란케 했을 것인지 자세히 모른다. 다만 자칭 여선지자라고 하면서 활동했던 것을 보면 사람들을 이끌 만한 특별한 영적경험과 예언 등의 (소위)은사들을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은 그녀에게 가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 받으려 했을 것이고, 이런 유의 영적경험과 그 깊이를 알지 못하는 교회 지도자는 혼란하면서도 성도들의 반응 때문에 그런 현상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딱한 사정에 처했으리라.

주님은 이러한 형편의 교회에 편지하면서 먼저 교회 지도자가 이세벨을 용납한 것을 책망하신다. 그리고 이세벨을 주님이 세우지 아니한 거짓 선지자라고 말씀하신다. 더 나아가 이세벨을 음녀라고 지적하신다. 주님은 교회 지도자의 혼란을 책망하시면서도, 모든 교회가 주님이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게 하심으로 교회를 혼란함에서, 부패에서, 타락에서 건져 내시는 것이다. 교회 지도자에 대한 책망은 정죄로 나타나기 보다는 이세벨의 영향력이 어떠함을 보이시고, 그녀와 그녀를 따르는 자들의 결국이 어떠할 것을 보이심으로 혼란에 더 이상 빠지지 말고 처음 받은 그 믿음을 주님 오실 때까지 굳게 붙잡도록 하고 계신다.

오늘 한국교회는 여러 부분에서 소위 영적 은사를 잘못 활용하는 사람들에 의해 혼란에 빠져 있다. 작금의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어려운 현실 가운데 역학과 역술에 의존하는 사람들이 많아져 가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데, 이와 함께 교회 안에서도 점쟁이를 방불케 하는 그릇된 행위들이 여러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혼란한 세력에 매이도록 묶어 버리는 것을 본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님의 관심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교회 지도자들의 태도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두아디라에 보낸 편지에서 읽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왜 교회 지도자들이 이런 활동을 잘못된 것으로 규정하고, 더 이상 혼란한 활동을 못하도록 막지 못하는 것일까 그냥 놔두면 해결될 것처럼 기다리고만 있는 것일까 형제의 신음하는 아픔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일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교회 지도자들이 그릇된 교회 부흥 신드롬에서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사도적 가르침에 굳게선 건전한 신학 없이 건강하지 못한 목회를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하나님의 말씀과 역사하심은 여전히 풍성한데 교회 지도자들은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채 뭔가 색다른 교회 부흥의 길이 있을지 모른다고 여기며 확신 없는 목회를 하고 있다.

그러면 교회 지도자들의 자기 한계 극복은 어디서 가능한가 주님께서 두아디라 교회에 주신 말씀처럼(계2:25), 사도들에게서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더욱 헌신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 시대 속에서 더욱 확연히 알아가는 일에 헌신하는 것 외에는 없다고 나는 믿는다. 한국교회 지도자들에게 말씀 연구와 기도가 부족하다는 말은 과거 여느 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다.

죽은 교회(Dead Church)

어떻게 교회가 죽었다는 말을 들을 수 있을까 살았다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제로는 죽은 자라니. 그동안 갖가지 교회 행사들이 있었다. 사람들도 여럿 모였다. 그러나 주님은 죽게 된 교회라고 말씀하시면서 교회의 행위에서 온전한 것을 찾지 못했다고 말씀하신다. 그들의 행위에는 그 동기와 목적에 있어서 순전함이 결여되어 있었다. 내세운 목표들은 교회를 위한 것 같고, 치루어지는 행사들은 교회의 이름으로 하는데, 이 과정 중에서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는 온데 간데 없고, 주님의 주님 되심을 드러내려는 헌신된 모습도 온데 간데 없고, 분주히 그 일을 되게하기 위해 뛰는 가운데 세상의 가치와 방식을 사용하면서 옷을 더럽힌 그들을 주님은 죽게된 교회라고 말씀하고 계신 듯하다.

목표를 이렇게 이루었다고 돈 씀씀이를 자랑하고, 수고한 사람들은 칭찬하지만, 그 일을 준비하고 이루어 가면서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변화 되어가는 모습에는 별 관심이 없다. 교회에서 나누어진 교제와 광고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주님은 교회에서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능력을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일하심이 순전히 드러나는 데에 관심있다는 것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교회가 모든 일에 그 가치와 동기가 바르지 못하면 그 목적이 분명하지 않으면, 그 일을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뭔가 일의 진행은 될 지 모르나 죽게 된 교회로 전락할 수도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교회 행사가 소위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교회가 일을 준비하고 이루어가는 중에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가 있으며, 하나님의 마음과 그 관심을 드러내려고 수고하느냐에 있다. 아직도 우리가 교회를 죽일 수 있다는 것이 생소한 말인가 '우리는 무엇으로 교회를 건강케 하시는 주님의 역사에 참여하고 있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준행 목사 / 광주 초록빛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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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race of the Lord Jesus be with God's people. Amen (REVELATION 22:21)

강해설교 연재 4:요한계시록 3장 7절-22절

신실한 교회

빌라델비아 도시는 AD 17년에 있었던 대지진으로 그동안 정들었던 지역을 떠나 인근 지역으로 옮겨 다시 정착한 도시였다. 그러므로 당시 도시 사람들은 여전히 지진에 대한 두려움이 남아 있었으며 새로운 지역에서의 삶은 예상 밖의 어려움으로 가득했을 것이다. 이러한 도시에 자리잡은 빌라델비아 교회 역시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며, 소아시아 일곱교회 중에서 그 역사가 가장 짧은 교회였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잃지 않고 신실하게 주 예수님께 붙어 있었던 교회였다. 주님은 이러한 교회의 모습을 무척 자랑스러워 하시면서 많은 칭찬과 위로를 주시고 엄청난 내용의 약속들을 하셨다.

우선 주님은 빌라델비아 교회에 편지하시면서 '주님의 교회를 주님이 인도해 나가신다'는 점을 강조하셨다.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신 주님께서 빌라델비아 교회에 '열린 문'을 두셨다고 말씀하신다. 이 '열린 문'은 능히 닫을 사람이 없는 문으로, 구원에 이르는 문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 열린 문을 언급하신 주님은 곧 이어서 빌라델비아 교회가 보여준 건강한 모습을 자랑스럽게 소개하신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이 주님의 자랑스러운 칭찬 가운데서 우리는 주님의 지대한 관심과 기도와 그 역사하심이 교회가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지켜 행하는 건강함에 있음을 보여준다. 교회로 모일 때뿐 아니라 실제 일하는 일터와 누구보다도 허물없이 친근한 삶을 살아가는 가정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행하는 믿음의 역사를 주님은 기뻐하신다.

관심이 다르고, 추구하는 가치가 다르고, 목적을 이루어가는 방법이 다른 세상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하여 꾸준히 물으면서 믿음으로 말씀을 따라 행하는 길을 찾아가는 성도들. 주님이 찾으시고 기뻐하시는 주님의 백성들이다. 그러나 교회의 예배와 가르침이 이러한 실제 생활과는 거리가 먼 내용들로 가득 차 있다는 안타까움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 적용하기에 급급해 하자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삶의 체계로 형성되기까지 신실하게 연구하고 깨달아가야 한다는 것인데, 여기서 성도들의 실제 생활의 갈등과 고민을 실제적으로 다루어갈 수 있는 교회의 지도력이 부족해도 너무 부족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교회 지도자들이 실제 삶에 대한 이해와 경험이 너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성도들에게 배우려하지 않고 주기만하고 가르치기만 하려하니 그 거리는 점점 멀어지고 교회를 중심으로 한 신앙생활은 생활의 일부분에 머물고 마는 것을 우리는 안타까워 해야 할 것이다.

주님이 빌라델비아 교회에 주신 칭찬의 메시지를 들으면서 개인적 행동에 대한 것으로만 보지 않았으면 한다. 이 말씀은 교회 지도자에게 주신 말씀이면서 교회 공동체를 향해 주신 말씀으로 받아야 한다.

교회로 모일 때 성도들의 실생활의 갈등과 고민이 소개되고 나누어지면서 그 가운데서 주 하나님이 원하시는 생활은 무엇인지를 자연스럽게 이야기하고, 성경을 연구하면서 깨달아지는대로 그렇게 살아보려고 서로 격려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도와주는 교회 공동체의 분위기를 염두에 두고 이 칭찬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성도들이 세상에 나가서 실패한 이야기도 좋다. 손해를 본 경험도 좋다. 바보라고 취급받았던 경우도 좋다. 그러나 교회에 와서 성도들과 교제하는 가운데 실제 삶을 나누면서 주님의 위로를 얻고 다시 한 번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새 힘을 얻어 세상으로 나아가는 교회의 모습을 그려보는 가운데 이 칭찬의 말씀에 귀 기울여 보자는 것이다.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들에 교회가 줄 수 있는 대안 중의 하나는 교회 안에 팽배한 개인 중심의 신앙(개인 중심의 성경해석, 자기 중심적인 복에 대한 이해, 자기 의를 드러내려는 봉사 등)을 벗어나 교회 공동체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서로를 이해하고 더불어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는 교회생활과 그 열매들이라고 확신한다.

주님은 이러한 빌라델비아 교회를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열린 문으로 삼으셨다. 이 열린 문을 통해 주님은 친히 주의 백성들을 모으시고 건강한 성도로 자라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교회의 소망이 여기에 있어야 할 것이다. 주님이 인정해 주시는 교회의 건강함으로 인해 주님이 교회에 열린 문을 두시고 주의 백성들을 모이게 하시는 역사가 실제로 오늘날에도 전국 곳곳에서,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야 한다.

주님의 일하심이 여기서 멈추는가 아니다. 빌라델비아 교회 성도들이 살아가면서 받는 고난과 아픔을 기억하시고, 그 고통을 가중시키며 핍박하던 무리들 중 몇 명을 그 성도들 앞에 나아와 무릎 꿇어 절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고난과 핍박을 받으면서 성도들이 생각하지도 못했던 일을 주님은 하시겠다는 것이다. 이런 일을 통해 주님은 주님이 얼마나 빌라델비아 교회를 사랑하시는지를 보이시겠다고 하신다.

아이쿠나, 주님! 교회는 주님이 세우시고 이끄시는 것을….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머리로는 인정하지만 행위로는 주님보다 앞서가는 조급함으로 일관했던 것을 인정합니다. 풀어가야 할 많은 교회의 연약함과 갈등을 뒤로 하고 교인 숫자 늘리기에 급급한 교회의 모습을 인정합니다. 주님이 교회에 열린 문을 두시는데, 우리는 우리가 교회를 열어 가려고 얼마나 힘써 왔던지요. 용서하옵소서. 다만 바라옵기는, 주님의 말씀에 순전하게 반응하며 건강한 교회를 이루어 갈 때 주님이 그 교회에 맞게 주의 백성을 모아가시는 것을 믿게 하시고 의지하게 하옵소서! 성도들의 생활에서 겪은 고난으로 인해 주님은 성도들을 실제적으로 위로하시고 주님이 교회 성도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이시고 다시 한 번 성도들이 힘있게 증인의 삶을 세상 가운데서 살아가도록 이끌어가시는 것을 믿게 하옵소서!

주님은 성도들에게 임할 시험을 면케 해 주시겠다고 하심으로,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시험들이 신앙 성숙을 위한 하나님의 배려였음과 그러한 시험은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까지 말씀해 주신다. 교회가 동일한 시험을 받아 매번 넘어지는 것은 건강하지 못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오히려 예전에 당한 시험을 피하지 않고 진실하게 대처한 후에는 더욱 견고해진 교회의 모습으로 서 있기에, 동일한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하실 뿐 아니라 그런 유형의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하시겠다는 것이 주님의 약속이다.

주님은 마지막으로 신실한 믿음을 잃지 않도록 하라고 말씀하시면서 이기는 자에게는 거처를 옮겨야 하는 생활이 아닌 안정된 생활이 있는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의 친 백성으로 삼으시겠다고 너무도 분명하게 약속하신다.

미지근한 교회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차지도 덥지도 아니한 교회라고 말씀하신다. 물론 교회의 성도들이나 주변 사람들과 주변 교회들로서는 생각할 수 없었고 드러낼 수도 없었던 평가임에 분명하다. 부유한 도시에서 부유함을 누리며 교회가 누리게 된 부요를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알고 지내던 라오디게아 교회. 이웃 교회와 사회에 그들이 지닌 부요함으로 많은 일을 하고 있던 라오디게아 교회. 누가 차지도 덥지도 아니한 교회라고 말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신다. 누구의 표현이 옳은가 누구의 평가기준이 바른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보면 이에 대한 답은 쉽다. 그러나 주님이 평가하시기 전까지는 소경처럼 우리도 함께 우둔한 자가 아니었겠는가.

라오디게아 도시 사람들은 찬물이 주는 신선함과 뜨거운 온천수가 주는 치료효과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차지도 덥지도 아니한 미지근한 물을 마시려할 때 도저히 넘기지 못하고 내뱉을 수밖에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주님이 지금 라오디게아 교회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으며 내뱉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음을 말씀하신다. 주님은 그 곳 사람들이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던 미지근한 물과 교회를 비유하심으로, 물은 물이로되 전혀 도움이 되지 아니한 물처럼, 교회의 모습은 많은 것으로 넉넉하게 갖추었으되 전혀 교회로서의 참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교회를 미지근하다고 평가하신 것이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스스로를 생각할 때 주님의 생각하심과 너무도 달랐다. 그들은 스스로 부자라고 여겼고, 그 부요함으로 인해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가난한 사람, 가난한 교회를 많은 것으로 도왔을 것이다. 교회의 부를 어떻게 쓸 것인가에 많은 시간과 돈을 써야 했을 것이다. 교회의 행사는 소문이 날 정도로 짜임새 있게 화려하게 치루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그 교회가 곤고하다고, 가련하다고, 가난하다고, 눈이 멀었다고, 벌거벗었다고 지적하신다. 주님의 지적은 교회로서 받아들이기 너무 힘든 것임에 분명하다. 이 지적만 가지고 생각하게 되면 라오디게아 교회는 차라리 흩어져 버리는 편이 나은 교회로 보인다. 오늘날도 우리는 많은 라오디게아 교회들을 보고 있다. 그러면서 이에 대한 두 가지 반응을 본다. '우리도 빨리 저 교회 같아졌으면' 하는 것과 냉소적인 눈빛으로 '저런 교회는 썩었어' 하고 경멸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다르시다.

라오디게아의 모습이 외적으로 드러난 것들과는 달리 내적으로 형편 없었지만, 주 예수님은 교회가 살아날 길을 보여주시고 처방을 주신다.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고 하신다. 이렇게 주어진 주님의 처방전에서 우리는 교회가 가져야 할 관심과 기도의 내용을 발견하게 된다. 실제 생활에서 모든 것을 믿음으로 행할 것과, 삶의 모습에서 그리스도의 성품과 흔적이 드러나도록 하라는 것과, 무슨 일을 할 때에 영적인 분별력을 회복하라는 것이다.

주님은 계속해서 권면하시는데, 돈으로만 무슨 일을 하지 말고 직접 참여하여 땀을 흘려 수고하는 일에 열심을 내라고 하신다. 예를 들면 누군가를 도와주면서 그의 어려운 형편을 알려고도 하지 않고 별 관심도 없고 다만 우리가 누구누구를 얼마나 많이 도왔는지 자위하고 자랑하려 들지 말라는 것이다. 오히려 주님은 그렇게 살지 못한 그 동안의 생활을 회개하라고 촉구하신다.

끝으로 주님은 소망이 있는 약속을 주신다. 주님은 교회의 성도들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과 사귀어 살면서 주님의 뜻을 분별하여 행하는 삶을 살아가는데 승리한다면, 하늘의 부요함, 즉 지금의 부요와는 비교할 수 없는 부요함에 참예케 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교회의 부요는 세상의 부유와 달라야 한다. 세상의 부유한 자가 저지르는 죄악보다도 교회가 그 잘못된 부요함으로 저지르는 죄악은 더욱 무섭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든 경제적 가치를 흔들어 놓을 것이다. 노동의 숭고한 가치를 무너뜨릴 것이고, 상호신뢰의 기반을 깨뜨리고, 삶의 목적을 허무케 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성도들이 부를 구하기 전, 교회의 진정한 부요를 채워야 할 것이다. 모든 일을 믿음으로 행할 줄 아는 생활의 부요함과 그리스도의 성품과 그 흔적을 드러내는 생활의 부요함, 그리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분별할 줄 아는 영적인 안목이 가져다 주는 부요함을 말이다.

주님께서 오늘 미지근한 라오디게아 교회를 통해 주시는 말씀이 우리의 미지근함을 깨우며 하늘의 부요함에 참예토록 우리를 이끄시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이준행 목사 / 광주 초록빛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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