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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베스도 앞에서 (행 25: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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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25장에 보면 베스도에게 재판을 받는 사도 바울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24장과 25장 사이에는 2년이라는 세월이 있습니다. 바울은 2년 동안 감옥에 있었는데 바울에 대한 재판의 결론이 나지 않습니다. 미결상태로 2년 동안 감옥에 있게 됩니다. 총독이 바뀝니다. 벨릭스 총독에서 베스도 총독으로, 그렇지만 상황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2년의 시간만 흘렀을 뿐입니다. 아무 것도 결정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냥 감옥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에게는 2년이란 시간이 허무하게만 흐른 것은 아닙니다. 만약에 2년 전에 바울이 무죄를 선언을 받고 감옥에서 나온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는 죽임을 당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을 죽이기까지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결심한 사람이 40명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25장을 보면 그 사람들이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2년이 지난 지금도 똑같이 사도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2년동안 사도 바울을 잘 보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입니다.
두 번째는 사도 바울의 쉬지 못함을 2년동안 쉬게 하십니다. 바울에게 안식년을 주신 것입니다. 감옥에서 하나님은 바울을 위로하시고 축복해 주심을 알 수 있습니다. 쉰다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쉰다는 것이 영적인 재충만과 하나님의 사랑의 시간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벨릭스 총독 후임으로 베스도 총독이 부임을 했습니다. 부임을 한지 3일 후에 그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간 총독은 대제사장과 장로들을 만나게 됩니다.
1-3절,
바울을 죽이고자 했던 사람들은 2년이 지난 후에도 변하지 않았았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들은 바울을 꼭 죽여야 했습니다. 총독이 바뀐 것을 기회로 해서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이송을 시킬려고 합니다. 그들은 재판이 목적이 아닙니다. 매복했다가 바울을 죽이고자 했던 것입니다. 베스도는 정치인입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유대인들의 의견을 들어줄려고 합니다.
4-5절,
베스도는 유대인들에게 기회를 주었습니다. 다시 와서 너희가 송사한 이야기를 말하고 문제가 있으면 그를 즉시 예루살렘으로 후송을 시키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바울은 죄가 없기 때문에 바울을 송사할만한 실제적인 증거와 내용이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걸고 넘어질려고 해도 걸고 넘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6-7절이 그 내용입니다.
유대인의 율법적인 관점에서도 바울을 재판정에 세울 수 없었고 성전이나 로마의 법에도 잘못한 일이 없기 때문에 바울을 송사할 수 없었습니다. 증거를 실제로 댈 수가 없었던 것이죠.
8절이 그 내용입니다.
이제 베스도는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실제로 증거는 없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송사하려고 듭니다. 정치적으로는 유대인들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 자리가 든든히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을 재판하려고 하니 전혀 재판을 할 증거가 없습니다. 베스도는 두 사이에서 고민을 하게 됩니다. 결국 베스도는 바울에게 이런 요청을 합니다. ‘네가 예루살렘으로 갈 수 없겠느냐’ 그러나 단호하게 바울은 베스도의 요청을 거부합니다. ‘나는 예루살렘에서 재판받기를 원치 않습니다. 나는 로마 가이사의 법정에 서서 가이사에게 재판받기를 원합니다.’
9-12절의 내용입니다.
베스도는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재판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강력하게 ‘예루살렘에 가서 재판 받지 않겠다’고 이야기합니다. ‘나를 로마의 법정에 서게 하라. 나는 가이사에게 호소하노라.’ 정식으로 요청을 합니다. 고민에 빠진 베스도는 배석 심판 위원과 함께 의논을 한 결과 다음과 같은 재판 결과를 내립니다. ‘네가 가이사에게 재판을 호소했기 때문에 너는 가이사에게 갈지어다.’
재판이 종결되었습니다. 이제는 누구도 바울을 재판 할 수 없습니다. 오직 가이사 외에는.
왜 베스도가 정치적인 부담을 가지면서 이런 결정을 했겠습니까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베스도가 이런 결정을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우리는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결정을 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이렇게 가야 하는데 생각지도 않은 엉뚱한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재판을 이렇게 하기로 생각 했는데 다른 방향으로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이 개입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로마를 보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뜻은 ‘너는 로마를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재판을 이렇게 인도하신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생애도 이렇게 인도하심을 믿습니다. 내가 내 인생을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내 인생을 이끌고 가는 것 같습니다. 내가 내 사업을 하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사업을 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이런 결정이 났을 때 베스도에게는 두 손님이 찾아 옵니다. 아그립바 왕과 그의 여동생인 버니게가 베스도를 찾아 옵니다.
13-14절,
여기를 보면 베스도가 얼마나 고민을 했는지 나타납니다. 자기도 모르게 베스도는 가이사의 재판에 이 재판을 이송한다고 하니까 불안한 것입니다. ‘내 결정이 잘한 것인가 이 결정뒤에는 어떤 일이 생길 것인가’ 그래서 그는 아그립바 왕이 왔을 때 일종의 재판 상담을 요청을 합니다. ‘내 전임인 벨릭스가 한 사람을 구속을 했는데 그 사람의 이름이 바울이라.’ 그리고 지금까지 있었던 내용들을 15-21절 사이에서 그는 요약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고소해서 감옥에 집어넣었는데 그 사람을 재판해 보니까 문제는 유대인들이 고소를 했지만 그 사람에게서는 전혀 잘못을 발견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어떤 물증이 없었고 증거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송치하기를 원했지만 자기가 보기에는 바울은 죄가 없기 때문에 바울의 소원대로 이 사람을 가이가의 재판을 받기로 결정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을 15절에서 21절까지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하고 아그립바 왕에게 상담을 합니다.
여기 상담하는 내용중에 재미있는 말이 있는데 18-19절입니다. 바울이 자신의 무죄에 대해서 주장하는 부분을 베스도가 이렇게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에게 형사적인 증거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 사람들에게서 보이는 것은 종교적인 문제다. 예수가 부활했다고 하는 그 주장 때문에 생긴 문제다.’ 하는 것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재판장에 가는 이유는 예수 때문에 가는 것이 아니고, 거꾸로입니다. 재산싸움이니, 사기니,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문제로 교도소에 가지, 예수님 때문에 가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예수님을 얘기 하다가, 부활을 얘기 하다가, 십자가를 이야기 하다가 고난을 당한 사람이 있습니까
이것이 누구의 얘기입니까 베스도의 이야기입니다. 지금 이 사람의 문제는 형사의 문제가 아니다. 종교의 문제고 예수가 부활했다는 것 때문에 유대인들이 흥분해서 잡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깊이 생각해야 할 메시지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유대인들이 송사를 보았습니다. 벨릭스의 재판을 보았습니다. 베스도의 재판을 보았습니다. 이 세 사람의 얘기의 요점이 무엇입니까 바울이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가 주장한대로 예수가 그리스도요, 부활하셨다고 하는 그 주장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자기의 입장을 자기를 반대한 사람들에게 정확히 전달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가끔 여러 가지 문제에 부딛치게 됩니다. 문제에 부딛히는데 문제는 그 내용이 예수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구 때문에 그런 어려움을 당하셨습니까 무슨 일 때문에 그렇게 고민을 하십니까 다 자기 문제요, 욕심의 문제요, 재물의 문제입니다. 그런 일로 인한 고난입니다. 자기 분수껏 살지 못한데서 오는 고난입니다. 그런 문제들로 내 인생을 이렇게 망가뜨려 놓은 것입니다. 시간을 낭비하고, 그렇게 바삐 돌아다니고, 밤새고 하는 일들이 무엇 때문입니까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앞으로 고생을 하고, 어려움을 겪어야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어야겠습니까 다 시시한 것이 때문에, 인간의 욕심 때문에, 인간의 정욕 때문에, 다 이기적인 이유들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인생의 수 많은 시간들을 보내고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고 그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예수를 믿은 후에 자신의 문제 때문에 고난을 받은 일이 없습니다. 자기가 저질러 놓은 일 때문에 고난을 당한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고난을 당한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 이름을 위하여, 그의 영광을 위하여, 그의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당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위하여 고생을 하십니까 여러분이 겪고 있는 고난은 누구 때문입니까 더 이상 자신 때문에, 분수를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욕심 때문에 오는 고난이 없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 고생은 남는 것이 없습니다. 피곤하고, 지치고, 고통스럽고...
우리가 아무리 못 살아도 세끼는 먹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한들, 아무리 큰 집을 소유한들, 여러분의 몸을 누일 수 있는 것은 침대 하나 뿐입니다. 아무리 에어로빅을 해서 살을 빼고, 좋은 음식을 먹는다고 해도 70-80세면 족합니다. 더 이상 못삽니다. 그런 인생입니다. 문제는 얼마나 값지고 보람있게. 고생은 했으면서도 수모는 겪었다 할지라도 내가 보람있는 삶을 사느냐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내가 감옥에도 들어갈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보는 바울입니다.
내가 왜 이렇게 고생을 하면서 돈을 벌고, 공부를 하는 것입니까 이것에 대한 해답을 가지지 못한 사람의 결말은 허무함뿐입니다. 그 결과는 비참할 뿐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감옥에 갈지라도 그에게는 영광스러운 삶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영광스러운 삶은 무엇입니까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예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아그립바 왕이 베스도의 재판 상담을 하는 데 그는 재판에는 관심이 없어요. 그가 관심이 있는 것은 딴데 있었습니다.
22절,
바울 좀 보자.
23절,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는 아주 화려하고 웅장하고 권위있는 왕의 신분을 표시하는 옷을 입고 바울에게 나타납니다. 천부장과 성중의 높은 사람들을 다 초청을 해서 신문소에 있게 합니다. 그리고 베스도의 명을 따라 초라한 바울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여기서 재미있는 한 그림을 보게 됩니다. 불륜과 죄로 가득찬 내면에는 그런 것이 있지만 겉으로는 화려하고 품위있고 권력있는 높은 지체의 왕과 비록 죄수의 몸으로 끌려 나와 있지만 하늘의 영광과 그리고 놀라운 복음의 능력으로 가득차 있는 여기한 초라한 한 사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어떻게 평가하느냐로 평가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느냐로 평가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여러분들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하느냐로 너무 신경쓰지 마십시오. 성공했다. 이런 말에 속지 마십시오. 사람들은 자기가 가진 것이 자기라고 생각을 합니다. 더 갖기를 원하고 권력을 소유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겉치장을 잘했어도 그 속에 불륜이 있고, 거짓이 있고,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면 그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러나 감옥에 있고 낮은 자리에 있고 별볼일 없어도 영광스러운 소망이, 사랑이 있는 당신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이, 예수님을 위해서 고난도 희생도, 손해도 기뻐하는 그런 축복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양심에 부끄럼움이 없게 하시고, 신앙에 부끄러움이 없게 하소서. 바울처럼 주님을 전하는 그런 믿음을 우리에게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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