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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산 자의 하나님 (눅 20: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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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일에는 포도원 농부에 대해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오늘은 포도원 농부의 비유에서 심한 책망을 받은 종교 지도자들의 반격입니다.
먼저는 바리새인들의 세금 문제로(19-26), 두 번째는 사두개인들의 교리적인 문제로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고져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간계를 아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메시아관을 바로 잡아 주십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요, 하나님은 다윗의 주라 칭하신 영원히 살아 계신 주(主)이십니다.

Ⅰ.가이사의 것, 하나님의 것 (19-26)

지난 시간에 예수님께서 포도원 농부의 비유(9-18)를 하셨습니다.
이 비유를 들은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은 자기들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 알고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잡으려 하였으나 사람들이 무서워서 손을 대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회를 엿보다가 스파이를 선량한 사람처럼 꾸며 예수님께 보냈습니다. 이들은 바리새인들이 헤롯 당과 합세하여 보낸 정탐인들 입니다.(마22:16)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트집을 잡아 사법권을 쥔 로마 총독에게 넘겨서 처벌을 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 와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의 말씀과 가르침이 옳다는 것을 압니다. 또, 선생님은 사람을 겉모양으로 판단하지 않으실 뿐더러 하나님의 진리를 참되게 가르친다는 것도 압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나이까 불가하나이까”
로마 황제에게 세를 바치는 것은 유대인들 사이에서 심각한 사회문제였습니다.
당시 로마 황제(caesar)는 디베리우스(Tiberius, AD14-37)였습니다.(3:1) 그는 대 헤롯의 아들 아켈라우스가 폐위된 후(AD 6년) 유대인들에게 인두세를 거두게 했습니다. 인두세란 남자 14세(여자 12세)부터 65세까지 일 년에 한 차례씩 로마 황제에게 바치는 세금입니다.
① 이 세금은 가난한 유대인들에게는 무거운 세금이었습니다. 식구 10명이면 10데나리온을 내야 합니다. 1데나리온은 어른의 하루 품삯입니다. 하루 품삯을 일당 10만원으로 계산하여도 100만원입니다. 이 100만원을 내야 합니다.
②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은 재정상의 문제보다도 그 문제의 초점은 종교적인 문제였습니다. 열렬한 유대인들은 <우리의 왕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고 주장하며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다른 어떤 사람에게도 세금을 내는 것을 치욕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위해서는 죽음도 불사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실제 애국심에 불타는 민족주의자나 경건한 유대인들은 자주 반란을 일으켰습니다.(행5:37)
그러므로 로마 황제(Caesar)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나이까 하는 이 질문은 예수님을 진퇴양난의 궁지에 몰아 넣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로마 황제(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라고 하면 로마에 대한 분노와 증오심이 가득한 열심 당원들과 경건한 유대인들로부터 신뢰성과 소외를 당할 것입니다. 민족 반역자로 낙인이 찍히고 유대인의 분노를 사게 됩니다. 또, 만약 로마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하면 로마법에 걸리고 황제에 대한 반역죄로 로마 총독에게 고발되어 체포할 것입니다.(23;4)
아마 이들은 후자의 대답을 기대하고 올무를 놓았습니다.
이들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끌어다 놓고(요81-11) 예수를 올무에 빠뜨리는 것과 같습니다.
“선생님, 간음한 여자는 율법에 돌로 치라 하였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ㅇ돌로 치지 말라면-①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되고, ② 간음을 장려하는 자가 됩니다.
ㅇ또, 돌로 치라 하면-① 예수님이 지금까지 가르친 사랑의 법에 위배되고, ② 로마 총독의 허락 없이 죽이라 한다면 로마법을 어기고 살인자로 몰아 부쳐 잡고자 했습니다.
이와 같이 오늘 본문도 황제에게 세를 바치지 말라면-로마법을 어겨서 반란자로 체로가 될 것이고, 세금을 바치라고 한다면-유대 민족의 배신자 내지는 매국노로 낙인이 찍히며 유대인들로부터 소외를 당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이런 올무에 걸었습니다. 예수님을 이러 지도 저러 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간계를 아시고 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 뉘 화상과 글이 여기 있느냐 대답하기를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하니 예수님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즉 로마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바치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23-25) 하셨습니다.
데나리온은 로마 황제가 인두세를 거두기 위해서 만든 은화입니다. 이 은화에는 로마 황제의 얼굴과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데나리온은 가이사의 형상이 새겨져 있으므로 가이사의 것이므로 가이사에게 바쳐야 합니다.
데나리온에는 가이사의 형상이 새겨져 있지만 우리 인간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과 모든 생애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드려지고 바쳐져야 합니다. 사실 우리의 모든 소유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것은 마땅히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다고 국가의 의무를 소홀히 할 것이냐 예수님은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바치라 하셨습니다. 국가의 의무를 다하라고 하셨습니다. 세금을 바치고 교육의 의무를 다하고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병역의 의무를 감당해야 합니다. 여호와의 증인 같은 이단에서는 군에 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근로에 솔선 수범해야 합니다. 엿새 동안 힘써 일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일하기 싫은 자는 먹지도 말라(살후 3;10)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중 시민권을 가진 자들입니다. 이 땅에 몸을 두고 있기 때문에 몸담고 있는 국가에 의무를 다하고 장차 들어갈 하나님의 나라의 의무를 다해야 할 것입니다.
동양에 이런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말을 타고 사막을 여행하고 있던 세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밤 이상한 나그네 한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나그네는 그들에게 얼마 가지 않아서 마른 시내 하나를 건너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어서 “당신들이 그곳에 도착하거든 말에서 내려 시내에서 자갈들을 주워 자루와 호주머니에 채우도록 하시오 그리고 나서 계속 여행을 더 하다가 해가 뜰 때 당신들이 주운 자갈들을 살펴보시오. 당신들은 기뻐하며 한편으로는 애석하게 여길 것이요” 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 사람의 말처럼 세 사람은 마른 시내에 도달하였습니다. 그들은 호기심으로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많은 자갈들 중에 몇 개를 주워 호주머니에 넣었습니다. 다음 날, 해가 뜰 무렵 그들은 주워 온 자갈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 자갈들은 다이아몬드, 루비, 에머랄드, 진주 및 기타 여러 가지 보석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사막에서 만났던 나그네의 말을 떠올리며 더 많이 주워 오지 않은 것을 애석하게 생각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우리는 사막을 여행하는 여행자들로서 조약돌을 줍는 것과 같습니다. 주의 말씀을 하나 하나를 조약돌처럼 마음의 주머니에 담습니다. 그것이 장차는 보석으로 변할 것입니다. 많이많이 담지 못한 자는 애석해 할 것입니다. 국가에 대한 말씀이든,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말씀이든 주의 말씀 하나 하나를 마음에 담아 순종할 때 그것이 곧 복이 될 것입니다.

Ⅱ.산 자의 하나님(27-40)

바리새인들이 세를 바치는 문제로 예수를 올무에 빠뜨리려고 했으나 예수님의 답변에 놀라고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었습니다. 더 이상 예수님에 대해 트집을 잡을 수 없게 되자 이번에는 사두개인이 등장을 해서 예수님께 질문을 했습니다.(37-40)
사두개인은
① 부활도 없고, 영도 없고, 천사도 없다고 주장하는 유대교의 한 종파에 속한 사람들입니다.(행23:8)
② 이 종파는 대제사장들과 제사장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③ 이들은 유다의 귀족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연 산헤드린 공의회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④ 이들은 “스스로 지혜의 제자”라고 할만큼 세상 지식도 많았습니다.
⑤ 또, 부자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를 부정하였습니다.
⑥ 또, 실증할 수 없는 내세도 부정하였습니다.
⑦ 또, 천사의 존재도 부정하였습니다.
⑧ 뿐만 아니라 이들은 영혼 불멸도 믿지 않았습니다. 영혼은 육체와 함께 소멸한다고 생각했습니다.
⑨ 또, 영원한 하나님의 섭리도 거부했으며, 모든 세상 만사는 인간의 자유의지대로 되어져 간다고 믿었습니다.
이런 자들의 소망은 자연히 이 땅에만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현세뿐입니다. 이 세상에서 얼마나 잘 먹고, 잘 살것인가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로마 정치 권력과 결탁을 했습니다. 또 이들은 물질에 대한 탐욕에 사로잡혀 성전에서 장사를 하였습니다. 만인이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신앙이란 하나의 생활 수단에 불과하였습니다.
이런 이 사두개인들도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부활에 관한 교리 문제로 예수님을 함정에 몰아 넣기 위해서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사람의 형이 만일 아내를 두고 자식이 없이 죽거든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지니라” 이 말씀은 신명기 25:5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근친 서열식 결혼법(the levitate law)에 의존한 것으로 우리 나라 부여 시대 때 있었던 <형사 취수>제도와 비슷한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에서는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결혼을 합니다. 그래서 맏아들을 낳으면 형의 족보에 올려 대를 잇게 하였습니다.
창세기 38장에 보면 유다에게 세 아들이 있었습니다. 엘과 오난과 셀라 였습니다. 그런데 엘이 다말과 결혼을 하였으나 자식이 없이 죽었습니다. 그후 오난이 다말과 결혼을 했으나 또 죽었습니다. 그러자 유다는 두려워서 셀라는 어리다는 이유로 다말에게 주지 않는 사건이 나옵니다.(창38:1-11)
사두개인들은 이 계명을 근거로 하여 29-32절을 보십시오.
“어떤 집에 칠 형제가 있는데 맏이 아내를 취하였다가 자식이 없이 죽었습니다. 둘째와 셋째도 저를 취하였다가 죽었습니다. 넷째, 다섯째, 여섯째, 일곱째 모두 그 여자와 결혼을 하여 살아 보았습니다. 그런데 모두 자식이 없이 죽었습니다. 마침내 그 여자도 죽었습니다. 이 일곱이 다 저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부활이 있다고 하면 죽은 일곱 형제와 그 아내가 함께 부활하면 이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어야 하겠습니까 하는 질문입니다. 이 대답은 참으로 곤란한 것이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부정하기 때문에 이런 곤란한 문제를 들어서 부활을 부정하려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만약 부활이 있다면 칠 형제가 치고 박고 싸움을 할 것이고 이 여자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부활은 절대로 있어서 안되며 있을 수 없다는 주장입니다.
이런 이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34-36절로 이렇게 대답을 하여 주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이 여김을 입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
저 세상과 부활의 영광에 참여한 자들에게는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이 없습니다. 장가가고 싶은 사람이나 시집가고 싶은 사람은 안됐겠습니다만, 이는 천사와 같습니다. 천사는 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자식을 낳을 필요가 없습니다. 결혼은 어떤 의미에서는 종족보존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저 세상에는 다시 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결혼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 세상에서는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로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혼수로 뭘 보낼까 돈은 얼마나 들까 염려할 것도 없습니다. 귀찮게 선보는 일도 없습니다.
거기는 다시 죽음이 없고 아픈 것이나 슬픈 것이 다시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장막에 거하시며 우리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시며 뜨겁게 사랑해 주십니다.(계21:3,4)
37,38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이제 모세 오경에 기록된 말씀을 근거로 죽은 자의 부활을 증거 합니다.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보였으되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서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사두개인들은 기록된 말씀 <모세 오경>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었습니다. 또 모세 오경에서는 결코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증거가 없다고 이들은 주장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이 모세 오경을 근거로 부활을 증거 하셨습니다. 그것도 모세를 부르실 때 하나님께서 친히 들여 주신 말씀을 근거로 부활을 증거 했습니다.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은 모세보다 500년 전에 죽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다”[현재형 I am....]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근거로 생각해 볼 때 하나님은 현재 아브라함과 함께 계시며, 이삭과 야곱과 함께 계십니다. 그들은 육신적으로는 죽었지만 영적으로 하나님 앞에 다 살아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생명의 부활로 다시 부활하여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요5:29)
사두개인들의 생각과 같이 아브라함이 죽으므로 그 삶이 끝나 버렸다면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될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었고 이삭의 하나님이었고 야곱의 하나님이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에게서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살아 있습니다. 이삭도 야곱도 살아 있습니다. 모세도 사무엘도 이사야도 예레미야도 다니엘도 모두 모두 다 살아 있습니다. 권 동석 장로님도, 권 원규 권사님도 살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죽은 모든 성도들이 다 하나님 앞에 살아 있음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오라비의 죽음 앞에서 슬피 울고 있는 마르다에게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네가 이것을 믿느냐” 고 하셨습니다.(요11:25-26)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모세의 하나님, 이 하나님 안에서 우리 모두가 살아 있고 다시 죽지 않으며 영원히 살 것을 확신합니다.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시고 부활의 생명을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의 산 소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을 부정하는 사두개인들의 헛점을 말씀으로 지적하시자 서기관 중에 어떤 사람들이 감탄을 했습니다. “선생님이여 말씀이 옳으니이다” 그래서 저희는 다시 아무것도 감히 더 물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입이 봉해져 버렸습니다. 더 이상 묻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Ⅲ.다윗의 주되신 그리스도(41-47)

예수님은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왜 예수 그리스도를 다윗의 후손이라 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질문을 통해서 백성들의 그릇된 메시아관을 바로잡아 주고자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단순히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다윗과 같은 훌륭한 목자요 왕으로만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하루 속히 그리스도가 오셔서 그들을 로마의 권세에서 해방해 주고 잘 살게 해 주기만을 바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시편 110:1절의 말씀을 통해서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음을 증거 하였습니다.(42,43)
그런 즉, 어찌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는 반문입니다. 이로써 물론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이지만 예수님은 다윗의 주시요,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될 분이시요, 다윗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히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요, 다윗의 주가 되신 참 주님이십니다. 이 주님을 길이 길이 찬양합니다.

199

5.

5. 2

8. 주일 낮 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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