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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울과 아나니아의 만남 (행 09: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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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이라는 청년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오기 위해서 다멕색 으로 가다가 바로 그 예수쟁이들이 믿는 예수를 그가 만나게 됩니다. 이것은 참으로 기막힌 일입니다. 그리고 굉장히 충격적인 일입니다. 사울은 다멕색 도상에서 하늘로부터 강렬한 빛을 받습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강한 빛이 그를 둘러 쌉니다. 그 빛 속에서 사울은 두 가지 음성을 듣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 하느냐 라는 음성입니다. 주여 누구십니까 그 때 두 번째 음성이 들립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만약에 여러분들이 그 음성을 들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사울은 그 빛과 음성 앞에 고꾸러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일어났을 때는 시력을 일어 버린 것입니다. 앞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에 이끌려서 다멕색 으로 그가 예수 믿는 사람을 체포하려 했던 그 다멕색 으로 가긴 갔는데 다른 모습으로 다른 입장으로 다멕색 에 들어가서 유다라 하는 작은 집안에 거처 하게 됩니다. 사울과 예수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 된 것입니다. 이 사건은 결코 우연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사울을 만나기 위해서 예비한 하나님의 준비였던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일어난 사건은 우연 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들에게 결코 어떤 사건도 우연이 아닙니다. 내가 우연처럼 느껴졌을 뿐입니다. 신앙이 생기면 그 사건이 해석이 되는 것입니다. 이해 할 수 없는 사건 감당 할 수 없는 사건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내 생애에 들어오면 이해가 됩니다. 예수님이 내 생애에 들어오면 과거가 열립니다. 닫혀졌던 나의 과거 황충이 가 먹어버린 나의 과거 해석 할 수 없었던 나의 과거가 해석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현실의 의미가 깨달아지고 동시에 내가 가야할 미래에 대해서 환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면 두 번째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사울에게 한 사람을 준비 시켜 주셨습니다. 이제 예수를 만난 사울을 격려하고 위로하고 치료하고 양육할 한 사람을 준비 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이 아나니야 라는 사람입니다. 이 아나니야 라는 사람은 아주 참 놀라운 독특한 신선한 그런 충격을 주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에 대한 기록은 별로 없습니다. 그 사람이 나타나는 장면도 이 장면 외에 별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많이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아나니야라는 사람을 볼 때 놀라운 신선한 충격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1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그 유명한 12사도 중의 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예루살렘의 초대교회 집사도 그 어떤 사람도 아닙니다. 그냥 예루살렘이 수도 도시라 한다면 다멕색은 지방입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시골의 지방 도시에 있는 무명의 성도요 예수님의 제자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생애는 어쩌면 사울을 만나기 위해 준비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사울에게 결정적인 그리고 중요한 영향력을 미친 사람입니다. 잠깐 만났지만 큰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래 만났지만 전혀 영향력을 미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냥 세월만 보냈을 뿐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를 잠깐 믿었지만 크게 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수 십년 동 안 교회를 들락날락 하지만 전혀 변하지 않는 그런 사람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사울은 사도행전 22장에서 자기가 예수를 어떻게 만나게 되었냐라는 간증을 하게 됩니다. 그 간증속에서 사울은 이 아나니야 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2장 12절에 보면은 거기서 아나이야에 대한 언급을 사울은 이렇게 합니다. 그는 율법에 의하면 경건한 사람으로서 거기 사는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아나니야라는 사람에 대한 얘기를 좀 이해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다멕색에 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보면 완전하고 경건한 사람이라고 사도바울은 소개 합니다. 그렇게 보면 이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아주 경건하고 그리고 정말 율법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모하며 살았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과연 율법으로 완전한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사람의 일상적인 삶이 그렇게 하나님 중심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울은 아나니야에 대해서 한마디 더합니다. 이사람은 모든 유대인들에게 아주 칭찬을 받고 있었다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그는 유대인의 공동체에 살고 있었던 유대인이었다. 헬라인이 라기 보다는 히브리인이었다는 것을 짐작할수 있습니다. 이 히브리인들 중에서도 유대인 중에서도 굉장히 존경을 받고 있는 칭찬을 받고 있는 사람이 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어디서 사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떤 직분을 갖고 어떤 위치에 서있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그가 누구냐 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미국서 사느냐 서울서 사느냐 서울에서도 강남에 사느냐 강북에 사느냐 이것을 가지고 따집니다. 몇평에 사느냐 그것으로 사람들은 자기의 존재를 확인하려 하는 것입니다. 어떤 차를 타느냐 어떤 옷을 입느냐 그래서 많은 사람들하고 비교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만족을 느끼려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당신은 어떤 종류의 직업을 가지고 있느냐 그리고 그 직업중에 당신은 어떤 위치에 있느냐 사장이냐 이사냐 전무냐 교수냐 연구원이냐 아님 노동자냐 아니면 실업자냐 사람들은 그것으로 자기를 평가하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을 대하기도 합니다. 우리를 늘 이렇게 속아 살아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이 어디 사느냐도 중요하지 않고 당신이 어떤 지위에 있느냐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당신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당신이 누구냐 라는 것입니다. 당신의 내면 생활이 어떤 것이냐 당신의 존재가 누구냐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아나니야는 시골에 산 사람이었고 그가 지위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물론 교회에서도 스데반이나 빌립 같은 사람은 아니었습니다만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쓰는 사람이 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결정적인 순간에 자기역할을 잘했던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여러분과 내가 되길 원합니다. 하나님이 쓰시고자 할 때 쓰임 받을 수 있는 사람 그래서 하나님이 쓰시기 위하여 늘 준비하고 있는 사람 기다리고 있는 사람 주여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쓰시옵소서 그리고 내가 쓰임을 받을때 결정적으로 순종하는 그런 사람 그리고 그것이 작은 사건이고 순간적인 것이지만 그리고 결정적인 역할을 미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나니아를 오늘 성경에 다시 살펴보고자 합니다. 10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여기서 보면 아나니아 라는 사람은 예수님을 무척 사랑하는 제자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10절을 보면 그는 늘 기도 하고 있었다는 사람인 걸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말씀하고 싶어 합니다. 가까이 가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내가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해요. 그렇다고 갑자기 길을 걸어가고 있거나 잠을 자고 있는 나에게 용조야 이렇게 말하기도 어렵지 않겠어요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고 싶다면 그리고 나에게 어떤 말씀을 전해주고 싶다면 내가 성경을 읽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쭉 읽고 있어야 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오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너를 위한 말씀이다. 말씀을 성경을 읽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묵상하라고 했어요. 깊이 묵상을 해야 합니다. 그 때 하나님은 그 말씀을 통하여 그 묵상을 통하여 나에게 찾아오셔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만약에 내가 아무리 교회일 에 바쁘고 성경공부하고 여러 가지 일을 하더라도 성경을 안 읽고 있다면 어떻게 하나님이 나에게 깊은 이야기를 해줄 수 있겠습니까 또 한 가지 하나님은 우리에게 환상을 보여주고 싶어 합니다. 특별한 뜻을 계시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내가 눈을 감고 기도하지 않는데 어떻게 그 환상이 보이겠습니까 눈 뜨는데 환상이 보이겠습니까 내가 왔다 갔다 하고 있는데 환상이 보이겠습니까 그렇죠 기도하고 있어야 합니다. 늘 기도하고 있어야 합니다. 눈을 감고 하나님을 묵상하고 하나님께 아뢰고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과 가까이 있을 때 그 분은 우리에게 환상도 보여주실 것이며 그 분은 우리에게 당신의 어떤 뜻을 계시하여 주실 것입니다. 오늘 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문제가 너무 바쁘고 분주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루 종일 교회 와서 물론 우리가 여러 가지 봉사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일에 이 사람 만나고 저 사람 만나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그리고 교회는 생각보다 회의가 많은 것입니다. 기도보다 회의가 많은 것입니다. 묵상하고 경건하게 기도하고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나 적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내 가정생활에 있어서도 경건한 시간 기도하는 시간 묵상하는 시간 침묵하는 시간이 적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성경을 읽고 있지 않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내가 기도하고 있지 않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환상으로 무언가를 보여줄 수 있겠습니까 이 아나니아를 보면 특별히 주님과 대화하며 환상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기도는 내가 무언가 말하므로 끝이 납니다. 내 생각을 전달합니다. 내 간구를 전달합니다. 비록 감사할 찌라도 나의 감사의 뜻을 전달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다합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하나님이 내게 말할 기회를 드리지 않습니다. 그것으로 끝을 어 버립니다. 우리의 기도는 반쪽인 것입니다. 정말 진정한 기도는 어디에서 완성이 되는가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완성이 됩니다. 정말 참 된 기도는 주여 말씀 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우리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겠나이다. 우리 당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겠나이다. 우리 제직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겠나이다. 우리 위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겠나이다. 말씀 하시옵소서. 그렇게 하고 기다려야 하는데 우리는 그렇게 끝내 버립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얼른 빨리 끝나고 하나님 말씀하시는 것에 대하여 기회를 드리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는 침묵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분의 음성을 듣는 그런 시간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내 소리가 크면 타인의 소리가 안 들립니다. 내가 잠잠하면 다른 사람의 소리가 들립니다. 자기 생각이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경청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잠잠히 기다리는 그런 시간이 필요합니다. 내가 하나님 됨을 알찌어다.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그 시간을 하나님이 운행 할 수 있는 그런 기회를 드려야 합니다. 정말 믿음은 하나님이 어떻게 행하는 것인가 보는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행하느냐가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습니다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 믿음이라 생각하는데 그것은 믿음의 시작에 불과합니다. 참 믿음은 하나님이 어떻게 움직이시고 어떻게 말씀하시고 어떻게 운행하시고 하나님이 어떻게 기적을 베푸는가를 우리가 목격하고 보는 것입니다. 나는 그런 일들이 우리 안 에 있게 되길 바랍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겠습니까 하나님이 엄청난 일들을 하신다면 일어나겠습니다. 아나니아는 주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는데 보통 들은 것이 아니라 환상을 보고 들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인들의 간증을 듣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예수님의 환상을 보았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데 성경에서 말하는 뚜렷한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이 음성이든 환상이든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들은 것은 분명하지 않은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항상 같기도 하고 안 같기도 하고 꿈에서 보긴 봤는데 개가 한 마리 나타나고 왔다 갔다 합니다. 이런 꿈 꿨다 저런 꿈 꿨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는 희미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환상이 해석을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하지 않고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환상은 분명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희미하지 않습니다. 아주 분명한 것입니다. 상상한다든지 글을 깍았다든지 그런 것들이 아닙니다. 에스겔서 13장13절에 보면은 해주는 것이 있습니다. 본 것이 없이 자기의 심령을 따라 예언하는 우매한 선지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라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 마음에서 나온데로 예언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마음의 생각을 하나님의 뜻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본 것이 없이 상상해서 환상이라고 과장해서 이야기 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해서 말하는 사람은 화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게 막연한 것이 아닙니다. 분명한 것입니다. 아나니아는 분명히 주님과의 대화와 영적교제와 환상을 본 사람입니다. 또 한 가지 아나니아에 게서 말씀을 찾을 수 있는 것은 그는 언제나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태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그 밑의 내용을 보면 그런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명령의 내용에 따라 순종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들어보고 그 내용이 할만하면 하고 할만하지 않으면 안하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순종이 아닙니다. 순종보다 더 중요한 것은 순종의 태도입니다. 어떤 명령을 내리든지 나는 순종 하겠습니다. 그런 의지와 결단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면 순종할 마음이 언제나 있어요 야 우리 도망가자 부모님이 반대하니까 우리 튀자 그래서 좋다 따라 갑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 내용을 따지지 않습니다. 그냥 따라가고 순종하려는 태도가 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라도 그런 태도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이런 영적 태도가 아주 중요합니다. 그분이 당신이 말씀하신다면 내가 무슨 일이라도 하겠습니다 하는 그런 영적 태도인 것입니다. 환상 속에 주님이 나타났을 때 나는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오늘 주님이 나타나실 때 여러분이 반응 하시길 바랍니다. 주여 내가 여기 있습니다. 주여 말씀하시옵소서 무슨 말이라도 나는 순종할 각오가 되어있습니다. 아담과 이브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아담아 아담아 내가 어디 있느냐 그때 아담이 뭐라고 말했습니까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그랬습니까 아닙니다 주여 내가 벌거벗어서 숨었나이다. 죄가 있는 사람은 순종할 마음이 없습니다. 언제나 따져보고 생각해보고 나에게 잘해주면 잘하고 나한테 잘 안 해주면 안하고 이런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 그 심령이 깨끗한 사람 하나님의 뜨거운 애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주여 말씀하시옵소서. 이렇게 응답하는 것입니다. 죄가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를 때 얼른 숨습니다. 그렇게 눈만 내어 놓고 이렇게 봅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가 부르면 주님이 부르면 딱 숨습니다. 먼저 숨고 이렇게 잘 관찰을 합니다. 그렇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여러분을 부를 때 숨지 않기를 바랍니다. 일단 순종하려는 영적 태도를 가지십시오. 적극적인 태도를 가지십시오. 하다가 못하면 그때 못하더라도 순종하는 태도를 가지십시오. 그때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에게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아나이아에게 부탁한 명령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11절을 읽겠습니다. 환상 중에 나타난 주님의 명령은 막연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주 구체적입니다. 그리고 분명합니다. 우선 거리 이름이 나옵니다. 집 가는 거리 그 집 주소가 나옵니다. 유다라고 하는 사람의 집 그리고 만나야 될 사람까지도 분명합니다. 다소 사람 사울 얼마나 구체적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인도하십니다. 아나니아는 영적으로 순종하려는 태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내용을 들어보고 놀랬습니다. 굉장히 충격을 받고 당황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순종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 자체가 기대에 전혀 다른 상식에 벗어난 그런 내용입니다. 13절과 14절입니다. 아니 다소 사람 사울이라는 이야기 입니까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사람은 내가 소문을 들었는데 예수쟁이들을 다잡아가는 사람이고 교회를 핍박하는 사람이고 지금 대제사장의 문서를 가지고 우리를 핍박하러오는 그 사람 말입니까 이런 이야기입니다. 어찌하여 사울 같은 사람에게 관심을 갖습니까 그런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이 아나니아의 이 반응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순종 안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놀랜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끔 우리를 놀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도 놀래게 하십니다. 하나님 나를 택하시다니 나도 깜짝 놀래 내가 예수를 믿다니 아주 자기가 예수 믿어 놓고 자기가 놀래죠 아니 나같은 사람이 예수를 믿다니 어찌 이런일이 있을수가 있겠습니까 사울이 예수를 믿었다면 이 세상에 예수 못 믿을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안심하고 전도하시길 바랍니다. 반드시 안 믿을 것 같은 사람이 잘 믿게 되어있습니다. 그분이 예수를 못만나서 예수님을 몰라서 그런 것 뿐이죠 정말 예수를 알았더라면 어찌 예수를 안 믿겠습니까 문제는 우리가 예수 전하는 방법에 문제가 있고 내가 예수님을 보여주는 삶에 문제가 있고 내가 예수님을 못 보여주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보고 세상에 안 믿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정말 사울이라는 사람 예수쟁이를 잡아들이는 그 사람이 예수를 만나 변했다는 것입니다. 가끔 성경에 보면 그런 일이 있습니다. 베드로에게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갑자기 기도하는 중에 환상이 보이더니 보자기가 내려옵니다. 구약에서 불결하고 부정한 동물들이 거기있어요. 하나님의 음성이 먹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라는 사람 참 대단한 사람입니다. 못 먹습니다. 하나님께 항의를 합니다. 나는 이런거 못먹습니다. 내가 거룩하다고 하는데 왜 못먹는다 하느냐 하나님이 야단을 치십니다.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그런 명령을 내리십니다. 바울은 아시아로 전도하러 갑니다. 그때 하나님이 나타나서 아시아로 전도하는 것을 막습니다. 마게도냐로 유럽으로 전도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대와 생각과 방법을 어떤 때는 뒤집어 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우리 온누리 교회는 창립 때부터 이렇게 간다 열심히 믿고 있는데 어느날 하나님이 오셔서 바꾸라 하면 아무소리 말고 바꾸어야 합니다. 그런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내 영보다 중요한 것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 영은 언제든지 수용될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영의 주인이신 명령의 주인이신하나님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면 해야합니다. 그것이 축복입니다. 이 아나니아가 또 놀란 사실은 10절 마지막 부분에 보면은 사울이 기도하는 중이라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11절에 보면은 그 다음에 12절에 보면은 또 무슨 말이 있습니까 저가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보게하시고 보았느니라 사울도 환상을 본거예요 아나니아가 안수하는 환상을 봤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나니아는 이런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었을때 두말하지 않고 즉각 자기의 두려움 자기의 선입관 자기의 염려 이런 것들을 전부 덮어두고 그대로 순종한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순종하는 자는 정말 하나님의 비밀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순종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비밀의 축복을 보는 것입니다. 15절과 16절을 읽겠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아나니아 선입관에 사로잡혀 있는 아나니아 그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사람은 사울이라는 사람은 내 이름을 위하여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하였습니다. 두 번째는 내이름을 위하여 고난을 화를 겪을 사람이라 하였습니다.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나의 택한 종이라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사울이라는 사람은 하나님이 택한 그릇이라 누구를 위하여 이방인을 위하여 아프리카를 위하여 택한 그릇은 누구입니까 여기에 누군가가 있어요 아시아를 위하여 택한 그릇은 누구입니까 소련과 중국을 위하여 택한 그릇은 누구입니까 회교권과 이슬람권과 불교권에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찾기 위해서 하나님은 누군가 택해서 보내시길 원하십니다. 나는 그분들이 여기 계시다고 믿습니다. 누군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 하십니다. 너는 내가 택한 그릇이다. 주님은 여러분을 부르고 계십니다.주님은 사울 하나를 불러서 이방인 전체를 유럽을 전 세계를 복음화 시키는 그런 그릇으로 삼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한 사람을 택하여 이 민족을 변화시킬수도 있고 여러분의 가정을 변화 시킬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을 택하여 엄청난 일을 하실수가 있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16절과 17절 사이에는 휴식이 없습니다. 그말을 듣는 순간 아나니아의 발걸음은 사울의 집에 있었던 것입니다. 거기 가서 형제 사울아 이말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어요 원수 사울아가 형제 사울아로 변한거예요. 여러분 어떤 사람도 변할 수있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변할 수있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형제 사울아 주님께서 네가 오는 길에 나타났던 바로 그 주님께서 나에게 나타나셔서 나를 보내어 너를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아나니아는 17절에 보면은 거기가서 안수했다 나옵니다. 나는 이런 안수가 여러분에게도 임하길 바랍니다. 안수를 하게하셔서 너의 눈을 뜨게 하시고 성령이 너에게 임하도록 충만히 임하도록 성령의 세례를 거쳐서 성령의 충만함이 임하도록 하게하셨다입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에 한 놀라운 법칙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사건이 일어날 때 마다 성령이 사건에 먼저 왔다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에수를 믿었다 할때도 베드로 요한이 가서 성령의 안수를 성령의 임재를 한것입니다. 이것은 고넬료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에베소에 있는 많은 12제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이 논쟁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도행전의 역사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우리 장로교가 그동안 성령에 대하여 너무나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이사실을 깨닫고 나서 굉장히 놀랬습니다. 왜 이렇게 말을 안했을까 이부분에 대해서 왜 이렇게 무지 했을까 나는 온누리 교회 성도 여러분들이 사도행전 적으로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 원합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게 되길 바랍니다. 성령의 살아계신 그역사를 여러분의 삶 속에서 경험하길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지식으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2000년 전 팔레스타인에 있었던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예수님은 사실이고 실재지만 그분은 지금 다시 살아나셔서 성령으로 우리안에 거하시고 말씀하시고 운행하시고 기적을 베풀어주시는 그분이 이신 것입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여기서 사울에 대해 독특한 것을 보게 됩니다. 사울이 눈에서 안수하고나니까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져서 다시 보게 되었다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일어나서 무엇을 받았습니까 그게 바로 물세례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세례가 먼저오고 물세례가 뒤에 온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성령세례와 물세례가 같이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물세례가 먼저오고 성령세례가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울의 경우에는 뭐가 먼저 왔습니까 성령세례가 먼저 왔습니다. 성령의 역사들이 먼저 일어 난거예요. 고넬료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물세례 줌을 금하리오. 이미 성령이 오셨는데 누가 물세례 줌을 금하리오 그러나 유감 스러운 것은 물세례를 받았지만 성령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너무나 이런 분들이 교회에 많은 것입니다. 성령의 깊은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진리의 깊은데를 이르지 못하는. 성령이 우리 가운데 임하면 그가 우리를 진리가로 인도할 것이요 성령이 임하면 그가 내가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할 것이요 성령이 임하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그가 말 할 것이요.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니 내가 떠나가면 보혜사 성령이 너희에게 임할 것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너무나 이런 부분에 대하여 무관심하고 무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믿었지만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살아있는 예수 그리스도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움직이시는 예수 그리스도 오늘 우리 시대에 말씀하시고 움직이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주님이 되길 바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세례가 먼저 사울에게 임했고 그 후에 눈에 비늘 같은 것이 떨어졌다고 말했습니다. 일어나서 이것이 떨어지게 되니까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일어나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를 받고 나서 이제야 3일동안 식음을 전폐했는데 음식을 어떻게 했죠 먹게 되었고 음식을 먹게 되니까 다시 건강하게 되었다. 음식먹고 건강했다는 이야기는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입니다. 성령이 안수하고 나니까 비늘 같은 것이 떨어져서 보게되었다. 오늘 우리에게도 비늘 같은 것이 있어요. 무언가 할 것같은데 안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먼가 볼 것 같은데 보아지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느낄 것 같은데 느껴지지가 않습니다. 움직일 것 같은데 안 움직여 집니다. 용서 할 것 같은데 용서가 안됩니다. 용서할려고 하면 화가 나요 신경질이 나요. 용서해야된다는 것을 다압니다. 사랑해야 된다는 것을 다압니다. 분노 품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압니다. 죄를 지어서는 안된다든 것을 압니다. 그러면서 죄 지어지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내가 원하는 것은 안됩니다. 하기 싫은 것은 자꾸 됩니다. 이게 무엇입니까 로마서에서 바울은 이렇게 로마서에서 말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안된다. 하고 싶지 않은 것이 자꾸 하게 되는데 이것이 무엇이냐면 죄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인간은 자기가 절제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 안되는 것입니다. 비늘 같은 것이 내 눈을 가린 것입니다. 내 영혼을 가리고 있는 것입니다. 내귀를 막고 있는 것입니다. 내입을 막고 있는 것입니다. 손이 있는데 움직일수가 없고 발이 있는데 갈수가 없고 마음이 있는데 느껴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올무에 갖힌 것입니다. 자유하기 바랍니다. 올무를 끊어 버립시오.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을 띄어 내어야 합니다. 그래야 보는 것입니다. 그래야 듣는 것입니다. 그래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움직이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새장에 갇힌 새처럼 아무것도 할수 없는 비만증에 걸려 버린 사람처럼 가긴 가는데 기우뚱 거리고 말은 하긴 하는데 힘이 없고 찬송을 하긴 하는데 능력이 없는. 사울은 비늘이 떨어졌습니다. 오늘 나는 예수의 이름으로 여러분의 비늘이 다 떨어지길 원합니다. 성령이 임하여 여러분 마음의 기쁨이 없는 그곳에 샘물처럼 기쁨이 솟아나고 의욕이 솟아나고 충만한 역사들이 일어나게 되길 바라는 것입니다. 사울은 다시 보게 되었고 음식을 먹게 되었고 건강해졌습니다. 그러나 예전과는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밥을 먹고 건강해졌는데 뭔가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왜 그런 사람이 있죠 뭔가 달라진 사람. 그는 불을 통과하고 그는 새로운 세계를 통과하게 된것입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볼때 외형적으로 변한 것은 없습니다. 그 사람이 그 사람이죠 그 사람의 족보가 달라졌겠습니까 코가 두개 생겼겠습니까 손가락이 열개 겠습니까 아! 손가락은 열개죠 그 사람이 그런데 그사람이 아니예요. 나는 여러분이 다른 사람으로 물이 포도주가 되듯이 변화되길 바랍니다. 속이 변해야합니다. 본질이 변해야 합니다. 19절에서 21절까지 읽으시십시오. 사울의 변화 첫 번째 변화는 무엇입니까 그가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에게도 이런 변화가 있길 바랍니다. 불을 통과하는 사람 성령의 불을 통과 하는 사람 성령의 세례를 받은 사람 이런 사람에게 공통적인 변화가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자꾸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가 무엇을 하든 밥을 먹든 잠을 자든 공부를 하든 강의를 하든 일을 하든 언제나 그 사람 머리 속에 예수가 가득차 있습니다. 예수를 이야기 하고 싶어 합니다. 틈만 있으면 기회가 있으면 자꾸 예수가 충만해져서 그분이 나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안에 예수님이 충만해야 예수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가 바닥난 사람이 있습니다. 펌프질하고 야단을 쳐야 겨우 예수 한마디가 나옵니다. 그게 잘 안되요. 전도하라고 그러면 예수 이야기 하라고 하면 땀을 뻘뻘 흘리면서 할까 말까 아니 하지말자 안됩니다. 예수님 말하기도 힘들고 예수님 자랑하기도 힘들고 근데 어떤 사람은 틈만 있으면 예수 이야기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 사울은 드디어 예수 이야기 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아니 사울이 예수 이야기를 하다니 22절을 읽으십시오. 그가 예수에 대해서 말을 했다. 힘을 얻고 예수가 그리스도다. 그곳이 신학교인가 그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크리스천 대학인가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곳이 교회인가 그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곳에서 예수가 불려지고 있는가 예수가 말이 되어지고 있는가 이것이 중요합니다. 오늘날 신학교에는 예수 이름이 별로 없습니다. 오늘날 크리스천 대학에 예수 이름이 별로 없습니다. 모든 세미나에 환경이란 이름이 있고 민족이란 이름이 있는데 예수 이름은 없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셔야 합니다. 교회가 많지만 예수 이야기를 안하는 교회가 많습니다. 그런 이야기는 창피하니까 나중에 하자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건 교회가 아닙니다. 신학교도 아닙니다. 크리스천 스쿨도 아닙니다. 예수가 말해지는 곳 그곳이 교회요 사신학교요 그것이 기독교 병원이요 그것이 기독교 학교입니다. 나는 여러분의 가정이 예수가 말해지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에 예수님이 날마다 날마다 풍성하게 전해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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