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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첫 번째 크리스마스 (눅 02: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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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저희 집 아이들은 크리스마스가 오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 벌써 오래 전부터, 도대체 왜 이렇게 크리스마스는 오지 않느냐고 한숨을 쉬곤 하는 것을 몇 번 들은 적이 있습니다. 물론 제 아이들이 기다리는 대상은 예수님이 아니라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입니다. 저희 집 아이들은 비교적 순진해서 아직 산타클로스를 믿고 있는 것 같습니다.

큰 아이가 요즘 들어서 무엇인가 의심을 하고 있는 것 같은 눈치가 보이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아직 아는지 모르는지 저로서는 분명한 확신이 서질 않습니다. 저희 집 사람은 아이들의 동심을 키워주기 위해 산타할아버지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별로 멋이 없는 사람이라서 그런 잘못된 지식은 최대한 빨리 계몽하여 깨우쳐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참고로 말씀을 드리면 저는 어렸을 때는 한번도 산타할아버지가 있다고 믿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가끔 산타할아버지가 진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말해도 저희 아이들이 못 알아듣는다는 것입니다. 사실 제가 아이들에게 산타할아버지의 실체에 대해서 가르쳐 주려는 진짜 이유는 다른데 있습니다. 저희는 매년 성탄절이 되면 한 아이 당 두 개씩 선물을 준비해야 합니다.

하나는 산타할아버지가 주는 것, 또 하나는 아빠 엄마가 주는 것입니다. 언젠가 한 개만 준비했더니 아이들이 물었습니다. 산타할아버지는 선물을 준비했는데, 아빠, 엄마는 선물을 어떻게 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과소비를 없애기 위해서라도 산타가 빨리 우리 아이들의 머리에서 사라져야겠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제 아내는 진저리를 칩니다. 세상에 저렇게 멋이 없는 사람이 또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드는 거겠지요. 그런데 저는 산타를 기다리는 아이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무엇인가 성탄절의 의미가 아이들에게 잘못 각인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쳐가곤 합니다.

요즘은 우리 나라도 성탄절이 되면 장식을 하는 등 축제 분위기에 젖어드는 것 같습니다. 교회보다 오히려 사회에서 먼저 크리스마스를 반기는 분위기입니다. 제가 생각할 때, 아마도 예수탄생일을 제일 기다리는 사람들은 백화점을 운영하는 분들인 것 같습니다. 아직 크리스마스가 멀었는데 장식을 시작해서 한껏 성탄절 분위기를 돋구곤 합니다.

미국에서 있을 때 매년 성탄절이 되면 집안밖에 트리를 비롯한 장식을 하고, 그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장식을 학교에서 골라서 상을 주곤 했습니다. 저희 학교는 신학교였기 때문에 아마 그랬던 것 같습니다. 저는 물론 애석하게도 한번도 상을 받은 적은 없습니다. 절기가 다가올 때마다 그 절기를 즐기는 미국 사람들의 그런 긍정적인 태도를 보면서, '나와는 참 많이 다르구나.' 라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11월 셋째 주에 있는 추수감사절이 끝나기가 무섭게 성탄절 준비를 시작합니다. 추수감사절 장식을 떼어내면서 거의 동시에 성탄절 장식을 시작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도 집안에 간단한 트리를 꾸미기는 했지만, 직접 그렇게 아름다운 장식을 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입장은 아니었고, 아이들과 함께 아름다운 장식을 한 동네에 차를 타고 구경을 가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나라에 비해서 기독교 문화가 더 깊이 뿌리를 내린 나라라서 그런지 사회전체가 온통 성탄절 분위기에 휩싸이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마치 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탄생을 반기고 환영하는 것 같은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저는 문득 문득 첫 번째 크리스마스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곤 합니다. 산타를 기다리는 저희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또한 온갖 장식으로 화려하게 수놓는 현대의 성탄절을 보면서 저는 1세기에 처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그 첫 번째 크리스마스는 과연 어떠했을까하는 궁금한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는 것은 복음서 가운데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뿐입니다.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도 담고 있지 않습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 누가복음에 있는 말씀으로 함께 성탄의 의미를 나누고자 합니다.

제가 작년 성탄절에 누가복음 2:1-7을 설교했었습니다. 오늘은 8-20절에 있는 말씀을 본문으로 성탄의 의미를 묵상하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매년 성탄절 설교도 무슨 책별 강해 설교 같이 같은 책만 이어서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준비를 하다보니 그렇게 바로 다음 구절에 이어서 준비를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1세기의 크리스마스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본문에 몇 가지 질문을 던져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오늘 우리 시대에 성탄절의 의미를 바르게 회복하려면 먼저 1세기의 성탄절을 정확히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먼저 본문에 질문을 던져서 그 시대 속으로 뛰어들어가 1세기의 크리스마스를 함께 경험하고자 합니다. 저와 함께 1세기의 크리스마스를 경험하기 원하는데 이 여행에 함께 동참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첫 번째 질문입니다.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던 1세기의 크리스마스는 어디에서 시작되었습니까

두 말할 것도 없이 첫 번째 성탄절은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렇다면 1세기의 팔레스타인은 어떤 곳이었습니까 당시 팔레스타인은 로마의 속국이었습니다. 누가복음 2:1에 나와 있는 것처럼 당시 황제는 아우구스투스였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정치인으로서는 아주 성공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통치기간동안 로마의 신민들은 큰 기대를 품었습니다.

로마의 신민들은 아우구스투스에게 최고의 국가를 이룰 것을 기대했고 요구했습니다. 사실 '복음' 혹은 '기쁜 소식'이라는 뜻의 그리이스어를 최초로 차용한 사람이 바로 아우구스투스였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이 말을 자신의 통치로 인해 이루어진 새로운 세계의 질서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했습니다. 로마 제국은 그를 신으로 선포하고 예배의식을 제정했습니다. 안정적이고 찬란하게 빛나던 그의 정부는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대다수의 신민들은 믿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의 개선이 필요 없는 최종적이고 완전한 정부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그 로마가 다스리는 영토인 팔레스타인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로마제국은 최고의 정부가 아니라 최악의 정부일 수도 있었습니다. 당시 로마는 헤롯을 내세워 팔레스타인을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헤롯은 자신의 통치 영역에 로마법을 강요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주 포악한 왕이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잘 알고 있는 사건 가운데 한가지는 그가 베들레헴 지역의 모든 두 살 이하의 어린이들을 학살한 사건입니다. 그것은 아주 극악무도한 테러였습니다. 그러나 헤롯에 대한 세속역사를 보면 그가 충분히 그럴만한 인물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헤롯은 정치적 격변기에 기가 막힌 줄타기를 통해서 유대의 왕이 된 사람입니다. 그는 로마 정국이 혼미한 틈을 타서 그 시대에 계속해서 줄을 대어가면서, 필요하면 줄을 바꾸어 가면서, 끝내는 줄타기에 성공해서 유대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는 수많은 정적들을 제거하면서 왕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는 왕이 된 이후에도 자신의 권좌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처형했습니다. 헤롯은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서 첫 부인 도리스를 죽이고, 당시 유대인들에게 인정받고 존경받는 가문이었던 하스모니안 왕가의 마리암네와 결혼했습니다.

이 때부터 그는 끝없는 처형행진을 계속합니다. 아내인 마리암네와 아저씨의 관계를 의심하여 아저씨를 죽였습니다. 얼마 후에 직전 왕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자신의 두 번째 아내인 마리암네와 장모까지 처형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마리암네의 두 아들인 아리스토불러스와 알렉산더를 죽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죽기 5일전에 첫 부인의 아들인 안티파테르를 죽였습니다.

자신의 죽음 직전에 죽인 것은 첫 부인의 아들만이 아니었습니다. 죄 없는 많은 백성들마저도 체포하여 자신이 죽는 날 함께 처형하라는 명령을 자신이 죽기 5일 전에 내렸습니다. 그래야 자신을 추모하는 분위기가 전국적으로 확산될 수 있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헤롯이 통치하는 기간동안은 처형이 자행되지 않은 날이 거의 없었습니다.

오죽하면 어떤 작가는 헤롯의 아들이 되는 것보다는 그의 돼지가 되는 편이 훨씬 더 안전하다.는 조롱하는 말을 나중에 남기기도 했습니다. 헬라어로 '돼지'라는 말과 '아들'이라는 말은 발음이 유사합니다. 그래서 비꼬기 위해 그러한 글을 남겼던 것입니다.

한 나라의 왕이 이런 지경일 때 일반 백성들의 삶이 얼마나 고단할지는 두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필립 얀시는 예수님이 태어날 때의 유대지역의 정치적 분위기를 스탈린 치하의 1930년대 러시아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로마는 찬란한 문명을 자랑하고 있었지만 저 바닥에 있는 힘없는 일반 백성들의 삶은 고단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상황에서 1세기에 저 유대 땅에 오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1장에 있는 마리아의 찬가에서는 이런 당시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51-53을 같이 읽겠습니다.

[51]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52]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53]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마리아는 자신의 몸에서 온 세상의 구주가 태어난다는 사실을 알고 감격하면서 이 찬송시를 지어서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 고백을 보면 당시 그녀의 고단한 삶을 엿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교만한 자를 흩으셨고 권세있는 자를 내리치셨고 부자를 공수로 돌려보내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동시에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배불리셨다고 찬양합니다.

자신이 처한 삶의 고통을 드러내면서 그 고통 속에서 자신을 건져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1세기에 예수님이 찾아가신 곳은 그렇게 황량한 곳이었습니다. 압제당하며 굶주린 백성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고난의 땅에 우리 주님께서 찾아가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시대에 우리 주님께서 가장 긴급하게 찾아가기를 원하는 곳은 어디이겠습니까 과연 우리 시대의 1세기 팔레스타인은 어디입니까 어쩌면 여전히 2000년 전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그곳은 팔레스타인일지도 모릅니다. 또 어쩌면 요즘 전쟁의 상처로 신음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일지도 모릅니다. 또 어쩌면 굶주림과 추위로 죽어가고 있는 저 동토의 땅 북한일지도 모릅니다. 우리 주님은 2000년 전에 바로 그런 곳에 우리 모두와 같이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친히 육신을 입고 찾아가신 것입니다.

이제 두 번째 질문으로 넘어갑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만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본문 8-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8]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9]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이 말씀에 보면 주의 사자가 영광가운데 목자들에게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주의 사자가 목자들에게 나타난 것의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살았던 목자의 지위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전통적인 견해입니다. 목자가 아주 천한 계층이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목자들은 성 안에서 사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들의 증언은 법정에서 인정받지도 못했습니다. 이 견해에 따르면 목자는 철저한 천민입니다.

두 번째 견해는,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위와 같은 전통적인 견해는 1세기 목자의 모습은 아니라고 보는 것입니다. 목자가 철저히 소외당한 천민이었던 것은 1세기가 아니라, 1세기 이후의 일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1세기의 목자는 지극히 평범한 계층이었다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있는 목자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가 이런 해석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저는 두 번째 견해가 더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느 견해를 따르든지 분명한 것은 당시 사회에서 목자는 결코 상류층이라고 볼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상류층의 사람들과 비교할 때 목자는 분명히 그 사회의 낮은 계층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제일 처음 만난 사람은 누가복음 2:1에 나오는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아니었습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헤롯왕도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바리새인이나 서기관같은 종교지도자들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제일 처음 만난 사람은 지극히 평범한, 아니 어쩌면 평범하다 못해 낮은 계층이라고 할 수 있는 목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님이 지금 이 땅에 오신다면 가장 먼저 찾아가실 사람들은 최소한 나와 같은 목사는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아마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 아니 그 보다도 오히려 소외된 사람들을 찾아가실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 북한에서 굶어죽은 부모 때문에 어느 날 갑자기 고아가 되어 버린 아이들, 그리고 이 땅에서도 미혼모에게 버림받고 고아원에 버려진 그 아이들을 가장 먼저 찾아가실 것입니다.

세 번째 질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굶주리고 압제받는 곳에서 평범하게 살고 있는 일반 백성들을 만나기 위해 어떤 모습으로 오셨습니까

누가복음 2:4에 보면 요셉이 다윗의 족속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11절에 보면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구주가 나셨다고 기록합니다. 예수님은 다윗왕의 후손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동네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이상적인 왕으로 생각하는 다윗의 후손으로 이 땅에 왔다는 것은 그 분이 이 땅에 왕으로, 구원의 주 메시아로 오셨다는 것을 웅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후손인 그 왕이 여관도 없이 말구유에서 태어났습니다. 누가복음 2장은 세 차례에 걸쳐 예수님이 말구유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7절에서, 12절에서, 그리고 16절에서 세 번이나 반복하여 예수님이 말의 밥그릇인 구유에 뉘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역설입니다. 역설 중에서도 엄청난 역설입니다. 그런데 이 엄청난 역설이 깊은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의 밥그릇인 말구유에 오셔서 가장 낮고 천한 자에게도 생명의 떡으로 그리고 생명의 밥으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가난하고 비참한 모습으로 오신 것은 그 분이 어떤 왕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왕과 같이 지배하고 다스리는 자가 아니라 백성들의 눈에 고인 눈물과 한숨을 거두어주는 진정한 목자요, 진정한 왕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분의 탄생은 10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여주는 목자들의 태도는 우리에게 귀한 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목자들의 행동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 집니다.
1) 그들은 먼저 영광가운데 주의 사자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주의 사자로부터 다윗의 동네에 구주가 태어났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얼마나 감격스러웠겠습니까 그 감격은 천군 천사의 찬송으로 절정에 달합니다. 우리 같이 13-14절을 읽겠습니다.

[13]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14]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천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 가운데 가장 신비로운 존재로서 하늘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천사들이 나타나서 아기 예수의 탄생이 하나님의 계획에 의한 것임을 확증하는 찬송을 부릅니다.

15절에 보면 그들은 기쁨가운데 단숨에 베들레헴까지 달려갑니다. 이 목자들은 비록 그 사회에서는 크게 주목받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알지 못하는, 심지어 헤롯왕이나 황제인 아우구스투스조차 알지 못하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제일 먼저 듣는 놀라운 축복을 누렸습니다.

2) 그런데 목자들의 행동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16-1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16]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17]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고하니

목자들은 자신들이 들었던 기쁨의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그들은 그 감격을 직접 경험하고 마리아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과 나누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성탄의 기쁨을 누리는 자들입니다. 저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이 이 넓은 우주의 점 하나와 같은 지구에 오시고, 그 중에 점 하나와 같은 내게 찾아오셔서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이 땅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영생의 소망을 누리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첫 번째 크리스마스때 목자들이 했던 일과 같은 것이어야 합니다. 목자들이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듣고 단숨에 달려가서 그 소식을 전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그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목자들은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왕궁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성전으로 가지도 않았습니다. 시장으로 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이 달려간 곳은 말구유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낮은 자리로 오셨으므로 그들도 역시 낮은 자리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왕궁이나 성전이 아니라 말구유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만나려면 말구유로 가야 합니다.

오늘 이 시대에는 크리스마스를 맞기 위해 말구유로 가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셔서 겸손해지셨지만 우리는 높아지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며 삽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볼 수 있는 1세기의 크리스마스는 서로가 높아지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며 나팔을 불어대는 우리 시대의 크리스마스에 강력하게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나팔을 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천사들이 할 일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나팔을 부는 것이 아니라 말구유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구유를 향해 가고, 그때 하나님의 천사는 우리에게 나팔을 불어줍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입으로 직접 나팔을 불고 싶어합니다.

성육신하신 주님을 만나기를 원하십니까 말씀으로 듣는 것뿐만 아니라 성육신하신 주님을 눈으로 보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말구유로 가야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은 말구유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시대의 말구유는 과연 어디입니까 우리는 어디로 가야 말구유에 계신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까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는 과연 어디로 가서 말구유에 계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이 세상의 구세주로 오셨음을 긴급하게 전해야 할 곳은 과연 어디입니까 우리가 진정으로 말구유로 가서 겸손히 자신을 낮추신 주님을 만나기 원한다면, 우리도 역시 오늘 이 시대에도 여전히 낮은 곳으로 내려가야만 합니다.

그 곳은 이 땅에서 여전히 소외되어 있는 고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미혼모에게서 태어나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야 할 시기에 부모의 얼굴조차 모르고 버려진 아이들일 수 있습니다. 단지 육체의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이 사회로부터, 그리고 심지어 교회로부터도 격리당하고 외면당하고 있는 수많은 장애인들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멀리 팔레스타인이나 아프가니스탄에서 정치인들의 싸움 사이에서 희생양이 되어 버린 불쌍한 백성들일 수도 있습니다. 또 우리의 사랑하는 동족인 북한 사람들, 그 중에서도 특별히 부모를 잃고 추위와 배고픔으로 신음하고 있는 북한 땅의 고아들일 수 있습니다.

필립 얀시는 자신의 유명한 책, 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라는 책에서 헨리 나우엔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기록합니다. 헨리 나우엔은 하버드 대학에서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던 천주교 신부였습니다. 그런데 한창 그 일을 하다가 교수직을 사퇴하고 토론토 근처에 있는 데이 브래익이라는 공동체로 갔습니다. 그 이유는 에덤이라고 하는 한 청년과의 우정 때문입니다. 헨리 나우엔은 자신의 책에서 에덤이라는 청년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에덤을 25세의 젊은이로, 말할 줄도 모르고 혼자서는 옷을 입을 줄도 벗을 줄도 모른다. 혼자 걷지도 못하고 먹을 때도 남의 도움이 있어야만 먹을 수 있다. 웃거나 울 줄도 모른다. 아주 가끔씩 눈을 마주치는 경우가 있을 뿐이다. 에덤의 등은 휘어있다. 팔다리를 놀리는 것도 이상하다. 게다가 간질이 심해서 발작을 일으키지 않는 날이 얼마 되지 않는다. 어떤 때는 난데없이 몸이 뻣뻣해져 소리지르거나 계속 신음 소리를 내기도 한다. 더러 굵은 눈물 한줄기가 뺨을 타고 흐르는 것을 보기도 한다. 에덤을 깨워 약을 먹이고, 목욕탕에 데려가 씻기고, 면도시키고, 이빨을 닦게하고, 또 부엌으로 데려가 아침을 먹인 다음, 휠체어에 태워 그가 하루종일 물리치료를 받으며 시간을 보내는 장소까지 데려다 주는데 꼬박 한시간 반이 걸린다.'

필립 얀시는 토론토를 방문해서 헨리 나우엔이 에덤을 데리고 위에서 말한 과정을 실제로 수행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참 그것을 지켜보다가 필립 얀시의 마음에 헨리 나우엔이 과연 자기에게 주신 인생의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고있는 것인가, 최선으로 쓰고 있는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헨리 나우엔은 당시까지 아주 유명한 교수였습니다. 학문적인 업적이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큰 영향을 미치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에덤이라는 한 청년을 돌보는 따위의 단순 노동은 누군가 다른 사람이 해줄 수 있지 않을까 그럴 때 헨리 나우엔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얀시는 조심스럽게 나우엔에게 그런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나우엔은 그때 얀시가 오해하고 있음을 일깨워 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아무 것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 우정에서 득을 보고 있는 것은 에덤이 아니라 바로 저입니다. 그리고 나서 나우엔은 에덤과의 관계로 어떤 이득을 보고 있는 지를 열거했습니다. 에덤과 시간을 보내고 있노라면 깊은 내적인 평화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내적인 평화에 비하면 그 동안 해왔던 다른 활동들, 고도의 정신적인 그런 노동들은 너무나 지루하고 피상적인 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이 어린아이와 다를 바 없는 사람 옆에 앉아 있노라면, 헨리 나우엔 자신이 학문의 세계 및 목회 사역에서 그 동안 얼마나 성공과 경쟁에 집착하며 살았는지를 깨닫게 된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면서 나우엔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 인간이 되는 길은 우리의 정신이 아니라 가슴이며,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에 있습니다.

진정으로 우리가 말구유에 오신 주님을 만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오늘도 유대 땅 베들레헴에 있는 그 곳으로, 낮은 곳으로, 우리 주님께서 오셨던 곳으로 가야만 합니다. 왕궁에서는 그 분을 만날 수 없습니다. 화려한 성전에서는 그 분을 만날 수 없습니다. 진정으로 성육신하신 주님을 만나기 원하신다면 오늘도 우리는 여전히 베들레헴의 말구유로 내려가야 합니다.

그 곳에 백성들의 고난에 함께 동참하기 위해 자신을 낮추신 우리 주님께서 계십니다. 그 곳에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기다리는 우리의 이웃들이 있습니다. 그 곳에 가서 그들과 함께 자리를 펼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 가운데 살아계신 성육신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오늘 저녁에 우리 교회는 카이스트 강당에서 특별한 성탄행사를 갖습니다. 우리 성도들끼리 보냈던 예년의 성탄절과 다르게 올해는 우리가 지난 일년동안 함께 사랑하며 섬겼던 분들을 초청했습니다. 약 200명의 형제, 자매님들을 초청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분들과 함께 성탄절을 보내기를 원합니다. 비록 작은 것이지만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나누기 위해 마련한 자리입니다. 이것은 첫 번째 크리스마스로 돌아가서 그것을 회복하기 위한 우리의 작은 걸음입니다.

또 선교위원회에서는 '북한 어린이들에게 담요 보내기' 운동을 합니다. 한 장에 $6이라고 들었습니다. 우리가 $6을 헌금하면 북한의 한 어린이가 이 추운 겨울철에 얼어죽지 않고 생존할 수 있습니다. 북한에서 사역을 하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느 날 아침에 한 겨울에 문을 열고 집에 들어가 보면 그곳에서 여러 명의 아이들이 집이 없어 돌아다니다가, 헌 낡은 집에서 잠을 자다가 한꺼번에 얼어죽어 있는 것을 수 없이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선교위원회가 중심이 되어 이 운동을 시작합니다. 육신의 생명을 연장하므로 영생의 소식을 들을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 그런 사랑의 나눔을 통해서 저들이 하나님이 계심을, 하나님이 지금도 살아 계심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선물을 받기 위해 눈이 빠지라고 성탄절을 기다리는 저희 아이들에게도 이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설명을 했습니다.

정인아, 지인아! 성탄절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 모두에게 기쁨을 주신 날이니, 너희들도 선물을 받기만 하지 말고 누군가에게 선물을 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큰 아이가 아빠, 엄마 선물 준비했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아빠, 엄마 선물도 감사하지만, 아빠가 생각할 때는 북한의 어린이들이 담요가 없어서 너무 춥다고 하니 담요를 보내주면 좋겠는데 아빠도 물론 보내겠지만 너희들도 담요를 보낼 수 있으면 좋겠다. 제가 그렇게 설명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작은 아이가 얼른 대답했습니다. 나는 3,000원 있어! 그런데 형아는 1,000원밖에 없어! 아마 누가 용돈을 주었는데, 작은 아이는 덜 쓰고 큰 아이는 많이 쓴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부탁을 했습니다. 그러면 너희들이 둘이 힘을 합해서 담요 한 장 값을 모아서 북한의 어린이들에게 보낼 수 있으면 좋겠다. 엄마의 일을 조금씩 도와주고 돈을 받든지 용돈을 아껴서 하든지 너희 둘이 상의해서 담요 한 장만 북한의 어린이에게 보내면 아마 우리 예수님께서 기뻐하실 것 같다. 그랬더니 둘이 해 보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6살 먹은 막내와 9살 먹은 큰 아이가 과연 돈을 모아서 담요 한 장이라고 보낼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을 통해서 올 성탄절에 제 아이들에게 성탄 선물 가운데에는 최고의 선물을 주고 싶습니다.

성탄절이 단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에게 선물을 받기만 하는 신나는 날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참 평화를 주러 오신 예수님을 기억하고 그 예수님의 사랑을 소외되고 그늘진 곳에 전하는 절기라는 것을 제 아이들에게 가르쳐 주고 싶습니다.

미국 사람들이 자동차에 부착하고 다니는 글귀 가운데서, Reason for the Season이라는 글귀가 있습니다. 이는 절기의 이유, 절기의 의미라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이 절기를 주신 의미를 생각해 보라는 뜻입니다. 성탄절의 진정한 의미를 생각해 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의미를 깨달았다면 예수님을 본받아 말구유로 내려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비록 작은 것이지만 제 아이들이 그런 마음을 이해할 때 저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이 땅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잘 자라준다면 그런 소외된 곳에 가서 말구유에 누이신 예수님을 만나고 일생동안 그 사랑 안에 거하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럴 때 나팔을 부는 자가 아니라 말구유에 찾아가는 아이들이 될 것이라고 저는 굳게 믿습니다. 그런 작은 실천으로 제 아이들도 성탄의 의미를 바로 알고, 북한의 어린 아이들도 성탄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그런 성 축제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랑의 실천으로 우리 새누리 가족들이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참 평화와 참 기쁨을 누리는 성탄절을 경험하게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온통 화려한 축제로서의 성탄에 빠져 있는 이 때에, 우리 새누리 가족들은 첫 번째 크리스마스를 회복하여 유대 땅 베들레헴에 있는 말구유로 가서 진정으로 낮은 자를 건지시기 위해 우리 가운데 육신을 입고 오신 살아계신 예수님,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뜻 깊은 성탄절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같이 낮은 자들을 건져 주시고 구원해 주신 그 은혜를 생각할 때마다 진심으로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립니다. 오늘 이 시대에, 참으로 성탄의 의미가 퇴색해가고 상업주의에 물들어 가는 이 시대에 저희들이 1 세기의 크리스마스, 그 첫 번째 크리스마스를 회복하고 싶습니다. 참으로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던 그 모습을 본받고 목자들이 말구유로 찾아가서 예수님을 만났던 것처럼 우리도 말구유로 가서 예수님을 만나기를 소원합니다. 참으로 이 땅에 소외된 곳, 그늘진 곳, 주님께서 그곳에 계심을 알고 우리가 그곳에 가서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고 경험하기를 원합니다. 올 크리스마스가 그런 놀랍고 축복된 크리스마스가 되게 해주시옵소서. 참 평화의 주님을 경험하는 그런 크리스마스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특별히 저희에게 주신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성탄의 의미를 바로 알아서 그들의 인생의 가치관을 바르게 정립하고 살 수 있도록 주님 인도하여 주시고 함께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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