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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직 성령의 열매는 (갈 05: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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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성령강림주일 입니다.
특별히 초대교회의 성령강림을 기념하고 감사하면서 드리는 예배입니다. 이날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50일째 되는 날이고, 승천하신 후 열흘째 되는 날입니다.
이날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전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그대로 성령님께서 강림하신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날밤에 모든 말씀으로 제자들을 위로하시고 부탁하시면서 예수님 대신에 성령님께서 오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요14:18절에 보면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요16:7절에 “내가....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무슨 뜻입니까 내가 장차 너희를 떠나지만 너희로하여금 고아와같이 내버려두지 아니하고 내가 가면 반드시 보혜사 성령을 너희에게 보내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바로 그날이 오순절 날인데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고 했습니다.
사모하는 자들에게 주시겠다는 약속대로 성령님께서 강림하시는 그날에 그들은 모두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다시말하면 그들은 모두가 전적으로 성령의 다스림을 받게 되었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전에는 자신이 살아서 자기의 고집대로 육신의 정욕을 따라 살았지만 이제는 자신은 온저히 죽어지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서 살 수있는 능력을 받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내려오는 말에 ‘사람이면 사람이냐 사람답게 살아야 사람이지’라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다니면 다 성도냐 성도답게 살아야 성도이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성도답게 살기위해서는 내 힘으로 안됩니다. 수양이나 노력으로도 안됩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예).과격한 성격 때문에 10년동안 같이 살던 부부가 별거하게 되었습니다. 이 별거 생활 중에 남편이 예수를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중생하여 새 마음으로 아내를 찾아가 다시 시작하자고 간청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10년을 속고 또 속았기에 이제 믿지 않았습니다. 답답한 남편이 그 교회 목사님에게 찾아가서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그 부인을 만나 10년을 속았지만 이제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속아보라고 사정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전과는 달리 예수를 믿고 새 사람이 되었으니 한번만 더 시도해 보라고 권했습니다.
그러나 그 부인은 완강했습니다. 자기가 그동안 온갖 방법과 정성을 다 들였어도 못고쳤는데, 예수가 어떤 분인지 모르지만 그 분을 믿는다고 달라질 수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옆에서 거들기를, 이왕 속았으니 또 속는 셈치고 한 달만 계약조건으로 살아보는게 어떠냐고 해서 다시 만나 재결합하였는데, 이제는 잘 살고 있답니다. 그분이 그 교회 교회 집사님까지 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변화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흔히 어머니들이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자식은 내가 겉을 낳았지 속까지 낳았겠느냐고요. 어머니는 겉 모양은 단장시켜 줄 수가 있고 심지어는 높은 학력까지 공부를 시킬 수도 있지만 그러나 사람이 되고 안되고는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내가 정성을 들이고 사랑한다고 남편이 바꾸어질 것 같습니까 사람되기는 힘든 것입니다.
사람은 무엇을 때려 부수는 재주와 파괴하는 굉장한 능력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살리고 변화시키는 데는 재주가 없는 것 같습니다. 요새 심리학 박사도 많고, 교육학 박사도 많아서 열심히, 바로 가르치고 많이 배우느라고 야단인데, 세상은 어찌된 셈인지 점점 더 어려워만 갑니다. 교육으로 안되는 모양입니다.
‘Complain Form Personality'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불평형의 인간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이 불평형은 자기가 100만원 있었으면 하고 불평을 하는데 막상 100만원이 채워지면 또 만족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더 큰 불평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결국 불평하는 사람은 어디갔다 놓아도 불평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즉, 불평형의 성격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환경이 그 사람을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믿지 않습니다.
가난할 때 악한 사람이, 부하다고 선해지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오히려 더 악해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무식할 때 인간성이 잘못 된 사람이 지식이 많아졌다고 해서 사람이 다시 될 것 같습니까 박사 학위를 열 개 가졌어도 사람이되는 것과 지식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어느 환경이라도 안 될 사람은 안됩니다.
속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이지, 사람들의 어떤 재주로는 변화시킬 수가 없습니다.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는 우리가 다 경혐하는 바입니다. 그러므로 남의 이야기 할 것 없습니다. 나 자신도 변화하기기 이렇게 힘드니 말입니다. 내 의지로, 내 능력으로, 내 지혜로 불가능한 것임을 성경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그는 원래 갈릴리 어부로서 제자로 발탁되어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녔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기거하고, 말씀을 들으며, 모름지기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들을 샅샅이 다 보았습니다. 바다를 고요하게 하신 일, 귀신을 내어 쫓는 일, 병자를 고치는 일, 5천명을 먹이신 일, 죽은 자를 살리신 것등....3년동안 그저 감탄할 일 뿐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아마 베드로는 시간 시간 깜짝 놀라며 감격하여 발이 땅에 닿는지 뜨는지도 모르게 신이 나서 예수님 뒤를 따라 다녔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베드로를 위시해서 그 제자들은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베드로였습니다.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하는 초라한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변화된 것이 없었습니다. 그 다음 예수님의 부활을 보았습니다.
같이 기뻐하고 같이 식사를 했습니다. 희한하고 굉장한 사건을 만났는데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모름지기 이러한 생각을 하였으리라 짐작을 해 봅니다. ‘예수님, 저를 이제 찾지 마세요. 저같은 인간을 제자로 삼았다가는 예수님 망신입니다. 저는 이제 사양하고 갈릴리 바다로 갑니다.’ 그리고 옛 직업으로 돌아갔던 베드로입니다.
그리고보면 예수님의 변화산의 일, 예수의 부활 사건도 베드로와는 무관했습니다. 배워도 소용이 없고, 알아도 소용이 없고, 깨달아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여전히 베드로였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므로 말미암아 이제 비로소 새 사람이 되고 부활 사건의 의미가 달라지고 예수님의 교훈과 말씀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기억되며 새로운 의미로 저 깊은 곳에서 권능으로 역사하게 됩니다. 여기서 베드로가 새 베드로가 되고 복음을 위해 일생을 바치게 됩니다. 결정적인 것은 성령의 강림이었습니다. 이 귀중한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부활절이 없는 오순절은 추상적인 감격에 끝납니다. 오순절이 없는 부활절은 역사적 사실과 객관적 진리로 남을 뿐입니다. 이것으로 변화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평생 예수를 따르고 성경 66권을 몽땅 외운다고 해도 그것으로 사람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 말씀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그리스도의 사건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이 역사적인 사건이 내게 다가와서 신앙 사건으로 바꾸어지기 전에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역사를 배웁니다. 그 역사와 오늘 나의 삶과 무슨 관꼐가 있습니까 심지어 잘 알고 잘 가르칩니다. 그러나 나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미 주께서 하신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이제 내게 주신 말씀으로 부딪치고, 그 사건이 내 사건으로, 부활 사건이 내 생명의 사건으로 살아나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고백합니다. 그것이 성령의 능력입니다. 오늘 여기서 나의 주로 고백하게 될 때에 그 속에 말씀의 능력이 능력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흔히 중생이라고 합니다. 위로부터 나는 역사요, 새롭게 출생하는 신 기원적인 역사요, 의식이전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성화의 역사입니다. 의롭다 하시는 사랑을 받아들이게 되고 받아들일 때에 기적이 나타는 것입니다.
로마서8:16에 보면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성령은 계속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나와의 관꼐를 정상화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될때에는 세계관이 바뀌어집니다. 나에 대한 인식이 달라질 뿐만 아니라 세계를 보는 눈도 달라집니다.
전에는 이 세계가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움직이는 세계인 줄 알았는데, 성령을 받고 보니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가 주인이요, 하나님의 섭리하시고 진리가 다스리게 되는 세계라는 것을 알게 되고, 마침내는 이 우주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함을 알게 됩니다. 신천 신지를 봅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이제는 내가 하나님의 자녀요, 이웃은 내 형제요, 모든 세계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세계로 보게 됩니다.
이제 죽은 일이 두렵지가 않습니다. 그러므로 목숨을 걸고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체험이 있어야 하고 둘째는 사랑이 있어야 하고 세째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령님이 체험을 주셨습니다. 성령님이 극진한 사랑의 마음을 주셨습니다. 성령님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와 운명을 같이 할 수 있는 용기를 주셨습니다. 드디어 증인이 됩니다. 성령님이 증거하게 하십니다.
“성령이 임하면 너희가 권능을 얻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 땅끝가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증인이 ‘되라’가 아니고, ‘되리라’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권능을 얻습니다. 증인이 되는 권능, 그리스도와 운명을 같이 하는 권능, 부활의 증인으로 죽음을 넘어서는 권능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제자들은 남은 생애를 증인으로 살아가고 증인으로 순교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도 초대교회 성도들과 같이 모이기를 힘쓰며 말씀을 사모하여 읽고 듣고 순종하기에 힘을 써야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회개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배에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주시는 것입니다. 변화의 사람이 됩니다. 열심있는 일군이 됩니다. 능력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봉상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뜨거운 헌신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성령의 충만을 받게 되면 우리 생활에 어던 표가 생깁니까
오늘 봉독한 갈5:22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말하면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보면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1).사랑과 희락과 화평의 사람이 됩니다.
이것은 성도의 심령속에 열리는 열매입니다.
예수님께서 요13:35절에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먼저 우리 생활이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성령충만이 임하면 원망하지 아니하고 언제나 감사하며 찬송하는 생활을 합니다. 그래서 그 마음속에 언제나 기쁨과 화평이 넘치는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화평케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2).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의 열매를 맺습니다.
이것은 사람에 대하여 나타나는 열매입니다. 성령충만한 사람은 대인간계에 있어서 열매가 이렇게 나타납니다.
어려운 일을 당하든지, 속이 상할 수 밖에 없는 대접을 받거나 말을 들어도 분을 내지 아니하고 참고 안내하는 덕스러운 신앙인격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참는 자가 복이 있다고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오히려 불쌍히 여기며 용서해주는 마음이 생깁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자들을 향해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하셨습다.(눅23:24)
이렇게 우리 예수님은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남을 불쌍히 여길 뿐만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선을 행하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양선입니다.
3).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취해야 할 태도입니다.
성령충만하여 그리스도께 든든히 붙어있는 사람은 여려울 때도 자기 맡은 일에 충성을 다 합니다. 그리고 매사에 온유함으로 대합니다. 반항하지 아니합니다.
언제나 순종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과 생활에 표준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준하여 우리의 말과 행동을 제어합니다. 다시말해서 내 좋은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겸손히 순종하는 삶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도라면 반드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왜 오늘날 교회가 무능하게 되었으며 왜 성도들이 맛 잃은 소금처럼 무시당하며 짓발힘을 당하니까 그것은 바로 성령충만을 받지 못하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가 성령의 충만한 사람들이 되었을 때에 세상 사람들로부터도 칭송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고전13:1-3절에 보면 성령충만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가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했습다.
다시 말을 바꾸어 말하면 신자가 성령충만함을 받지 못하면 아무리 봉사를 많이 하며 교회활동을 많이 한다할지라도 그것은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가리와 같이 그저 소란만 피울 뿐만아니라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주님께서 열매를 얻기 위해서 찾아오십니다.
믿음의 열매, 회개의 열매, 전도의 열매 그리고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를 다 맺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모든 사람들에게 큰 은혜와 유익을 끼칠 수 있는 능력있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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