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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 리이다 (눅 0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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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고인이 되신 한경직 목사님의 오래된 수필집에 갈릴리 바다와 사해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흔히 성지라고 불리 우는 팔레스타인에는 작은 바다가 있다. 하나는 갈릴리 바다요 또 하나는 ‘사해’, 곧 죽은 바다이다. 북편에 있는 갈릴리 바다는 물도 맑고 물고기도 많아 언제나 어부와 어선을 볼 수 있고 또 주위에는 푸른 수풀이 둘러있어 경치도 아름답다.
그런데 조금남쪽에 있는 사해는 그와 정반대이다. 물이 탁하고 물고기나 패류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고 따라서 어부나 어선도 볼 수 없고 그 주위는 황막하다. 두 바다가 다같이 북편에서 흘러내리는 요단강 물을 받는데 왜 그렇게 차이가 있을까 그 이유는 분명하다. 갈릴리 바다는 북편으로 들어오는 요단강 물을 받는 동시에 남편으로는 도로 그 물을 흘러내리게 하여 요단강의 주류가 된다. 반대로 사해는 요단강 물을 받기 만하고 흘러나가는 곳이 없다. 다만 뜨거운 태양광선에 증발이 될 뿐이다. 그러므로 그물은 너무 짜서 물고기들이 살지 못한다.
이 두 바다는 우리 인간에게 큰 교훈 한 가지를 주는 줄 생각한다. 곧 인간이 한편으로 받을 뿐만 아니라 또한 줄 줄을 알아야 나의 삶 자체가 윤기 있고 풍부하여진다. 그 반면에 우리인간이 남에게 받을 줄만 알고 줄 줄을 모르면 나의 삶 자체가 부패하여지고 냄새가 나기 마련이다.
이것은 학문도 그러하고 경제도 그러하고 문화도 그러하다. 어느 세대나 역사적으로 또는 외부로부터 많은 문화의 혜택을 받기만 해서는 안 된다. 줄줄도 알아야 한다.
주님은 말씀하셨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저는 갈릴리 바다의 아름다운 모습을 사해와 비교하여 보며 갈릴리 바다 가에서 말씀하고 계시는 주님을 그려봅니다.

1.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는 시몬 (눅5:1-6)1) 본문설명
누가복음 5:1-6은 예수님이 베드로를 비롯하여 첫 번째로 여러 제자들을 부르시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이 말씀은 마 4:18-25과 막 1:16-20에도 나옵니다. 예수님이 게네사렛 호숫가에서 말씀하실 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밀려왔습니다. 그런데 거기 배 두 척이 대어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어부들이 고기를 잡는 것을 끝마치고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배 가운데 하나인 시몬의 배에 오르셨습니다. 그리고 시몬에게 배를 육지에서 조금 떼어놓으라고 하신 후에 배에 앉으셔서 무리를 가르치셨습니다.
게네사렛호수는 수금처럼 생겼다고 긴네렛 호수라고도 하며 갈릴리 호수라고도 하며 로마식으로는 디베랴 바다라고도 합니다. 때로는 호수라고도하며 바다라고도 합니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후 예수님은 나사렛에 있는 가족과 떨어져 가버나움을 자기의 고향으로 받아들이고 그곳에 머물렀습니다. 나사렛지역과 가버나움은 그리 멀지는 않지만 가버나움은 갈릴리바다와 더 가깝습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갈릴리의 모든 에피소드는 거의 예외 없이 갈릴리바다와 관련되어있다고 보여집니다. 수난 설화 이전의 복음서 기사의 대부분은 갈릴리 바다를 배경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주로 호수 북쪽 끝에서 설교했습니다. 여기 호숫가에서 예수님은 어부 중에서 그의 첫 제자들을 얻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선생님, 우리가 밤새도록 애를 썼으나 아무 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그물을 내려보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어부들이 밤새도록 헛수고하고 허탈한 상태에 빠졌을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며 무리한 명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깊은 곳은 상식적으로는 고기를 잡기가 매우 힘든 곳이기 때문입니다. 또 이미 해가 떠오른 뒤에 깊은 물에 그물을 던져 많은 고기를 잡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밤에 고기가 잘 잡히는 것이므로 시간적으로 불합리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이렇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시몬은 예수님을 가리켜 ‘선생’이라고 했는데 이 칭호는 존경하는 “명령권자”를 나타내는 것으로 랍비라는 의미와는 틀립니다. 즉 복종의 태도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또 이상하게 고기잡이에는 일가견이 있는 베드로가 자신의 경험과 재능과 힘을 부인하고, 고기 잡는 것에는 전혀 모르시는 예수님께 복종하여 그물을 던졌습니다. 여기에서 왜 베드로는 예수님을 선생이라고 부르며 예수님의 말씀에 복종하였을까하는 것이 의심이 됩니다. 그런데 잘 살펴보면 그 이유를 발견할 수 가 있습니다. 1절에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말씀을 가르치셨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배에 오르셔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을 때에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몰려온 것을 베드로는 보았고 또 예수님의 말씀을 자기 배에서 군중들과 같이 들었습니다. 말씀을 들음으로서 사람들은 변화를 받습니다. 말씀을 들음으로서 믿음이 생기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말씀을 전하는 예수님을 보고 베드로는 예수님이 보통 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다른 세상의 서기관이나 제사장들과도 다른 분이시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 당시에 인기가 있었던. 세례요한이 와도 다른 분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많은 은혜를 받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세상의 다른 사람과는 다른 권위가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복종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이미 느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2)성경적 연결: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는 구절은 예수님의 능력을 보여주시는 것이고 또한 은혜의 깊은 곳으로 가라는 에스겔 47장5절의 말씀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은혜는 깊은 곳에 갈수록 커지며 우리를 만족시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생수가 흘러내리는 곳마다 소성 함을 받는 은혜가 넘치게 됩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친다는 말씀을 우리는 믿습니다. 또한 이것은 이방세계로 가라는 명령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전하는 것은 단지 얕은 물가가 아닌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3)적용
우리의 생각과, 체험적인 판단이, 능력이 주님의 명령과 대치되었을 때 우리는 어떤 것을 선택하는지도 한번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안다고 하나 실은 잘 모릅니다.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해를 하지만 이를 삶에 잘 적용을 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배우기에 열심을 다하여야 하겠습니다. 기적을 매일 매일 접하고 살아도 우리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말씀이 없으므로 우리는 기갈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알아야 제자가 되는 기본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2. 죄인임을 고백하는 시몬(6절-9절)1)본문설명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힘입어 그물을 내립니다. 그리한즉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와서 고기를 배에 가득히 채웠습니다. 배는 가라앉게 될 정도가 되었습니다. 인간의 모든 상식을 뒤엎고, 예수님의 말씀이 기적을 낳았습니다. 이러한 광경을 보고 베드로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주님 제게서 떠나주십시오.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굴복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두려워하며 자신의 부족함을 느꼈습니다. ‘주여’라는 말은 예수에 대한 호칭으로, 누가복음에서 21회나 사용되었습니다. 베드로가 5절에서 예수님을 ‘선생이여’라고 부른 것과 비교하여 보면 예수에 대한 그의 생각이 크게 변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권능을 깨달은 자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때 자신의 죄가 많음과 무능을 인식하게 됩니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 말은 예수님의 위대한 능력을 통해서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으며 베드로는 자신이 무기력한 죄인에 불과함을 깨달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발견하기 전에는 참 자아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2)성경적 연결
구약성경에서도 하나님이 임재 하셨을 때 그 앞에서 자신의 자아를 발견한 사람에 대한 기사가 여러 번 나옵니다. 출애굽기 20:19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나타나심을 보고 떨면서 멀리에서 서서 모세에게 말하기를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옵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옵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 이다.라는 말씀을 우리는 비교해볼 때에 베드로의 행동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사기 6:22에서도 기드온은 자기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음을 알고는 죽을까 걱정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욥기 42장 5절,6절에서 욥은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라고 하는 것을 볼 수 가있습니다. 이사야도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자기의 죄를 깨달았습니다(이사야 6장). 하나님의 영광을 느끼는 자는 자기의 죄를 느낍니다.
3) 적용
아직도 예수님를 단지 인류의 위대한 선생님 정도로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직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느끼지 못한 사람인 것입니다. 자기의 죄를 깨닫지 못한 자 입니다. 교회에서도 이러한 많은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실존적 무신론자들이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말로는 주님, 주님 하면서도 막상 주님을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지 못하는 사람들도 실존적 무신론자가 아닐 런 지요 나도 모르게 실존적 무신론자가 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자기의 경험과 지식에 맞지 않더라도 해야합니다. 6절의 첫마디 그리한즉 이라는 단어는 굉장히 중요한말 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한즉 모든 결과는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는 말입니다. 이런 모습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철저한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칼빈은 “인간이 하나님을 알 때 자신의 모습을 진정으로 알게되며 죄인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에 대하여 알아야만 하겠습니다. 또 아는 것만이 아니라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자기가 죄인임을 고백하는 자만이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3.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은 시몬과 제자들 (10절, 11절)1)본문설명
예수님은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베드로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예수님은 그를 제자로 부르고, 그가 새로운 삶, 곧 물고기 대신 사람을 취하는 삶을 살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에서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부터는 생명을 나눠주는 삶을 살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말씀은 사도행전의 베드로의 전도사역이 뻗어나가 이방인 고넬료에게 증거 하는 데까지 이르는 과정까지 예시한다고 볼 수 있다. 시작될 새로운 삶의 단계를 서술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만나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자신의 이전의 삶을 청산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자신의 부족했던 과거의 삶에서 돌이켜 새로운 삶의 차원과 목적에 따라 살기로 결심하는 것입니다. 제자의 길은 험하며, 때로는 불확실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고기가 풍성하게 잡혔듯이, 제자의 앞길에는 풍요롭고 영광스러운 미래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2) 성경적 연결
빌립보서 3장 6절에서 14절까지를 보면 사도 바울을 통하여 제자의 모습을 잘 볼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열심히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였으나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신에 유익하던 것을 해로 여기고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한 것으로 알았고 예수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겼다고 했습니다.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상을 위하여 좇아간다고 했습니다. 디모데후서 2장 3절, 4절에서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라고 했습니다. 또 디모데후서 3장 12절에서는 무릇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라고 했습니다. 디모데후서 6절에서 8절까지에서 사도 바울은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네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 에게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어떠한 분인가를 정확히 알고, 목표만 뚜렷하면 우리는 군사와 같이 자기자신의 삶을 버릴 수 있습니다.
3) 적용
정말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천년 만년 살 것도 아님을 깨닫는 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렇게 힘들여가면서 매달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금으로는 예수님의 제자로 살려고 하면 무엇인가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분은 예수님과 함께 하는 특권이 얼마나 좋은지를 알아야하며 얼마나 보람이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가운데 우리는 적극적인 포기를 할 수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뜻을 깨닫게 되면 다른 모든 것을 자발적으로 버리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남은 햇수가 얼마 되지 않는 다는 것을 안다면 어떠한 삶을 살겠습니까 하루하루가 정말로 귀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남은 날이 얼마 안 남았다면 이 세상에서 부정을 저지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 일에는 관계를 갖지 않을 것입니다. 오로지 주님의 제자의 삶에 관심을 갖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전파하며 삶을 주님께 드릴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줄려고 할 것입니다. 훌륭한 제자는 선생님이 하는 그대로 하기 때문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주님의 제자로 택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주님께서 하라고 명령한대로 하기만 한다면 본문에서 있는 것처럼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을 인하여 놀라고 놀랐음이라.”라는 기적이 우리에게도 일어날 것임이 틀림없다고 믿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주님의 제자로서의 삶의 모습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하나님말씀을 계속하여 묵상하는 가운데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또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는 믿음도 가질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놀라고 놀라운 삶이 여러분의 삶에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복종하며 감사하는 삶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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