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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로 드리는 사람들 (고후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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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중도시에서 목회하는 목사님이 있는데 어느날 그 도시의 천주교 신부가 찾아 왔더랍니다. 찾아온 목적은 신도들을 모아 놓을테니 몇 시간 집회를 해달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천주교에서 개신교 목사를 청해다가 집회를 할려고 하는가, 그리고 무슨 얘기를 해달라는 것인가라고 물었더니 이미 로마 바티칸의 허락까지 받았다며 개신교의 십일조하는 법을 얘기해 달라는 것입니다.
찾아온 신부의 얘기는 도대체 천주교 교인들이라는게 헌금할 줄도 모르고 바티칸에서 돈오기나 기다리고 있어서 답답하고 속상하다며 몇 시간 개신교인들 헌금하는 얘기를 해달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목사님은 쾌히 승락하고 가서 몇 시간 십일조 얘기를 했더니 바응이 크게 일더라고 했습니다. 천주교보다는 개신교가 훨씬 더 헌금 생활에 익숙하고 최선을 다합니다. 그리고 세계 교회 가운데 한국 교인들이 가장 올바른 헌금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보다 더 헌금의 원리를 제대로 이해하고 드린다면 받으시는 하나님께는 더 큰 영광이 될 것이고 드리는 우리에게도 더 큰 은혜가 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6:1-8과 고린도후서 8:1-8과 고린도후서 9:1-7은 바울사도가 고린도교회에 주신 헌금에 관한 교훈입니다.
몇 가지 기본적인 원리를 찾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은혜입니다.
고린도전서 16:3을 보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라고 했고, 고린도후서 8:1을 보면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라고 했고, 8:4을 보면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8:6을 보면 “이 은혜를 그대로 성취케하라 하였노라”고 했고, 8:7을 보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찌니라”고 했습니다.
이상에서 말하고 있는 “은혜”는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행위를 의미합니다. 바울은 하나님께 드린다는 그 행위자체를 은혜로 해석한 것입니다.
바울이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를 [은혜]로 해석한데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보답이며 감사행위이기 때문입니다.
1988년 10월5일 아침 제약 회사원이었던 전용기 씨가 아침 조깅을 하러 나갔다가 차에 치어 두개골 골절 등 14가지 합병증세로 전주 예수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연락을 받고 병원으로 쫓아간 부인 성정식 씨의 놀라움은 표현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 당시 네살된 딸과 생후 45일밖에 안된 딸을 대전의 친정집에 맡기고 월 5만원의 사글세 방을 병원 앞에 얻어 남편의 간병을 시작했습니다.
남편 전용기 씨는 식물인간이었습니다. 하루 수십 차례씩 가래를 빼내고, 대소변을 받아내고, 목욕을 시키는 등 남편 수발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 고통의 날들은 하루 이틀이 아니었습니다. 5년 11개월 이었습니다.
주위에선 포기하라고 했고, 시댁식구들도 발길이 뜸해지는가 하면 의사들도 합병증세 때문에 얼마 살지 못할거라며 살아난다고 해도 식물인간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가까운 사람들은 새출발을 하라고 권유하기도 했습니다.
남편은 급성폐렴 등 합병으로 수많은 고비를 넘겼는가 하면 성정식 씨도 4개월만에 쓰러져 입원을 하기도 했습니다.
성씨는 평소 배워둔 미용기술로 환자들의 머리를 깍아주고 한달에 4-5만원을 받아 남편의 기저귀를 사거나 약값에 보탰습니다.
본래 성정식 씨는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믿는 집으로 출가를 해왔지만 교회를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남편이 사고로 쓰러지면서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고 날마다 병원교회에 나가 남편 살려달라고 기고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식물인간이라도 좋으니 제발 살아만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4년 11개월간의 길고 긴 식물인간의 잠에서 깨어난 것입니다.
저는 이 사연을 신문에서 읽었고, 예수병원 관계자의 입을 통해 직접 들었습니다. 참으로 감동적인 한편의 인간드리마입니다. 부부가 서로 얼굴을 마주 바라보며 주고 받은 이야기가 있을 것입니다. 무엇이겠습니까
“여보 고맙소”, “여보 깨어나줘서 고마워요”
“내 일생 당신 은혜 잊지 않을께”
“나 당신 사랑한다구”
“저두요”
부부의 대화를 엿들은 건 아니지만 대충 그런 대화가 오고 갈 것입니다.
은혜는 순수한 것입니다. 은혜는 조건도 없습니다. 다만 은혜는 감동과 감격과 감사가 넘칠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감동하고, 감격한다면 드린다는 행위가 너무나 감사하고, 기쁜 사건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둘째, 드릴 수 있고, 드릴 것이 있다는 것이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억천만금을 가지고 있어도 죽어버리면 드릴 수가 없습니다.
살아있기 때문에 드릴 수 있고 또 드릴만한 것이 있기 때문에 드리는 것입니다. 제아무리 드리고 싶어도 가진 것이 없다면 드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드릴 것이 있다는 것과 드릴 수 있다는 것은 은혜인 것입니다.
저는 매일 아침 잠자리에서 깨어나면 그대로 무릎꿇고 즉시 그 자리에서 기도를 드립니다. 기도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 오늘도 깨어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심장의 고동소리를 듣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눈으로 보게 해주셨군요. 귀로 듣게 해주셨군요. 입으로 말하게 해주셨군요. 손발이 움직이게 해주셨군요. 또다시 오늘 하루를 주셨군요. 주님 감사합니다.”
이 기도를 드리고 일어서곤 합니다.
여러분, 억천만금을 벌지 못했더라도, 성공출세를 내 욕심대로 못했더라도 살아있다는 것과 내 것이라고 몫지은 것이 있다는 것 때문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것을 아는 사람이라야 은혜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위장병을 치료하는 내과 전문의의 얘기를 들었습니다. 평소 식도락을 즐기던 두 남자환자를 치료하고 있었습니다. 위장병 환자는 다른 환자들에 비해 음식을 조심해야 하고 특히 의사의 지시를 따라야 합니다. A라는 성을 가진 환자는 의사의 말에 순응하고 치료되면 마음 놓고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자기 절제에 최선을 다합니다. 그 결과 치료가 급속도로 빠릅니다. 그런데 B라는 성을 가진 환자는 의사 말을 듣지 않습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먹는 재미로 사는데 왜 음식을 먹지 못하게 하느냐, 먹으면서 치료를 하는 법은 없느냐, 먹고 치료하면 되지 않느냐며 항의하고 의사의 지시를 따르지 않습니다. 그 환자는 A환자에 비해 80% 치료가 지연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먹게 되면 먹게 되서 감사하고, 먹지 못하면 이 다음에 잘 먹게 될 줄로 믿고 감사하는 사람이 은혜생활을 하는 사람이고 그가 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건겅한 것, 드릴 수 있게 된 것, 그릴 것이 있다는 것, 오늘 내가 여기 존재한다는 것 그것을 은혜로 믿고 감사합니다.

2. 자신을 먼저 드려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8:5절을 보면 “우리의 바라던 것 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라고 했습니다.
물질로 헌금을 하기 전에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부부관계를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가령 남편이 딴집 살림을 차리고 딴 살림을 하면서 그것을 미봉하기 위해 자기 부인에게 좋은 차를 사주고 좋은 옷을 사주고 용돈을 분에 넘도록 준다고 가정해 봅시다 부인은 남편이야 어디를 싸돌든 돈주고, 차사주고, 옷사주는 것만으로 감지덕지 할 수 있겠습니까
돈이 큰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 자신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네 마음을 내게 달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순서가 있습니다. 그것은 나를 먼저 드리는 것입니다.
10여년 전 저는 어느 사진전에 갔다가 별난 작품을 구경했습니다. 사진 모델은 주로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작품은 거의가 얼굴이 없었습니다. 여자의 각선미, 히프, 가슴, 팔목 등 그런 부분만을 클로즈업 시켜 찍은 사진이었습니다. 얼굴없는는 지체들의 전시회였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나는 드리지 않고 돈만 드린다면 그것은 얼굴없는 가슴처런 흉물스러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수재민 구호금을 내는 행위와 같은 것입니다. 나를 먼저 드릴 때 하나님은 내가 드리는 물질과 시간과 재주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3. 심는대로 거둡니다.
고린도후서 9:6을 보면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농사법칙이고 인생법칙입니다.바울은 그 법칙을 하나님께 드리는 법칙으로 도입한 것입니다.
쿠바의 산타아고 마을에 [마리아]라는 여선생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매일 말을 타고 학교에 출퇴근을 했습니다. 어떤 날 남루한 옷차림에 맨발로 학교를 향해 뛰어가는 소년을 보게 되었습니다. 차림새가 꾀재재한 거라든지 맨발로 뛰는 걸로 보아 가난한 집 아이임에 틀림없었습니다.
그 소년이 누구인가를 알아 보았더니 자기 학교 학생이었고, 검은 눈이 초롱초롱 빛나고 공부를 잘하는 아이였습니다. 다음 주 월요일 마리아 선생은 구두 한 켤레를 사서 그 학생에게 주었고, 정성껏 도와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해 그는 그 학교를 떠났습니다. 그후 쿠바의 지도자로 카스트로가 권좌에 오르게 되었고, 마리아 선생은 한 신문에 공산주의를 비방하는 글을 썼다는 죄목으로 경찰서에 연행 되었습니다. 그 선생은 곧 바로 정보과장에게 넘겨졌습니다.
마리아 선생을 본 정보과장이 깜짝 놀라며 물었습니다. “당신은 마리아 선생이 아니오 저를 모르시겠습니까 옛날 구두 사준 학생이 바로 접니다”라며 덥썩 손을 잡았습니다. 구두 한 켤레와 작은 정성이 훗날 위기를 모면케 해주었다는 것입니다.
덕이라는 씨앗을 뿌리면 덕이라는 열매를 거둡니다. 사랑이라는, 종자를 뿌리면 사랑이라는 열매를 거둡니다. 그러므로 좋은 일은 많이 뿌리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악을 뿌리고, 부덕을 뿌리고, 죄를 뿌리면 그것들을 많이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쁜 일을 많이 뿌리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창세기 18장을 보면 어떤 날 아브라함 집에 낯선 손님 셋이 찾아왔습니다. 너그럽고 후덕한 아브라함 부부는 정성을 다해 송아지를 잡고 요리를 만들어 그들을 대접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두 천사였습니다. 그날 아브라함은 그들을 대접하고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는 축복을 받게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날의 약속대로 일년 후에 이삭을 낳게 되었습니다.
주님께 드리는 것은 공짜가 없습니다. 많이 드리면 많은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우리가 주님께 드리면서 늘 해야 할 고백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 더 많이 못드려 죄송합니다”, “주님 정성껏 드리겠습니다”, “주님 더 많이 드리도록 복 내려 주옵소서”라는 것입니다.
은혜로 알고 드립시다.
은혜로 감사하며 드립시다.
나 자신을 드립시다.
풍성하게, 넉넉하게, 많이 드립시다.
심는대로 거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바로 드리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드리는 사람들의 헌신과 헌물과 감사를 받으실 것입니다.
얼마나 드리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드리느냐가 중요합니다. 거지도 거지취급하면 화내고 덤빕니다.
하나님을 누구로 알고 믿고 드리고 있습니까
바로 드리는 사람에게는 은혜와 축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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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0.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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