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고난의 의의2 (욥 42:1-6)

첨부 1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온통 하나님 자신의 영광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성도는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19:1)라고 하였습니다.
영감의 사도 바울은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롬11:33)라고 하였습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롬11:36)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우연이나 무의미가 자리를 잡을 수가 없습니다. 더욱이 이 세상에서 의인이 왜 고난을 당하는가 하는 문제는 그야말로 난제 중에 난제 같이 느껴집니다. 그것은 바로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나 살던」 동방 우스 땅의 큰 사람 욥의 경우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그는 날마다 온 가족의 성결을 위하여 번제(예배) 생활로 그 삶의 중심을 이루고 살던 자가 아닌가(욥1:8)
그러던 욥에게 죽음에 이르는 극한 고난의 태풍이 불어닥치고 말았습니다. 그 많은 재산과 종들이 절단이 나버렸습니다. 그 몸은 살았으나 죽은 송장과 방불하였습니다. 그로 인한 아내의 원망과 친구들의 조소와, 종들과 형제들과 여러 객들 그리고 동포들에게 조차 그는 혐오의 대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정말 죽음보다 더한 고통에 이르고 있던 욥이었습니다.
의인 욥의 고난은 우연이었을까 돌발적이었을까 무의미한 것이었을까 아닙니다. 우리는 욥의 고난에 의의를 성경에서 그 대답을 찾고 있는 중입니다.

Ⅰ. 그것은 절대하신 하나님의 주권 신앙을 체험시키기 위함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욥1:20-21).

하나님 자신의 자존적 영광, 그 영예로운 속성과 완전성, 그의 헤아릴 수 없는 지혜, 결코 거부당할 수 없는 그의 전능,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의 영광, 꺾일 수 없는 그의 정의, 도전받을 수 없는 그의 엄위하신 주권을 체험케 하는 고난이었습니다.
하나님 자신의 주권적 창조와 통치 그리고 섭리를 체험시키는 고난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소유주이시오, 우리의 주님이시오, 끝까지 우리의 신(信)망(望)애(愛)가 되시는 분임을 체험시키는 수단이 욥에게 임한 고난이었습니다. 결코 악인에게 임하는 형벌이 그리고 의인에게 임하는 궁극적 축복이, 침범할 수 없는 하나님 자신의 공의로운 주권적 계획임을 알게 해주는 고난이었습니다(욥1:20-21).

Ⅱ. 성화적(聖化的) 삶의 수단이었습니다.

욥기 42장 5-6절에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욥의 이러한 말은 그가 당했던 ‘고난의 의의’를 확실히 대답해주는 내용 중에 하나입니다. 「귀로 듣던 하나님을 눈으로 보았다」는 말은 부요하였을 때의 신앙 생활에서 보다 환난 중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더 실감있게 체험했다는 고난의 참된 뜻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고난은 욥의 신앙을 성장시킴에 필요한 성화적 수단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성화적(聖化的) 내용들이 무엇인가

1. 죽음의 실존에 대한 바른 이해였습니다.

욥은 환난을 당할 때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다 같이 경험하는 공감적인 지식인 것 같습니다. 이때 불신자들은 죽음을 우연으로 돌리고, 싫지마는 받아드립니다. 그리고 자살에 이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욥은 그의 죽음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고 믿었습니다. 결코 자신의 목숨은 자신에 의해서 끊어지거나 주장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손을 들어 자기의 생명을 끊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욥6:8, 9). 그래서 그는 죽는 것을 사모한다고 하였습니다(욥6:8). 그리고 그것을 기뻐하고, 위로받기를 바란다고 하였습니다(6:10). 욥기 13장 15절에도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욥의 심리는 염세적 사상이나, 자기 포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가 죽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아예 그 뜻에 순종하고 말겠다는 신앙고백입니다. 한 번 죽기로 작정된 마음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당해도, 그 마음은 늘 안정되어 있습니다(시57:7).
월터 랠리드(W. Releght)란 성도는 죽으면서 하는 말이 ‘죽음은 아프지만, 모든 병을 고치는 양약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불사의 몸을 덧입는 영화로운 부활의 몸을 내다보고 한 말입니다.
영국의 찬송 작가 테일러(T. R. Taylor)는 청년 시절에 죽었습니다. 그는 죽기 전에 ‘나는 길가는 나그네니…’라는 찬송을 작곡하고, 또 말하기를 ‘나는 용사와 같이 검을 손에 들고 죽노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약속된 주님의 말씀을 붙잡고 가는 것을 뜻함입니다.

2. 내세(天國) 소망의 신앙입니다.

욥은 극한 환난 중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뜻하신 계획대로 자기를 데려갈 것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니 기뻐하고 사모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세계, 곧 내세(天國)를 소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말하기를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믿겠다’(욥13:15)고 하였습니다. 욥기 19장 25-27절에도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급하구나」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육체 밖에서 살아 계신 그의 구속자를 볼 것이라는 확실한 내세 신앙을 가졌습니다.
내세 신앙의 체험은 죽음이라고 하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을 때, 더 확실해지고, 더 분명하게 직감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욥이 그에게 임한 죽음의 환난 속에서 그것을 기다린 것은 빨리 그 고통을 벗어나 주님을 만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영원을 사모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이런 경우를 두고 잠언 14장 32절은 「악인은 그 환난에 엎드러져도 의인은 그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3. 기도의 인내였습니다.

죽음에 이른 환난 앞에서 죽음을 실감한 욥은 기도밖에는 할 일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욥의 생각대로 하나님은 그를 빨리 데려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러 달째 곤고의 밤들이 계속된다고 몸부림쳤습니다. 밤이 오면 아침을 기다리고, 낮이 되면 밤을 기다린다고 하였습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숨쉬는 호흡이나, 잠자는 것까지도 마음대로 못하도록 자기를 괴롭히고 있다고 토로(吐露)하였습니다. 침 삼키는 것조차 자기 마음대로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육체뿐 아니라 마음이 아파서 견딜 수 없다고 부르짖었습니다(욥7:). 욥기 16장에서는 주께서 나를 시들게 하고, 곤고케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나를 꺾고, 다시 꺾고 용사같이 내게 달려드신다고 하였습니다(욥16:14). 그때 내 얼굴은 울음으로 붉었고, 내 눈꺼풀에는 죽음의 그늘이 있다고 하였습니다(욥16:16). 그때 「내 눈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린다」고 하였습니다(욥16:20). 그 눈물 속에 올리는 자신의 기도는 「정결하다」고 하였습니다(욥16:17). 그는 인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그 인내를 기도와 함께 감수한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5장 11절은 「욥의 인내」를 본받으라고 하였습니다.

4. 말씀의 은총입니다.

욥기 6장 10절에 「그러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위로를 받고 무정한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할 것은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지 아니하였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난의 태풍은 욥으로 하여금 하나님 당신의 말씀을 지키게 하는 은총의 방편이었습니다.
욥기 38장 1절부터 41장까지는 고난의 태풍 속에서 하나님이 욥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폭풍 가운데서 욥에게 당신의 주권적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그가 당하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서 지구를 창조하심, 바다를 통치하심, 새벽 별을 주장하심, 어둠의 세계를 주장하심, 기후변천을 주장하심, 별들의 움직임과 번개를 주장하심 그리고 구름과 비를 주장하심에 대한 메시지를 주었습니다(38장).
그리고 산 염소와 암사슴의 생육, 들 나귀의 거처, 들소의 성격, 타조의 어리석음, 말의 힘과 용기, 매와 독수리의 지혜를 주장하시는 하나님 자신을 알려주었습니다(욥39장)
하나님께서 악어를 길들임을 말씀하였습니다(욥41장). 하나님은 이 모든 것들에 대해서 네가 창조하고 관장할 수 있느냐고 질문하였습니다. 욥은 유구무언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욥은 창조의 능도 없었고, 통치와 섭리의 지혜도 없었기 때문입니다(욥39장). 사람은 그 어느 것 하나도 창조하거나 통지하거나 섭리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임을 알려주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욥을 고난의 태풍 가운데 두시고 위대하신 당신의 주권적 창조와 통치와 섭리를 교훈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욥은 고난 속에서 주의 말씀을 받는 순간입니다. 위대하신 주님의 말씀을 받고, 듣고, 깨닫고, 믿는 고도의 영적 성장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시편 성도는 고백하기를 ‘고난 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내가 고난을 통하여 주의 말씀을 깨닫고 지키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5. 종의 신분을 확인시켰습니다.

하나님이 욥에게 허락하신 환난의 태풍을 정돈하실 무렵입니다. 하나님은 욥을 괴롭혔던 세 친구에게 노하시면서 저들에게 욥을 다시 인식시켜주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내 종 욥」에게 너희가 말한 것들이 정당하지 않다고 하였습니다(욥42:7). 「내 종 욥이」 「내 종 욥의 말 같이…」라고 반복하고 있습니다(욥42:8).
하나님은 욥을 가리켜 「내 종 욥」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환난 전에도 사탄 앞에서 욥을 소개할 때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고 한바 있습니다(욥1:8).
그렇다면 그는 순경 중에도 「하나님의 종」이었고, 환난 중에도 「하나님의 종」이었고, 환난 후에도 「하나님의 종」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여호와의 종」이란 말은 하나님께서 모세의 최후를 설명할 때도 썼던 말입니다(신34:5).
이 말은 하나님이 그가 즐겨 쓰시는 사람들, 좋아하시는 사람들,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즐겨 쓰시는 일종의 애칭과도 같습니다. 저들이 얼마나 하나님 뜻 행하기를 즐거워하였는가를 보여줍니다. 욥은 환난을 통하여 그에게 다시 한번 빛나고 영예로운 이름이 확인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여호와의 종」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환난의 태풍을 가지고 욥을 만나러 오셨습니다. 욥은 죽음에 이르는 고난의 수렁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습니다. 맹목이 아닌 목적이었습니다. 무의미가 아닌 의미였습니다. 왜, 의인들에게 고난이 있는가를 보여주는 진리였습니다. 말하자면 고난의 의의(意義)를 알려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절대하신 하나님 주권 신앙을 체험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또한 그것은 성장하는 신앙, 곧 성화적 신앙을 위한 섭리적 환난이요, 고난이었습니다. 욥은 하나님이 주신 고난을 통하여 그 신앙이 성장하였습니다. 그는 고난 당하기 전에는 하나님을 귀로 듣기만 했는데,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을 눈으로 보는 고도의 영적 수준에까지 오르게된 것입니다.
그는 그 고난을 통해 ① ‘죽음’ 준비를 제대로 하게되었습니다. ② 죽음 후에 있는 내세 신앙이 더 뜨거워지고, 확실해졌습니다. ③ 하늘의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는 정결한 기도와 인내를 배양할 수 있었습니다. ④ 그 고난 속에서 꿀과 송이 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의 진미를 맛보게 되었습니다. ⑤ 그리고 고난 속에서 그가 「여호와의 종」인 자신의 영예로운 신분이 더 빛나게 되었음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고난은 하나님의 절대하신 주권 신학을 배우는 학교가 아닌가! 신앙의 성장을 맛보는 성화 신학의 요람지가 아닌가!
예수 십자가의 진리를 따라갔던 제자들(사도들)이 모두 순교에 이르지 않았던가 그 사도적 신앙을 계승한 초기 박해 300년 동안의 위대한 지도자 폴리갑(Polycarp), 익나티우스(Ignatius), 유스티노(Justin Martyr), 키프리안(Cyprian)이 모두 고난의 용사들이 아니었던가 초기 중세기 저 영국의 위클립(J. Wycliffe), 보헤미야의 허스(J. Hus)가 고난의 등불이 아니었던가 중세 개혁시대 루터(M. Luther), 칼빈(J. Calvin), 파렐(G. Farel), 베자(T. Beza), 요한 낙스(J. Knox)가 모두 다 고난의 별들이 아니었던가
이것이 바로 죽음을 통하여 생명이 나오고, 자기 희생을 통하여 영광의 결실을 보고 마는 고난 종교의 특색이 아닌가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