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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한 바울의 소원 (살전 02: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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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 교회는 서양에 세워진 두번째의 교회였습니다. 즉, 빌립보 교회가 세워진 후 두번째로 텔마이(Thermak:온천)에 세워진 데살로니가 교회는 마게도냐의 아가야 모든 지방에 본이 되는 아름다운 교회로 성장되어 갔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로 인해 날마다 감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의 그 격심한 핍박으로 인해 잠시 데살로니가를 떠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유모와 같은 심정으로, 혹은 아비와 같은 애정으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그리워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잠시 떠나있는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해 가졌던 소박한 몇가지 소원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과연 교회를 향한 사도바울의 3가지 소원이 무엇일까요

1. 성도들의 얼굴 보기를 열정적으로 힘쓰는 소원이었습니다.
(1)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더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17절)했습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여러가지 외적 악조건으로 잠시 데살로니가를 떠나야 했습니다. 여기 잠시 란 헬라어 프로스 카이론 호라스로서, 직역하면 한 시간의 기간(for time of an hour)를 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짧은 시간 몸은 떠나 있었지만 그 마음으로 아니라 고백하고 있습니다. 실로 진한 사랑의 맥박과 고동이 들리는 듯한 표현입니다.
(2) 특히 너희를 떠난 것은이란 헬라어는 아포르파니스덴테스입니다. 즉, 고아로 내어 버려둔다는 뜻으로서, 자녀를 잃은 고독한 어버이를 표현 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사도 바울은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했습니다. 그 뜻은 많은 열정으로 힘썼다(with much desire)는 뜻입니다.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과 정열로, 그 말고 고마운 마음을 보기를 열망했다는 뜻입니다. 실로 넘치는 애정의 실토였습니다. 이렇게 마음과 마음이 연결되어 있으면 얼굴 또한 보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거짓없는 사랑의 증거요,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사랑의 증거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와 성도, 교역자와 성도의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3) 지금 이 시대는 사탄이 맹활약하는 시기입니다. 교역자들은 물질주의, 쾌락주의 편리주의에 기울고 성도들도 점점 더 세속화되어 교회내에도 온갖 권모술수와 폭력과 비리가 판치는 시대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마음과 마음이 통하고, 날마다 보고싶고 더 보고싶은 사랑의 관계가 이어지도록 순수한 마음, 깨끗한 마음, 사랑의 마음을 지켜 나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성도 한사람 한사람을 굳게 세우려는 소원이었습니다.
(1) 지금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유대인 들에게 모진 방해와 고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사도 바울은 잠시 피신했지만 날마다 데살로니가로 가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는 디모데를 대신 파송하며 성도들을 위로하면 굳게 세우려 했습니다. 그러므로 3장 2-3절에, 우리 형제 곧 그리스도의 복음의 하나님의 일군인 디모데를 보내노니 이는 너희를 굳게 하고 너희 믿음에 대하여 위로함으로 누구든지 이 여러 환난중에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여기 굳게하고란 헬라어 스테릭싸이로서, 튼튼한 기초 위에 고정하여 세움을 뜻하는 것입니다.
(2) 그러나 사탄은 이 사도 바울의 길을 가로 막고 있었습니다. 사탄은 대적자요, 참소자요, 훼방자입니다. 그는 도적이요, 거짓말장이요, 분열하는 자입니다. 과연 사탄은 어떻게 사도바울의 길을 막으며 방해 했을까요 벵겔(Bengel)이나 밀리간은 유대인의 핍박을 들고 있습니다. 시몬은 사도바울 의 육체적인 질고를 들고 있습니다. 마펫(Maffeatt)은 전도사업의 긴급성으로 이해 데살로니가에 갈 기회를 얻지 못하게 막는 방법이라 했습니다. 조웨트 (Jowett)은 내적 고민(행16:7)을 들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날 목회 상황에서도 이런 저런 저해 요소들이 있습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인해서 성도들의 모든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3) 그러나 이 모든 방해중에서도 사도 바울의 마음을 항상 저들에게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을 사모했고, 심지어 목숨까지 주려 했습니다.(2:8) 그러나 갈수 없게 되자, 쉬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1:2,2:13, 3:10) 우리는 베풀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베푸는 삶, 섬기는 삶, 나누어 주는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고, 한 사람 한 사람을 바로 세워 주님앞에 아름답게 설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주 예수의 재림의 날 함께 영광스럽게 서는 소원이었습니다.
(1) 19절에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 이니라했습니다. 그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자신의 유일한 기쁨으로 영과으로 여겼습니다. 데살로니가의 그 아름다운 성도들을 그는 누구 앞에서나 자랑하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언젠가 예수 그리스도 강림의 날에 함께 그 앞에 서서 영광스러운 면류관을 쓸 수 있는 아름다운 성도가 되기를 기대하며 소원했던 것입니다.
(2) 자식은 그 부모의 영광입니다. 농사군에게는 그가 온갖 정성을 다 쏟아 가꾼 농작물이 그의 영광과 기쁨입니다. 스승에게는 훌륭한 제자가 항상 자랑스러운 자랑감이 되는 것입니다. 소나 양떼를 기르는 사람에게는 그가 정성을 다해 기른 소나 양떼들이 그의 자랑과 기쁨이 될 것입니다.
(3) 성도들의 자랑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자랑은 바로 교역자들입니다. 교역자를 보면서 다른 사람들은 성도들을 채점하게 됩니다. 또한 성도 한사람 한사람을 보면서 그 교회 교역자의 수준을 채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서로 최고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는 귀한 일군들이 될수 있도록 가꾸며 정성을 쏟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주 예수의 재림의 날, 함께 영광스런 시상대 위에 서서, 천만 성도의 박수 갈채를 받으며, 그 상급을 받을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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